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35- 베스트 스코어
“자네가 좀 말려주게.”
“뭘 말입니까?”
“모모카가 아파. 그런데 굳이 효고를 가겠다지 않은가! 대회출전 약속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먼저잖아.”
“일단 제가 모모카와 통화를 해 보겠습니다.”
“내가 연락했다는 말은 하지 말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얼마나 어디가 아픈지는 묻지 않았다.
그가 나서서 만류하는 것을 보면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모카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문자를 보내도 일체 답이 없었다. 짐작컨대 부친의 의도를 알아채고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기어코 모모카는 효고에 나타났다.
“모모카...”
“왜 귀찮게 자꾸 전화를 하고 그래요?”
“걱정 되서 그러지.”
“이럴 줄 알았어요. 여하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전 이만 들어가 쉴 게요.”
안색이 창백했다.
험난한 과정을 돌파한 필상을 축하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질색을 하건 반색을 하건 해야 하건만 가방을 한쪽에 놔둔 모모카는 그대로 침대로 가 쓰러지듯 누웠다.
“운동선수한테 건강이 제 1호 재산인 거 몰라?”
“......”
침대 맡에 앉은 필상을 묵묵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했다. 말할 힘조차 없는 것인지...
“병원은 다녀왔어?”
“응.”
“약도 먹었고?”
“응.”
“어디가 아픈 건데?”
“독감이래요. 오뉴월에 감기라니 저 참 바보 같죠?”
“그래. 내가 어떻게 해 줄까?”
“그냥 이렇게 곁에 있어 줘요.”
곁에 있어 달라는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것이 그것 때문이라면 더더욱 가슴 저미는 일이겠지. 하지만 더 묻지 않았고 모모카도 이내 무거운 눈꺼풀을 덮고 잠을 청했다.
필상은 이불을 덮어 주고는 그녀의 곁에 앉아 이번 주에 열리는 JLPGA 대회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들이 뇌리를 휘돌아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모모카를 바라보았고 열이 있는 것 같아 수건을 적셔 닦아주기도 했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
“오빠!”
“어?”
“왜 여기서 이러고 자요?”
아직 잠에서 덜 깬 필상은 자신이 모모카 침대 밑에 쭈그리고 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다 좀 피곤한 것 같아 잠시 침대에 기댄 채 앉아 있을 요량이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괜히 쑥스러운 상황이 된 것 같아 일어나 나오던 필상의 뒤에 모모카의 깜찍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 괜찮은지 묻지도 않아?”
“구박하는 거 보니까 이제 다 나았네!”
“치!”
얼른 샤워를 하고 나왔지만 모모카는 꿈쩍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살이 밤새 다 낳았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몸 상태는 아닐 것 같아 먼저 일어났다.
“나 아침운동 하고 올게.”
“기, 기다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운동복을 걸친 모모카가 나타났다.
여자의 하루는 변장으로 시작하는데 그녀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더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그녀가 생얼이었다.
하도 신기해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구박을 받았다.
“뭘 봐요!”
“주근깨.”
“이씨! 어젯밤에 볼 거 안 볼 거 다 봐 놓고 이러기에요!”
“그래. 이제 생얼 텄다 이거네?”
“어서 나가기나 해요. 땀 쪽 빼고 씻을 거예요.”
빵빵하게 대꾸하는 것 보니 정말 괜찮아졌다.
그래서 잠깐 짬을 내 미우라에게 문자를 보냈다.
모모카의 독감이 다 나았다고. 적어도 소식은 알려야 걱정하지 않을 것 같아 보냈는데 고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다행이다.
여기까지 고집해서 왔는데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만큼 아프다면 자신이 더 미안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마워.”
“뭐가요?”
“쌩쌩해져서.”
“저도 고마워요.”
지난밤 아픈 자신의 곁을 지켜줘서 그런 말을 하나 싶어 씩 웃고 말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7언더를 쳤다면서요!”
“아! 그날은 공이 좀 맞더라고.”
“홀인원도 했고요?”
“응. 페더 샷이 제대로 걸렸고 운도 좀 좋았지.”
“귀여운 캐디가 도와주니까 힘이 펄펄 나던가요?”
