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31- 만화책 좀 작작 봐
“한 마디로 정글이로군!”
“미녀와 야수? 미녀를 괴롭히는 사나운 야수가 너무 많죠?”
“그러게.”
“어? 웬일로 인정을 다 해 주죠?”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 삭막한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미녀가 아니라 괴물이 되어야만 해.”
“괴물은 사양하고 싶은데 미녀가 이길 방법은 없나요?”
“이 상황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괴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그 어떤 위협에도 당당하게 한 샷 한 샷에 집중하는 자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지.”
“상대가 스스로 자멸할 때까지 버터야 한다는 거죠?”
“뭐가 부족해? 미모가 빠져? 기량이 떨어져?”
“좋아요. 제대로 붙어 볼 게요.”
인코스는 험난한 홀이 많다.
때문에 필상은 철저히 전략적인 접근을 제안했다.
553야드의 긴 파5홀인 11번 홀에서 273야드의 티샷을 날리며 테레사의 드라이브 티샷 미스를 이끌어 냈고, 이어진 150야드 파3 홀에서 홀인원에 가까운 절묘한 아이언으로 모모코의 기를 죽였다.
둘을 1타 차로 따돌린 모모카는 13번 홀부터 17번 홀까지 철저히 파 세이브를 목표로 안전한 플레이를 펼쳤고, 무리하게 추격하던 공동 2위와의 격차를 다시 2타 차로 벌렸다.
마지막 파5 홀은 496야드지만 지난 이틀 동안 이글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오르막 홀이기에 안전하게 가도 되지만 모모카는 그 홀마저도 서드 샷을 핀에 붙이며 우승을 예약했다.
- 참 믿기지 않네요. 모모카가 원래 저런 선수였나요?
- 하하하. 질문이 좀 묘하군요. 90년대 후반에 태어난 투어 신인들이 보다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것은 부정할 수 없지요.
- 그 말씀은 우리 일본의 골프교육의 저변이 취약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많은 선배들이 이르길, 자신만의 스윙을 찾아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 결과 좋은 선수들이 나오기는 했죠.
- 하지만 우리보다 늦게 골프를 시작한 한국보다 뒤쳐졌지 않습니까?
- 바로 그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동양선수들은 서양선수와 맞대결을 펼칠 수 없다는 선입견이 강했는데 그걸 한국선수들이 깨부수는 것을 보며 정통 스윙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 아프지만 인정해야 할 부분이군요. 그러나 이제 우리 젊은 선수들도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거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면 미래가 어둡지는 않겠군요.
- 그 대표적인 주자가 바로 하타오카와 모모카라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팬들의 사랑을 받는 거지요.
버디 퍼팅을 성공한 모모카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환호했다. 마치 그린의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1년에 3승, 4승을 거두는 선수도 있지만 Q 스쿨을 어렵게 뚫고 올라온 투어 신인이 2년차에 연승을 한 경우는 없다.
그녀가 힘들어했던 기간은 대부분의 프로선수들이 겪는 엄청난 고난과 위기를 단숨에 통과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스타의 탄생을 열망하는 일본 골프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값진 결과였기에 그녀의 연승은 더욱 깊은 의미가 부여됐다.
지난주와는 달리 여유롭게 우승 세러모니를 즐긴 모모카는 우승 인터뷰에 필상을 초대했다. 극구 사양했지만 카메라가 밀고 들어오는데 도망갈 수도 없어 어색한 자리를 함께 했다.
- 우승 소감부터 한 마디 부탁합니다.
“제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캐디이자 스윙코치이신 공 프로님의 절대적인 도움 때문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저는 위기마다 무너졌을 것이고 우승 근처에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 너무 겸손한 말씀 아닌가요?
“절대, 절대 아닙니다. 골프는 정말 어렵거든요. 한 마디 말이, 한 번의 생각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낳고 그것이 쌓이면 우승이 되기도 하고 컷 탈락이 되기도 합니다. 고비마다 저를 붙들어 주고 대안을 제시한 코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연승은커녕 누군가의 우승을 바라보며 속이 쓰렸을 거예요.”
- 그렇게까지 캐디의 역할이 중요한 가요?
“캐디지만 캐디가 아니잖아요. 저는 스승이라고 생각해요.”
