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37- 꿈틀대는 본능
“힘들지?”
“네. 오늘은 지독히도 안 풀리는 날인 것 같아요.”
“그럼 우리 바람이나 쐬러 갈까?”
“정말요?”
“그래. 샷에 문제가 없는데 머리 싸매고 달려든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냥 마음 편하게 하루 쉬자.”
“좋아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그런 기대조차 하지 못했기에 모모카의 얼굴은 활짝 핀 꽃처럼 밝아졌다. 눈이 부시도록.
“얼른 가요!”
“어? 씻기는 한 거야?”
“그럼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모모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소한의 위장보다도 바람 쐬러 가는 것이 더 좋았던 듯.
하지만 뽀송뽀송한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청순했다. 둘은 성적도 확인하지 않고 바로 시내로 달렸다.
일단 피자와 스파게티로 배를 든든히 채운 모모카가 향한 곳은 기대와는 다른 장소였다.
“동전노래방?”
“네. 아빠 몰래 갈 데는 여기뿐이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오빠랑 둘이 와서 너무 좋아요.”
대단한 즐길 거리를 찾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장소다. 하기야 매일 훈련에 지친 그녀가 갈 곳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까지 신경 써야 했기에 혼자 동전노래방에 들어가 무슨 노래를 불렀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에게 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는 최근의 일일뿐, 얼마나 오랜 시간을 혼자 고독하게 싸워왔겠는가!
들어서자마자 노래를 선곡하는 모모카를 두고 음료수를 사러 나가는데,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음성이 뒤통수를 때렸다.
필상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도 아니고, 이럴 때 가볍게 한 잔 마시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노래 잘 하네!”
“히이이... 거짓말.”
“정말이야. 난 완전 음치거든.”
“그럼 한 번 불러 봐요.”
“음치라니까! 한국 노래도 없잖아.”
정말로 한국 노래가 없어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맥주 한 캔에 감정이 격해진 모모카는 결국 노래를 부르다 말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어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하기야 모모카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이 아니던가.
“모모카. 힘들었던 일들은 이제 다 잊어.”
“이제는 힘들지 않아요. 오빠가 곁에 있어서.”
그녀의 노래를 열 곡 넘게 들어줬다.
가슴에 기댄 모모카의 노래는 신이 나는 곡인 것 같은데도 왠지 슬프게 들렸다. 아직 마음 둘 곳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해줄 것은 없었다.
급격하게 변한 환경과 높아진 기대와 위상을 스스로 극복하고 누릴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것이 최선일 뿐, 속마음까지 드러낸 모모카에게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도.
‘대체 나의 진심은 뭐지?’
사랑스러운 모모카에게 호감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지금도 살결이 닿은 그녀를 꼭 껴안고 싶은 충동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걸 겨우 누르고 있는 것이 쉽지 않을 뿐.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어색했다.
자신이 가야할 길이 명확한데 다른 것에 관심을 나누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고 더더욱 께름칙한 것은 한참 나이가 많은 자신이 아직 그녀와 함께 서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진정 그녀를 원한다면 보다 확실한 결과를 손에 쥐고 당당히 관계를 리드하고 싶다. 촌스러운 생각일지 모르나...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3언더, 공동 15위까지 내려간 마지막 라운드.
선두와는 6타 차로 역전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선두권을 형성한 선수들의 면면이 절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9언더로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을 노리는 이보미, 그녀가 2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또한 8언더에 자리 잡은 하타오카 나사와 가쓰 미나미의 기세도 드높았다.
게다가 안선주를 비롯한 신지애, 김하늘도 모모카보다 상위에 위치해 제치고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제저녁 기분전환을 마친 모모카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경기를 풀어나갔다. 우승에 대한 소망이 왜 없겠냐마는 적어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은 오히려 간결한 스윙을 가능케 했다.
“오늘 몸이 가벼워 보여.”
“어제 아침보다 600g이나 늘었거든요!”
매일 아침 체중을 체크하는 듯, 모모카는 곧바로 받아쳤다.
“한 근?”
“저도 확 떼서 팔고 싶어요. 이 나쁜 아저씨야!”
“왜 또?”