“윽!”
이젠 정말 다 나은 게 분명했다.
우리 사이가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주변 여자들까지 신경을 쓰는 것인지, 그녀의 집착이 고개를 내민 것이 두렵고 또한 반가웠다.
“얼마나 아팠던 거야?”
“이게 다 오빠 때문이에요. 왜 첫날 그렇게 못 쳐서!”
“내가 못 친 게 네 독감과 연관이 있다고?”
“그럼요!”
너무도 당당하게 외치자 정말 그런 것 같아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자신의 부진에 신경 쓰느라 독감 바이러스가 침투했다니, 더 이상의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적어도 이틀은 아팠다는 건데, 그래도 꿋꿋하게 러닝을 하는 마음가짐이 보기 좋았고 흐뭇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 무리하지 않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그만 뛰고 스트레칭 하자.”
“난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모모카는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며 순순히 필상의 리드를 따라왔다.
아침운동을 마친 필상은 모처럼 그녀와 식탁을 마주했고 그녀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그러니까 매니지먼트 회사 직원이라는 거네요?”
“그래. 한 때 프로로 활약한 경력이 있어서 특별히 도와주려고 왔던 거라니까.”
왜 자신이 구구한 변명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모모카의 질문에 답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평온해야 자신도 곧 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이바라키에서 만났던 중년여자 분이 그 회사 대표라고 했죠?”
“J&L 이보영 대표야. 이번에 골프장부킹과 관련해서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는 유지될 것 같아.”
실제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모모카의 시선이 이상야릇해 안 되겠다 싶어 필상은 아예 못을 박았다.
다행히 더는 캐묻지 않았고 이때다 싶어 얼른 화제를 바꿨다. 간사이 골프클럽에서 개최되는 리조트 트러스트 레이디스 대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
“골프장 정말 좋네.”
“코스도 아주 예뻐요. 호수도 많고 나무 조경도 깔끔하죠.”
“어서 필드에 나가보자.”
“그래요. 다시 저녁내기 해요.”
“정말이야?”
“대신 티는 달리 써야죠. 오빠는 블랙, 난 블루.”
“그래도 안 될 걸?”
“일단 장갑 벗고 나서 보자고요.”
지난해 투어 신인으로 이 대회에 참가한 모모카는 72, 71, 74타를 기록해 최종 1오버로 공동 48위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즌 첫 2연승을 거둔 메이저대회 우승자라는 위상을 안고 방문했다. 한 주 쉬었지만 벌써부터 그녀의 3연승에 대한 기대 어린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진짜 미치겠네!”
“잘 붙여 봐. 적을 응원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네!”
“아우 얄미워!”
7개 홀을 지나며 모모카가 이긴 홀은 없다. 두 개 홀에서 비겼을 뿐, 이미 5DN으로 패색이 짙어졌다.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녀의 태도는 확실히 바뀌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기거나 비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긍정적이었다. 그런데도 필상도 바짝 신경을 썼다.
실전라운드보다 좋은 연습은 없기 때문이다.
8번 홀에서 비긴 모모카는 승부가 나도 18홀까지 돌자는 제안을 했고 연습이 절실한 필상은 당연히 동의했다.
“한 홀이라도 이기고 싶었는데!”
“7개 홀이나 비긴 것도 대단한 거 아냐?”
“이 아저씨가 정말!”
“결과보다 내용이 좋아졌다는 것이 고무적이야.”
“어떤 점에서요?”
“자신의 경기를 했잖아. 네 스코어가 얼마인지 알아?”
“스트로크 스코어 말이에요?”
“그래. 3오버 쳤어.”
오로지 UP DN에만 신경 쓰느라 몰랐지만 그녀의 성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작년에 쳐 봤다지만 오랜만에 찾은 이 코스는 처음이나 다름없는데 첫 라운드치고는 아주 훌륭했다.
“그럼 오빠는 얼마나 쳤는데요?”
“뺄셈 못해?”
“아! 그럼 8언더라는 거예요?”
“자 봐!”
필상이 건넨 스코어카드에는 상세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필상은 이글 하나, 버디 7개, 보기 하나를 기록한 게 맞다.
