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33- 실력의 반의 반
“캉!”
소리는 좋았으나 지나치게 안전하게 치려고 했던 것일까?
공은 악간 덮여 맞아 본의 아니게 드로우가 먹고 말았다.
1번 홀은 398야드의 왼쪽으로 휘는 도그렉 홀인데, 240야드 지점에 위치한 좌측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벙커가 아니었다면 좌측 OB지역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를 정말 엉뚱한 샷이었다.
평소에 이런 실수가 잦다면 모를까, 티잉 그라운드를 내려오는 필상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본인은 당황했건만 시선이 마주친 모모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좋아라!’ 하는 표정이었다.
“프로님도 긴장을 하세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미사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필상의 기량을 확인했기에 걱정은커녕 약간 약 올리는 듯 비아냥거렸지만 필상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골프를 치면서 실수가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스스로 판단한 자신의 기량은 이런 샷이 나오면 안 된다. 일관성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무기였기 때문이다.
“172야드에요.”
“6번 아이언 주십시오.”
벙커라서 한 클럽 더 잡았다.
게다가 좌측에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은 핀을 정면으로 공략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페어웨이라면 몰라도 벙커에서 드로우를 구사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못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필상은 이미지를 그리는데 성공했고 곧이어 과감하게 스윙했다.
나뭇가지들을 비키며 멋지게 훅이 먹은 것은 좋았다. 하지만 벙커라서 좀 더 인아웃 스윙을 의식한 것이 문제였다.
악성 훅처럼 휜 공은 그린을 좌측으로 외면했을 뿐더러 의도한 것보다 한참이나 길었다.
‘퍽!’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린 좌측에 작은 벙커가 2개 있는데 뒤쪽 벙커 속으로 공이 사라져버렸다. 만약 거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홀의 경계선을 넘어 OB로 처리되었을지도 모른다.
미사키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그 정도 힘이었다면 공이 벙커에서 튀어 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튄 것은 모래뿐이었다.
그래도 라이가 괜찮기를 바라고 다가갔지만, 프라이드 에그(Fried egg- 모래에 반쯤 묻힌 볼)였다.
그것도 볼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박혔고 스탠스가 나오지 않는 경사면에 박힌 공을 걷어내야만 했다.
“왼발은 위에 걸쳐야할 것 같은데요?”
정확한 지점을 강하게 찍어 쳐야 하는데, 괴상한 자세로 과연 정상적인 스윙이 가능할지 의심이 들었다.
실전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이렇게 난해한 트러블 상황은 처음이다. 게다가 이런 최악의 상황은 연습해 본 적도 없다.
아예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는데 중요한 시점에 맞닥뜨린 벙커샷은 마음의 평정심을 뒤흔들었다.
심호흡을 길게 한 필상은 샌드웨지를 들고 스탠스를 취해봤다. 헤드가 더 묵직한 것을 쓰고도 싶었으나 모래를 파고들 것 같지가 않았다.
“시작부터 꼬이네.”
“그래도 잘 해낼 거예요.”
“내가 볼 때 너를 지도할 만한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아직 갈 길이 머니까 지켜보세요.”
모모카는 의구심을 나타내는 부친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띠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하지만 샷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다리를 쩍 벌려 벙커 턱에 걸친 왼발에는 힘이 전혀 실지 않았고 오른발에만 무게가 몰린 가운데 강한 스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정확한 지점을 찍었건만 애초에 스윙이 너무 컸다.
“볼!”
그린을 훌쩍 넘어가는 공에 미사키가 깜짝 놀라 위험을 알리는 경고의 외침을 터트렸다. 그나마 갤러리라고는 동반자들의 가족이나 지인들뿐이라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은 그린을 넘어 우측의 러프 지역에 떨어졌다. 순간 OB가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인해 본 결과 공은 타이트 라이(Tight lie- 잔디가 전혀 없는 지점)에 놓여 있었다. 나무 그늘아래였고 낙엽 등이 떨어져 풀이 자랄 수 없는 흙바닥이었던 것이다.
세컨샷을 쳐서 공이 그곳으로 갈 수는 없다. 우거진 나무 때문에 지금처럼 반대편에서 어프로치가 탑핑이 날 때만 아주 힘들게 구경할 수 있는 엄한 자리였다.
