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백발백중
“무섭네, 무서워.”
“제가 뭐랬어요. 비범한 사람이라니까요!”
“감칠 맛 나는데 그냥 가까이 가서 보면 안 됩니까? 이 대표님과 제가 온 걸 알면 더 힘이 날 텐데요.”
“괜히 부담 주지 말고 그냥 멀리서 응원해요. 잘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절대 그런 것에 흔들릴 인간이 아닙니다. 얼마나 독한 녀석인데요.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최 이사는 꾹 참았다.
그저 너무도 반갑고 기특해 격려하고 싶을 뿐, 홀로 일본에 건너와 정식 대회에 참가한 필상의 도전을 그도 높이 샀다.
“지난 주 미야 모모코는 탑 10에 들지 못했다면서요?”
“그래도 공동 12위면 선방한 거죠. 필상 없이도 홀로서기를 하는 것 같은데, 기본은 갖췄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더군요.”
“이번 주도 쉬지 않고 대회에 참석했다던데, 바람직한 것 같아요. 괜히 쓸데없는 인터뷰를 해서 걱정시키더니.”
“그나마 시끄러워지지 않은 것은 다행입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몰매부터 맞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장단이 있는 것 같아요. 모모코에 대한 일본 골프팬들의 거대한 관심을 생각하면 부정적인 면이 더 크겠지만 그래도 공 프로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다를 것도 같거든요.”
“이번 대회에 덜컥 우승이라도 한다면 금상첨화가 되겠군요. 하하하!”
일본까지 찾아온 두 사람의 소망이 그러했고 출발은 기가 막혔지만 우승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정규 투어 대회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4일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고 선두권에 나서면 쏟아질 관심이 경험이 부재한 필상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디캡 3번인 407야드의 3번 홀에서 필상은 또다시 멋진 티샷에 이어 송곳 같은 아이언 샷을 선보였다.
애초에 페어웨이 우측에 숲이 무성히 우거져 탄도를 높이거나 페이드 샷을 구사해야 하는데, 필상의 드라이버 샷은 자로 잰 것처럼 숲의 경계선을 타고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페이드를 구사하지 그러셨어요?”
“똑바로 칠 수 있는데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지.”
“제 딴엔 페이드 샷이 더 안전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피칭.”
대답 없이 자신이 원하는 클럽을 말한 것을 보면 필상에게는 스트레이트로 치는 것이 더 안전한 모양이다.
약간만 열려도 나뭇가지에 맞아 엄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데, 그건 애초에 우려할 사항이 아니라는 태도였다.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진 공의 세컨 샷 거리는 141야드, 필상은 피칭웨지로 정말 부드러운 컨트롤 샷을 만들어 냈다.
짧으면 워터해저드, 길면 벙커인데도 우측으로 안전하게 잘라 갈 생각은 애당초 없는 듯, 정확한 거리감을 보이며 다시 2m 남짓한 버디 퍼팅을 남겼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컨트롤 샷이네요.”
“부지런히 동영상이라도 찍어 둬야겠습니다.”
“최 이사님. 그런데 공 프로는 왜 풀스윙을 하지 않죠?”
“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심결에 대답한 최 프로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를 깨달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엉성한 면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풀스윙만 해 대서 자신이 직접 스윙 크기에 대한 지도를 해 준 적도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프스윙이나 쓰리쿼터 스윙만 연습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연습장을 찾을 때마다 그런 모습을 봤는데 가끔 찾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전에 다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인가?”
“다치다니요?”
“일전에 안수현의 캐디를 본 적이 있는데, 경기 중에 벼락을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벼락이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는데…….”
벼락을 맞고 멀쩡한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최 프로도 자세한 상황은 파악하지 못했다. 그 뒤로 무사히 복귀했기 때문에 정말 벼락을 맞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과장된 말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만약 필상이 풀스윙을 하지 못하는 이유인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세 홀에 3언더. 미치겠네.”
“뭐라고?”
“미친 거 아니냐고요.”
“됐고. 4번 아이언.”
“핸디캡 1번인 555야드 파5인데요?”
“어차피 3온을 할 건데 드라이브를 잡을 이유가 없지.”
“알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이언 티샷은 좀 그랬다.
드라이브를 잡지 않는다면 우드라도 잡는 게 보통인데, 필상은 여타의 프로와는 달리 모양새는 따지지 않았다.
과감한 4번 아이언샷으로 221야드, 다시 5번 아이언으로 203야드를 시원하게 날리자 남은 거리는 130야드에 불과했다.
