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6화 (26/354)

ILG026- 해맑은 영혼

“동반 플레이어들이 만만치 않더군!”

“하타오카보다 안선주가 더 걱정이에요.”

“걱정하라고 꺼낸 말은 아닌데?”

“그쵸? 저는 오늘 제 플레이에만 집중하려고요.”

[-9 모모카/ -7 하타오카/ -6 안선주]

그 밑으로는 4언더라서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지만 함께 경기할 2위와 3위는 그야말로 거물급이었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2016년 일본여자오픈을 우승한 하타오카 나사는 모모카와 또래였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맞은편에서 연습하는 그녀를 가리켰다.

“저기 쟤가 하타오카에요.”

“봤어. 미야자토 아이의 후계자라더니 그건 아닌 것 같아. 스윙이 아주 힘차고 간결하더군!”

“저랑 비교하면 어때요?”

심히 당황스러웠으나 필상의 대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모모카, 네가 훨씬 낫지. 파워도 정교함도 모두.”

“흐흐흐... 정말이죠?”

“물론이야. 성적이 말해주잖아.”

자그마하지만 단단한 하체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샷은 마치 신지애를 보는 것 같았다. 그다지 예쁘지 못한 스윙을 지닌 미야자토와 연관을 짓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판단했다.

아마도 미야자토처럼 좋은 성적을 바라는 소망이 담긴 표현 같은데, 한국에는 그 정도 선수가 넘쳐 나지 않던가!

“우리도 이제 슬슬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네. 전쟁터로 나가야죠.”

어느새 하나둘 빠져나간 연습장에는 챔피언 조의 선수들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가다말고 안선주와 마주쳤다.

그런데 모모카가 먼저 조르르 달려가더니 안 프로에게 반색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도 환하게 웃으며 받아줬고.

안선주는 87년생으로 필상과 같은 나이다. 99년생인 모모카나 하타오카와는 띠 동갑인 셈이다. 필상도 인사를 나눠야했지만 어제의 일이 생각나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기대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언니. 혹시 제 캐디 알아요?”

“응? 한국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그런가?”

“네. 맞아요. 오빠, 안 프로랑 인사 안 해요?”

“호호호. 오빠?”

모모카의 호칭이 한국어였던 것이다.

일본어로 대화하던 중에 불쑥 오빠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시선이 마주친 안 프로가 확대해석하려는 것 같아 필상은 서둘러 나서야만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 프로님.”

“제가 설마 누나는 아니죠?”

초면에 나이부터 따지는 한국인의 특성은 굉장히 독특하다.

그래도 여성들은 덜한 편인데, 다짜고짜 위아래를 따지려는 것 같은 그녀의 태도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성격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객지에서 만난 관계가 각별하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어 필상은 순순히 대답했다.

“우리 셋 다 토끼띠입니다.”

“어머! 그럼 우리 친구네? 반가워! 근데 이름이?”

“필상. 공필상이야.”

또래라고 밝히자 바로 말을 편하게 하는 그녀에게 필상도 격을 맞췄다. 그리고는 재미있다는 듯 같이 웃었다.

나눈 대화가 한국어였기에 곁에 선 모모카의 표정에 묘한 감정이 스치는 것 같아 필상은 슬그머니 빠졌다.

“너 설마 이 꼬맹이 눈치 보는 거야?”

“응. 얘 성격이 장난이 아니거든. 그래도 아주 착해.”

“어라?”

“하하하. 여하튼 오늘 즐겁게 라운드 하자고.”

“그래. 수다 떨 친구가 있어 나도 좋네!”

웬일인지 모모카가 닦달하지는 않았다.

어제 윤채영과 몇 마디 나눈 것 가지고는 쌍심지를 켜더니 아무래도 유부녀인 그녀는 편한 게 아닌가 싶었다.

JLPGA에서 활약한 9년 동안 무려 28승을 거뒀으며 상금왕도 4번이나 차지한 안선주를 JLPGA의 절대강자로서 인정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야. 하타오카를 견제하는 건지도 모르지.’

떠들썩한 일행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하타오카의 표정이 시원찮은 걸 보며 그런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순진한 것 같은 모모카에게 이런 구석도 있었나 싶었다. 그런데 연습장을 벗어나자 다시 발길을 잡는 사람을 만났다.

“최 프로님.”

“이야! 우리 공 프로, 얼굴 한 번 보기 정말 힘드네.”

