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24- 여동생처럼
동반 플레이를 펼치는 한국선수, 윤채영이다.
재작년 JLPGA 투어에 합류한 그녀는 2018년 우승은 없지만 탑 10에 무려 11번이나 들어 상금순위 17위를 기록했다.
오늘 함께 경기할 선수 중에 한국프로가 포함된 것을 확인한 필상은 검색해 봤었다. 흥미로운 포인트도 보였다. 2005년에 데뷔한 그녀는 필상과 동갑인 1987년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력보다는 팔등신 미녀골퍼로 더 유명하다는 점이 특이했는데 성적이 말해주듯이 안정적인 플레이가 돋보였다.
특히나 큰 신장에서 터지는 부드러운 스윙이 일품이었다.
경기 시작 전, 살짝 목례만 나누고 말았는데 그녀가 필상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저냥 대화만 통하는 수준입니다.”
“그런 것 같지 않던데, 이제 일본투어에 선수만 진출하는 건 아닌가 봐요.”
“모모카와 개인적인 인연이 좀 있어서요.”
“아! 보기 드문 케이스네요.”
바짝 다가온 그녀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으나 상대해 줄 수가 없었다. 모모카의 새침한 표정을 봤기 때문이다.
씩 웃으며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았다.
삐친 듯 말이 없더니 그린 주변에 오자 한 마디 툭 던졌다.
“나보다 더 예뻐요?”
“무슨 소리야? 한국선수라서 그냥 인사만 나눈 거야.”
“이보미, 안신애, 그리고 저 윤채영하고는 말도 하지 마요. 특히나 경기 중에는.”
“하하하. 알았어. 그런데 마치 어느 선수가 예쁜지 내게 가르쳐주는 것 같은데?”
“우측 반 컵 보면 되죠?”
“장난해?”
“그러니까 집중하라고요. 집중!”
집중은 본인이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씩씩대며 그린을 돌아보는 녀석을 보자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대체 화를 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옅은 우연이 만들어준 인연이지만 그 우연이 무럭무럭 자라 자신의 인생에 꼭 필요한 필연으로 작용하기를 바랐다.
그녀와 함께 3개 대회를 치르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둬 일단 일본에 안정적인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과제다.
그 이후에는 일본에서 많이 열리는 오픈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계획을 잡았다. 그것이 한국에서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보다 지름길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미약했다.
그러나 이미 봐둔 게 있었고 일단 모든 것을 그것에 맞추기로 작정했다.
시작과 함께 연속 버디를 낚은 모모카는 잠시 주춤했다.
비교적 쉬운 12번 파5 홀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세컨 샷을 시도했는데 그게 그린을 훌쩍 넘은 것까지는 괜찮았다.
이제라도 붙여서 버디를 낚으면 되는데 그 시점에서 어이없는 칩샷 미스가 나왔다. 그나마 에이프런에 떨어진 공을 퍼팅으로 핀에 붙여 파로 막은 것이 다행일 만큼 깜짝 놀랐다.
그런데 다음 홀로 이동하던 모모카가 다시 깜찍한 소리를 말을 꺼냈다.
“거 봐요.”
“뭐가?”
“저 질투의 화신이거든요.”
“알았어. 하하하.”
하도 어이가 없어 일단 알았다고 대답한 필상이지만 터지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질투라니?
꼬맹이가 참 발칙하다고 생각했지만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했다. 째려보는 모모카의 눈빛이 제법 사나웠기에.
묘한 감정이 싹 튼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건 첫날 뿐, 함께 온천을 하고난 뒤부터는 다행히 감정을 거의 추스렸다.
자신이 일본에 온 목적을 되새기면 녀석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몸소 깨달았다.
“13, 14번 홀은 안전하게 가자.”
“좋아요.”
190야드의 파3 홀인 13번과 405야드 파4 홀인 14번은 버디를 노리다 실패하면 중상을 입을 핸디캡 상위 홀들이다.
안전한 플레이로 파 세이브에 성공한 것은 상당한 성과였다. 동반자들이 타수를 잃었기에 더더욱 만족스러웠다.
그 기세를 몰아 15번 홀에서 홀인원을 하는 줄 알았다.
호수를 가로 질러야하는 175야드 숏 홀에서 의도하지 않은 드로우가 걸렸는데 모모카의 스윙 후 동작을 보니 의도했던 샷이었다.
