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단독 선두
“8언더에요, 8언더!”
“보기가 없다는 것은 고무적이군!”
“프로님은 기쁘지도 않아요?”
마지막 퍼팅을 마친 필상은 너무 담담했다. 마치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표정으로 동반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하지만 8언더가 어디 쉬운 스코어인가?
당사자보다 더 흥분한 미사키는 좀 웃으라고 닦달했다. 하지만 필상의 마음은 전혀 들뜨지 않았다.
실전에서 느낀 독특한 예감, 그것에 대한 의문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공 프로!”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경기 잘 봤어요.”
“어? 난 이제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가?”
“하하하. 왜 이러십니까. 한가하신가 봐요.”
“네 경기가 보고 싶어 일이 손에 잡혀야 말이지.”
“일단 스코어 카드 내고 올 테니까 클럽하우스 내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시죠.”
“그래. 다녀 와.”
아직 경기가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31조로 12:05에 출발한 필상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1라운드 성적이 나와 있었다.
“공 프로, 공동 1위야. 크하하하.”
“보기가 없는 것이 주효했나 봅니다. 코스 세팅도 평이했고.”
“그래도 아주 멋지고 안정된 경기였어.”
“조언해 주실 점은 없으십니까?”
“8언더 1위를 기록한 선수한테 내가 조언은 무슨! 더 바랄 게 없는 완벽한 경기력이라고 생각해. 쭉 그대로만 하게.”
먼 길을 온 분들에게 식사라도 대접하고자 모셨다.
최 프로는 시종일관 요란한 축하를 건넸지만 묘한 미소를 띠고 있던 이 대표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어디 불편한 것은 없나요?”
“네, 대표님 덕분에 아주 편안하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몸은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습니다.”
염려에 감사를 표했지만 이보영은 필상의 몸을 주시했다. 특히나 어깨와 목을 비롯한 상체를 유심히 살핀다는 느낌을 받은 필상은 그녀가 무엇을 염두에 뒀는지 알아챘다.
하지만 풀스윙이 불가한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설사 그녀와 모종의 계약을 하더라도 의학적 진단은 나오지 않을 증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적당한 시기에 상의할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투어 시드를 취득한 뒤라면 모를까.
“이 대표님의 배려는 잊지 않을 겁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뭘. 부담 갖지 말아요.”
“만약 매니지먼트가 필요한 상황이 된다면 그 상대는 J&L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드리겠습니다.”
“그럼 머지않았네요. 호호호!”
남자 투어는 4라운드로 진행된다.
아무리 필상에게 관심이 있어도 4일 내내 일본에 머물 수는 없다. 일단 좋은 출발을 봤으니 최종 라운드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밤 비행기로 두 사람은 떠났다.
이후 연습장에서 하루 일과를 정리한 필상은 숙소로 돌아와 잠이 들기 전, 한동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모모코가 참가한 어스 몬다민 컵의 1라운드 성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주 톱10 진입에 실패한 모모코는 예정에 없던 이번 대회 참가를 강행했다.
홀로서기의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쁘지는 않은데 좀 아쉽네.”
모모코는 첫날 버디를 7개나 쓸어 담았다.
하지만 파5 홀에서 3.5m 이글 퍼팅을 놓쳤고 이어진 홀에서 보기를 범한 장면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시즌 2승에 탑 10에도 두 번 더 진입한 모모코는 상금 순위와 메르세데스 랭킹에서 모두 1위를 달리고 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만 그녀가 이번 대회를 통해 이뤄야 할 것은 명확했다. 필상이 곁에 없어도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한다는 과제다.
각별한 능력을 지닌 필상이 도와주면 보다 나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 필상에게 기댈 수는 없다.
이미 필상과 4번의 호흡을 맞추며 여러 가지를 깨우쳤다. 홀을 공략하는 자세나 경기 운영 마인드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것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대회가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로 연락하지 않기로 했지만 필상은 문자를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라인!”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모모코에게서 먼저 라인 문자가 날아왔다.
‘good night!’ 이모티콘이다.
수다스러운 그녀가 왜 할 말이 없겠는가.
아마 오늘 라운드에 대해 주절주절 읊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홀로서기를 위해 경기에 대한 얘기는 나누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켰다.
필상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누르고 문자를 보냈다.
-왜 아직 안 자? 얼른 자!
