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43화 (43/354)

043. 골프에 나이는 없다.

[-19 공필상/ -16 이케다 유타/ -13 고다이라 사토시]

모리스의 이름은 리더 보드에서 사라졌다.

한 번의 과욕이 불러온 참사는 라운드 내내 그를 괴롭혔다. 웬만하면 털어 버려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듯.

이케다가 1타 추격한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언론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5타를 줄이며 무섭게 추격한 이케다와 동반 플레이를 펼치면서도 선두를 굳건히 지킨 필상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좋았다.

골프를 늦게 시작하고도 한국에서 세미프로 자격을 취득한 것, 기량은 물론 경기 운영 능력도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다.

“프로님. 혹시 AGM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AGM? 매니지먼트 회사인가?”

“네. 제가 소속된 회사가 거기에요.”

“아! 이 대표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회사인가 보군.”

“아, 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번 사안은 그렇지 않다. 다방면으로 협력하는 관계지만 필상과 관련해서는 딴 마음을 품고 있다.

이 대표는 꿈에도 몰랐지만, AGM의 유코 회장은 관련 보고를 받은 뒤 특이한 지시를 내렸다. 필상의 예의주시해 동향을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말도 꺼내기 힘들겠네.’

미사키는 어제 이미 이보영 대표를 봤다.

무뚝뚝한 필상이 그녀를 대하는 각별한 태도에서 AGM이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필상과 함께 라운드를 진행한 그녀는 자신이 다시 프로가 된 것 같은 흥분과 대리 만족을 경험했다.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을 필상과 함께라면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캐디에 불과하지만 심정적으로 완벽하게 선수와 동심을 이루는 유일한 파트너가 바로 캐디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급적 필상과 오랜 시간을 호흡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AGM이 계약하면 좋은데, 힘들 것 같았다.

“모모코도 공동 3위로 올라섰어요.”

“선두와 몇 타 차지?”

“2타 차라서 우승 가능성이 높다고들 평가하더라고요.”

“음……. 나쁘지 않네.”

미사키는 필상의 가려운 부분을 파악하고 정확히 긁어 줬다. 내심 기껍지는 않지만 그게 필상을 지원하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우승 경쟁에 뛰어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필상은 판단했다. 쇠뿔을 단김에 빼면 좋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행운까지 받쳐 줘야 가능한 게 투어 우승이 아니던가. 자신이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만 체감해도 앞으로 모모코의 앞길은 훤히 열렸다고 생각했다.

“이러다 정말 우승하겠어요.”

“우리가 같이 해내야지!”

‘우리’라는 표현이 감동을 줬는지 미사키의 얼굴이 환히 피었다. 사실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우승은 연기처럼 꺼질 수도 있다.

때문에 말을 아낀 필상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시 연습장으로 향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필상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꽤나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필상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연습임에도 불구하고 자로 잰 듯 똑바로 나가는 샷 때문이다.

***

“누나?”

‘그래. 나다. 이 무심한 놈아!’

“오랜만에 전화해서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너 오늘 중요한 날이라면서?’

“그건 어떻게 알았어?”

‘기사에 뜬 걸 남에게 들어야겠냐? 누나들이나 엄마나.’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한국 선수가 JGTO 정규 대회의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 가능성이 높은데, 국내 스포츠 언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저 경기에 집중하려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소식이 가족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죄송했다.

“지금 어디야?”

‘집이야. 우리 집.’

“그럼 엄마 좀 바꿔 줘.”

‘안 계셔. 미륵사에 불공드리러 가셨지. 너한테 부담 준다고 전화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만 그래도 우리가 너랑 함께한다는 건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알아. 정말 죽을힘을 다할게.”

‘힘내. 필상아…….’

울컥 했는지 큰누나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아들이 하나뿐이라 엄마도 누나들도 오로지 필상의 성공을 바라고 살아왔다. 하지만 인생이 왜 그리도 팍팍하게 풀리지 않는지 필상 못지않게 마음고생이 심했을 가족들이다.

코끝이 찡해 더 이상 통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엄마 통장으로 돈 좀 부칠 테니까 저축할 생각하지 말고 보약도 지어 드시고 먹고 싶은 것 마음껏 자시라고 해.”

‘알았어.’

“누나가 직접 챙겨. 절대 돈 허투루 쓰지 않는 거 알잖아.”

‘그래.’