물론 동반자 중에 한 명은 그린 앞까지 보냈다. 하지만 2온을 노린 다른 동반자는 공이 그린을 앞둔 페어웨이 좌측 깊은 골짜기에 떨어지며 OB를 내고 말았다.
“뒤에서 6야드, 좌측에서 5야드에요.”
“경사를 감안하면 핀 좌측을 공략하는 게 낫겠지?”
“앞에 작은 벙커도 있는데요?”
“그거야 넘길 수 있지. 바람은?”
“맞바람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오케이.”
필상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미사키를 통해 재확인했다. 작은 착각이나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다.
핀이 그린 좌측 끝에서 5야드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사이를 노린다는 것은 무모하게 느껴졌다. 자칫 당겨지면 OB도 날 수 있어 미사키는 안전한 선택을 바랐다.
그러나 맞바람까지 고려한 필상은 과감한 피칭웨지 샷을 때렸고 훌쩍 그린을 넘길 것 같던 공은 마법에 걸린 듯이 그린으로 뚝 떨어졌다.
“너무 센 것 같지 않았나요?”
“네. 저도 깜짝 놀랐는데 연습 라운드를 통해 맞바람이 많은 걸 확인했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심장이 떨려 저렇게 바로 공략하는 것은 위험한데, 결과가 좋으니 할 말이 없네요.”
“라이가 굉장히 어려워서 최적의 퍼팅을 남기기 위해 그런 것 같아요.”
“강심장도 타고 나야 하나 봅니다. 하하하.”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기량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 펼칠 배포가 없다면 실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실수만 일어난다.
하지만 필상은 심장이 튼튼한 게 아니고 자신의 샷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기 때문이다. 만약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무리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절대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다.
“오르막이지만 라이는 좀 봐야죠?”
“내 생각에는 홀컵 왼쪽 내부를 보면 될 것 같은데, 가서 다시 확인해 봐야지.”
올해 새로 바뀐 규정은 그린 플레이에서 캐디의 관여를 지나친 시간 지연의 원인으로 봐서, 가급적 선수가 직접 거리를 확인하고 라이를 읽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사키는 그린 근처에 가면 아예 다가오지 않고 그 전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4연속 버디이자 싸이클링 버디라는 것을 뇌리에서 지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행히 동반자들의 숏 게임 진행 때문에 라이를 살필 수 있는 여유는 많았다.
‘그대로 보고 밀어야 하나?’
막상 그린에 올라 확인한 결과, 생각보다 경사가 없었다. 야디지 북에 나온 정보를 보면 분명히 슬라이스로 흐르는데, 아무리 봐도 경사를 느낄 수 없었다.
연습 라운드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오르막 퍼팅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정면으로 밀어야겠다고 판단했다.
뭐가 잘되려고 했던지, 그린 앞에서 어프로치 칩샷을 핀에 붙이려던 동반자의 공이 하필 필상의 마크 뒤로 굴러 왔다.
라이를 살핀 그도 필상과 같은 결론을 얻었는지 경사를 보지 않고 과감하게 스트로크를 했는데, 이게 웬 일인가!
홀컵 앞에서 스르르 밀린 공이 홀컵을 빙글 반 바퀴 돌더니 다시 토해 내고 말았다.
텅!
물론 필상은 그것을 참조해 버디를 낚아 냈다.
운마저 따라 준다는 생각이 들자 더 바짝 정신을 가다듬었다. 행운이라는 놈이 자신과는 좀처럼 친하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5번 홀은 비교적 쉬운 파4인데 제대로 걸린 백스핀 때문에 그린에 올라갔던 공이 다시 굴러 내려왔다.
핀에 붙여 파를 기록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필상은 이어진 파5, 파4 홀을 안전하게 파 세이브 시켰다.
경기의 흐름이 좋지 않을 때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스코어 관리의 비결이며 신중한 가운데 다시 기회가 찾아오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잘 나가던 리듬이 흐트러진 모양이죠?”
“그런 것 같습니다. 이미 4타나 줄여 놨는데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그래도 좀 아쉽네요.”
한 번 놓친 흐름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꾹 참고 파 세이브에 집중하는 필상을 보며 이 대표와 최 프로가 더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버티다 자칫 지치면 확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필상은 파를 버디처럼 여기고 악착같이 타수를 지켜 나갔다.
“왔어!”
“네?”
“감이 왔다고.”