‘4온이라도 해야 하는데?’
필상은 9번 아이언을 들고 피치 앤 런(Pitch and run- 평상시보다 볼을 낮게 띄워서 많이 굴러가도록 의도하는 어프로치 샷)을 시도했다.
바닥이 딱딱하기 때문에 띄우는 샷은 실수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어프로치는 원했던 지점보다 짧게 떨어졌다.
프린지에 떨어뜨려 핀까지 굴릴 생각이었으나 더도 말고 30cm 정도 짧게 떨어진 공은 겨우 한 번 튀어 그린 엣지에 멈추고 말았다.
등을 타고 오르는 기분 나쁜 기운, 그건 분노였다.
‘대체 뭐 하는 거냐? 공필상!’
무리하지 않고 핀에 붙여 더블보기를 기록하고 홀 아웃을 하는 필상의 표정은 차갑다 못해 냉기가 풀풀 날렸다.
온전히 자신의 어리석은 실수였다.
티샷 미스 하나가 낳은 결과가 이렇게 큰 낙심을 불어올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이 정상화되었다고 판단하고 있기에 더더욱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이제라도 차분하게 경기를 풀어 나가야한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 흔들린 샷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심리상태가 경기내용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스윙이 이어졌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도 컷 탈락을 하잖아요.”
“변명이 너무 구차한 거 아니냐?”
“아빠는 제가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보여요?”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면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아.”
“골프는 장갑을 벗어봐야 안다잖아요. 더 지켜보세요.”
미우라가 필상의 기량을 의심하는 것은 근거가 있었다.
첫 홀에 더블을 기록한 필상은 이후에도 보기를 3개나 기록하며 프런트 나인(Front nine- 18홀 라운드 중 전반 9홀)에 5오버를 기록했던 것이다.
동반자들도 비슷했지만 140명 중에 단 2명만 바늘구멍을 통과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어림도 없는 꿈만 같았다.
“반전이 필요해!”
“네?”
“아닙니다. 오늘 참 힘드네요.”
“그래도 전 걱정하지 않아요! 실력을 아는데 그게 어디 가겠어요? 결국 기어 나오고 말 걸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가중된 압박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후반 홀로 넘어가며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스스로 힘들다고 말한 뒤부터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는 순간, 주변이 보였고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다시 시작하죠. 그까짓 5타, 핸디 줬다고 생각하죠 뭐!”
“5타는 좀 많기는 하지만 늦지는 않았다고 봐요.”
“어? 왜 내게는 늦었다는 말로 들리죠?”
“아,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프로님의 선전을 바라는데요!”
“그럼 파이팅 한 번 외쳐줘요!”
“네?”
“큰 소리로 파이팅 한 번 외쳐 달라고요!”
얼굴이 발개진 미사키는 오른손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쳤다. 사적인 대화는 한 마디도 없던 필상이 돌연 멍석을 깔아주자 그녀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개미 목소리로 무슨 파이팅이 되려나 싶지만 필상은 아주 만족했다. 더도 말고 자신이 생각하는 둘째 누나와 너무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학예회 준비는 가장 열심히 했지만 막상 무대에 서자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분명 자그마한 입을 벙긋 거렸는데 말이다.
“굿 샷!”
드라이브 티샷이 시원하게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티샷을 정확히 때리는 것은 좋은 성적을 만드는 기초 작업에 불과하다. 스코어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린 적중률이 중요한데, 번번이 그린을 놓쳤다.
그래도 마음을 편히 먹은 뒤 샷이 안정되었지만 그런데도 클럽페이스가 살짝 열려 맞았다. 몸이 살짝 먼저 돈 것이다.
그나마 온 그린은 가능할 것 같아 낙하지점을 확인하던 필상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그린에 떨어진 공이 정면이 아닌 홀컵 방향으로 튀었기 때문이다.
확인한 결과 4m 오르막 슬라이스 라이였다. 생각만큼 잘 붙지는 않았으나 연습할 때 굴려본 라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텅! 텅텅텅텅...”
기어코 하나 떨어뜨렸다.
홀컵에 떨어진 공이 만들어낸 청량한 잔음이 전반 홀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서서히 녹이는 것 같았다.
