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23- 하이파이브
“뭐 해요? 빨리 안 나오고.”
“나, 나갈게.”
불길한 예감은 왜 한 번도 빗나가지 않는 걸까?
그래도 온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필상은 반바지에 면 티를 껴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이미 탕에 자리를 잡은 모모카의 모습을 눈에 담은 필상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고 시선 둘 곳을 몰라 방황했다.
모모카의 하얀 어께가 드러난 것만으로도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하자 야한 꿈에서 팍 깨어났다. 실상 그녀도 필상과 비슷한 복장이었던 것이다.
물기에 젖어 엄한 착시가 일었던 것일 뿐!
“이리 와요. 촌스럽기는!”
“촌스럽다고? 내가?”
촌스럽다 못해 마가 끼었던 필상은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그걸 합리화시키기 위해 당당하게 탕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박력이 지나치게 과했던가?
“으으으... 뭐 이렇게 뜨거워.”
화들짝 놀라 다시 탕 밖으로 튀어나오는 필상의 모습에 모모카가 까르르 웃는데, 아기 마녀가 따로 없어 보였다.
“촌스러운 거 맞네요. 화상 입은 거 아니죠?”
“뜨거우면 뜨겁다고 얘길 해줬어야지!”
“뜨겁지 않은 온천수도 있나요? 천천히 몸을 적시고 들어와요. 오빠.”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되는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이 걱정이지만 머리를 싸맨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기에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보다 더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자신이 지금 일본에 와 있다는 것이고 이 여정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에 중요한 분수령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모모카가 부른다고 무턱대고 일본에 온 것은 아니다.
프로선발전을 통과했지만 한국 투어에서 한 발 한 발 내디뎌야할 과정이 너무 지난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일본과 인연이 없었다면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만 묘하게도 좋은 여건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더 힘겨운 길이 될지도 모르지.’
현실은 늘 생각처럼 녹록하지가 않다.
그런데도 마음이 끌렸고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의욕만 앞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 상황을 점검하고 가능성을 타진해 볼 요량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믿기지 않아서. 내가 일본에 와 있다는 게.”
“저도 지난해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한국이 이렇게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한국과 일본은 정말 가깝더라고요.”
“그렇지. 가깝지...”
문득 그녀의 존재가 고맙고 그녀를 알게 된 것이 신기했다. 자신과 일본을 이어준 인연의 고리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성공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꺼냈다.
“모모카. 왜 혼자 왔어?”
“누구요? 아빠랑 고모?”
“응. 네 고향은 큐슈의 미야자키잖아.”
“가셨어요. 오늘 아침에. 제가 부탁드렸거든요.”
“그럼 그동안 대회 출전했을 때, 캐디는 누가 했어?”
“대회가 열리는 코스의 경력 많은 하우스캐디를 썼어요. 다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번 성적이 괜찮아서 아빠가 고집을 꺾으셨어요.”
“이제 홀로 서는 건가?”
“아뇨. 오빠가 도와주셔야죠.”
그녀는 필상의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던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이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여건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물론 필상도 원하는 바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결과를 만들어야만 한다. 고집을 꺾으셨다는 그녀의 부친이 자신을 기꺼워하지 않음을 알기에 결과로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부담스럽지만 싫지는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부각시키지 못한다면 그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단 스케줄부터 체크해 보자.”
“네.”
각자 하루를 보내는 다른 방식에 길들어져 있어서 함께 대회를 소화하려면 일정부터 상의할 필요가 있었다.
모모카는 필상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고 그날 밤 정식 계약서도 작성했다. 예상치 못한 것이 있다면 그건 앞으로 3개 대회를 함께 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통상적인 조건보다 우대해준 이유는 캐디 일뿐만 아니라 스윙코치 역할도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적시한 것은 유의미했다.
일단 프로의 자격을 갖췄고 능력을 인정하기에 가능했던 내용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배려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했다.
*
“괜찮아요! 이제부터 더 집중하면 되죠.”
