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4화 (34/354)

ILG034- 첫 홀인원

“이제야 제가 고생하는 보람이 느껴지네요.”

“영광이 아니고 고생?”

“치! 누가 들으면 JGTO 최종라운드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내겐 그것보다 더 중요해.”

“그렇기는 하죠. 호호호.”

어제 빚을 갚기 위해서는 보다 완벽한 샷이 필요했다.

어려운 3, 4번 홀을 파로 막은 필상은 다시 5번 홀에서 롱 퍼팅에 성공하며 기어코 언더파의 대열에 합류했다.

코스 세팅을 어렵게 했다더니 필상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피하면서도 버디를 노리는 전략적 접근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전반에 딱 1타만 더 줄이면 좋겠어요.”

“캐디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참! 내가 캐디인 것은 맞나요? 어차피 내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좋아, 그럼 이 8번 홀은 어떻게 공략하는 게 좋을까?”

“음... 슬라이스 바람이니까 페더(Feather- 그린의 왼쪽을 향해 치는 정교한 페이드) 샷이 좋을 것 같아요.”

“그건 오케이. 거리는?”

“오르막 이단그린이잖아요. 175를 다보지 말고 172야드만 공략하면 좋을 것 같으니까, 이거 어때요?”

미사키가 내민 클럽은 8번 아이언이었다.

보통 이 거리를 필상은 7번 아이언으로 컨트롤 샷을 한다. 하지만 사방이 뚫린 높은 지대에 그린이 위치했기에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높은 탄도는 자제하는 게 좋다.

미사키는 8번 아이언으로 다소 낮은 탄도의 스윙을 주문한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그녀도 홀 공략에 대한 기본이 잡혀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기분이 좋았던지 클럽을 건네받으며 필상은 왼손을 들어 미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느닷없는 돌발행동이지만 눈이 동그래진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히죽 웃었다.

헤어스타일을 중시하는 여인이었다면 그 자체로 불쾌감을 표현할 만도 한 행동인데 필상은 한 술 더 떴다.

“귀여운 척 하지 마!”

“우이 씨! 다 큰 여자의 머리를 헝클어놓고!”

“샴푸 좋은 거 사 줄게.”

“린스도요.”

강한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 고분고분한 스타일, 착하다고 보는 것이 맞지만 그것과는 좀 결이 다르다.

취향이 독특하며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굽히지 않고 한 번 틀어지면 얼굴도 보지 않는 미사키의 성격을 알게 되자 함께 지내기는 편했다.

확실한 우군이기에.

‘프린지에 떨어뜨려 굴리면 최상인데...’

평소보다 위크 그립(Week grip)으로 조정한 필상은 페더를 치기 위한 스윙궤도를 점검했고 공이 날아갈 궤적을 생각하며 연습스윙을 시도했다.

2번 만에 이미지가 맺혀졌고 스윙을 위한 루틴을 밟았다.

옅은 긴장 속에 이륙하는 비행기처럼 느린 테이크 어웨이(Take away- 백스윙의 시작부분)가 이뤄졌고 한껏 당긴 활시위처럼 감긴 클럽헤드는 바람을 가르며 공을 부술 듯 때렸다.

‘쩌억!’

타구음도 없었다.

그냥 아이언 스윗스팟에 적중한 공은 한껏 일그러진 채로 주인이 시키는 곳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품이야! 쓰리쿼터 스윙!’

바로 뒤에서 필상의 스윙을 지켜본 미사키는 감탄을 거듭했다. 컨트롤 샷은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실전 긴장감은 컨트롤 샷을 하려다 오히려 실수를 부르기 때문에 프로들도 웬만해서는 가장 익숙한 스윙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선수마다 다르지만 가용한 힘의 80%에 맞춘 풀스윙을 주로 구사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걸 벗어나지 않는다.

실제 그 기준으로 비거리를 조절하기 때문에 실전에서 컨트롤 샷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선수는 이미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선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박인비 프로다. 그녀의 아이언 샷을 보노라면 얼마나 차분하고 느긋한지 ‘실전을 연습처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던가.

‘좀 작은가?’

공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자신이 만든 디봇에 시선을 박은 필상의 느낌은 살짝 아쉬웠다.

사실 필상의 백스윙은 4분의 3까지 가지도 않았다.

