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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가 좋아-22화 (22/354)

ILG022- 온천 여관

전에 말했던 것은 골프장 후원이다.

그것도 이제 갓 프로선발전을 통과한 햇병아리한테는 과분한 대접이다. 그런데 최 프로는 매니지먼트 회사를 언급했다.

그것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프로들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국제적인 매니지먼트 회사라는 말에 순간 멍해졌다.

물론 그들처럼 좋은 대우를 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제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도대체 그럴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이다.

“사양하겠습니다.”

“왜?”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뭐라고.”

“필상아! 이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야. J&L의 이 대표가 먼저 자넬 꼭 집어 들어온 제안이라니까.”

“저는 전혀 모르는 분입니다.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하하하. 왜 몰라? 같이 라운드도 했잖아?”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이 대표가 신분을 밝히지 않았던 모양이군. 골든베이에서 2인 플레이 함께 했던 여자 분, 기억 안 나?”

“혹시 그 고운 여자 분 말입니까?”

“그래. 그러고 보면 사람 운이라는 게 참 오묘해?”

최 프로는 그녀와 J&L이라는 회사에 대해 한참 소개했다.

그의 표정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그 회사와 이 대표라는 여인의 높은 위상을. 적어도 국내 골프계에서 나름 굵직한 입지를 다진 존재인 듯.

그 당시 필상도 이유 모를 호감을 가졌었기에 씁쓸했다. 그녀의 대단함보다는 스스로 위축되는 느낌이 더 강했다.

자신이 계약을 맺을 경우, 과연 어떤 길을 걸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분명한 것은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세상의 통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최 프로에게 미안했지만 생각해 보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연습장에 들어선 필상은 습관처럼 웨지를 들고 샷을 했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긋지긋한 불운이 끝났다고 판단하지만 그렇다고 행운이 찾아왔다고 믿지도 않는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행운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벼락을 맞고도 멀쩡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아예 벼락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나!

절로 찾아온 복을 걷어차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었으나 그래도 분에 넘치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서로의 입장을 상의할 수 없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물론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지만 그건 안 하니만 못한 것 같았다.

- 약속 지켜요!

심란한 마음을 다잡지 못하던 와중에 문자가 삑 울렸다.

다짜고짜 그런 말을 던질 사람은 한 명뿐이다. 모모카.

- 언제야?

- 내일 모레요.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 살롱파스 컵!

- 헉!

- 어제 경기 끝난 거 알아요. 하지만 제발!

- OK!

- ♡♡♡

OK를 친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어이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답답한 마음에 어디든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일본이고 캐디로 일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녀가 보낸 하트에 마음이 푸근했다. 무려 3개나 보내다니!

“어딜 간다고?”

“일본이요. 돈 벌러 가는 거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바로 간다는 말이야?”

“네. 새벽 비행기거든요. 갔다 올 때 선물 뭐 사다드려요?”

“현금!”

“하하하. 알았어요.”

집을 나선 필상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도중, 엄마 통장에 그녀가 바라는 선물을 이체했다.

그동안 드리면 반납하기를 수차례, 이제는 드릴 수 있어서 감사했다. 돈 걱정 없이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어딜 간다고?”

“벌써 도착했어요. 일본.”

“정말이야?”

“따스한 밥 먹고 왜 헛소리를 하겠어요. 근데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는 왜 했어요?”

“만나러 가려고 그랬지.”

“아! 어쩌죠. 엇갈려서.”

“할 수 없지 뭐. 잘 갔다 오고 내 선물 잊지 마!”

“뭐죠?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을 그런 애틋한 사이였던가?”

“에이! 지금 보너스 이체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손가락이 왜 아픈 걸까?”

“뭐 사다 드려요?”

필상도 아쉬웠다.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 안 프로와 너무 허망하게 헤어졌기 때문이다. 대회 때문에 마음을 졸이던 때와는 달리 편하게 한 잔 나누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엇갈린 것이다.

미리 날을 잡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귀국하면 거하게 한 잔 사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대회가 열리는 이바라키 골프클럽으로 이동하는 사이, 모모카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놈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네!”