1라운드 내내 필상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의욕이 너무 앞섰는지 첫날은 코스파악에 더 중점을 둬야하건만 자꾸 이런저런 조언을 보탰다. 그런데 묘하게도 필상이 코치를 하면 샷 결과가 좋지 않았다.
마치 이 코스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모모카의 샷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불러준 거리의 오차가 더 크게 작용했고 바람과 같은 제반 환경도 도와주지 않았다. 하다못해 운까지 따라주지 않아 2오버로 라운드를 마쳤다.
지난해 이 대회 첫날 2언더로 선두에 나서며 각광을 받았던 것과 너무도 극명한 대비였기에 필상도 의기소침했다.
“힘든 하루였어!”
“전 괜찮았어요. 작년 이 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제가 몇 타 쳤는지 알아요?”
“자세히 못 봤어. 하지만 첫날은 선두에서 출발했잖아.”
“그 뒤로 주르르 미끄러졌지요. 마지막 날 81타를 쳤고 최종성적은 13오버였다고요.”
“스코어가 잘 안 나온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심하게 무너지기도 하는구나.”
“오늘 2오버면 크게 나쁜 성적도 아니에요.”
나중에 확인된 결과, 2오버는 공동 31위였다.
모모카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만 필상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녀의 샷이 나빴다면 모를까, 그녀의 스윙은 더 좋은 기록을 얻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안 돼! 타이즈라도 입고와.”
“치! 예쁘기만 하구만!”
둘째 날, 숙소를 나서는 그녀의 복장은 앙증맞았다.
하얀 색 바탕에 핑크 빛 가로 줄무늬가 새겨진 긴 팔 티에 깔 맞춘 핑크빛 반바지는 패셔너블한 그녀의 감각을 그대로 보여줬다.
하얗고 귀여운 얼굴이 더 돋보이는 의상이지만 문제는 짧은 하의였다. 맨살을 드러낸 핫팬츠가 너무 추워보였다.
무릎까지 오는 양말 스타킹도 그녀가 좋아하는 패션 아이템이지만 필상의 잔소리에 그녀는 툴툴거리면서도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어때요?”
“예뻐. 훨씬!”
옷은 그대로였고 양말 스타킹 대신 하얀색 타이즈를 갈아입고 나왔는데 눈빛을 반짝이는 모습이 요정처럼 귀여웠다.
하기야 뭘 입어도 깜찍할 모모카!
2라운드는 아침 티오프였다.
어제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필상은 무엇이 부족했는지 철저히 분석했고 마음을 비우고 2라운드에 돌입했다.
과도한 욕심이 문제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그 결과, 시작부터 산뜻했다.
“118야드, 피칭으로 컨트롤하자.”
“좋아요.”
“훅 바람 때문에 그린 우측 끝을 보는 게 좋겠어.”
첫 홀인 10번 홀은 365야드의 파4 홀인데, 어제 평균 타수가 4.19를 기록한 녹록하지 않은 홀이다.
첫 홀의 부담감이 컸지만 모모카의 드라이브 티샷이 아주 깔끔하게 떨어졌다. 문제는 3개의 벙커가 도사리는 그린이다
IP지점에서 그 벙커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만 짧게 치지 않는다면 벙커는 페이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많은 선수들이 길게 쳐 그린 뒤의 거친 러프에서 해매기 때문에 타수를 잃는다. 게다가 훅성 바람까지 작용해 버디 퍼팅을 남기기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모모카는 필상의 조언을 신뢰하고 과감하게 때렸다.
“와우! 굿 샷!”
“모모카 파이팅!”
굿 샷이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응원의 함성이 터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열정적인 팬을 확보한 모모카였기에 성적만 받쳐준다면 그녀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같은 황금세대 중에 선두주자인 하타오카는 이미 3승을 거뒀고 아라가키와 가쓰 미나미도 이미 우승을 맛봤다.
