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38- 황당한 고백
대체 뭐를 책임지라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씩 웃어 보인 모모카는 필상이 건넨 우드를 들고 샷 루틴을 밟기 시작했다.
모모카의 5번 우드는 평상시 240야드에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3번 우드가 적절하지만 다른 고려사항이 하나 더 있다.
그녀의 샷이 지금 한창 물이 올랐다는 점이다. 똑같은 느낌으로 때려도 10야드 이상 더 나갈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했고 필상도 그 점에 동의했다.
다만 이번 샷의 난제는 그린 좌우에서 앞까지 뻗어 나온 그린 벙커의 덫을 피하기 위해서는 폭이 5m에 불과한 정면으로 공을 보내야한다는 것이다.
“따앙!”
일단 임팩트가 제대로 이뤄졌다.
낮은 탄도로 이륙한 공이 다시 한 번 도약하듯이 치고 올라갔고 무서운 가속을 붙여 그린을 향해 쏘아져 갔다.
‘드로우?’
인아웃 스윙이 이뤄지며 공이 우측으로 출발한 것은 흠이 되지 않는다. 다만 너무나 잘 맞은 것이 오히려 불안했다.
그린을 훌쩍 넘어가면 상당히 깊은 러프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마치 클래스 벙커처럼 질기고 긴 러프로 인해 어프로치가 쉽지 않아 3온 1퍼팅이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벙커가 나아!”
필상의 그 바람이 통했는지 훅이 생각보다 더 먹힌 공이 그린 앞 좌측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벙커로 굴러들어갔고 그 광경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시선을 떼지 않은 필상의 눈에 다시 튀어나오는 하얀 공이 보였다. 머금은 힘을 감추지 못한 공이 벙커에 맞고도 그린으로 튀어 올라온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그린에 올라간 공이 홀컵이 아닌 좌측으로 굴러가는 광경에 필상의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진짜 아깝네!”
“운 좋게 2온 했는데 뭐가 아까워요.”
“기왕이면 그린 우측 벙커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거의 붙었을 것 같아.”
“욕심은! 흐흐흐...”
“그런 음흉한 웃음소리는 좀 자제하는 게 어때?”
“음흉하다고요?”
“그래. 누가 알까봐 무서워.”
“괜찮아요. 오빠는 알고도 잘 버티잖아요. 흐흐흐!”
“일단 가 보자. 훅 라이가 제법 되는 것 같아.”
“2퍼팅은 자신 있으니까 걱정 마요.”
에이프런에 선 공은 하필 러프의 경계에 멈춰 퍼팅 스트로크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동반자들이 3온을 하는 동안 충분히 라이를 살핀 모모카는 아찔한 퍼팅으로 팬들의 가슴을 다시 한 번 졸이게 만들었다.
홀컵을 살짝 스치며 떨어질 듯이 움찔했던 공이 그냥 흘렀기 때문이다. 이글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진 사람은 오로지 필상뿐이지 않았을까?
아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글이 낫다고 우기며 그녀가 대체 자신에게 무슨 요구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저길 봐!”
18번 홀에 들어서자 급기야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리더보드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13 이보미/ -12 가쓰 미나미, 김하늘, 모모카/ -11...]
스마일 캔디 이보미는 오늘 착실하게 4타를 줄여 단 한 번도 선두를 다른 선수에게 넘기지 않은 플레이를 선보였다.
역시 이보미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든든한 경기를 펼친 것이다. 그 와중에 미나미가 바짝 추격했고 김하늘마저 오늘 불꽃 샷을 터트린 가운데 자신의 이름이 바로 밑에 위치한 것을 보자 모모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결국 기록을 눈앞에 두게 되자 긴장감이 몰려온 것이다.
“지키자!”
“싫어요.”
“네가 버디를 했지만 16, 17번 홀은 절대 쉬운 홀이 아니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야.”
차마 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1타차 공동 2위까지 올라섰고 챔피언 조가 이제 막 16번 홀에 들어선 상황이라면 그 판단이 옳다고 믿기에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승은 절대 흔히 다가오는 기회가 아니다. 일평생 우승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지는 꽃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미 코스레코드를 갱신한 상황이다.