- 티켓 구매 했어요. 오후 1시 비행기.

- 빨리 취소해.

- 왜요? 못 와요?

- 지금 나리타 공항이야.

- 리얼리?

- 택시 탔어.

- ♡♡♡♡♡

정신없는 여정이지만 하트 5개를 보자 피곤이 싹 날아가 버렸다. 비행기 표까지 끊어 보내는 정성도 고마웠다.

도쿄 인근의 이바라키 현에는 골프장이 무려 120개다.

일본열도에 골프장이 너무 많아 도산하는 곳도 있다지만 이번 대회가 열리는 이바라키 골프클럽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명문 골프장이다.

“음... 좋네.”

다른 찬사가 필요치 않았다.

택시를 타고 골프클럽 인근에 도착할 때부터 주변 일대가 모두 잘 가꿔진 자연휴양림처럼 숲이 무성하게 우거졌다.

하얀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는 파란 하늘 아래, 빽빽하게 들어 찬 나무들은 고향집 풍경과 다르지 않았지만 뭔가 좀 더 정돈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대도시와는 다른 고즈넉한 옛 풍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유수의 골프장인데도 1층으로 지어진 클럽하우스가 왠지 더 정겨웠다. 다만 대회가 내일부터 열리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택시에서 내리는데 반가운 음성이 빠르게 다가왔다.

“오빠!”

“어? 어?”

필상도 오랜만에 만난 모모카가 너무 반갑고 사랑스러웠지만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확 품에 안길 줄은 미처 몰랐다.

자유분방한 성격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일본의 풍토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보수적이다.

특히나 공공의 부문에서는 더더욱.

그걸 알기에 깜짝 놀란 필상은 애써 그녀를 밀어냈다. 그런데 녀석의 반응이 또 다시 기대를 엇나갔다.

“치! 설마 내가 반갑지 않은 거예요?”

“사람들이 보잖아.”

“보면 어때요. 난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데. 호호호.”

“나 배고파.”

“가요.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모모카가 필상의 캐리어를 잡더니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지리를 모르는 필상은 졸래졸래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헐렁한 핫팬츠를 입었지만 뒤태가 어지러워 눈을 두 곳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도착한 곳은 주차장이었고 그녀는 작은 차의 트렁크를 열더니 캐리어를 먼저 집어넣었다.

“타요!”

“응. 간단히 먹자. 코스도 한 번 둘러 봐야지.”

“싫어요. 난 맛있는 거 먹을래요.”

일단 잠자코 따라갔다.

머잖은 곳에 위치한 꽤나 그럴싸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아마도 골프장을 찾는 손님들의 명소인 것 같았다.

사실 그녀를 만나면 나눌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천천히 알아도 상관없지만 당장 내일부터 대회를 치러야하기 때문에 정보가 절실했다.

그녀도 모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자리에 앉자 피자와 파스타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가 시켜도 되죠?”

“다 시켜 놓고 뭔 소리야?”

“히히. 그동안 더 예뻐진 것 같아요.”

“예뻐졌다고?”

“네. 고생했다는 말, 다 거짓말이죠?”

적당한 표현이 아니지만 그러려니 넘기고 장단을 맞춰줬다.

“그럼 너도 고생은 하나도 하지 않은 건가?”

“와우! 와우! 고마워요. 히히히.”

뭔가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는 여전한데 왠지 더 성숙했다는 느낌, 분명히 말투나 행동은 더 푼수처럼 보이는데 묘한 일이었다.

“밥 먹고 우리 숙소부터 가 봐요.”

“아냐. 숙소는 천천히 가고 일단 연습부터.”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안시현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모모카도 시간이 없을 필상을 위해 미리 준비해뒀던 야디지북을 내민 것이다.

새것이 아니어서 열어 봤더니 깨알 같은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부탁해 구한 것인 듯.

문제는 휘갈겨 쓴 일본어를 필상이 정확히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도와줄 게요.”

“도와주러 온 사람은 난데?”

