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25- 넘볼 걸 넘봐야지
“연습하러 가야지.”
“그래요. 연습해야죠. 내가 꼭 우승해서 오빠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 거에요.”
“네가 우승한다면 나야 더 없이 좋지.”
그래야 보너스를 듬뿍 받는다는 의미인데, 그 말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연습 내내 신이 난 모모카, 순진한 모습에 괜히 미안했다.
하지만 우승상금이 자그마치 2,400만 엔이다. 우승할 경우 보너스가 20%인 까닭에 필상은 480만 엔(대략 5,000만원)을 번다. 오자마자 그런 거금을 손에 쥔다는 생각을 하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다.
“20야드.”
“정확하잖아요.”
“아니야. 경기 때처럼 빈 스윙을 하고 똑같이 쳐야지.”
야외 어프로치 연습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필상은 집요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자율적인 연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치는 것은 연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리를 불러주고 실전과 동일한 루틴을 밟으며 치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일정한 거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길고 짧은 폭이 필상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지금 장난하는 거지?”
“3야드 안팎에 붙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3야드 퍼팅 성공률이 100%라면 상관없지. 그래?”
“치!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요. 그렇게 잘 하면 직접 보여주든지!”
마지막 말은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코치와 실전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연구 개발자와 전문 경영인의 영역이 서로 다르듯, 그녀처럼 보여 달라면 어느 프로가 레슨을 받겠는가!
지구최강이라던 우즈를 가르칠 사람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백에서 갭 웨지를 꺼내 들고 다가왔다. 프로가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실력은 알 수 없었던 모모카도 눈을 반짝이며 지켜봤다.
“샷 하나 하는데 준비시간이 뭐 이렇게 길어요?”
“몸이 안 풀려 이미지를 그리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그냥 농담조로 던진 말에도 필상의 대답은 진지했다.
익숙한 자신의 클럽이 아니어서 당연하겠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계속 반복적인 빈 스윙을 시도하는 필상의 태도에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실제 3분 정도가 흘렀으나 기다리던 모모카에게는 정말 지루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첫 샷부터 시작해 다섯 번의 칩샷 결과가 모두 직경 1야드 안에 모인 것을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다시 빈 스윙을 하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뭐가 문제죠?”
“탄도가 들쑥날쑥하잖아.”
“기가 막혀서. 어디 더 해 봐요.”
다시 방향을 바꿔 다섯 번의 칩샷을 했는데 결과는 비슷했다. 하지만 일정한 탄도를 형성한 것은 분명히 달랐다.
중요한 것은 그 어프로치들이 모두 퍼팅에 성공할 거리라는 점이었다. 어려서부터 골프를 했던 모모카는 수없이 많은 연습을 했고 다른 선수들의 기량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필상이 보여준 능력은 분명히 각별했다.
“미켈슨이 울고 가겠네요.”
“아니야. 프로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실전도 아닌 연습에서마저 일관성이 없다면 어떻게 안심하고 경쟁할 수 있냐고.”
“그런 건가요?”
“어서 준비해.”
모모카는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한 요구였지만 보여 달라는 대로 보여줬기 때문에 당신이 특별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태도는 아주 바람직한 했다.
이론이나 방법을 모른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그렇다고 볼 여지는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건 집중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5야드.”
“네!”
“누가 컷 샷(클럽을 열고 아웃인의 궤도로 치는 샷, 그린에 바로 세울 때 구사)을 하래. 그냥 칩 샷을 해! 동일한 탄도를 유지하라고!”
“으으으... 악마!”
“고마워. 하지만 잡념은 버리고 집중해.”
20야드에 적응하자 필상은 25야드를 요구했고, 적응하면 또 30야드, 그렇게 거리를 늘려가며 40야드까지 늘렸다.
공을 스무 개 들고 나왔는데 몇 번이나 자리를 옮기며 쳤는지 모르지만 어느새 어두컴컴해 졌다.
“저녁 먹으러 가요.”
“조금 더. 감이 왔을 때 완벽하게 몸에 담아야지.”
“배고픈데...”
“배고프다고 쓰러지지 않아. 비축한 지방도 많으면서.”
“뭐라고요!”
“30야드.”