우승경쟁을 하고 있는 선두권 선수들의 압박감을 고려하면 차분하게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된다.
‘모모카!’
대답 없이 드라이브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선 그녀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빈 스윙을 보면 그녀가 어떤 공략을 할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모모카는 안전보다는 공격적인 공략을 마음에 두고 있음이 분명했다. 안타깝지만 선택은 본인의 몫이니 어쩌겠는가!
다만 자신의 안전을 강조한 조언이 도리어 그녀의 샷에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불안한 일은 왜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인지, 그녀의 드라이브 티샷이 밀리고 말았다.
애초에 클럽페이스가 열려 맞았다. 강하게 때리려는 욕구가 강해 몸이 먼저 돌고 만 것이다.
“넘어가!”
우측으로 휘는 도그렉이 조금 있지만 벙커를 가로지르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이 홀의 난점은 그린이 아일랜드 홀처럼 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지, 티샷 미스는 거의 없다.
그런데 모모카의 샷은 애초에 스윗 스팟에 맞지 않고 덮여 맞은 탓에 날아가다가 뚝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였다.
그게 다 자신의 방정맞은 조언 탓처럼 느껴진 필상은 제 입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나마 벙커를 넘기면 3온 1퍼팅도 가능하기에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벙커 끝에 낙하한 공은 턱을 넘어가지 못하고 벙커 아래로 씁쓸하게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힘이 너무 들어갔나 봐요. 어쩌죠?”
“러프보다는 불편하겠지만 3온 위치로 보내면 돼.”
“잘 붙일 수 있을까요?”
“일단 네가 가장 좋아하는 60야드를 남기는데 집중하자.”
“네...”
샷 하나에 감정이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게 골프다.
오늘 라운드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승은 접어두고 최대한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자고 마음먹고 나섰다.
그 결과 코스레코드까지 기록하며 팬들도, 본인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아주 좋은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눈에 보이자 마가 끼고 말았다.
“퍽!”
65야드를 남긴 벙커샷은 비교적 준수했으나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짧은 거리에서 모모카의 웨지가 뒤땅을 때릴 거라고.
겨우 물에 빠지지 않고 러프에 걸린 것을 하늘에 감사해야할 샷이 나왔다. 3온도 실패한 모모카와 그린으로 건너가는데, 선수를 소개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특유의 밝은 표정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멋진 하루를 보내고도 마지막 홀에 연이어 실수한 모모카의 심정을 생각하면 필상의 속도 말이 아니었다.
“결과는 생각하지 말자.”
“네.”
“오늘 아침에 어땠는지를 생각해 봐. 우승경쟁에 뛰어든 것만 해도 넌 네 몫을 이미 충분히 한 거야!”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담은 모모카는 핀에 붙이기 위해 차분하게 연습스윙을 가져갔고 생각보다 짧았지만 2.5m 퍼팅을 성공해 유종의 미를 거뒀다.
-11. 오늘만 8타를 줄인 모모카의 기록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지만 스코어카드를 제출하러 이동하는 모모카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얼굴 좀 펴고 팬들에게 사인도 좀 해주고 그래.”
“싫어요. 오늘은.”
“싫다고?”
웬만해서는 그럴 모모카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말했던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 성에 차지 않는 듯 보여 위로의 말을 건넸다.
“뭐든 들어줄 테니까 기분 좀 풀어.”
“정말이죠?”
“그래. 최고의 플레이를 펼쳤는데 내가 뭔들 못해 주겠어.”
“후회하기 없어요. 히히히...”
묘한 웃음소리에 뜨끔했지만 진심이다.
모모카는 오늘 정말 좋은 플레이를 펼쳤다. 더도 말고 오늘처럼만 경기를 풀어나가면 앞으로 그녀는 리그를 휘어잡을 확실한 선수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그 점을 분명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필상은 모모카가 어림도 없는 바람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즉흥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은 생각이 깊은 아이다. 투정을 부릴 때와 자신이 해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고 결코 위험한 선을 넘지도 않는다.
그게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코치고 캐디라도 같은 숙소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진즉에 사달이 났겠지!
“참 짓궂네!”
“괜찮아요. 저게 저 분들의 일이잖아요.”
