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2화 (32/354)

ILG032- 독특한 캐릭터

“내가 보낸 문자는 읽지 않더니, 웬일이죠?”

“도움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은 이보영 대표였다.

최 프로에게 전화할까 싶었지만 어차피 그녀에게 연결될 것이라면 굳이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는 모모카에게 부탁하면 더 수월할 것 같지만 묘한 자존심이 이 대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차피 그녀와 자신은 비즈니스 관계다. 기껍지는 않지만 받은 만큼 돌려주면 된다는 생각이 있기에 부탁하면서도 몸을 낮출 마음은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첫 마디와는 달리 무척 반가워했고 필상은 필요한 것을 얘기하고는 가급적 말을 아꼈다.

“제가 일본에 갈까요?”

“아직 만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알았어요. 제가 알아보고 조치할 게요.”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서운할 것 같기는 했다.

진즉에 내놓은 제안을 사양한 것도 실은 시건방진 행동으로 비칠 수 있으며 일본까지 건너와 직접 만났는데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으니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호의적이었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상당히 좋은 사업수단이라고 느껴졌다.

꽤나 거친 직장생활을 했던 필상은 오너들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다. 오로지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지나치게 강하다.

물론 모두 다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확실한 근거도 없이 좋게 평가할 까닭도 없다는 게 평소의 소신이었다.

“만나도 내가 더 떳떳할 때, 그 때 만나야지!”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직 그 어떤 것도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덜컥 지원부터 받는다면 원지 않는 을의 길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더 컸다.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둔 뒤, 보다 동등한 상황에서 관계를 맺고 싶었다. 나이도, 경험도, 심지어 가진 것도 많아 보이는 이 대표에게 가진 감정이 통상적이지 않은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꿀리기 싫어.

그게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묘한 호감과 무관지 않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보다 먼저일 수는 없는 것이다.

*

“안녕하세요? 프로님.”

“저를 찾아오신 것 맞습니까?”

아침운동을 마친 필상이 식사하고 있는데 웬 젊은 여자가 테이블에 다가오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귀여운 외모에 친절함이 몸에 밴 여자가 아침부터 호텔까지 찾아와 외판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으나 필상의 반응은 다소 퉁명스러웠다.

“저는 J&L 대표님이 보낸 미사키라고 해요.”

“아! 일단 앉으시죠.”

엄청난 오해를 했던 필상은 얼른 일어나 의자를 직접 빼주며 자리를 권했다. 물론 엉뚱한 생각은 들키지 않았겠지만.

“아침에 나스 시라카와GC에 연락해 부킹은 잡아놨어요.”

“하하하. 벌써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본시 매니지먼트 사업이라는 것이 이래야한다는 생각을 들지만 이 대표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능했다.

“9시 30분 티오프니까 시간 맞춰 가시면 될 거에요.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든 제게 연락을 주시면 언제든 최선을 다해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일단 챙겼고 보다 편한 연락수단인 라인을 땄다. 그런데 볼일은 다 본 것 같은 그녀가 미적거리며 돌아가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축객령이었다.

고마웠지만 당장 자신은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녀에게 나눠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아들은 것 같았는데 그녀의 입에서는 엄한 말이 나왔다.

“일요일 대회까지는 제가 프로님을 지근거리에서 지원할 거예요. 그게 제게 주어진 업무거든요.”

“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절대 귀찮게 하거나 신경 쓰이게 하지 않을 게요. 저는 그럼 밖에 대기시켜 놓은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제발 뜯어말리고 싶었으나 냉큼 일어난 미사키는 조르르 사라졌다. 마치 필상의 이런 대응을 염려한 사람처럼 보여 심히 난감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대표가 그렇게 지원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 같았다. 과잉 배려라는 생각은 들지만 미사키가 스스로 밝혔듯 이게 본인의 업무라고 했다.

만약 거부하면 그녀의 입장이 곤란할 것 같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또한 누군가 곁에서 도와준다면 보다 편하게 대회에 집중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어는 가능해도 외국인은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 많다. 그래서 일단 호의는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건 안 됩니다.”