이후 여러 질문이 이어졌지만 모모카는 일관되게 필상의 역할에 대한 감사의 말을 빼먹지 않았다.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나 그 말은 곧 캐디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필상에게도 마이크가 왔지만 일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며 빠져 나왔다. 모모카의 의도와는 달리 공공의 적이 될 것 같다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모모카는 이제 비교불가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할 가능성이 높아 굳이 한국인을 캐디로, 또 코치로 곁에 두는 것이 마뜩찮은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모모카는 캐디를 보겠다며 박박 우겼지만 필상은 공언한 대로 그녀에게 숙제를 잔뜩 내주고 미야자키로 보냈다.
숙제 중에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회복하라는 것과 내년에 대학진학을 모색하라는 미션도 포함되었다.
극히 사적인 지시였으나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모카가 고마웠다. 절대적인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필상이 향한 곳은 후쿠시마였다.
예선전은 전국의 여덟 개 지역에서 펼쳐지지만 굳이 후쿠시마까지 가는 이유는 본선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자리를 잡았어!”
모모카는 필상을 스승이라고 표현했다.
과연 그럴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있지만 필상도 그녀에게 고마웠다. 그녀가 있었기에 일본에 올 수 있었고 그녀의 신뢰가 굳건하고 기량이 받쳐 줬기에 안정된 기반을 닦을 준비가 되었다.
목돈이 마련되었으니 적당한 거처를 마련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섣부른 생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집시처럼 떠돌아야할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다소간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하겠지만 아직 안개에 가려진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뷰 팔레스 여기 맞지요?”
“네. 감사합니다.”
한나절이 걸려 도착한 곳은 후쿠시마 도치기 현에 속한 나스라는 작은 도시였다. 택시에서 내린 필상은 눈앞에 보이는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4성급이 왜 저렴한가 했더니 역시 연식이 오래된 탓이었다. 그래도 예선전이 열리는 나스GC의 바로 옆이라 만족했다.
모모카와 같이 다닐 때와는 천양지차다.
자신이 원하는 최고를 추구하고 그럴 능력이 된 모모카는 고르고 골라 마음에 드는 숙소를 구했지만 필상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먹고 자는 것에 거금을 쓸 마음이 없다.
긴 여행으로 피곤했지만 짐을 푼 필상은 곧바로 골프장으로 향했다. 그의 어께에는 반짝이는 새 골프백이 걸려있었다.
“골프 치러 가십니까?”
“아, 네. 제가 길을 잘 몰라서요. 나스 골프장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골프백을 메고 나오자 지배인이 한 걸음에 달려 나왔다.
싹싹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길을 물었는데, 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친절하게 태워주기까지 했다.
그래봐야 1km정도였지만 길을 정확히 알게 되어 거듭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그의 친절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프런트까지 따라오더니 부킹하는 방법, 드라이빙 레인지 위치도 알려주었고 직원들과 한참 수다까지 떨었다.
“내일 라운드를 하고 싶은데, 혼자입니다.”
“아! 걱정 마세요. 내일은 예선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많아 빈자리가 제법 됩니다. 언제 치실 거죠?”
“아침 일찍 가능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도 빈자리가 있으면 부탁 좀 드립니다.”
대회에 나갈 거면 전날 36홀은 무리가 아니냐며 묻지만 순순히 부킹을 잡아줬다. 마쓰이라는 이름을 가진 호텔 지배인 덕분에 배려를 받은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연습장으로 향하던 필상을 쫓아 나온 그의 입에서 이유가 밝혀졌다.
“코치님.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모모카의 사인을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아! 네. 다음에 제가 필히 친필사인을 받아서 우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모모카도 기꺼이 해 줄 겁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필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열렬한 골프팬인 것 같았다.
연습장에 도착한 필상은 구석에 자리를 잡고 몸부터 풀었다. 미우라가 선물한 미즈노 골프클럽을 서둘러 적응해야하기에 마음이 좀 급했다.
아마도 클럽이 없는 것을 알고 모모카가 부친에게 사오라고 부탁한 것 같았다. 포장도 뜯지 않은 클럽을 하나씩 꺼내 정리하며 드디어 필상의 일본에서의 골프가 시작되었다.
“쉭!”
타구감이 기가 막혔다.
최신 상급자용 클럽은 상당한 금액일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쓰던 채와 너무 다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오히려 비거리가 한 클럽 정도 더 나가는 것 같아 다시 클럽별 거리를 계산해야할 정도로 샷 감이 훌륭했다.