미사키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4연속 버디 뒤에 5개의 파를 기록하며 필요 이상으로 안전한 선택을 이어 온 필상이 10번 홀 티샷을 날린 뒤에 느닷없는 말을 뱉었기 때문이다.
10번 홀은 455야드의 긴 전장을 가진 파4 홀이다.
핸디캡도 전체 3위인 어려운 홀인데, 176야드의 세컨 샷을 남기고 왜 감이 왔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6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장담한 대로 정확한 아이언샷으로 3.6m 버디 기회를 만들어 냈다.
“감이 어떻게 온 거죠?”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하나?”
원하는 티샷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그것도 좀 이상할 것 같았다.
하지만 6, 7, 9번 홀에서 때린 티샷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타수를 잃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 홀 티샷은 정확한 스윙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손바닥에 느껴진 감각은 굉장히 좋았다.
그 감을 유지하면 그 어떤 샷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고 결과도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먼저 나간 선수들의 데이터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왜죠?”
“핸디캡대로 성적이 나오는 것 같지가 않아서요.”
“제가 확인해 보죠.”
JGTO 정규 대회는 생중계는 물론 실시간 성적 집계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하고 있다. 바로 스마트 폰으로 결과를 확인한 최 프로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 대표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선수들이 아웃코스 후반부에 타수를 잃었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필상이 어떻게 후반부에서 안전한 선택을 이어갔는지 그 경기 운영 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줄버디를 하네요?”
“13번 홀은 조심해야 하는데 두고 보죠.”
인코스에 접어들자마자 필상은 또 다시 3연속 버디를 잡아내며 순식간에 7언더까지 치고 올라갔다.
누가 그를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앞선 선수들이 고전한 13번 홀에서 안전한 선택을 이어 가는 필상을 보자 이 대표는 물론 최 프로도 소름이 돋았다.
589야드의 롱홀에 2온을 노리는 선수는 없지만 최대한 길게 쳐 어프로치를 남기려던 선수들의 공은 둘에 하나의 확률로 벙커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필상은 드라이브 티샷에 이어 6번 아이언을 잡아 120야드를 남겼다. 너무도 극단적인 비교가 되는지라 꿋꿋하게 제 길을 가는 필상을 보는 갤러리들도 고개를 저었다.
“120에서 140까지가 가장 편한가 봐요.”
“백발백중이었으니 구태여 멀리 보낼 이유가 없죠.”
“동반자들이 빵빵 때리는데 신경이 안 쓰이나?”
“저 표정을 보세요. 까딱도 하지 않잖아요.”
“화난 것처럼 보일 정도네요. 웃으면 더 좋을 텐데.”
“포커페이스가 최고입니다. 어차피 남자 투어는 실력이 곧 돈이고 인기인데 굳이 웃을 이유가 없지요. 하하하.”
인코스 후반부에 파로 막은 홀들은 주로 도그렉 홀이었다.
티샷을 잘 날린 필상은 거의 100야드 안쪽을 남겼으나 핀에 붙이지는 못했다. 대체로 그린 주변이 지저분해 그린에 올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늘의 현실은 분명히 그러했다.
“굿 샷!”
“아닌 것 같은데요?”
“이런, 이런!”
부드러운 리듬에 임팩트도 제대로 이뤄졌다.
때문에 최 프로는 환호성부터 질렀건만 그린에 떨어진 공은 스핀이 먹지 않고 홀컵을 지나 그린 뒤의 프린지에 겨우 멈췄다.
평상시 필상이 피칭웨지로 컨트롤 샷을 하면 백스핀이 먹을 정도로 강력한데, 하필이면 내리막 경사에 떨어진 것이다.
클럽 페이스가 살짝 열린 결과가 너무도 큰 차이를 보였다.
“몸이 먼저 돌았지?”
“그런 것 같아요.”
“음……. 다시 안전 모드로 가야 하나?”
필상은 못내 아쉬웠다.
아무리 핸디캡 1번 홀이라도 연습 라운드에서는 가볍게 버디를 기록했던 홀이기 때문이다. 다소 묘한 위치에 핀이 박히기는 했지만 조금 밀렸다고 엉뚱한 결과가 나온 것은 불길한 징조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다시 파 세이브 모드로 전환한 필상은 꾸역꾸역 파를 지켜 나갔고 177야드의 파3, 17번 홀에서 9m 퍼팅을 구겨 넣으며 자신의 프로 투어 첫 라운드를 무보기 8언더로 마무리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