자그마한 그녀가 대기시켜 놓은 차는 중형 SUV이었다.

골프백을 실고 다니기에 가장 적절한 차를 가져온 준비성도 마음에 들었으나 차분하게 운전하던 그녀가 꺼낸 말에 필상은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녀가 연습라운드 캐디를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보통 어느 골프장이든 하우스캐디를 써야하건만 그게 가능하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일이었으며, 가녀린 그녀가 무거운 골프백을 메고 따라오면 부담될 것 같았다.

상당히 거친 반응이었지만 미사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혹시 제가 너무 약해 보이세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싫어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제가 약해보여도 재작년까지 투어선수로 뛰었어요. 2부 투어였지만.”

대답이 궁색해졌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했다면 외양만으로 판단한 것은 분명한 오류였다. 게다가 골프선수로 활약했다면 웬만한 캐디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데도 쉽게 캐디를 하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 그녀를 너무 부려먹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사무적인 업무지원에 운전도 하는데 몇 시간씩 땀을 흘려야하는 캐디 일까지 맡기는 것은 적절치 않게 느껴졌다.

“남성 우월주의자이신가요?”

“아닙니다. 뭐 그렇게까지 확대해석을 하십니까.”

“남들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이신가요?”

“그건 그대가 캐디를 하는 것과는 무관한 질문입니다.”

“기분 상하시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 제가 선수출신이라는데 하우스캐디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괜찮아요. 우린 만난 지 1시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오자 괜히 미안했다.

자신이 선입견을 가졌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만약 자신에게 플러스 요인이라면 스스로 복을 걷어찬 꼴이기에.

“체력은 됩니까?”

“벗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연약해보여도 아주 튼튼해요. 12kg을 다이어트 했지만 타고난 통뼈에 근육만 조금 붙어있거든요. 호호호.”

뜻하지 않은 그녀의 푼수 끼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체력과 체격은 다른 소재인데, 여하튼 캐디를 하는 것에 대한 염려는 하지 말라는 강한 주장으로 받아들였다.

어제는 씁쓸하게 돌아섰지만 오늘은 확연히 달랐다. 미사키와 나란히 클럽하우스로 들어서자 팀장이 직접 달려 나왔다.

예약상황을 설명하는 그에게 미사키는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달리 시종일관 뻣뻣한 자태를 드러냈다.

“아주 독특한 캐릭터네!”

나이는 어리지만 문득 둘째 누나가 떠오른 것은 그녀 또한 사차원이라는 말을 가끔 들을 행동을 취하기 때문이다.

외모는 미사키처럼 아담하고 귀여운 상이지만 흥분하면 옥타브가 올라가고 말발이 세지며 의외로 허영심도 강해 자형이 머리를 싸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약 확인됐어요. 옷 갈아입고 오시죠?”

“5분. 5분 뒤에 스타트에서 만나요.”

“5분이요? 자, 잠깐만요...”

필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성 라커룸으로 향했다.

아직 확신하기 어렵지만 둘째 누나와 비슷한 성격이라면 처음부터 관계를 잘 정립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차분하고 성실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똑 부러지게 하지만 가끔 엉뚱한 일을 벌여 당혹케 한다.

특히나 편하거나 만만한 사람에게는 그 경향이 짙어지기에 빈틈을 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미리 강조하지 않으면 스타트에서 20분 이상 기다릴 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과 말까지 더듬는 것을 보면 자신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합리화가 됐다.

“굿 샷!”

“우와! 멋져요.”

“귀신이네, 귀신!”

“본선 통과는 너무도 당연할 것 같아요.”

원하는 클럽을 얘기한 것 말고는 잡담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화난 사람처럼 너무도 진지해서 처음에는 말도 잘 붙이지 못했던 그녀가 점점 더 말이 많아졌다.

흥분 게이지가 상승한 것인데, 그 원인은 당연히 필상의 샷이다. 처음 나온 코스에서 버디를 5개나 잡는 것은 프로의 면모를 보여줬다고 할만 했다.

하지만 필상은 내내 심각했다. 보기를 2개를 기록했으며 더블보기까지 하나 범했기 때문이다. 코스가 녹록치 않았고 의외의 함정이 도사린 홀들이 눈에 띠었다.