“이럴 때 보면 다 큰 것 같기도 하고.”
“치! 어떻게 더 커요! 비만이라도 되라는 말인가요?”
“그럴 리가! 하하하.”
먼저 경기를 마친 모모카가 최종 성적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16번 홀에서 선두권도 나란히 타수를 잃어 이보미와는 이제 1타차로 좁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급 선수인 이보미가 남은 홀에서 다시 타수를 잃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른 선수들도 악착같이 덤빌 테고.
그래도 기다릴 수밖에 없어 퍼팅 연습을 하며 감을 유지하고 있는데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댔던 것이다.
- 모모카. 지금 심정 한 마디만 부탁해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곁에 섰던 필상이 막아섰고 기자는 멋쩍게 돌아섰다.
하지만 모모카는 안면이 있는 기자였는지 모든 성적이 나오면 인터뷰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우승을 한다면 너무도 자연스럽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초조한 가운데 한 팀씩 들어오는 선수들의 기록을 살폈다. 챔피언 조가 18번 홀에 들어선 지금, 이보미는 –12를 유지하고 있었고 –11의 모모카가 단독 2위였다.
“차라리 치고 말지, 기다리는 건 정말 고역이네.”
“마음 비워요.”
“뭐?”
“파를 놓칠 상대가 아니잖아요.”
자신보다 더 침착한 모모카의 그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보미의 안정적인 플레이스타일은 필상도 익히 아는 바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한국선수라도 지금 심정은 솔직히 그녀의 실수를 바랐다.
일본에 와 있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처럼 필상도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필요에 의한 선택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자신이 캐디인 것을 떠나 모모카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가진 것과 무관치 않다.
- 정말 긴장되네요.
- 이보미는 실수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 왜죠?
- 특유의 옅은 미소를 띠우고 있지 않습니까! 저 미소에 얼마나 많은 동반자들이 나가 떨어졌는지, 또 얼마나 많은 팬들이 그녀의 샷에 매료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그래도 사람인데, 떨리지 않을까요?
- 물론 엄청나게 떨릴 겁니다. 더욱이 이보미는 지난 2년간 우승이 없었으니 마치 신인처럼 심장이 두근거릴 겁니다. 하지만 그녀가 쌓아왔던 21승중에 떨리지 않은 승부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 와우! 2온에 성공했습니다!
이보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차분한 세컨샷으로 공을 핀에 붙이지는 못했으나 6m 퍼팅을 3번에 나눠갈 만큼 호락호락한 선수가 아니다.
부드럽게 밀어 홀컵 20cm 앞에 붙인 그녀는 우승퍼팅을 집어넣고 두 손을 높이 쳐들어 모처럼 거둔 의미 있는 우승을 하늘에 감사했다.
결국 모모카는 1타 차의 아쉬운 2위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결과가 나오자 모모카는 활짝 웃으며 이보미의 우승을 축하했고 몰려드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사인을 해 줬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는데 폭탄은 의외의 장소에서 터졌다.
“전 코치님을 정말 좋아해요!”
- 모모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공 코치님을 좋아한다고요. 여자인 제가 그 분을 좋아하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 스승으로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으로, 남자로 생각하고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물론 고지식한 우리 코치님은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죠. 매번 숙소를 같이 쓰는데도 제 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아요.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 아무리 그래도 이런 폭탄선언을 하는 건 좀...
연예인들이 공개연애를 하는 경우는 왕왕 있다.
하지만 교제하는 것도 아니고 짝사랑을 언론에 고백하다니!
그것도 일본 골프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귀여움과 예쁨의 상징, 미우라 모모카가 뭐가 아쉬워?
인터뷰를 진행하는 기자도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 멀찍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필상은 어떠했겠는가! 결국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척 하며 라커룸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네, 정말!”
철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필상이 아는 한.
그런데 어떻게 본인에게 집중된 팬들의 시선과 사랑을 잘 알면서 저런 위험한 발언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한 번의 인터뷰가 어떤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이나 해본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건 두고두고 족쇄가 될 것이다.
그녀는 물론 일본 투어에서 활약하고 싶은 필상에게도.
긍정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나 그보다 훨씬 더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뇌의 작동이 원활치 않았다.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걱정이 눈앞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