그린에 한 번 튄 공이 핀에 정통으로 맞았던 것이다.
‘퉁!’
“와아아아!”
무슨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다.
물론 상당히 멋진 시도였고 좋은 결과였지만 활짝 웃으며 내려오는 모모카를 향해 필상은 검지를 가로로 흔들었다.
“좌측 그린이라서 해볼 만한 샷이었잖아요?”
“그럼 6번이 아니라 7번을 잡았어야지. 정말 이럴 거야?”
“치! 버디 찬스니까 한 번만 봐줘요.”
“싫어. 복수할 거야.”
“복수요?”
그저 장난으로 던진 말인데, 모모카의 시선이 티 박스에 올라간 윤채영에게로 향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보다 못해 알밤을 튕기려다 겨우 참았다. 오로지 그녀만 바라보는 수많은 남성 팬들이 쏟아낼 질타가 떠오른 것이다.
“미치겠네!”
“뭐라고요?”
“아니야. 그냥 농담이었어.”
“안 되겠어요. 제가 한국말을 배우던지 해야지.”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다면서?”
“누가 그래요?”
“얼굴에 다 써 있어. 나 공부하는 거 무지 싫어한다고.”
“그거 무진장 예쁘다는 말이죠?”
“그래, 그래. 너 무진장 예뻐!”
“히이이...”
이만하면 중증이 아닌가 싶다.
그녀가 예쁘고 깜찍하다는 것은 골프를 모르는 일반인들도 모르지 않을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기사거리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다.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오늘 그녀가 입은 패션도 당장 내일이면 완판이 될지도 모른다.
스포츠 지면마다 그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게재될 테니.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자꾸 확인을 받으려 하는 건지.
어쩌면 팬들이 보는 그녀의 포장된 이미지와 실상과의 큰 괴리에서 비롯된 깊은 외로움에 기인하는 게 아닐까?
적어도 가족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홀컵 우측 바깥쪽 봐. 내리막 조심하고.”
“걱정 마요. 예쁜 제가 그걸 놓칠 것 같아요?”
“퍼팅도 예쁘게 해.”
“당연하죠!”
너무 기분이 좋아도 실수를 하는 게 골프다.
하지만 모모카는 좀 특이했다. 긴장하거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바로 표정이 굳었고 플레이도 어색했다. 반면 기분이 좋을 때는 침착하게 경기를 압도한다.
항상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염려가 되지만 이번에도 원하는 스트로크를 잘 만들어냈고 결과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홀컵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자세를 풀었다.
“트레이드마크를 볼 수 없는 것은 아쉽네.”
그녀의 사진 중에는 그린 위의 모습이 유난히 많다. 평소 퍼팅 후에 입을 귀엽게 꾹 다물고 굴러가는 공을 바라보며 심하게 몸을 쓰던 행동, 그게 절로 미소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필상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바로 반응이 왔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보여줄 테니까.”
“노노! 롱 퍼팅 상황은 연습그린에서 보는 거로!”
“알았어요. 흐흐흐.”
“웃음소리가 왜 그래?”
“몰라요. 기분 좋으면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자꾸 나오더라고요. 많이 이상해요?”
“아니야. 귀여워.”
차마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행여 그걸 신경 쓰느라 집중력이 분산될까 두려웠다. 혹시 속내를 들킬까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까지 짓는 자신이 한심하게 보이지는 않을지 답답했다.
도중에 윤 프로가 말을 건넸지만 못 들은 척 하는 것도 미안했다. 몰래 알아듣도록 손짓은 했지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라 어쩔 수 없었다.
모모카는 어제의 부진을 털고 훨훨 날기 시작했다.
1, 3, 5번 홀에서 버디를 추가했고 마지막 9번 홀에서 보기를 적어내고도 5언더의 아주 멋진 하루를 보냈다.
“3언더면 톱 10에는 넉넉하게 들 걸요?”
“마지막 집중력이 좀 아쉬웠어.”
“저 배고파요. 얼른 씻고 밥 먹으로 가요.”
“그래. 밥 먹고 와서 숏 게임 연습 좀 하자.”
“... 알았어요.”
모모카는 뛸 듯이 기뻤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연습을 하자는 필상의 말에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오늘 숏 게임이 좀 아쉬웠기 때문이다. 2타 정도는 까먹은 게 사실이다.
“공 프로.”