“제 상황을 잘 아시면서.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대략 감을 잡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고운 중년여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젠 그녀가 누군지 잘 안다. J&L의 이보영 대표.

“우리 오랜만이죠?”

“아, 네.”

“바쁠 텐데 끝나고 식사나 같이 해요.”

“그러시죠. 티오프 시간이 다 돼서 저는 이만.”

왜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르겠다.

반갑기도 했고 괜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필상의 붉어진 얼굴을 확인한 모모카의 시선이 이 대표를 쓱 한 번 훑고 지나가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필상의 지인이면 인사를 할만도 한데, 최 프로에게는 깍듯했던 모모카가 그녀에게는 목례조차 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 싸한 분위기가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 염려된 필상은 굉장히 억울했지만 서둘러 수습에 나서야 했다.

“모모카. 우리 오늘 우승하면 같이 바람 쐬러 갈까?”

“정말이죠?”

“우승하면!”

문득 떠오른 즉흥적인 제안이지만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금방 활짝 웃는 녀석의 모습에 모든 시름이 일거에 걷혔다.

바람 쐬러 어디로, 얼마의 일정으로 갈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일단 우승부터 하고난 뒤에 고심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실수했다는 느낌이 조여 왔다. 재잘재잘 가고 싶은 곳을 얘기하는 모모카의 집요함, 무서웠다.

“모모카. 샷에 집중해야지!”

“당연하죠! 우승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서 좋아요. 흐흐흐.”

“어서 나가!”

그녀를 소개하는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으며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서는 그녀, 긴장은커녕 팬들의 사랑을 담뿍 즐기는 모습이었다.

오늘 그녀의 패션 컬러는 블랙 앤 핑크였다.

검은색 타이트한 폴라 티셔츠에 검정 롱 스타킹은 늘씬한 몸매를 여실히 보여줬고, 그 위에 입은 핑크색 핫팬츠는 그녀가 완성한 패션의 포인트였다.

하얀 모자와 골프화에도 핑크빛 무늬가 새겨져 마치 골프웨어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했다.

“광고주가 줄을 서겠어.”

“본질이 그게 아니잖아. 메이저 퀸 타이틀까지 거머쥐면 더 없이 좋을 텐데.”

“가능할 것 같아?”

“응. 충분히.”

“하기야 샷은 괜찮더라.”

“쉿!”

안선주와 나지막하게 속삭이던 필상에게 루틴을 밟아 나가던 모모카의 시선이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싱긋 웃은 그녀는 침착하게 어드레스에 들어섰고 모든 걱정을 날려 보내는 호쾌한 드라이브 티샷을 선보였다.

겉으로는 전혀 긴장하거나 흔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알 수 없었던 필상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굿 샷!”

“흐흐흐... 오키나와 어때요?”

“집중!”

“집중은 샷을 할 때만 하면 되죠. 계속 집중하면 머리 아프다고요.”

“그런가?”

대회가 치러지는 한 라운드는 4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집중하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모모카가 원하는 화제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는 너무 멀다는 둥, 도쿄 인근에 조용한 곳은 없냐는 둥, 고문 아닌 고문의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모카가 이 험난한 최종라운드를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 단독선두 모모카. 한층 성숙한 기량을 보여줍니다.

- 지난해에도 반짝 빛나는 성적을 보여주기는 했죠? 하지만 늘 뒷심이 약했는데 올해는, 특히나 이번 대회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거죠?

- 투어에 적응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스윙이 훨씬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말에 한국 투어에 다녀온 뒤, 본인이 인터뷰 했던 것을 참조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저는 금시초문이라... 그 당시 뭐라고 했었나요?

- 본인의 부족함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운을 탓하거나 환경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연습에 매달리겠다고 하더군요.

- 어린선수들은 대개 그런 각오를 밝히지 않나요?

- 그것과는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본인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 인정하지 않거든요. 진심에서 우러난 고백, 그걸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하튼 올 시즌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니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을 것 같기는 하네요.

1, 2번 홀을 파로 막아낸 모모카의 첫 버디는 3번 홀에서 나왔다. 520야드의 파5 홀에서 2온 시도를 했지만 짧았다.

그러나 침착하게 칩샷을 핀에 바짝 붙여 탭 인 버디로 연결한 과정은 아주 깔끔했다. 지난 이틀간 연습한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모모카도 아주 만족스러웠는지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아름다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숏 게임에 자신감이 붙어서 그런지 아이언도 훨씬 부담이 적은 것 같아요.”