정상적인 풀스윙에 비하면 65%나 돌아갔을까?

하지만 스윙 밸런스는 완벽했으며 임팩트를 만들어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주 미세하게 약하다는 느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을 부정하는 반응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공은 그린 좌측을 향해 정확히 날았고 의도한 페이드가 먹으며 휘였다. 그린 좌측 벙커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공은 짧은 게 아니라 오히려 약간 길었다.

탄도가 낮아 바람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은 탓이다.

“홀 인!”

미사키의 흥분한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그린 끝에 떨어진 공이 홀컵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다고 생각했지만 필상도 숨을 쉬지 않고 지켜봤다.

‘팅!’

핀을 정통으로 때린 소리가 티잉 그라운드에도 들렸다. 확실히 강했던지 핀 끝에 달린 깃발이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로 인해 착시가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상의 눈에 마땅히 보여야할 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린을 오버하는 장면은 분명히 없었건만.

“어억!”

누군가 필상의 등에 확 매달렸다.

졸지에 중심을 잃은 필상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겨우 균형을 잡으며 얼른 뒤로 두 손을 빼 등에 올라 탄 미사키를 업어야만 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필상도 그린에서 자취를 감춘 공을 찾느라 그녀를 꾸짖을 틈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걸 보면 홀인원을 한 것 같기는 한데 현실감이 없었다.

“나. 홀인원 한 거야?”

“미쳤어, 미쳤어!”

“뭐?”

“나 좀 내려 줘요.”

“어? 너 왜 내 등에 업혀 있는 거야?”

“몰라요!”

아무리 흥분해도 그렇지 캐디가 티 박스에 서 있는 선수에게 달려가 등에 업히는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기쁨을 함께 나누는 모습은 흔하지만 축구장에서나 볼 수 있는 격한 세러머니가 골프에서 나오자 당사자들도 당황했다.

동성도 아닌 이성이기에 사람들의 시선도 좀 묘했다.

물론 아무런 사이도 아닌 필상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미사키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미 홍시가 되어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녀를 탓하다가는 당장 도망칠 것 같았다.

“클럽 안 받아?”

그제야 고개를 든 미사키가 아이언을 받아들며 던진 첫 마디가 더 흥미로웠다. 시선도 맞추지 못하면서 한다는 소리가.

“나 무겁죠?”

“허리가 휜 것 같아.”

“네?”

“미리 말하고 업히란 말이야. 내 백을 하루 종일 메주는 널 업어주는 게 뭐가 어렵겠어.”

“정말 다친 건 아니죠?”

“몰라. 생애 첫 홀인원 축하치고는 좀 과격하기는 했지. 하하하!”

8번 홀 홀인원은 필상을 공동선두로 이끌었고 이후 2타를 더 줄인 필상은 결국 5언더로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가 끝난 뒤 진행된 시상식에서 뜻하지 않은 상품까지 잔뜩 받게 된 필상은 꿈같은 하루를 보냈다.

그래봐야 이제 겨우 JGTO 일회성 출전권을 딴 것에 불과하지만 골프채널에 필상의 우승소식이 실리는 영광도 얻었다.

당당한 실력이 아니라 모모카의 캐디라는 특수상황이 만든 해프닝이지만 36홀 스트로크대회에서 5언더를 기록했으며 홀인원까지 기록한 과정을 꼼꼼하게 확인한 몇몇은 전화까지 걸어 축하의 말을 전했다.

“한 잔 사줘요.”

“당연히 한 잔 해야지. 하하하.”

필상은 미사키와 함께 일본식 주점으로 향했다.

적어도 오늘 만큼은 마음 편하게 자축하고 싶었고 자신을 위해 수고한 미사키와 헤어지기 전에 감사한 마음도 전하고 아쉬움도 덜어야만 했다.

취할 의사는 없었으나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스스로 가뒀던 지독한 외로움이 고개를 쳐든 것인지 생각보다 빨리 취기가 돌았다.

취해도 나쁜 술버릇은 없지만 그래도 만리타국에서 술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용납되지 않아 겨우 자제했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일방적인 의지였을 뿐, 어느 한 순간 필상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

“으으으...”

머리가 지끈거려 정신을 차리는데 한참 걸렸다.