“와! 피자 나왔어요. 우리 일단 먹어요.”

천진난만이라는 비장의 무기까지 장착했단 말인가?

어쩌면 이게 그녀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 전에 만났을 때는 그녀에게 낯설고 부담스러운 한국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곳의 그녀의 나라였고 Q스쿨을 통과해 시드를 확보한 모모카는 작년보다도 더 큰 인기를 구가 중이다.

굵직한 스폰서가 붙었고 올 시즌 개막 이후 참가한 4개의 대회에서 모두 컷을 통과했으며 5위를 기록한 적도 있다.

지금도 체면 때문에 나서지는 않지만 그녀가 들어온 뒤, 우리 테이블을 힐끔거리는 수많은 시선이 안 그래도 따가웠다.

“저 돼지 같아요?”

“아니. 먹는 즐거움을 폄훼하면 안 되지.”

“역시! 걱정 말아요. 운동해서 다 뺄 거니까.”

“걱정은 무슨! 근데 체중이 얼마나 줄었어?”

“... 말 안 할래요.”

장난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시무룩해진 모모카, 그 묘한 분위기를 종잡기 어려워 그녀를 따라 연습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저놈의 핫팬츠는 못 입게 해야 할 것 같아!”

“뭐라고요?”

“아냐. 그냥 보기 좋다고.”

“치! 어딜 빤히 봐요!”

빽 소리를 질렀지만 이후 그녀는 다시 상승모드를 탔다.

웨지부터 시작해 드라이브까지 한 번 쭉 훑어본 필상은 안심이 됐다. 작년에 봤던 스윙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도 뜨거운 겨울을 보낸 듯.

“나 코스 한 번 돌아보고 올게.”

“같이 가요. 여기서 여러 번 플레이를 해 본 제가 설명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러든지.”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필상의 동선은 일직선이 아니었고 날카로운 시선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곁에서 재잘재잘 설명하는 모모카의 모습은 마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한테 고자질하는 8살 아이 같았다.

“어때요?”

“좋네. 아주 많이.”

어느새 해가 기울었고 최종점검을 마친 필상은 모모카와 함께 앞으로 나흘간 머물 숙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호텔이나 콘도가 아니었다. 일본 전통 민가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일반 가정집도 아니다.

커다란 마당 곳곳에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유황온천이 보였고 본채에서 동떨어진 별채로 향하자 유카타를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반갑게 맞이했다.

“온천여관은 처음이죠?”

“그냥 온천만 하고 돌아간 적은 있는데 자는 건 처음이야.”

“제가 이 별채를 전세 냈어요. 잘 했죠?”

“응. 난 그냥 여기서 푹 쉬면 안 될까?”

“히히... 그건 안 되죠.”

별채로 들어가 봤더니 일본 특유의 고풍스러움에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가구와 장식들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문 뒤로 이어진 난간 밑으로 마련된 온천탕은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맘에 쏙 들었고 난간을 지나자 나무마루가 깔린 거실이었다.

제법 넓은 그 공간은 앞뒤의 문을 활짝 열어뒀기에 마치 야외에 나온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실 좌우로 문풍지를 붙인 미닫이문이 예쁜 다다미방이 붙어 있는데 한 가족이 머물기 충분한 구조와 준비였다.

“왼쪽은 제 방, 오른쪽은 오빠 방, 어서 들어가 봐요.”

“짐부터 풀어야겠네. 하하하.”

너무 마음에 들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안에 들어서자 그냥 포근하다는 느낌부터 전해졌다.

3면이 너른 창문이었고 바닥에는 밝은 나무색을 띤 돗자리가 빼곡히 깔려 있었다. 한 편에는 침대가 아닌 일본식 요가 깔린 침상이 보였고 TV와 냉장고, 없는 게 없었다.

흥얼거리며 일단 짐 가방을 풀었고 옷도 편하게 갈아입었는데, 뜻하지 않은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어디서 씻지?”

정답은 이미 알고 있다. 욕실이 붙어있지 않고 야외에 있는 온천을 이용해야 하며 화장실도 거기에 있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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