사실 요 며칠 필상을 괴롭히는 주제가 하나 있다.
지난주에 모모카와 연습라운드를 돌며 확인한 것인데, 모든 샷이 기대 이상으로 좋지만 결정적인 문제점을 발견했다.
늘 쓰리쿼터 스윙을 해 왔고 비거리나 정확성에 아쉬움이 없건만 보다 큰 그림을 생각하며 풀스윙을 한 번 시도해 봤다. 그런데 되지가 않았다.
“아예 연습스윙조차 되지 않았단 말이지?”
대여섯 번을 시도했지만 어께가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황당했지만 일단 기존의 스윙으로 라운드를 마쳤는데 그 이후 끊임없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찜찜함을 더했다.
과연 다시 확인하는 것이 옳은지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망설이던 필상은 결국 연습을 마칠 무렵, 급기야 풀스윙에 도전했다. 그런데 우려하던 것이 현실로 확인되었다.
어깨가 쓰리쿼터스윙에서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몸에 익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반복해서 시도했지만 필상이 얻은 결론은 사고 후유증이었다.
“말이 돼! 말이 되냐고!”
골프를 시작한 이래 이렇게 화가 치민 경우가 없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도둑맞은 기분이 들어 자리에 앉은 필상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직원이 다가와 문 닫을 시간이라고 알려줘 결국 필상은 백을 메고 호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걷자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풀스윙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투어에서 버틸 수 있을지, 그런 핸디캡을 지니고도 도전을 할 것인지.
“하필 내일이 그 서막인데!”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부정한다고 사라질 사실이 아니며 하루라도 빨리 안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리를 온통 휘감은 생각은 자신을 지겹게 따라다니던 불운, 그게 다시 자신을 덮친 게 아닌지 분노가 치민다는 것이다.
물론 모모카나 안시현이 밝혔듯이 지금 자신의 기량은 프로로서 손색이 없다. 정말 잘할 자신도 넘친다.
그런데 어찌 하늘은 또 다시 나를 시험하는 것인지...
*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 아냐?”
“아무래도 프로선수 같아. 왜 있잖아, 부상 때문에 시드를 잃고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재도전하는 프로?”
“만화책 좀 작작 봐. 이건 픽션이 아니라고!”
자신을 두고 숙덕거렸지만 당사자는 한 마디 말도 없다.
그러나 그의 샷 하나하나는 무시무시했다.
동반자들이 이상한 소리를 수군거리는 이유는 하프스윙이나 쓰리쿼터스윙을 하면서도 보기 하나 기록하지 않고 가끔 버디까지 잡는 한 선수 때문이었다.
‘이런 대회일 줄은 미처 몰랐어!’
뒤늦게 깨달았지만 기량을 검증받은 선수들은 아마추어라도 예선전을 면제 받는다. 때문에 지금 펼쳐지는 예선전은 동네 골퍼들의 친교의 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기록도, 연고도 없는 필상은 해내야만 했다.
가끔 좋은 샷을 하는 사람도 보였지만 정규 대회코스였기에 보기 플레이어도 드문 와중에 언더파를 기록하고 있으니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불가항력적 한계 때문에 어제 아침 라운드까지는 큰 영향을 받았다. 보기를 6개나 기록하며 겨우 4오버를 쳤다.
그러나 그게 약이 됐다. 포기하지 않을 거라면 다시는 자신의 약점을 돌아보지 않기로 작정한 필상은 오후에 이븐파를 치며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얼굴에 웃음기는 사라졌지만.
“내게 골프는 전쟁이야!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하는.”
더 처절해야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실전에서 36홀 3언더를 기록한 필상은 예선전 1위가 되어 사흘 뒤에 펼쳐지는 본선에 나가게 되었다.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참가선수는 무려 140명이다.
지역예선을 통과한 선수는 단 16명뿐이고 나머지는 예선면제를 받은 하위투어 선수들과 국가대표 아마추어들이다.
이젠 진검 승부라고 할 만 했다.
그러나 대회가 열리는 나스 시라카와 골프클럽을 찾은 필상은 크게 실망했다. 부킹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회원도 아니며 회원과의 동반라운드도 가능한 입장이 아니라면 끼어들기는 애당초 불가한 명문 골프장이란다.
분명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필상은 결국 도움을 청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열 수밖에 없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