어젯밤 일본식 청주인 사케를 마셨는데, 이놈의 술이 왜 그리도 달게 느껴지는지 홀짝홀짝 마시다 일순간에 필름이 끊어졌음을 깨달았다.

얼른 주변부터 확인했다.

혹시 엄한 짓을 한 게 아닌지 염려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미사키는 방안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걸친 것이라고는 팬티 한 장 뿐이었다.

주점에서 호텔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설마 혼자서 이렇게 벗었을까?

“미치겠네!”

취중에 혼자 벗었다면 옷들이 주변에 널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옷장에 가지런하게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머리칼이 쭈뼛 섰다. 이건 분명히 미사키의 솜씨였기 때문이다.

얼른 스마트폰을 들었지만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지는 못했다. 잃은 기억을 소환하기 전에 취하는 그 어떤 행동도 실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수습한 필상은 자신의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거대한 힘을 발휘하던 소중한 것이 오늘따라 늠름한 자태를 잃은 것은 불길했지만 엄한 짓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 시트가 깨끗하잖아!”

“베게도 눌린 자국이 전혀 없어!”

그게 확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위하던 필상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욕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샤워 타월이 모두 접힌 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취했기로 늑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지만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남자의 본성 아니던가!

평소와 달리 너무 쉽게 취했기에 불안했던 마음을 다잡은 필상은 그제야 양치질을 시작했다. 하기야 떡 줄 사람이 거부했다면 호텔이 아닌 유치장에 있었을 게 아닌가!

“그래도 연락은 못 하겠네!”

샤워를 마친 필상은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하려고 로비로 내려왔다. 그런데 딱 걸렸다.

미사키가 커피숍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녀, 당황한 필상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는 결코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걸 모르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반갑게 다가온 그녀는 배고프다며 체크아웃 하는 동안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자고 권했다.

엉겁결에 따라가던 필상은 두려움을 떨치고 확인했다.

“어제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남자가 그렇게 술이 약해요!”

“약하지는 않아. 알코올 중독 초기까지 갔던 이력이 있던 난데 너무 오랜만에 폭주를 했나 봐.”

“알코올 중독이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얘기는 제발 잊어줘. 하하하.”

괜한 말을 꺼냈다 싶지만 그 때의 좌절을 잊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고 그 기억들은 자신의 자양분이 되었다.

폐인이 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도,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절감했다. 노모의 한숨과 눈물을 보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했던 암울한 나날, 그 기억은 성공을 향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원동력이었다.

“사람 불러 옮겨오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아! 그랬겠네.”

50kg도 되지 않는 그녀가 83kg까지 올라온 취한 자신을 호텔까지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미치자 필상의 마음은 한결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방심의 순간은 항상 위험하다.

“프로님께 그런 장난 끼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장난 끼?”

“저도 재미있었으니까 괜찮아요.”

무슨 말인지 감히 묻지 못했다.

장난을 치다니?

그녀와 식사를 나눴고 공항까지 태워준 그녀와 많은 얘기들을 했지만 대체 무슨 장난을 쳤는지는 미제로 남겼다.

*

- 축하해!

- 축하는 나중에 투어시드를 얻은 뒤에 받을게요.

- 잉? 그럼 축하할 일이 생기기는 하려나?

- 누나가 다음 우승 거두는 날보다는 빠를 걸!

- 너! 한국 안 들어오겠다는 말이야?

- 약속은 지킬 겁니다. ㅋ. 하지만 우승이 어디 쉽나!

- 그럼 내가 더 빠르겠네. 얼른 와. 보고 싶어...

- 이 아주머니가 진짜!

- 넌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거구나? ㅠ.ㅠ

- 그럼 보고 싶은 거로!

안시현 프로와 주고받은 문자다.

한국에도 소식이 전해진 것 같은데 아마도 미사키를 통해 이 대표에게 전달된 것이 입을 통해 그녀에게도 전해진 듯.

일본에서 활약하는 안면을 튼 몇몇 프로들도 축하 문자를 보내왔건만 정작 가장 기뻐할 것 같던 모모카에게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어차피 지금 만나러 효고로 향하고 있지만 그래도 참 별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먼저 연락을 하려다 겨우 참았다.

직접 얼굴을 보고 기쁨을 나누면 더 좋을 것 같아서였는데 간사이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미우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