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29- 여성의 프로필
“골프 배운지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이제 겨우 프로 자격 얻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칠 수가 있죠?”
“타고났나 보지.”
라운드를 마친 둘은 식사하러 이동 중이었다. 꾹 참았다 한 번씩 던지는 모모카에 질문에 필상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라운드를 한 필상도 생각할 것이 많았다.
‘정말 공을 치고 싶기는 했지!’
모모카의 우승에 모든 정신을 쏟았지만 시시때때로 자신도 공을 치고 싶다는 갈망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이 우선이었고 그저 생각만으로는 수십 번의 라운드를 돌기는 했다.
그런데 막상 클럽을 쥐고 필드에 서자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신중하게 한 샷 한 샷을 날리는데 모든 것이 생각한 대로 이뤄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나 자신감은 충만했지만 이렇게 좋은 샷이 만들어질 줄은 몰랐다. 너무도 오랜 갈망 때문인지 늘 골프 스윙만 생각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 기량이 진일보했다.
“이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뭘?”
“투어 참가했을 때, 경쟁력 말이에요. 오늘처럼 친다면 금방 저보다 더 유명해질 것 같아요.”
“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남자투어는 또 다르잖아.”
좋은 평가는 고마웠으나 과한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뿌듯함과 더 큰 용기를 얻은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생각해 뒀던 화제를 꺼냈다.
“다음 주는 쉬어야할 것 같아.”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응. 대회에 참가하려고.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한국에서 프로자격을 갖췄다고 그것도 준회원에 불과한데 일본 투어에 참가할 수는 없다. 그 정도는 모모카도 알고 있었기에 자세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회라니요?”
“오픈 대회 예선전이야.”
“설마 아마추어들이 주로 나가는 오픈 대회인가요?”
“아니. 스릭슨 후쿠시마 오픈.”
“그건...”
“알아. 지역예선과 본선까지 치러야한다는 거. 프로지망생들도 많이 참가한다고 들었어.”
물론 JGTO 정규 대회다.
하지만 비단길을 걸어왔던 모모카로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 아주 힘들고 험난한 과정이다. 어렵게 통과한다고 해도 그래봐야 겨우 출전권이 주어질 뿐이다.
수천 명이 몰려들지만 단 2명만 혜택을 받으며 내로라하는 국가대표 아마추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지역예선 면제를 받기에 보다 수월한 조건이라는 점도 감수해야 한다.
그나마 이제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오픈대회는 주최 측의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요식행위일 뿐이다. 게다가 최근 프로투어는 요행이 통하지 않는다.
“그럼 대회 끝나면 후쿠시마로 가야겠네요.”
“그러려고.”
“일단 이번 주는 제 성적부터 내야해요. 우승 뒤에 형편없는 경기를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아요.”
“그야 당연하지. 우승, 연승이라는 거 해보자.”
“흐흐흐. 우승은 힘들 거고 탑 10에만 들면 제가 오빠 캐디 해 줄 게요.”
“됐네요.”
“정말이라니까요!”
“너한테는 내가 숙제 내 줄 거야. 일단 그건 천천히 얘기해도 되니까 오늘 경기내용이나 같이 분석해 보자.”
모모카의 태도가 뭔가 좀 변했다.
장난 끼를 좀 자제하는 것 같다는 느낌, 벌써 대회에 대한 압박감일 리는 없고 아마도 필상의 압도적인 경기력이 자꾸 뇌리에 떠오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그 날 저녁, 필상은 바로 그와 같은 버거운 상황에 대한 대처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동반자의 강력한 기세에 눌리는 경우, 과연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하며 경기운영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또한 위축된 몸은 어떻게 풀며 스윙은 어찌 해야 좋을지.
“오빠가 곁에 있으면 만사형통 아닌가요?”
“만사형통?”
“크. 우리 아빠가 자주 쓰는 말이에요.”
“물론 내가 도와주면 한결 낫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네 곁에 있을 수는 없잖아. 캐디가 도와주면 좋지만 결국 혼자 서는 방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고 봐.”
필상이 곁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어차피 3개 대회를 계약했고 더 조르면 이후에 다시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평생 캐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며 다른 원대한 꿈을 지녔다는 것을 이미 모모카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런 상상조차 싫었던지 시무룩해졌다.