“좋아. 이대로 쭉 달리자고.”

안선주가 1, 3번 홀에서 2타를 줄이며 추격을 시작했지만 모모카는 동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아이언 샷에 부담을 덜었다더니 이어진 4, 5번 홀에서 연이어 온 그린에 성공했다.

4번 홀에서는 홀컵이 외면했지만 파5 홀인 5번 홀에서는 이글찬스를 맞이해 팬들의 비명을 자아내는 퍼팅에 성공했다.

앞선 62명 중에 이글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홀에서 단독선두인 모모카가 쐐기를 박은 것이다.

홀컵에 빨려 들어가는 공을 보며 두 팔을 번쩍 치켜 올린 모모카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에 필상은 난감했다.

미리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밀어 철통방어에 나서지 않았다면 저녁 스포츠 1면에 나올 고혹적인 장면이 나왔을지도.

- 와! 모모카의 아이언 샷이 정말 정확하네요.

- 보통 이글을 잡으면 다음 홀에서 그 흥분이 가시지 않은 대가를 치르는데, 확실히 모든 면에서 성장한 것 같습니다.

-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모모카의 캐디가 잘 생긴 외모 말고도 대단한 능력자라던데, 혹시 들으신 게 없으신가요?

- 저도 궁금해 한국의 지인에게 물어봤는데, 지난주에 한국투어 메이저대회의 우승자도 그가 캐디를 봤다고 하더군요.

- 그렇다면 그저 운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 그렇습니다. 정식 프로자격을 갖췄고 지난해 모모카가 한국투어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도 그가 도왔다고 하는 걸 보면 능력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눈 중계진의 대화는 필상의 존재가 한국보다 먼저 일본 골프계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직업에 대한 인식에 편견이 적다. 귀천을 따지지 않는 경향이 훨씬 강하고 무엇이든 전문성을 가지면 높이 산다.

일본 투어에 활약하는 외국인 캐디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한국출신은 처음이었기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경기를 치르고 있는 필상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사실이었고 아쉬워하는 선수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하라 에리카, 작년에 한국투어에 초청받았으나 필상과 조인이 되지 않아 불참했던 그녀도 이번 대회에 참가했던 것이다.

“좌측 홀컵 안쪽을 보면 될 것 같아.”

“과감하게 치면 되죠?”

“응. 좀 늦어도 괜찮으니까 확고한 이미지가 그려지기 전에는 스트로크를 하지 마.”

“알았어요.”

“그래도 불안하면 조금만 더 공을 노려봐.”

“그런 코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요?”

“한참 노려보면 자연스럽게 상체가 조금 더 숙여지거든.”

“아!”

“그렇다고 일부러 숙이지는 말고.”

180야드의 파3, 8번 홀 퍼팅을 남긴 상황이다.

7번 홀까지 3타를 줄여 공동 2위와의 격차를 3타차로 벌였지만 필상은 아직 배가 고팠다. 만족한 모모카와는 달리 더 줄일 수도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이언이 팍팍 꽂히는데 퍼팅이 따라주지 못했다. 이글 퍼팅 하나는 아주 훌륭했지만 3, 4m 버디를 3개나 놓쳤다.

큰 실수가 없는 가운데 퍼팅 하나에 추격자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해결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퍼팅 스탠스를 취한 모모카는 평소보다 훨씬 오래 버티다 스트로크를 했다. 큰 원한이라도 품은 것처럼 공을 노려보다가 과감하게 밀었다.

‘으으으...’

과감한 것은 좋지만 너무 강했다.

만약 들어가지 않는다면 홀컵을 훅 지나가 부담스러운 2m 퍼팅을 남길 것만 같았는데, 뜻밖의 결과가 튀어나왔다.

필상이 라이를 잘못 본 경우는 드문데, 빠질 것 같던 공이 홀컵 뒷벽을 세게 때리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극적인 버디에 환호성이 그린을 흔든 것은 물론이다.

안선주도 버디를 잡아 3타차를 유지했지만 보기라고 했더라면 1타차로 위기를 맞을 뻔 했던 고비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후반에 접어들자 모모카의 말수가 확연히 줄었다. 이미 혼자서 일본을 대표하는 여행지를 다 돌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고지가 눈앞에 다가오자 무거운 중압감이 그녀의 해맑은 영혼까지도 온통 휘어감은 것이다.

그녀의 관심을 돌릴 획기적인 화제가 필요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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