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27- 정확히 보내면 장땡
“모모카. JGTO에 합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오빠? 정말 일본투어를 뛸 거예요?”
“응. 어차피 난 맨바닥에서 출발해야할 입장이잖아. 기왕이면 규모가 큰 일본이 기회도 훨씬 많을 것 같아서.”
사실 모모카에게 해법을 구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적당한 화제를 꺼내 그녀의 긴장을 풀고자 의도한 것일 뿐.
자신이 투어프로라도 남자투어에 대한 지식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그 말에 표정이 밝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솔직히 필상도 감히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녀와 조금 더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픈 마음이 없지 않다는 점.
“음... 생각만 해도 좋네요.”
“너 좋으라고 일본에 머문다는 말은 아니고. 네 생각에 내가 경쟁력은 있는 것 같아?”
“그건 나도 모르죠.”
“어라?”
“걱정 말아요. 내가 먹여 살리면 되니까!”
“야!”
“왜요?”
하도 기가 막혀 한국말이 튀어나왔는데 그걸 그냥 받아치는 모모카를 어찌 할 도리는 없었다.
증상이 날로 심각해진다는 생각, 그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자신의 내부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을 뿐.
“퍼팅이 말을 안 들어요.”
“괜찮아. 충분히 잘 하고 있어.”
화제를 바꾼 뒤 평정심을 찾은 모모카는 보기와 버디를 맞바꾸며 11, 12번 홀을 무난하게 넘겼다. 안선주가 2타차로 쫓아왔지만 190야드의 긴 파3 홀에서 온 그린에 성공하며 기세가 꺾이지 않았음을 당당히 고했다.
하지만 멋들어진 아이언 샷을 터트린 모모카가 안타깝게도 쓰리퍼팅을 하며 타수를 잃고 말았다. 울상인 모모카의 표정,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아니던가!
가슴이 쓰라렸지만 감정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비슷한 거리를 남긴 안선주가 노련하게 핀에 붙여 파로 막아내면서 턱밑까지 추격한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역할이 절실했다. 핸디캡 1번인 14번 홀에 들어섰다.
- 승부가 갑자기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군요.
- 그렇습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하타오카와는 달리 소리 소문 없이 5타를 줄인 안선주의 견고한 플레이와 강렬한 카리스마를 극복하기란 쉽지가 않을 겁니다.
- 모모카의 플레이도 사실은 크게 나쁘지 않았어요. 라스트 라운드에서 2언더를 치고 있거든요!
- 그렇기 때문에 안선주가 대선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녀는 오늘 일본의 젊은 두 기대주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느긋하게 플레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렇다면 결국 모모카의 꿈은 이뤄질 수 없는 건가요?
- 스스로 이겨내야만 합니다. 스트로크 경기지만 우승경쟁을 중인 챔피언 조는 매치플레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아직 자신이 앞서고 있다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필상도 같은 생각이다.
기분 좋은 이야기로 압박감을 해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본인에게 닥친 상황을 스스로의 의지로 돌파해야만 한다고 판단한 필상은 모모카와 정면 돌파하기로 작정했다.
“모모카. 정신 차려.”
“저도 집중하고 싶어요.”
“알아. 하지만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잡다한 생각과 불안한 예측이 아니야. 한 샷 한 샷의 결과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최적의 이미지를 그려내야 해.”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데 그게 가능할까요?”
“그게 아니야. 네 단련된 몸은 생각을 따를 거야. 네가 정확한 이미지를 그려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
필상은 보다 적극적인 진단을 내렸다.
지금 모모카가 흔들리는 것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다. 감정이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확신 없는 결정이 평소와 다른 스윙을 도출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감정은 사람이 스스로 조절하기 어렵지만 생각은 얼마든지 강한 의지로 대체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 의지에 자신이 온기를 불어 넣으면 되는 것이다.
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 필상이 드라이브를 건네주고 갑자기 기초적인 연습을 주문했다. 바로 래깅(lagging)이다.
래깅이란 백스윙 톱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자세를 다운스윙 때 그대로 끌고 내려오는 일련의 연습동작을 말한다. 주로 슬라이스 샷을 교정하는 요령으로 쓰이는데, 필상은 래깅을 통해 이미지를 보다 세밀하게 그려보라는 의미였다.
