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36- 주인공은 나
“안녕하세요!”
“아! 네. 반갑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시다고요?”
“네. 감사합니다.”
뜻밖에도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 이보미, 무척 반가웠으나 길게 대화할 수는 없었다. 이미 경고했던 바, 모모카가 필상의 곁에 딱 붙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담아 인사를 나누지만 그 미소 뒤에 숨은 날카로운 가시에 언제 찔릴지 알 수가 없다.
인사가 끝난 뒤 서로가 멀어지자 바로 시험에 들게 했다.
“나이가 오빠랑 비슷하죠?”
“잘 모르겠는데...”
모르긴 왜 모르겠는가?
같은 조에서 플레이한다는 정보를 취득한 뒤, 바로 상세정보를 검색했다. 그녀는 88년생으로 필상보다 한 살이 어리다.
하지만 일본투어 내에서 그녀가 지닌 위상은 감히 범접하기 힘들 만큼 높고 견고하다. 통산 21승, 영구시드권을 확보한 그녀는 안선주, 신지애와 더불어 일본여자투어를 이끄는 한국골퍼의 삼두마차라 불릴 만하다.
특히나 ‘스마일 캔디’라는 애칭을 가진 그녀는 수많은 미녀골퍼들의 진출에도 불구하고 일본골프팬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모모카의 열풍이 열도를 들썩이게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오랜 시간에 걸친 팬덤이기에 쉽게 사그라질 것도 아니다.
“카앙!”
아너로 나선 이보미의 부드러운 티샷이 이뤄졌다.
그녀의 플레이스타일은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되었다고 인정받는다. 특히 무리함이 없는 간결한 리듬의 아이언 샷은 굉장히 정확해 늘 그린적중률 1, 2위를 지켜왔다.
물론 최근 2년간 주춤했으나 2015, 2016시즌의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한 후유증이라고 여길 정도다.
역대 일본 골프투어 최초로 상금 2억 엔을 돌파했으며 상금왕 2연패까지 기록한 그녀의 존재감은 인기절정의 모모카로서도 부담스러웠다.
“이보미의 아이언 샷 리듬감은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봐.”
“그건 오빠가 봐 둬요. 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오케이. 차분하게 가자고!”
“네.”
차분하게 가겠다고 대답해 놓고 모모카는 1번 홀부터 과감한 드라이브티샷을 선보였다. 다행히 공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나갔지만 결코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었다.
지기 싫어하는 것은 프로의 마땅한 자세지만 첫날부터 지나치게 상대를 의식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게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한 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버하지?”
“오버하지 않았어요.”
“혹시 너 스스로 그녀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라니까요!”
“그렇다면 당당히 자신만의 플레이를 해야지. 네가 느낄 수 있듯이 상대도 네가 어떤 자세로 경기에 임하는지를 알 수 있을 거야.”
“......”
“난 현재 JLPGA 투어에서 너보다 좋은 샷을 구사하는 선수는 없다고 봐.”
“알았어요.”
필상은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말했다.
우승 가시권에 있는 선수들은 많다. 하지만 3일 동안 꾸준함을 이어갈 수 있는 기량과 자세를 갖춘 선수는 많지 않다.
한 샷 한 샷은 더없이 훌륭할 수도 있지만 실수 없이 안정된 스코어를 이어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2연승을 거두며 자신의 스윙에 대한 확신이 강한 모모카는 누구보다 강력한 우승후보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과의 승부에서 이기는 것일 뿐이다.
다른 선수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동반자들이 모모카의 굳건한 플레이에 무너져야지, 우위에 있는 그녀가 스스로 가시밭길을 들어설 이유는 없다. 다행히 모모카는 필상의 조언을 가슴에 새긴 듯, 차분하게 경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JLPGA 21승, 괜한 것은 아니네요?”
“당연하지. 이보미의 경우를 주목해보면 다승을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지가 단적으로 드러나.”
“안정적인 플레이인가요?”
“바로 그거야. 평균최저타수, 그게 목표여야 해. 매번 좋은 기록을 만들어내다 보면 우승도, 다른 영광도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거든.”
“그럼 목표가 분명해졌네요!”
모모카는 필상에게 적극 공감했다.
우승을 목표하지 않더라도 매일 매일 좋은 라운드를 쌓아나가는 것이 결국은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만든다는 것.
“168야드지만 내리막을 감안하면 162야드만 보면 돼.”
“방향은요?”
“첫날 연습라운드 때 기억 안나? 슬라이스 바람 때문에 두 클럽 정도 밀린다고 보면 어디로 쳐야할지는 나오지 않을까?”