“안녕하십니까?”
샤워를 마친 필상은 늦장을 부리는 모모카를 기다렸다.
아무리 강조해도 피치 못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라커룸 앞에 앉아 야디지북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굵직한 저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모모카의 부친이 곁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와는 서먹했는데 어색한 미소를 지은 그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고생이 많지?”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이고 모모카를 돕는 것은 저도 즐겁고 보람을 느낍니다.”
예의 바른 모습에 살짝 미소를 보인 그가 찾아온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아빠라는 존재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자네의 탁월한 능력은 나도 인정하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여자아이일세. 자네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아빠인 나로서는 모모카가 호감을 가진 자네와 붙어 다니는 게 솔직히 걱정이 되네.”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에게도 모모카는 막내 여동생처럼 어리게 보이니까요.”
“그 말을 믿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캐디로서, 또 코치로서 역할을 다할 뿐, 넘지 말아야할 선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허허허.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
짧은 대화였지만 그는 필상의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신뢰 하겠다는 의미였다.
필상도 뭔가 찜찜했는데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두 남자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아빠!”
어느새 나타난 모모카가 허리에 두 손을 떡하니 얹고 두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화 내용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둘러 나오느라 뽀송뽀송한 맨 얼굴이었다.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으려고 왔어.”
“밥 먹고 가실 거죠?”
“그렇다니까!”
아빠한테는 표독하리만큼 쌀쌀한 그녀가 필상에게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식사해도 되는지 묻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오셨으니까 비싼 거 먹어도 되겠네?”
“공 프로가 고르게. 내 오늘 뭐든 사 줄 테니.”
“일본에 와서 아직 초밥을 못 먹었습니다. 혹시 잘 하는 곳을 아십니까?”
“그럼. 도쿄는 물론 이바라키도 내가 좀 알지. 허허허.”
모모카가 끼어들 틈도 없이 필상과 미우라는 좋은 호흡을 주고받으며 함께 일어나 앞서 걸었다.
이게 뭔가 싶은 표정을 지은 모모카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그녀가 알기로 두 남자는 사이가 좋을 리 없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훌륭한 일식집이 있었다.
모모카가 잔뜩 주문한 음식을 두 남자는 맥주까지 한 잔 곁들여 남김없이 먹었다. 이게 아닌데 싶었으나 모모카는 자신은 관심도 없는 화제로 죽이 맞아 껄껄대며 웃는 남자들의 대화에 끼지 못해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식사를 마친 미우라가 돌아가겠다는 말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부녀지간의 얽힌 사연에 제 삼자가 끼어들 여지는 없겠으나 악수를 나눈 미우라의 잘 부탁한다는 말이 어깨를 한층 무겁게 했다.
“내가 뭐랬어요?”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성적이 모두 집계되어 있었다. 본선 진출 컷은 무려 6오버였으며 65명이 결선에 진출했다.
또한 모모카는 본인이 장담한 대로 순위가 수직상승했다.
단독 3위.
2라운드 합계 3언더가 그런 상위권이라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일본 골프코스가 한국에 비해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턱없이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페어웨이 중간에 나무가 있거나 그린 주변에 벙커들이 조잡하게 느껴질 만큼 눈을 어지럽히지만 전장은 더 짧다.
적응만 된다면 그게 발목을 잡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국프로들이 일본투어를 휩쓰는 게 다 이유가 있었군.”
“그 말은 동의할 수 없어요.”
그녀에게도 아픈 부분이던가?
그나마 한국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던 모모카가 발끈하자 필상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런 반응이 이미 필상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모카를 비롯한 일본의 황금세대들이 주목받는 이유도 이미 기성골퍼들은 한국선수들의 월등한 기량에 밀리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대회가 올해 12회를 맞이하던데?”
“그런가요? 제가 숫자에 좀 약해서... 흐흐흐.”
“11번의 우승 중에 일본프로는 4명뿐이야.”
“그럼 7번은 누가 우승했는데요?”
모모카의 콧등에 주름이 살짝 잡힌 걸 보면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아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상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2011, 2012년 안선주, 2015년에는 전인지, 2017년 김하늘, 2018년 신지애가 우승하며 일본선수보다 승수가 많다.
모건 프레셀과 렉시 톰슨도 우승을 했으니 일본은 안방에서 외국선수들의 잔치를 구경만 했던 것이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