사실은 당사자도 놀랄 성적이다.
그저 한 홀 한 홀 모모카보다 잘 쳐야 하다는 생각이었을 뿐인데 자신의 베스트스코어를 기록한 날이 된 것이다.
추후 좋은 선례가 될 것 같았다.
“밥은 오빠가 사요!”
“뭐지?”
“이 성적을 기록하고도 밥 안사면 언제 살 건데요!”
“그러지 뭐. 라멘 좋다.”
“이이!”
다시 돌아왔다.
늘 아웅다웅 다투지만 그 모든 순간이 즐겁고 보람차다.
다만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은 언젠가 최 프로와 함께 TV에서 보던 최강의 미녀골퍼 모모카와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조 편성이 아주 묘하던데?”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
“필드에 미모 자랑하러 나오는 거는 아니잖아요!”
모모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주최 측이 지나치게 흥행을 위한 매치업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강자 이보미와 모모카를 같은 조에 편성한 것은 흠이 될 게 없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실제 이보미는 일본 골프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선수다.
항상 밝은 얼굴과 예의 바른 태도, 탄탄한 실력으로 무장되어 미워하고 싶어도 그러기 참 힘든 최고의 강자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이 문제였다.
“허무니(何沐妮)를 초청하느라 고생 좀 했을 것 같은데?”
“결과도 못내는 LPGA 루키를 뭣 때문에 거금을 들여 데려오느냐고요!”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초청 의도는 짐작 가능하지.”
“뭐요?”
“미모도 실력도 아시아 3국 중에 일본이 가장 월등하다는 자부심, 그걸 너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야... 제가 좀 이해해 줄 수 있죠. 하지만 오빠, 한 눈 팔지 않을 거죠?”
“야!”
허무니는 모모카와 동갑이다.
중국 사천성 출생이지만 캐나다 조기유학을 떠나 국적을 취득했고 캘리포니아에서 고교를 다녔다. 어려서부터 굵직한 주니어 골프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LPGA 2부 투어에서 눈에 띠는 성적을 거둔 뒤, 올 시즌 퀄리파잉 시리즈를 통과해 LPGA시드를 취득했다.
하지만 데뷔 후 이렇다 할 성적도 없는 그녀를 모르면 골프팬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다. 그 이유는 역시 탁월한 미모에 기인한다.
필상도 어제 상세한 기록을 살펴봤는데, 전문가의 냄새가 풀풀 나는 인스타그램 사진 말고는 별 다른 게 없었다.
‘와우!’
하지만 실물을 대하자 느낌은 달랐다.
실력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어려서 예쁜 건지, 예뻐서 골프도 잘 칠 것 같은 건지, 팬들이 왜 그녀에게 열광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비율이 남다르다고 해야 하나?
까무잡잡한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 게다가 볼륨감 높은 몸매를 살려주는 아찔한 패션은 뭇 사람들의 눈길을 잡기에 충분했다.
세계적인 매니지먼트사 IMG가 나섰고 나이키까지 달려든 이유는 그녀의 높은 상품성과 중국시장의 잠재력까지 감안한 결과일 것이다.
“오빠!”
“왜?”
“정말 이럴 거예요?”
“뭘? 내가 볼 때 쟤는 연예계에 진출해야 할 것 같아.”
“테드 오가 코칭을 하는데요?”
“테드 오의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썬 크림이 필요가 없겠네, 얼마나 변장술이 뛰어난지. 게다가 땀을 흘려야 하는 골퍼가 긴 눈썹은 왜 붙이고 나오느냐고!”
“흐흐흐...”
사실 모모카도 찔끔할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보기 드문 필상의 혹평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기에 표정은 한층 더 밝아졌다. 웬만해서는 구태여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데 다르게 생각한 듯싶다.
하지만 투어프로가 되기를 원하는 필상은 허무니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동선수라면, 그것도 이제 시작한 루키라면 최우선과제는 역시 기량을 가다듬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운동외적인 부분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다. 필요이상의 주목을 받는 것이 득이 되지는 않는다는 실례는 역대 최고의 기대주였던 미셸 위를 통해 이미 봤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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