“천천히, 천천히 샷의 결과를 그려봐.”
“네.”
잡념을 떨치고 오로지 샷에만 집중해야 한다.
수많은 팬들의 기대와 열망이 지금은 가장 큰 장애였다. 작은 동작 하나에도 큰 반향이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뒷면에 그려지는 그림자가 싫다고 아예 햇빛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빈 스윙을 여러 번 해도 이미지가 완성되지 않기에 그 동작을 더 세분화시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다행히 래깅을 반복하던 모모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자신의 스윙에 서서히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 숲을 넘기자.”
“좋아요!”
405야드의 14번 홀이 까다로운 것은 오른쪽으로 살짝 휘는 도그렉 홀이라 페어웨이 좌측의 벙커가 부담스러운데다가 코스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숲이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비거리가 짧은 선수는 아예 3온 1퍼팅 작전을 설계하기도 한다. 그런데 앞선 안 프로의 티샷이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홀 모양을 그대로 따르는 페이드 샷을 의도했는데 회전이 걸리지 않은 결과, 벙커에 빠졌고 턱에 걸려 다시 떨어졌다.
그렇다면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필상은 과감한 공략을 주문했고 모모카는 동의했다.
래깅을 반복하면 자연스럽게 드로우 구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모든 두려움을 이 한 방에 실어 날려 보내고 싶었다.
“까앙!”
정확한 인아웃 스윙이 이뤄졌다.
무섭게 돌아간 헤드의 스윗 스팟에 맞은 공은 까마득히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비명이 터졌다.
악성 푸시가 난 것처럼 공이 너무 우측으로 날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높은 나무의 끄트머리에 살짝 부딪치기도 했다.
심장이 날뛰어 숨을 쉬기 어려웠다. 지루할 만큼 오래 창공을 가른 공은 여전히 숲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점에 다가가는 순간부터 휘기 시작하더니 하강할 때는 마치 롱 훅을 먹인 볼링공처럼 미친 듯이 좌측으로 휘었다.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공이 떨어진 지점은 우측 숲을 겨우 지난 지점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굿 샷이야!”
“정말이야?”
“응. 아마 페어웨이까지 굴러들어갔을 거야.”
그 말을 건넨 이는 뜻밖에도 안선주였다.
사실이라면 절대 전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티잉 그라운드를 내려오는 모모카에게도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지존의 여유인가?
부지런히 달려가 공의 위치를 확인하려던 필상은 얼마 가지 않아 속도를 늦췄다. 도그렉 방향이 확보되자 새하얀 모모카의 공이 또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페어웨이 정중앙이야!”
“흐흐흐... 얼마나 날린 거죠?”
“290?”
그야말로 통한의 샷이었다.
내리막도 아닌 홀에서 290야드는 남자프로들이나 때리는 거리다. 하지만 기가 막힌 드로우 구질은 캐리만 250야드를 훌쩍 넘겼고 엄청난 런까지 덤으로 선사했다.
훌륭한 매너를 보였지만 안선주의 세컨샷 포지션은 레이업 외에는 다른 시도가 허용되지 않았다. 모모카의 티샷이 워낙 좋았기에 무리해서라도 2온을 노리고 싶었을 것이나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음 샷이 편한 위치로 퍼 올렸다.
“117야드야.”
“피칭 주세요.”
래깅에 재미를 붙였는지 편안해 보이는데도 모모카는 래깅과 빈 스윙을 반복하며 핀의 위치를 여러 번 확인했다.
본인의 샷 이미지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판단한 필상은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
“드로우 컨트롤 샷?”
“아니요. 똑바로 핀을 노릴 거예요.”
“오케이!”
필상의 조언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샷을 말하는 모모카를 보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 굿 샷! 핀을 바로 노렸네요?
- 박수를 부르는 훌륭한 컨트롤 샷이었습니다. 피칭 웨지로도 저렇게 스핀을 먹일 수 있는 기량, 아직 홀이 남았지만 모모카의 우승 확률이 확 치솟았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 어? 천하의 안선주도 저런 실수를 하는군요?