“그럼 저기 꽃밭의 좌측 끝을 보면 되겠네요.”
“오케이!”
결코 쉬운 홀은 아니다.
그린 앞을 가로지르는 호수는 위협이 되지 않지만 그린 앞에는 턱이 높은 벙커가 아가리를 벌리고 누워있으며, 해저드를 너무 의식해 길게 치면 영락없이 대가를 치르는 홀이다.
그린 뒤편에는 꽃이 만발한 화단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정확한 거리만 불러줬을 뿐, 그에 대한 언급은 일체 하지 않았다. 길거나 짧지는 않을 것이라는 서로간의 암묵적 신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쩌억!’
루틴을 밟아 나간 모모카의 아이언이 불을 뿜었다.
얼마나 잘 맞았는지 공이 맞는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제대로 헤드에 얹힌 느낌이 본인은 물론 필상에게도 전해졌다.
푸르른 창공을 향해 쭉쭉 뻗어나가는 공, 바로 이런 짜릿함을 느껴본 골퍼들은 결코 골프를 쉽게 놓지 못한다.
샷을 마친 모모카의 피니시 자세는 한 마디로 예술이었다. 늘씬한 몸매에 깔 맞춘 노란 티셔츠가 살짝 치켜 올라가며 부끄러운 듯 자태를 드러낸 배꼽, 얼른 뛰어가서 가려주고 싶을 만큼 자극적이지만 그것에 시선을 둔 이들은 없었다.
핀을 향해 멋지게 휘어져 들어가는 타구를 쳐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홀 인!”
누군가의 외침처럼 홀컵 3m 앞에 떨어진 공을 노려보는 필상의 마음에도 간절한 소망이 담겼다.
사실 너무 방향이 정면이다. 바람과 그린의 라이를 생각하면 조금만 더 왼쪽이 바람직한데, 그런 계산이 무색하게 공은 그대로 정면으로 튀었다.
“팅!”
핀 하단부를 강타한 공이 그냥 홀컵에 빨려 들어갈 줄이야! 다들 비명을 질렀지만 필상의 시선은 엄한 곳으로 돌아갔다.
바로 티 박스 뒤에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고급 세단, 홀인원 상품이 걸린 홀이었던 것이다.
“미치겠네!”
조르르 달려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폴짝폴짝 뛰는 모모카, 프로 전향 뒤 첫 홀인원이었으니 그녀가 내미는 하이파이브가 격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심드렁한 필상의 반응,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다.
“뭐에요?”
“세상 참 불공평해서!”
“제가 홀인원한 게 설마 배가 아픈 거예요?”
“나도 지난 일요일에 홀인원을 했다고. 그런데 내가 받은 건 뭔지 알아?”
“뭔데요?”
“지역 특산물. 복숭아 한 상자였다고!”
감사히 받아 친절했던 호텔 직원들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그제야 자동차로 시선이 돌아간 모모카, 그녀는 엄청난 시상품이 걸렸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이 너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세상이 불공평하게 느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뒤를 이은 모모카의 음성에 세상이 다시 환하게 보였다.
“전 자동차 있잖아요. 저건 코치님 드릴 게요.”
“내가 왜?”
“차는 한 대 있어야 하잖아요. 안 그래도 한 대 사 드려야 하나 싶었는데 잘 됐어요!”
“됐네요!”
일순 흔들렸지만 사양하는 것이 옳다.
그녀의 따스한 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사실 일본전역을 돌아다니는 투어에 자동차를 이용하는 일은 별로 없다. 소요되는 시간도 비효율적이거니와 상주하는 집이 없는데, 차가 있으면 오히려 번거로울 뿐이다.
견물생심이라고, 잘 빠진 고급 세단을 보니 물욕에 잠시 젖었을 뿐, 정신을 차린 필상은 그녀가 만들 멋진 하루에 의미를 더하기 위한 자신의 몫을 생각했다.
홀인원을 기록했으나 그날의 운은 거기까지였는지 경기는 생각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다.
“4언더면 훌륭해!”
“그렇죠?”
“응. 이 코스에서 펼쳐진 작년도 우승스코어가 9언더였어.”
“어서 샤워하러 가요. 아빠가 오신다고 했거든요.”
“그래?”
아쉬운 홀이 많았던 라운드였다.
하지만 그 또한 상대적인 것일 뿐, 다행히 모모카는 오늘 자신의 플레이에 만족했다.