우승이 없는 하라 에리카도 상금순위 38위로 시드를 확보한 가운데 모모카의 성적이 가장 쳐졌다고 볼 수 있다. 고군분투하며 Q스쿨을 통과했지만 성적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인기는 결국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필상 못지않게 그녀도 확실한 성적이 갈급했다.
“붙은 것 같죠?”
“응. 2m 안팎일 거야.”
“오늘은 시작이 좋네요.”
“결과도 좋을 거야. 하하하.”
모모카에게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애써 웃었지만 실은 엄청 떨렸다. 처음도 아닌데 참 기이한 일이었다.
아직은 미숙함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욕을 가지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의욕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 볼 문제, 때로는 호성적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
“우리 잘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확신에 찬 대답을 했지만 그녀의 말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결코 자신과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라고 노력하며 한 길을 달려오고 있지만 자신감의 이면에는 항상 그에 못지않은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
필상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그녀와 같은 입장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수는 오로지 플레이에 집중해야 하고 그 외의 것들은 자신의 몫인데, 그녀가 기댈 어께를 허락하지 못했다는 반성부터 필요했다.
설사 터무니없는 흰소리라도, 그게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는 것과는 다른 부분인 것이다.
“모모카. 네 샷은 충분히 좋아.”
“정말이에요?”
“응. 우리가 함께 연습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네가 우승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해. 뭐가 부족하냐고! 얼굴이 못 생겼어? 체중이 덜 나가?”
“오빠!”
“아! 체중은 빼야 하나?”
“내 키에 이 정도면 당장 모델 스테이지에 서도 된다고요!”
“그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냐?”
“정말이라니까요!”
“아, 알았다니까!”
짓궂은 장난을 치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이 지나치게 굳어 있었다는 것을.
몸이 경직된 것은 상관없지만 생각마저 유연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수에게 편안함과 여유를 선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마주 보고 크게 웃고 난 뒤, 모든 것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2.2m 버디 퍼팅에 성공했고 핸디캡 3번인 11번 홀 드라이브 티샷도 더 이상 좋을 수 없었다.
400야드 파4 홀인데 난이도를 높이는 장애는 바로 페어웨이 중간 중간에 심어 놓은 나무들이다. 정확히 중앙을 가르면 괜찮지만 뜻하지 않게 나무가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샷은 흔들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모모카의 샷은 방향은 물론 비거리도 최고였다.
“난 공 깨지는 줄 알았어.”
“전 페어웨이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길까봐 걱정했는데!”
“에이 진짜!”
“뭐? 뭐요?”
모모카와 필상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장면은 한 편의 그림 같았는지 경기내용을 소개한 기사의 사진으로 쓰였다.
모모카의 깜찍한 외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지만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쳐다보는 캐디도 정말 멋들어진 호남이었다.
189cm에 80kg, 훤칠한 체구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하체근육이 도드라졌고 적당히 그슬린 낯빛은 남자다워 보였으며 바람에 날린 머리칼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그날 이후 모모카의 갤러리 중에 아줌마들이 부쩍 많아진 것이 그 한 장의 사진이 만든 파장이었다.
“284야드 맞죠?”
“응. 체중이 실리니까 정말 무섭네.”
“오빠!”
이젠 ‘오빠’라는 단어에 아주 익숙했다. 발음도 정확했고.
하지만 그녀의 발끈하는 모습을 뒤로 한 필상은 세컨샷 솔루션을 제시했다.
“128야드 봐야겠네. 피칭으로 탄도 높은 샷 어때?”
“방향은요?”
“핀 하이!”
“좋아요.”
같은 말이라도 어감이 중요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필상의 제안을 받아들인 모모카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임팩트 순간, 공이 맞는 소리도 나지 않았던 깔끔한 샷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냈고 그린 중앙에 떨어진 공은 백스핀까지 먹었다.
앞 핀이었던 탓에 홀컵에 빨려들 듯이 확 끌려오는 장면에 비명이 쏟아진 것은 기대를 벗어나지 않은 귀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예상치 못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일본말을 정말 잘 하시네요?”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