“흐흐흐... 알았어요.”
툴툴거렸지만 모모카도 어느 순간부터는 연습을 즐기고 있었다.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샷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몇 시간 만에 샷을 몸에 배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준비된 그녀의 기량을 뽑아내는 것일 뿐이다. 달라진 것은 자신감일 뿐이지만 그 결과는 3라운드에 임한 모모카에게 최고의 라운드를 선사했다.
[미우라 모모카, 월드 레이디스 챔피업십 단독선두!]
[데일리베스트 6언더, 폭발한 모모카의 신들린 샷!]
[드디어 첫 승인가? 2타차 단독선두에 나선 모모카]
[모모카의 하루! 모든 샷, 모든 행동 정밀분석]
성적에 대한 찬사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모든 샷을 분석할뿐더러 오늘 입은 패션부터 시작해 홀마다 취한 특이한 표정과 몸짓까지 모두 화보처럼 꾸민 기사는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그걸 보며 시시덕대는 그녀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얼른 먹어. 연습하러 가야지.”
“에이 진짜! 아직 밥도 다 못 먹었다고요.”
“그건 내일 봐. 우승한 뒤에.”
“그쵸? 흐흐흐. 하지만 이건 오빠도 봐야 해요.”
모모카가 펼쳐준 페이지에는 그녀와 나란히 선 채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기자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만큼 멋진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하지만 그걸 보고 같이 희희낙락할 생각은 없었다.
목표가 너무도 뚜렷했고 자신은 아직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댓글이 장난 아니에요.”
“그만하지.”
하지만 그녀는 이동하는 내내 그걸 읽어줬다.
- 너무 잘 생긴 거 아냐? 혹시 모델?
- 모델치고는 일 너무 잘 함... 환상 호흡이더군!
- 한국 출신 캐디라던데?
- 어? 안 돼. 캐디마저도 한국의 프로들이 진출한 건가?
- 모모카가 우승한다면 난 아무래도 오케이!
- 난 반대일세. 아무리 일 잘 해도 모모카 제발 돌아와!
- 선남선녀네. 왠지 묘한 분위기?
- 설마 아저씨를 좋아하려고? 쓸데없는 걱정...ㅋㅋ
- 그를 향한 모모카의 활짝 핀 미소, 질투가 나를 불태운다!
일부러 짓궂은 댓글들을 찾아 한참 더 읽었다.
하지만 필상은 미우라에게 직접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말을 들었고 잘 돌봐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예쁘고 깜직한 여인에게 끌리지 않는 남자는 없다. 성기능 장애도 아니며 적극적인 행동을 보할 때는 멍해지기도 한다.
그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에 애써 뿌리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녀 사이에 나이는 장벽이 될 수 없으며 국경도 의미 없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의 인연은 자제하는 것이 옳다. 그녀에 비하면 자신이 너무 볼품없다는 생각도 하지만 오로지 골프 한 길만 걸어온 어린 그녀의 다가올 많은 기회를 자신이 가로채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탄도를 띄우는 어프로치를 연습해 봐요.”
“아냐. 꼭 필요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만 어제 느낌을 더 확실하게 몸에 익히게 나을 것 같아.”
“좋아요.”
“조금 더 런이 많은 샷을 가다듬자. 칩 앤 런(뒷핀일 때 살짝 띄워 많이 굴리는 샷) 어때?”
“좋아요. 피칭 주세요.”
칩 앤 런은 다양한 클럽을 사용할 수 있다.
떠서 날아가는 거리보다는 굴리는 거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사전에 연습을 통해 미리 정확한 계산을 끝내고 그에 맞는 클럽의 선택이 필요하다.
“피칭의 칩과 런의 비율이 어느 정도지?”
“음... 1:1?”
“좋아. 그걸 생각하면서 쳐 봐.”
하지만 모모카의 표정은 금방 붉어졌다. 자신이 말한 비율이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거리가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아마추어들은 공이 그린 주변에 떨어지면 아무 생각 없이 웨지를 들고 간다. 하지만 유명한 골프 격언은 말한다.
[굴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최대한 굴려라!]
굴리지 못하는 선수가 띄우려는 것은 마치 걷지도 못하는 아이가 뛰고자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공을 굴리는 원리에 대한 이해가 골프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오빠가 시범을 좀 보여줘요.”