어젯밤의 서운함을 얘기하는 것 같다.
사실 필상은 모모카가 시키는 대로 다 해줬다.
맥주 한 캔에 취기가 오른 그녀가 노래방을 나온 뒤 다리가 아프다며 업어달라는 부탁도 들어줬고, 필상의 노래가 듣고 싶다고 해서 그 힘든 일까지 들어줬다.
하지만 맥주 한 캔만 더 마시겠다는 것을 만류했고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달라는 말은 들어주지 못한 채 돌아 나왔다.
‘나도 미쳐 버릴 것 같았어...’
까딱하다가는 큰일을 저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녀와의 관계를 원치 않는 지점에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김칫국을 마시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젯밤 자신의 심리상태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술이라도 많이 마셨다면 또 모를까, 등에 업힌 그녀의 뜨거운 몸을 느끼는 순간부터 모든 감각이 정상궤도를 벗어났고 꿈틀대는 본능을 누르기도 버거웠다.
침대에 얌전히 던져놓고 나온 뒤, 쉬이 잠들지 못해 결국 혼자 조용히 바람을 쐬러 나갔다 왔을 만큼 긴 밤이었다.
그런데 그 뒤끝이 지금 작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상이 시선을 돌리자 다행히 그녀도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오늘도 어제랑 똑같은 공략을 하면 어떨까요?”
“나쁘지 않지. 마음껏 때려 봐!”
“좋아요!”
절대 오기를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맥없이 물러서고 싶은 마음 또한 추호도 없다. 필상도 같은 심정이었다.
우승은 어렵더라도 최대한 타수를 줄이는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도 구름처럼 몰려든 팬들을 위한 마땅한 자세였다.
도전적인 시도를 펼쳤으나 첫 홀은 아쉽게 파로 넘어갔다. 하지만 전장이 길고 까다로운 2번 홀부터 모모카의 신들린 샷이 터지기 시작했다.
“나이스 샷!”
“마음에 들었어요?”
“그럼!”
세컨샷 상황에 178야드를 남겨 살짝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모모카는 6번 아이언 풀스윙으로 온 그린에 성공한 뒤, 5m 퍼팅을 떨어뜨리며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어진 파 5홀은 가볍게 3온 1퍼팅으로 타수를 줄였고 4번 홀에서의 공격적인 시도는 갤러리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긴 벙커가 에워싼 그린 우측 핀을 과감하게 공략해 프린지에 떨어진 공이 홀컵을 향할 때만 해도 또 다시 파3 홀인원이 나오는 줄 알았다.
홀컵 바로 앞에 우뚝 서 버린 공,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 모모카! 이러면 싸이클링 버디가 되는 건가요?
- 그렇습니다. 2번 홀 공략도 환상적이었는데, 파3인 4번 홀은 지난 이틀 평균타수가 무려 3.52입니다. 그런데 보란 듯이 홀컵을 바로 공략하는 것을 보며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 이렇게 되면 다시 우승을 향한 시동을 거는 건가요?
-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지만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마지막라운드가 주는 부담감을 고려하면 더더욱! 선두권이 어떤 경기를 보일지 모르지만 일단 기세는 아주 좋아 보입니다.
- 결국 다른 선수들의 성적과 무관치 않다는 거군요. 14명이나 제쳐야하는데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어서 쉽지는 않아 보이네요.
- 챔피언 조의 이보미와 하타오카, 미나미가 벌일 경쟁도 볼만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의 황금세대 두 신예와 한국의 대선수가 벌이는 샷 대결이라서 더더욱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 모모카가 빠진 것이 좀 아쉬웠는데, 초반에 3타를 줄이며 다시 흥미진진해진 것 같아 팬들도 열광하실 것 같네요.
모모카의 갑작스러운 연승에 탄력을 받았는지, 이번 대회에서는 유독 일본의 젊은 선수들의 선전이 눈에 띄었다.