***
“오늘도 직진인가요?”
“그럼!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니까!”
“아!”
참으로 힘든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시드도 없고 일본골프협회로부터 아무런 자격도 취득하지 못한 필상은 아마추어로 분류되어 우승해도, 탑 10에 들어도 상금을 수령하지 못한다.
게다가 우승자가 아니면 특전이 주어지지도, 포인트가 쌓이지도 않는다. 오로지 우승해서 시드를 확보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기에 2라운드에 임하는 필상은 다시 공격적인 라운드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기자들도 보여요.”
“그래?”
필상은 시드를 갖춘 선수도, 우승 후보도 아니다.
하지만 일본 최고의 미녀 골퍼로 거듭난 모모코의 캐디이고, 그녀의 염문설이 있음을 모르는 골프팬들은 거의 없다.
애써 무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지만 은근히 퍼진 소문으로 인한 관심은 어제 공동 선두로 나서며 불이 붙은 것 같다.
갤러리들도 부쩍 늘었고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섞여 있지만 필상은 담담하다 못해 무관심했다.
그들에게 신경 쓸 여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까앙!
어제와 달리 오늘은 인코스 10번 홀에서 시작한 필상은 호쾌한 드라이브 티샷을 날렸다. 정말 가볍게 백스윙을 한 것 같지만 클럽헤드가 내려오는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455야드의 상당히 긴 파4 홀이지만 286야드를 직선으로 날린 필상은 165야드의 세컨 샷을 남겼다. 하지만 잘 맞은 8번 아이언샷이 그린을 오버하며 어렵게 파를 세이브 했다.
이후 전략을 수정한 필상은 13번 홀까지 안정된 플레이가 뭔지를 보여 줬다. 공격적인 전략을 선언한 필상이 연이어 안전한 선택을 하자 미사키는 넘치는 의문을 삼키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동반자들의 성적을 통해.
“귀신이 따로 없네요.”
“왜?”
“홀컵 세팅이 어렵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미리 고지했잖아. 그래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홀을 치는 것 같았어.”
티업 위치를 조금 수정하고 홀컵의 위치를 조정하면 같은 홀도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줄이지는 못해도 잃지는 말아야 목표를 이룰 수 있기에 어제 버디를 기록했던 홀들이지만 아쉬움을 꾹꾹 누르며 14번 홀에 들어섰다.
“드라이브!”
“설마 그린을 바로 노리려고요?”
“응. 바람이 도와줄 것 같아. 짧아서 그린 벙커에 빠져도 올리면 그만이잖아.”
319야드의 상당히 짧은 파4 홀이다.
장타자는 1온의 유혹을 느끼지만 사실 필상은 장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때문에 연습 라운드에서도 필상은 단 한 번도 1온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페어웨이 정중앙까지 255야드를 날리면 67야드가 남기에 유틸리티로 공략해 오히려 80야드를 정조준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드라이버를 요구하니 놀랄 수밖에.
게다가 트러블 샷은 무조건 피하는 필상이 벙커샷까지 운운하는 것을 보면 이번 홀에 승부를 건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저 친구 지금 1온을 노리는 건가?”
“에이밍이 그런데!”
“짤순이 아니었어?”
“조금 독특한 쓰리쿼터 스윙이지만 사실 비거리가 부족한 건 아니잖아. 난 안전하게 친다는 느낌이 더 강하더라고.”
“모모코가 그 컨트롤 샷을 배운 건가?”
“두고 보면 알겠지. 저런 스윙으로 300야드 이상을 날린다면 그것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
첫 홀부터 따라다니며 필상의 플레이를 평가하던 두 갤러리, 대화 내용을 들어 보면 평범한 주말 골퍼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부정적인 말만 쏟아내더니 이젠 다소나마 객관적인 표현들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필상의 플레이가 굉장히 안정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던 탓이다.
쉬이이익!
클럽헤드가 공을 깨부술 듯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공기를 갈랐다. 가까이 섰던 골퍼들은 그 소리에 전율을 느꼈다.
아마추어들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을 즐긴다. 성공 확률이 극히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홀에서 한 번쯤 해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혹시나 성공하면 평생 그 아름다운 추억에 젖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기가 걸렸다면 주저하다 포기하지만 그런 맛에 골프를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체로 스코어는 별로지만 프로의 자세는 다르다.