“시범? 이건 시범을 보일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이에요?”
“넌 이미 칩 앤 런에 대한 연습을 충분히 해봤을 거야.”
“그렇죠.”
“중요한 것을 잊은 것 같아.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 보이지 않고 더 절실한 것은 샷의 결과에 대한 깊은 고찰이 아닐까?”
“생각을 깊이하고 샷을 하란 거죠?”
“어프로치는 그냥 감각에 맡길 문제가 아니야. 특히나 프로는 감이 떨어졌다는 말로 변명할 수 없다고 생각해.”
아마추어들은 요즘 감이 떨어졌다는 말을 흔히 한다.
연습부족이 가장 큰 원인인데,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며 때가 되면 좋았던 감각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정말 큰 착각이다.
행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윙이 조금 바뀌며 어프로치가 좋아질 수는 있으나 대부분 다른 샷에 문제가 발생한다.
서로 다른 원리를 이해하고 각기 달리 몸에 익혀야 하는데, 모든 스윙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오만이며 심각한 오류인 것이다.
모모카는 이미 적절한 스윙을 익혔고 구사할 수 있다. 단지 스스로 샷에 대한 확신 없이 시도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와우! 되요. 정말 되네요!”
“네 피칭의 탄도는 칩과 런의 비율이 1:1이 아니라 10:8이라고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 같은 로프트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말이죠?”
“응. 지금 당장 스윙을 바꿀 생각을 하지 말고 네 샷에 대한 해석을 바꾸는 게 현명하다고 봐.”
“사랑해요. 오빠!”
“으흐! 나 먼저 들어갈까?”
“치!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뭘 너무해! 넘볼 걸 넘봐야지!”
“아! 약 올라!”
어림도 없는 말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 그게 당면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체득한 순간이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연습에 몰두하는 모모카를 보며 뛰던 가슴을 겨우 쓸어내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골프에 대한 이론이 더욱 굳건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연습보다 실전이 중요하고 실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생각하는 골프였다.
다행히 자신은 스스로의 샷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갖춰져 있었다. 남들보다 일관성이 높은 것이 남다른 노력과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불운했던 과거를 보상해 주는 축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로프트가 극단적인 수직이라도 퍼터처럼 밀지 않고 퍼 올리는 스윙을 하면 공은 뜰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겠지요.”
“일정한 힘이 가해진다는 가정 하에 탄도와 런의 길이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로프트 각도일 거야.”
“헤드의 무게가 각기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일관성의 유지가 절대적이고 각각의 특성을 파악해 미리 각본처럼 짜놔야 한다는 거지.”
“일관성은 제가 유지할 테니까 각본은 오빠가 써줘요.”
“이미 열심히 입력 중이니까 넌 기계처럼 집중이나 잘 해.”
“이렇게 귀여운 기계가 어디 있다고. 히히히...”
“어허! 병원 갈 시간 없어.”
“오빠!”
*
“역시 메이저대회답네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공 프로를 대체 어떻게 찾죠? 어서 전화라도 좀 해 봐요.”
“한창 바쁠 텐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디 있는지는 제가 뻔히 아니까요.”
“연습장?”
“네. 그 친구는 움직이는 시계거든요. 하하하.”
“혹시 우리가 갑자기 나타난 걸 싫어하지는 않겠죠?”
“왜 싫어합니까. 자기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인데.”
“우리 회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면서요?”
“거절한 게 아니라 사양한 거라고 봅니다. 분에 넘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요즘 그런 생각을 하는 선수가 없는데.”
이바라키 골프클럽에 나타난 두 중년 남녀는 페럼CC 기술이사인 최 프로와 J&L의 이보영 대표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일본이라는 것을 잘 아는지 짐도 없이 가벼운 복장이었다.
직원에게 드라이빙 레인지의 위치를 확인한 둘은 곧 필상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대회 때문에 연습장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이라면 갖은 영향력이 발휘되었을 것이나 이곳은 그게 통하지 않는 일본이었다.
게다가 단독선두에 나선 모모카의 스윙에 집중하는 필상을 부르는 게 실례처럼 느껴져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