큰누나와 통화를 마친 필상은 의지에 불타올랐다. 희미해졌던 자신의 아픈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경제적인 여유는 넉넉했다. 모모코의 캐디로 받은 급여와 보너스도 상당하지만 수입의 5%를 보장하겠다는 말을 가볍게 여겼던 필상은 계좌에 찍힌 금액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모코의 변호사가 말하길, 그건 시작에 불과하단다. 그녀의 상금 이외 수입이 올해 5억 엔(51억 원)을 훌쩍 넘길 것이라고 장담했다.

꿈을 접고 그녀의 캐디와 코치만 해도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모모코의 상품성은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공 프로. 잠은 잘 잤나?”

“네. 덕분에.”

“내 덕분에 잘 잤다고? 하하하.”

챔피언 조는 10시 정각 티오프라서 연습하던 선수들이 하나둘 빠져나갔고 썰렁해지자 이케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오늘은 필상이 먼저 다가가 인사했고 그 역시 기분 좋게 맞아 줬다. 이케다는 노련한 외모지만 사실 그는 두 살 위다.

사실 경기에 집중하느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으나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낀 서로는 한참 잡담을 나눴다.

고조된 긴장감을 서로를 통해 풀고 있는 듯.

“고다이라!”

“아, 네.”

“이리 와서 서로 인사들 해.”

공동 3위 세 명중에 오늘 필상과 함께 라운드를 돌 고다이라 사토시가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다가왔다.

89년생인 고다이라는 2013년부터 매년 1승 이상을 거둔 통산 7승의 강자였고 지난해 Nippon Series JT Cup을 우승했으며 2014년 이 대회 우승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필상과 안면을 틀 의사가 없어 보였다. 대선배인 이케다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했을 뿐.

필상도 거부감을 보이는 그와는 그저 악수만 하고 말았다. 어차피 개인적인 호감이 없는 한, 프로의 세계는 결국 실력으로 증명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래도 좀 괘심하기는 했다.

“굿 샷!”

아너로 나선 이케다의 티샷에는 우승에 대한 강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특유의 장타를 마음껏 뽐낸 스윙이 시원한 비거리를 만들어 내자 필상은 유감없이 ‘굿 샷’을 외쳤다.

보통 선수들끼리는 표현을 자제하기에 티 박스를 내려오던 그가 필상의 말을 듣고는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내 드라이브 샷, 얼마나 나갔을까?”

“298야드 정도? 남은 거리는 대략 100야드 안팎일 겁니다.”

“눈에 거리 측정기라도 달았나?”

“제가 눈이 좀 좋기는 하죠. 게다가 현직 캐디잖습니까!”

“하하하. 사실이라면 아주 대단한 재주일 것 같네.”

그는 믿지 않았다. 300야드라고 말하면 적절할 것 같은데 일의 단위까지 언급한 것은 오버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안전한 티샷을 날린 뒤, 세컨 샷 지점에 도착한 그는 필상을 보고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정확히 100야드가 남았던 것이다.

필상의 약점이 드라이브 비거리라고 생각한 그는 나름 장타를 선보여 기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270야드를 보내고도 여유롭던 필상의 각별한 재주가 확인되자 오히려 자신이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프로에게 거리감은 아주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셋 중에 가장 긴 130야드의 세컨 샷을 남긴 필상은 부드러운 샷으로 온 그린, 3m 남짓한 버디 퍼팅을 남겼다.

“하체가 너무 굳어 있는데?”

116야드를 남긴 고다이라가 갭 웨지로 그린을 공략하는 장면을 바라본 필상의 감상평이다.

그 말을 들은 미사키는 의문을 삭히지 못했다.

“하체 고정은 샷의 기본 아닌가요?”

“글쎄……. 골프에 정답이 있을까? 내가 볼 때 고다이라의 스윙은 너무 딱딱해.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웨이팅을 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웨지 샷을 팔로만 하지 말고 좀 더 부드럽게 몸이 같이 도는 스윙을 하면 일관성이 더 나아질 거야.”

미사키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의 신체 조건과 근육의 발달이 다른데 어찌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겪어 본 바, 미사키도 골프에 정답이 없다는 사실은 일찍이 깨달았다.

“경력도 짧다면서 아는 게 뭐 그렇게 많아요?”

“경력이 밥 먹여 주나?”

“네?”