“나랑 약속 하나 해요.”
“무슨 약속?”
이미 두 차례 약속한 것을 이행한 상황이지만, 모모카와의 새로운 약속은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
지키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커지는 자신의 감정을 규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동생처럼 정을 느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닌 감정이라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고, 그렇기에 적절한 간격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되었다. 워낙 엉뚱한 구석이 많은 스타일이라서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JLPGA 투어에서 캐디백을 맬 거면 그건 오로지 저, 모모카여야만 해요!”
“난 또 무슨 말이라고. 하하하.”
“오빠가 다른 선수를 도와 함께 다니는 거, 저는 도저히 못 볼 것 같아요.”
이건 좀 심각한 사안이다. 독점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인데, 이건 노동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입장 곤란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오케이!”
“그럼 저도 새로운 조건을 제시할 게요.”
“됐어. 충분히 좋은 조건이라는 거 알아.”
“아니요, 오빠가 저를 특별하게 대해주시는데 저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드려야죠.”
극구 사양했지만 기필코 계약서를 가져온 모모카는 필상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파격적인 조건을 명시했다.
주목할 부분은 보너스 관련 조항이 아니다. 기존의 조건보다 나아진 것은 분명했지만 새롭게 규정한 부분이 있다.
바로 레슨과 관련된 코치계약이다.
보통 유명한 투어프로들도 전담코치를 두는데, 고정급은 적고 필요할 때마다 원 포인트 레슨을 받으며 거액을 지불한다.
하지만 모모카는 필상과의 인연을 오래 가져가고 싶었는지 계약기간을 명시하지 않았고 수입에 따른 지불을 제안했다.
그 때만 해도 5%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몰랐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전혀 아깝지 않아요. 오빠가 없었다면 제가 지난주에 투어 첫 우승을 할 수는 있었을까요?”
“왜 못해! 충분히 할 수 있었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자신의 기여도가 적지 않다고 자부했다. 다만 아무리 캐디가 훌륭해도 선수가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모모카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것 봐요. 오빠는 저를 인정해 주잖아요. 그게 바로 제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호흡이 좀 잘 맞기는 하지. 하하하.”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지만 실보다 득이 많다.
어차피 능력을 인정받아 다른 선수의 캐디백을 매더라도 이렇게 좋은 대우는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 일이라는 게 장담할 수 없다지만 지금의 자신을 그녀보다 높게 봐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녀와의 동행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지만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받은 모모카도,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은 필상도 서로 만족한 따뜻한 밤이었다.
자기 전에 온천수에 몸을 담근 필상이 일본에 온 것이 좋은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게 누구십니까?”
“야! 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냐?”
“다짜고짜 무슨 말이에요?”
“최 프로님한테 다 들었어. 너 일본에 아예 주저앉을 거라면서?”
“주저앉기는 누가 주저앉아요. 그냥 당분간 머문다는 거지. 그리고 나한테 일본이 더 낫다고 추천한 사람이 누군데?”
“내가 지금 그 말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알아! 나 당장 이번 주말에 NH투자증권 챔피언십에 나가야 한단 말이야.”
“물이 올랐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물 다 빠졌거든!”
다름 아닌 안시현 프로였다.
노련하고 멘탈도 강한 그녀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밝히는 바, 필상과 함께 하면 하루에 2타는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단다.
3라운드로 치러지는 보통의 대회라면 6언더를 기본으로 깔고 간다는 말이다. 완전히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상위권은 보장을 받기에 당장 오라고 성화였다.
상당히 주관적인 평가지만 그 말을 듣는 필상의 기분은 좋았고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한국에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나.
다음 달까지는 꼼짝할 수 없기에 여름에 한 번 호흡을 맞추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밝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
- 모모카. 이러다 연승하는 거 아닐까요?
- 지금 같은 페이스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죠. 하하하.
- 지난주에는 하타오카를 압도하더니 이번 주에는 스즈키 아이를 상대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네요.
- 자신의 장점을 아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아이언 샷의 정확도가 믿기지 않을 정도네요. 전반을 마친 현재까지 그린적중률 100%, 퍼팅이 아쉽지만 그래도 4언더 단독선두입니다.