“언더파에요, 언더파!”

“수고했어요.”

“제가 한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무거운 백을 메고 함께 다녀준 것만으로도 고마웠습니다.”

“참! 제 체력은 인정받은 거죠?”

“네. 다 좋은데 대회 때도 그렇게 수다스럽지는 않겠죠?”

“어머! 혹시 불편하셨어요?”

“아닙니다. 힘이 절로 났습니다. 하지만 동반자들이 있을 때는 좀...”

“걱정 마세요. 제가 선수출신이라니까요. 호호호.”

실전에서 과연 그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음날 라운드에서 그녀의 옥타브는 조금 더 올라갔다.

더도 말고 스코어와 비례한 것 같은데, 버디는 5개로 같았지만 더블보기 없이 보기만 2개 기록하면서 3언더를 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미사키가 온 뒤로 필상은 아주 편해졌다는 것이다. 라운드 준비부터 시작해 식사와 간식까지 챙기는 그녀의 세심한 배려는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운동선수에게 이런 지원은 필수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으며 추후 캐디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될 부분도 없지 않았다.

*

드디어 본선의 날이 밝았다.

필상은 6시에 일어나 러닝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아침을 먹은 뒤, 대기하던 미사키와 함께 결전의 현장으로 향했다.

10:42티오프라서 연습장으로 향했고 샷 점검을 마친 필상은 급기야 1번 홀로 이동하기 위해 나섰다.

그런데 클럽하우스 인근에 사람들이 엄청 몰려 있었다.

필상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대회지만 사실 JGTO에서는 이 대회가 열리는지도 모를 존재감이 떨어지는 대회다.

그런데 갤러리들은 물론 선수들과 캐디들까지 모여 있는 모습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피해 1번 홀로 이동했는데, 그 때 미사키의 흥분한 음성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프로님. 누가 왔는지 봐요!”

“무슨 소리야?”

고개를 돌린 필상의 시선에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이는 다름 아닌 모모카였다.

무척 반가웠으나 다가와 안기려는 모모카를 제지한 필상의 표정에는 속마음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오빠!”

“여긴 뭐 하러 왔어?”

경기를 보고 바로 돌아간다고 해도 하루는 꼬박 허비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시간을 쓴 모모카를 꾸짖을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곁에 있던 미사키도 놀란 것 같았다.

둘이 각별하다는 것, 그리고 괜한 소문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사실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필상도 가슴이 뭉클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아니, 찾아야만 했다.

“숙제는 다 하고 온 거야?”

“치! 열심히 하고 있고 아빠랑 같이 왔어요.”

그제야 저 뒤에 서서 손을 흔드는 미우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기꺼이 온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딸과 함께 여행 온 것은 즐거운지 표정은 밝았다. 다가온 그와 악수를 나누는 사이, 모모카의 공격이 들어왔다.

“오늘 5언더, 그 이상 잘 치지 못하면 내일 경기도 보고 갈 거예요.”

“야!”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나한테 9&7로 이길 때처럼, 아니 그것보다 훨씬 잘 쳐야 해요.”

“나도 같은 생각일세. 모모카에게 전해 들었는데 정말 자네 그렇게 골프를 잘 치나?”

미우라까지 합세하자 상황이 좀 애매했다.

그도 이제는 알 것이다. 필상이 모모카와 코치 계약한 걸.

성적이 말해주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거나 적당한 기회가 없었을 뿐, 그가 모르는 계약을 맺은 것은 필상으로서도 좀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때문에 오늘 그에 대한 시험을 치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열심히 쳐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모모카의 팬들이 몰릴 것 같은데 아버님께서 신경을 좀 쓰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건 걱정 말게. 하하하.”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보며 필상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도 그의 큰 덩치와 험한 인상을 보고 처음에 상당한 위협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젠 한결 편해졌지만 누구보다 딸을 귀히 여기는 그가 곁에 있다면 불필요한 걱정일 뿐이었다.

여하튼 기대하지 않았던 뜨거운 응원을 받으며 필상은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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