“이케다의 지론처럼 자신의 샷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변화를 꾀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거야. 인간의 몸은 시간과 함께 변하게 마련이거든.”

“나이 먹으면 그에 맞춰 스윙을 교정해야 한다는 건가요?”

“늘 최고의 샷을 찾으려고 스스로를 확인하고 점검해야 한다는 거지. 연습이 부족한 프로는 아마추어와 다를 게 없어.”

“고다이라가 오늘 연습장에 늦게 나왔나요?”

“어제도, 그제도 그랬을 걸?”

참으로 신기한, 아니 귀신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반 라운드를 한다는 것은 어제 경기가 끝난 뒤에나 알았다. 결선에 올라온 67명을 다 확인했을 리도 만무한데, 어찌 그가 연습을 게을리 했음을 아는 것인지.

고다이라의 웨지 샷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 줬다. 더프(Duff-볼을 정확히 맞추지 못하고 뒤땅을 치는 것)가 된 공은 탄도만 높이 떴을 뿐, 그린 앞 러프에 멈추고 말았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입을 다물 수밖에.

흥미로운 것은 이어진 이케다의 샌드웨지 컨트롤 샷이었다. 앞서 고다이라의 어이없는 실수를 목도했던 그도 100야드의 짧은 거리에서 온 그린을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반대로 몸통 회전이 너무 빨랐다. 체중 이동은 문제가 없었으나 다운 블로우가 이뤄지기 전에 아주 미세하게 몸이 먼저 돈 결과, 공이 우측으로 밀려 버린 것이다.

‘그래도 숏 게임 감은 좋네.’

선두권에 나서기 위해 필수 조건이 바로 그린 주변에서의 플레이다. 짧은 거리에서 공을 그린에 올리지 못했으나 두 프로의 어프로치는 일품이었다.

홀컵 주변에 붙여 홀러블 디스턴스(Holable distance-원 퍼터로 홀인이 가능한 거리)를 남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버디를 성공한 필상이 더욱 빛난 것은 당연했다.

어제도 중계진의 칭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번 홀을 침착하게 버디로 마무리하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방송 사고가 터질 뻔했다.

-크음! 타고났다고 봐야 하나요?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확인한 사실에 의하면 그는 재작년 겨울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두 달 전에 한국의 프로 선발전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골프를 배운 지 1년 만에 프로 자격을 얻었단 말인가요?

-세미프로 자격을 얻은 것이지만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이런 기량을 갖추는 건 정말 믿기 힘들죠.

-비교적 늦게 골프를 시작하고도 성공한 선수도 있죠. 하지만 서른이 넘어 시작하고도 이렇게 단기간에 잘 칠 수 있는 것은 아마추어들에게 큰 희망을 주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되나요?

[골프에 나이는 없다. 몇 살에 시작해도 실력은 늘어난다.]

전설적인 골퍼, 벤 호건이 남긴 골프 명언이다.

다만 ‘골프는 내게 취미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나이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 준 말이다.

흔하지 않지만 실제로 골프를 배운 지 1년도 되지 않아 싱글 골퍼가 되는 사례를 접할 수 있지 않던가?

의지와 자질이 맞닿은 극소수에게만 허용되는.

1번 홀을 기분 좋게 버디로 출발한 필상은 기세를 몰아 추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그런데 2번 홀로 이동하던 중에 갑자기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두둑! 투두둑!

아침부터 짙은 구름이 햇빛을 가리기는 했다.

하지만 일기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며 은근히 걱정될 만큼 필드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흐린다고만 했는데?”

“그립 관리 좀 신경 써 줘.”

“혹시 몰라서 장갑도 열 개나 챙겨 왔으니까 걱정 마세요.”

미사키가 내민 우산은 일단 거부했다.

아직은 그저 시원하게 느껴지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압박감이 생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경험 부재가 문제인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우천 라운드는 아무래도 베테랑과 비교해 불안 요소가 많을 수밖에 없다.

본인 스스로 그걸 잘 알기에 이를 악물고 미스 샷을 줄이는 데 집중한 필상은 4타 차로 벌린 선두를 꿋꿋하게 지켰다.

말이 쉽지, 최종 라운드에서 선두를 고수하는 것은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부여했다. 지켜보며 조언하는 입장과 직접 스윙하는 심정의 격차는 천양지차라는 것을 확실히 체감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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