- 묘한 상호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려운 홀에서 그녀는 아마 동점이나 역전까지도 염두에 뒀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에 모모카가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버디 기회까지 만들었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요.
- 진한 인간미가 느껴지네요. 하하하! 그래도 아직 칩인 파가 남았으니 함께 지켜보시죠.
모모카의 선전은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일본 골프계 입장에서는 날로 투어 장악력을 높여가는 한국선수들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한지 오래다.
그러나 정당한 승부에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 무서운 추세로 세계 여자골프계를 휘어잡는 한국을 보며 절치부심했다.
어린선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고 가능성을 보인 신예선수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시아 최고 투어라는 자부심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 결과 황금세대라 불리는 젊은 스타들이 부각되었지만 아직은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한국선수들의 월등한 기량을 따라잡기에는 무리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그래서 미모와 실력까지 갖춘 모모카의 우승은 그저 단순한 1승이라고 볼 수 없다. 그녀의 우승이 가져올 파급효과까지 고려하면 대놓고 응원을 해도 시원찮은 게 현실이다.
“로브 샷이 완전히 예술의 경지로군!”
“탱큐!”
3온에도 실패했지만 안선주는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
거친 러프에 잠긴 공을 정확히 걷어내 핀에 붙이는 기술은 쉽게 흉내 내기 힘든 고절한 경지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필상의 찬사에 쓴웃음을 보인 그녀는 흥미로운 눈길로 모모카의 버디퍼팅을 바라봤다. 오늘 모모카의 퍼팅감이 좋지 않은 것을 알기에 버디만 아니라면 아직은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긴장을 이긴 모모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정확한 라이를 따라 굴러간 공이 청명한 소리를 만드는 순간, 오늘 승부의 8부 능선은 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둘이 굉장히 친해 보이죠?”
“일을 할 때도 공 프로의 인기는 말릴 수 없을 지경이었죠. 특히나 아줌마부대의 부킹전쟁 때문에 예약데스크 직원들이 골머리를 싸맬 정도였으니까.”
“하기야 투어프로도 만족할 솜씨인데 당연하겠네요.”
“어디 실력 때문일까요?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추파를 던진 여인네들이 숱할 겁니다.”
사실을 언급했음에도 최 프로는 뜨끔했다.
이보영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녀의 관심도 온전히 순수하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
자신이나 필상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제안이 고맙고 반갑지만 그저 라운드 한 번 같이 한 인연 때문에 햇병아리를 지원한다는 것은 이 계통의 통상적인 흐름과 맞지 않다.
그런데 이 대표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최 이사님은 공 프로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세요?”
“음... 적어도 투어에서 버틸 기량은 된다고 봅니다. 조금 더 가다듬으면 연간 1승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과는 좀 다르네요.”
“골프를 시작한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전 최경주 프로 이상 가는 아주 좋은 선수가 될 수도 있다고 봐요.”
“네?”
최인환 프로는 깜짝 놀랐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자신이 과한 평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보영은 필상의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제가 사람 보는 안목이 좀 있잖아요.”
“그야 이미 업계에 두루 정평이 나 있죠. 그것 때문에 J&L이 단기간에 최고로 급성장한 것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 공 프로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은 선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일본까지 날아온 거고요.”
뜻밖의 속내를 털어 놓는 이 대표의 말에 최 프로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특이한 능력은 자신도 익히 들어봤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무당도 아니고, 그냥 한 번 동반 라운드를 한 것으로 프로선수를 평가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도 필상의 경기나 샷을 본 게 아니다.
훌륭한 캐디로 활약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게 자신의 기량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가 골프를 잘 치지 못하는 거 아시죠?”
“하하. 못 치시는 건 아니죠!”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공 프로와 극과 극이죠.”
“그렇게 볼 수도 있나요?”
“하지만 골프의 본질은 알아요. 원하는 곳에 공을 정확히 보내면 장땡인 운동이잖아요.”
“하하하. 그건 틀림이 없지요.”
“전 공필상씨보다 공을 잘 다루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대표님은 PGA 경기 직관도 많이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더 놀랍죠.”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