이후 필상의 샷이 제 궤도를 찾기 시작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큰 실수는 더 이상 없었고 14, 17번 홀에서 타수를 줄이며 결국 2오버로 1라운드를 마쳤다.
전반에 5타를 잃은 것이 믿기지 않을 뿐, 후반만 본다면 크게 부족한 성적은 아니다. 실망스러운 결과였으나 좋은 경험이었고 샷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모모카의 반응은 의외였다.
“어째서 실력의 반의 반도 못 보여준 거죠?”
“그러게. 어쩌면 이게 내 실력인지도 모르지.”
“저 그냥 갈 거예요. 도저히 못 보겠어요.”
“그래. 일단 아버님 모시고 돌아가. 다음 주 화요일에 효고 현에서 만나기로 하고.”
“모모카. 식사는 같이 하고 가야지.”
“아니에요. 그냥 가요.”
미우라가 말렸으나 모모카는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돌아섰다. 이건 좀 아니다 싶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전반 9홀에서 필상이 헤맨 것이 자신의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변수는 그것뿐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식사하고 싶은 것은 물론 내일까지 머물며 결과를 보고 싶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자신이 빨리 떠나는 것이 필상을 위하는 길이라 판단한 것 같았다.
“말리지 그러셨어요?”
“서로에게 득이 될 게 없는데 뭘 말립니까.”
“큐슈에서 날아온 거 아닌가요?”
“며칠 후면 다시 만날 텐데, 각자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필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이 찜찜한 결과는 모두 자신의 부진 때문에 생긴 일이다. 깔끔하게 능력을 보여줬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끝난 것을 들추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모모카의 등장이 영향을 미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깟 일에 집중이 흐트러진 자신이 더 큰 문제였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미사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씻으러 간줄 알았는데, 샤워를 포기한 대신 1라운드 결과를 들고 있었다.
“1라운드 성적이 집계 되었어요.”
“선두의 성적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3언더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큰 차이였다. 한 라운드에 5타를 뒤집는다는 것은 과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사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가 않았다.
“2등이 중요하잖아요.”
“선두와 격차가 좀 있나 보군요?”
“네. 1언더가 1명이고 이븐파가 4명, 1오버가 7명이에요.”
“넘어야할 산이 12명이나 되는군요.”
“13명이죠!”
2위를 목표로 한다면 12명이지만 우승이 목표라면 13명이 맞다. 미사키가 필상에게 바라는 것은 우승이었다.
물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의 목표가 그거였다. 그런데 5타 차라는 말에 우승을 뇌리에서 지운 것이 부끄러웠다.
애당초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도전이다.
하루 실망스러운 결과를 냈다고 목표를 수정한다면 자신이 다다를 곳은 꿈의 무대가 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쑥스럽네. 여하튼 식사나 하러 갑시다.”
“제가 좋은 소식도 하나 물어왔는데, 궁금하죠?”
“뭔데 그럽니까?”
“내일 코스세팅이 어려울 거래요. 언더파는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할 거라던데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건 극비사항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가슴을 쿡 찔렀다.
이미 들어버린 내용을 어쩌겠는가!
미사키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입에 올린 것을 보면 필상이 더 강한 의욕을 불태우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칙마저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식사를 마친 필상은 다시 연습장으로 돌아와 반성모드에 돌입했다. 만약 이번 고비를 넘지 못하면 자신은 당분간 꿈을 접고 캐디 일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내일을 향한 전열을 가다듬었다.
“진짜 골프 살벌하게 치네!”
“저 사람 모모카의 캐디라는 그 작자 아니야?”
“맞아. 어제 모모카가 직접 여길 왔었잖아.”
“그러니까! 하필 난 2조여서 아침 일찍 나가는 바람에 못 봤어. 사인이라도 받았어야 하는데! 실물은 어땠어?”
“어떻긴! 내 플레이가 꼬인 게 다 모모카 때문이라고!”
“우이 씨! 그렇게 섹시해?”
“말도 마! 그냥 상큼하고 깜찍하고...”
듣고 싶지 않아도 워낙 크게 떠들어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필상이 일본어가 서툴다고 생각한 듯.
하지만 응징은 굿 샷으로 대신했다.
어제 더블을 기록한 1번 홀에서 6m 버디퍼팅에 성공한 필상은 172야드 파3 홀인 2번 홀에서는 탭인 버디를 잡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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