- 미모 대결 또한 모모카의 압승이 아닐까요?
- 그건... 그건 보시는 분마다 다를 것 같아서 제가 감히 평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비겁하게 빠져 나가시네요. 하지만 저도 그 부분은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것 같기는 합니다. 하하하.
1라운드 매치업이 아주 독특했다.
주최 측에서 흥행을 위해 마련한 이벤트인양, 아웃코스 마지막 조에 편성된 세 선수의 면면이 대단했다.
지난 주 메이저대회 우승자인 미우라 모모카와 겨루는 선수는 스즈키 아이와 초청선수인 안신애였던 것이다.
데뷔 이후 5년간 투어 통산 9승, 2017년 상금왕이며 지난해에는 평균 타수와 퍼팅이 1위였던 스즈키 아이는 명실상부 일본을 대표하는 JLPGA 최강자다.
또한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실력과 미모를 겸비했다고 평가받는 안신애의 인기는 성적과 무관하게 센세이셔널 했다.
시드확보에 아쉽게 실패했으나 초청받은 것은 오로지 팬들의 성원 때문만은 아니다. 한 방이 있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모카는 시작부터 질주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마치 지난주 우승의 기세를 그대로 살린 듯 무시무시한 샷 감각을 과시했다.
“인코스는 파5 홀만 공격적으로 가자.”
“네. 코치님.”
“그거, 별로야. 그냥 오빠가 훨씬 나아.”
“‘자기’는 어때요?”
“뭐? 그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웠어?”
“검색해 봤죠. 한국어 배운다고 했잖아요.”
“너 잠은 자지 않고 늦게까지 스마트폰 만지작거렸구나!”
“공부했다니까요!”
“안 되겠다. 내가 곁에 잘 수도 없고. 앞으로 자기 전에 폰은 나한테 맡기는 거로.”
“그냥 곁에 자요. 흐흐흐...”
“절대 안 돼! 네 코 고는 소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더라고.”
‘윽!’
결국 한 방 맞고 말았다.
그저 장난처럼 복부에 지른 어퍼컷이지만 거기에 스윙의 원리를 담았는지 임팩트가 장난이 아니었다.
정말 아파서 얼굴이 발개졌는데 엄살 피우지 말라며 깔깔 대는 모모카, 이종격투능력도 갖춘 게 분명한데 그 가치는 모르는 것 같았다.
“어딜 봐요!”
“스즈키 스윙. 왜?”
오늘 모모카가 민감한 소재가 하나 있다.
바로 필드의 섹시 퀸이라고 불리는 안 프로에 대한 필상의 시선처리였다. 동반 플레이어가 어떤 스윙을 하는지 살피는 것은 캐디의 역할 중에 하나다.
뭐라도 도움이 될 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일부러 인사도 나누지 않았지만 고개라도 돌리면 여지없이 중간을 막아섰다.
“프로필이 엉터리죠?”
“그건 인신공격이야. 너도 52는 아니잖아!”
“거의 맞아요.”
“거의?”
신기하게도 필상은 모모카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녀가 민감한 부분이 뭔지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차마 kg이라는 단위는 생략했지만 169cm인 모모카가 프로필에 나온 체중을 유지해서는 힘이 실린 샷을 날리기 어렵다.
물론 과체중도 악영향을 미치지만 좋은 샷을 날리기 위해서는 최적의 체격도 필수인데, 스즈키 아이는 작은 신장을 극복할 수 있는 탄탄한 체격이었다.
155cm, 55kg. 여성인 이상 프로필은 진실이기 힘들다.
“뭐가 문제인 것 같아요?”
“네가 보기엔 어때?”
앞선 자의 여유라고나 할까?
모모카는 스즈키 아이의 스윙에 대한 필상의 의견을 물었다. 이건 캐디가 아니라 코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에 필상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스윙, 흠 잡을 데는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은 것뿐이죠!”
“하산해도 되겠네. 하하하.”
“아이가 대부분 컨트롤 샷을 하잖아요. 저걸 배워야할 것 같아요. 다행히 내 코치님이 그게 전문이거든요.”
“오케이. 접수 완료!”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