이보미가 차분하게 타수를 줄여 5언더를 기록했고 무시했던 허무니마저 2언더로 선방했기에 어쩌면 팬들의 기대나 자신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모카는 성숙한 면모를 보였다. 또한 아빠가 오신다고 말하는 얼굴에 그늘 한 점 없는 것이 더 흐뭇했다.
“공 프로, 몸 좋은데?”
“아! 안녕하십니까.”
샤워를 마친 필상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와중에 불쑥 라커룸에 나타난 미우라, 아는 사이지만 타월로 하체만 겨우 가린 상태에서 만나는 것은 좀 어색했다.
하지만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그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호의가 느껴졌다.
친숙함이 없다면 이렇게 불쑥 찾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딸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 불편했던 과거의 기억을 상당 부분 해소시킨 게 아닌가 싶었다.
“오늘도 수고가 많았네.”
“경기는 다 보셨습니까?”
“그럼. 홀인원을 할 때 세팅이 아주 마음에 들더군.”
“모모카의 샷이 좋았지요. 그런데 이제 모모카와는 완전히 화해를 하신 겁니까?”
“허허허. 우승이 모든 오해를 풀어줬다고 봐야겠지. 거기에 자네의 각별한 배려가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네.”
“제가 무슨...”
“아닐세.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모카가 달라진 것이 바로 자네를 만난 뒤부터였더군. 그간 내게 서운했다면 오늘부로 다 잊어 주게.”
“맛있는 저녁을 사신다면 기꺼이!”
“허허허. 그야 당연하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인간관계다.
그와의 만남은 참으로 불편하게 시작되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캐디를 하겠다고 나설 때는 아빠의 빗나간 사랑이 딸의 재능을 가로막는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나 그 또한 최선을 다한 선택이라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모모카가 탄생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그다.
자신은 그 결실을 거두는 행운을 맞이했을 뿐, 기초가 견실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능력도 빛을 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시인했듯 좋은 결과는 많은 것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고 자신도 그 범주에 속하기에 원만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필상으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
“아빠는?”
“아침에 미야자키로 돌아가셨어요.”
“네 경기를 다 안 보시고?”
“이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셔서 바쁘시거든요.”
“사업?”
그가 자신의 일을 찾은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딸을 위해 나름 골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았지만 캐디를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감정이 앞선 그는 객관적이기 힘들어 서로가 피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모모카를 잘 부탁한다고 거듭 강조하던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보다 확연해진 셈이다. 믿고 맡기겠다는 게다.
“오늘도 더도 말고 4언더만 치자고.”
“싫어요!”
“목표를 말해 봐.”
“두 자리 수 언더로 올라가고 싶어요. 거기에 맞게 전략을 짜 주세요.”
“네!”
“그럼 전 연습 시작할 게요.”
3일간 계속 잘 치는 것은 어렵다.
어제 5언더가 2명이나 나왔지만 모모카는 당당한 공동 3위다. 때문에 그 페이스를 유지하면 얼마든지 우승을 넘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모모카의 의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 나갈 때 노 저으라고, 필상이 생각하기에도 현재 그녀의 좋은 샷은 그 이상의 스코어가 가능하다.
때문에 보다 공격적인 홀 공략 방법을 모색했다.
- 모모카가 3연승에 바짝 다가서는군요.
- 네. 1타차 공동 3위로 나서는 순간, 경쟁자들은 부담을 느낄 겁니다. 때문에 차분하게 자신의 플레이만 펼친다면 전무후무한 연승기록이 달성될 것 같습니다.
- 아! 투어 3연승. 그거 정말 어려운 건데요?
- 물론입니다. 2연승도 흔하지 않은 게 골프입니다. 이번 대회도 137명이나 참가했으니 확률적으로는 1%도 되지 않죠.
- 산술적으로는 100만분의 1도 되지 않는 거군요. 하하하.
- 와우! 멋진 티샷입니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 270야드는 족히 나간 것 같죠?
첫 홀부터 과감한 공략을 시작했다.
이제 JLPGA의 주인공은 나라고 외치는 샷 같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잘 풀리지는 않았다. 파온을 하고도 버디가 떨어지지 않는 홀이 이어지면서 급기야 4번 홀에서 1타를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윙이 크게 문제가 없고 분명히 노리는 샷이 이뤄졌음에도 타수를 줄이지 못하면 결국 심리적인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필상은 결국 전략을 수정해 편안한 라운드가 되도록 유도했으며 후반 들어 안정을 찾았지만 그래도 1오버로 마쳤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