최소한 80% 이상의 성공 가능성을 확신해야만 감행할 수 있다. 프로로서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샷 이미지 메이킹을 마친 필상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스윙을 날린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오른발이 살짝 뒤로 빠진 드로우 샷을 구사한 것이다.
“넘어가나?”
“벙커야, 벙커!”
그린 우측 끝을 보고 때린 공은 계곡을 넘고 물을 건너 날아가더니 최고점에서부터 그린을 향해 고개를 쓱 돌렸다.
하지만 그린 앞에 괴물인 양 도사린 네잎 클로버 모양의 벙커를 넘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 그런데 드로우 구질 탓인지 좀 더 뻗어 나간 공은 벙커 후면에 떨어졌다.
역시 버거운 샷이었던가?
피니시 자세를 유지하던 필상도 뒤늦게 지면에 도달한 공의 위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다고 느낀 순간, 벙커에 떨어졌던 공이 모래 파편을 사방에 분사시키며 하얗게 튀어 올랐다.
“우와아아아!”
“온이야, 1온!”
낮은 탄도의 승리라고 해야 하나?
가끔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 골프인 것은 알지만 벙커에 떨어진 공을 보고도 표정을 지웠던 얼굴에 오히려 미소를 띠운 필상을 보면 이건 운이 아닐지도 모른다.
“굴러!”
“마법이라도 걸려고?”
“아! 왜 안 구르죠?”
“그린에 모래가 많거든. 역시 짧긴 짧네!”
앞선 선수들 중에 벙커샷을 시도했던 흔적이 그린에 남아 있어 공의 런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 점까지 고려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 보다 강하게 때리지 못한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1온이 아니던가.
“온 그린은 했지만 이글은 어려울 거야.”
“모래 때문에요?”
“응.”
하지만 퍼팅 결과는 필상의 예상과 반대였다.
8m의 긴 퍼팅은 넣겠다는 의지를 지나치게 앞세우다 보면 쓰리 퍼팅의 늪에 빠지고 만다. 그저 살짝 홀컵을 지나치게 미는 스트로크가 포인트다.
그걸 잘 아는 필상은 신중하게 자신이 읽은 대로 밀어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사전에 라인을 확인할 때 보이지 않던 모래로 인해 공의 방향이 살짝 틀어졌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라이를 잘못 읽은 것이 확인되었고 힘이 부족한 공은 홀컵 왼쪽 끝에 걸려 떨어지기를 망설였다.
“후우우우!”
8m 거리에서 입김을 분다고 공에 영향을 미칠 리 없다. 하지만 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통한 것일까?
움찔거리던 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이스 이글!”
“멋지다! 멋져!”
갤러리들의 격렬한 환호성이 터졌다.
좀처럼 자신에게는 인색했던 응원이기에 더더욱 크게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골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다른 게 아닌 좋은 플레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다.
무표정하던 필상이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인 것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행동이었다. 축하에 감사를 표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기본적인 기량은 갖췄다고 봐야겠네.”
“그래. 이렇게 되면 우승 가능성이 꽤 된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아직은 모르지. 하지만 어제 한국에서 이 대표가 직접 날아와 경기를 직관한 걸 보면 우리도 준비해 두는 게 좋겠어.”
“모모코와의 미묘한 관계까지 고려하면 상품성은 충분하니까. 기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내는 게 좋겠어.”
“오케이!”
“미사키한테도 바람을 좀 넣으라고 해 둬야겠어.”
“미인계가 통할까? 모모코가 좋아한다잖아.”
“그런가?”
대화의 내용을 들어보면 필상의 기량을 인정한 두 사람은 매니지먼트 회사 관계자들인 것 같았다.
한 해에 투어에 참가하는 신인 선수만 해도 백 명을 훌쩍 넘는다. 모두가 1부 투어의 기회를 얻지는 못하지만 일본에서 지명도가 전혀 없는 필상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후원사 하나 얻지 못해 고생하는 선수들이 허다한 것을 고려하면 필상은 복을 타고 난 것이 분명했다.
본인은 지독히 불운하다고 생각하지만 골프를 시작한 이후, 인생의 운이 뒤바뀌고 있음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행운의 이글을 잡은 뒤, 폭풍처럼 몰아친 필상은 2라운드도 7언더를 기록하며 예선전을 -15, 단독 선두로 대이변의 막을 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