하타오카와 미나미는 사실 모모카보다 한 발 빨리 우승을 맛봤고 안정적인 기량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심리적 안정을 꾀한 모모카가 몰아치기 시작하면서 그들도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선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보미가 일본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지만 그렇다고 팬들이 자국의 선수보다 잘 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결정적인 승부처에 이르면 더 격렬한 응원을 쏟아낸다. 그러나 이미 그런 단계를 여러 번 지나온 이보미는 당당하게 선두를 유지해 나갔다.
“리더보드 확인해 볼까?”
“아니요. 전 그냥 제 플레이에 집중할 게요.”
15번 홀까지 무려 7타를 줄인 모모카는 어느새 -10로 접어들었다. 이글 1개에 버디 5개,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현재 성적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할 만도 한데, 모모카는 진심으로 제 경기에 집중하고자 했다.
“다 컸네!”
“이미 발육이 끝난 지가 언젠데!”
“그럴 리가!”
“진짜! 이럴 거예요!”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남은 홀에서 딱 1타만 더 줄이자.”
“뭐가 진실인데요!”
필상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걸까?
차마 진실을 밝힐 수는 없지만 농담으로 넘길 말이지만 정색한 모모카가 빽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동반자들은 물론 가까이 있던 팬들까지 필상을 째려봤다.
경기 진행상황에서는 무조건 캐디가 을이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다독이지 않을 수 없었다.
“농담이잖아. 샷에 집중해. 모모카.”
“1타를 줄이자는 목표 말고 불가능한 목표를 잡아줘요.”
“갑자기 불가능한 목표는 왜?”
“그건 묻지 말고 빨리 목표나 잡아줘요.”
“3언더.”
쉽게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은 3홀이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다. 1타는커녕 2타를 줄이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만약 –13까지 갈 수만 있다면 그녀도 우승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막상 어림없는 말을 던진 필상도 묘한 기대감이 어렸다.
캐디로서 그다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지만 톱 10진입이 확실해진 상황이라고 판단되기에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하지만 16번 홀에서 탄성을 자아내는 아이언샷에 이어 버디를 낚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면 필시 턱없는 요구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까앙!”
543야드의 파5 홀은 여자프로에게 결코 짧은 홀이 아니다.
게다가 페어웨이가 좁고 우측으로 휘는 도그렉 홀이라 그나마 3온 1퍼팅이 적절한 전략이지만 모모카는 과감한 티샷을 날렸다.
필상의 조언은 귓등으로 흘린 그녀가 의도적인 페이드 샷을 구사한 것이다. 어드레스부터 지켜본 필상의 심장이 쪼그라들 시도였으나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마치 페어웨이를 본뜬 것처럼 정확하게 도그렉을 따라 휘어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바닥이 울릴 만큼 엄청난 팬들의 환호가 이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 판타스틱! 판타스틱 한 드라이브 샷!
- 네. 이번 홀에 승부를 건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현재 2타차 공동 3위까지 올라온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러면 더 떨릴 텐데요. 겁 없는 신인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잘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없는 것 같네요!
- 8언더는 이미 여자선수 코스레코드입니다!
- 어제 오버파를 친 것이 더 아쉬워지네요. 그래도 자신 있게 한 홀 한 홀 공략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제가 다 떨리네요.
- 모모카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그녀는 팬들의 기대를 채워준 것 같습니다. 프로라면 저런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요. 정말 대단합니다!
“256야드야.”
페이드 샷은 드로우 구질에 비해 비거리가 짧다.
그런데도 도그렉을 가로지른 덕분에 모모카에게 남겨진 세컨샷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하지만 그린 주변의 트러블 상황이 너무 많아 2온을 노리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거리를 불러주는 필상도 다른 제안을 꺼내지 않았다.
이미 수차례 이 홀을 공략해본 결과를 그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급적 3온 1퍼팅을 추천하고 싶지만 그럴 거면 애당초 과감한 티샷을 날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다만 그로 인해 무리한 선택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5번 우드 어때요?”
“결정했으면 의심하지 마! 넌 네가 그린 그림을 완성할 실력과 배포가 있잖아!”
입에 올렸다는 것은 이미 2온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필상의 조언을 참조하겠지만 그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한, 다른 선택은 오히려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용기를 북돋아준 필상에게 던진 말이 의미심장했다.
“각오해요!”
“뭘?”
“책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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