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화 (21/354)

ILG021- 십시일반

“설마 불안한 겁니까?”

“난 괜찮아. 네가 걱정이지.”

“하하하. 제가 누굽니까!”

“공 노예!”

“벼락을 맞고도 멀쩡했던 아주 질긴 인간이라고요. 제발 쓸데없는 걱정일랑 다 구겨서 던져 버리세요.”

“알았어.”

“어허! 목소리 봐라!”

“알았다니까!”

큰 소리 대신 응징을 택한 그녀의 주먹이 복부에 푹 꽂혔다. 괜히 운동선수가 아니라는 듯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그보다 더 따스한 정을 감지했기에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후반은 그야말로 고군분투였다.

비가 불규칙하게 내렸으며 바람도 종잡기 힘들었다.

분명히 슬라이스 바람이라고 체크했는데 어드레스를 하면 얼굴이 시린 맞바람으로 바뀌기도 했다.

피치 못하게 운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방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굿 샷!”

진심으로 던진 감탄사였다.

그런데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며 공이 그린을 훌쩍 넘어가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미안합니다.”

비록 자신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 한 마디에도 신경이 쓰이는 상황이기에.

하지만 장 프로는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저도 굿 샷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고 보면 신은 공평한 것 같아요.”

“파이팅!”

후반 시작과 함께 2타를 잃은 안 프로의 성적은 –13이었다. 반면 슬금슬금 파로 막아내며 버틴 장 프로는 –12, 본의 아니게 턱밑까지 추격한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의 행운이 따랐던 것을 쿨 하게 인정한 것이다. 남은 홀이 4개뿐이기에 더더욱 화가 날 만도 한데.

그래서 응원의 말을 보탰다. 결코 빈말이 아니었는데 그 느낌이 전해졌는지 돌아오자 안 프로의 잔소리가 터졌다.

“뭐 파이팅까지 불러주고 그래.”

“좋아 보이잖아요. 당당한 승부.”

“됐고! 난 어떻게 칠까?”

15번 홀은 494m 파5 홀이다.

하지만 그린 앞을 가로지르는 폭이 넓은 해저드를 건너야하기 때문에 악천후가 아니더라도 2온은 과한 모험이다.

세컨샷으로 좋아하는 거리를 남기고도 장 프로의 웨지 샷이 그린을 훌쩍 넘어가는 걸 봤기에 판단이 쉽지 않았다.

“엄연한 뒷바람을 봤는데 탄도를 띄울 수도 없고 눈앞에 해저드가 훤히 보여서 짧게 칠 수도 없고...”

“그럼 그냥 제 거리 보자.”

“그래요. 어드레스에서 최대한 좋은 타이밍을 잡아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무조건 자세 풀고요.”

“오케이!”

안 프로의 남은 거리는 72m에 불과하다.

샌드웨지를 잡은 서드샷이 컨트롤되어야 하는데 당면한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비로 인한 거리손실도 감안해야하는데 바람까지 말썽을 부리니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차라리 자신이 치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냉철하게 판단한 조건이 완성되는 시점을 노려 과감하게 샷을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감각에 의지해야 하는 부분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결국 그녀의 경험과 감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담을 느끼면 엉뚱한 미스 샷이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휴우!”

정말 깜짝 놀랐다. 분명히 잘 들어간 샷이다.

조금 전의 장 프로 샷을 감안하면 그린을 넘지는 않아도 살짝 홀컵을 오버할 힘 조절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치솟은 공이 좀 이상했다.

앞으로 나갈 생각을 잊어 버렸는지 갑자기 자유낙하를 하는 느낌이었다. 짧으면 호수에 빠지는데!

“고! 고!”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음성이 자신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다. 뒤늦게 공의 궤적을 확인한 안 프로도 들고 있던 클럽을 쭉 밀며 공이 뻗기를 바랐다.

‘퍽!’

하필이면 그린과 해저드 사이의 좁은 러프에 처박혔다.

느낌상 비로 인해 젖은 진흙 때문인 것 같았다. 앞으로 튀었다면 그래도 버디 퍼팅을 남겨 최소한 파는 잡을 상황이건만 공의 상태를 어서 확인하고 싶었다.

빨라진 발걸음을 좇던 안 프로가 소망을 입에 올렸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요?”

“간절히 기도하거든.”

“믿습니다!”

신앙은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게 아니었다.

러프에 가린 공을 직접 확인한 결과, 대가리만 살짝 보일 뿐 공의 몸통이 대부분 흙에 잠긴 상태였다.

구제받을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이럴 때 경험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필상은 솔직히 멍했다. 실전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던 안 프로는 피칭 웨지를 요구했다. 일단 장 프로의 샷이 먼저였기에 여유는 있었다.

“쳐내려고요?”

“응. 그냥 콱 찍는 수밖에 없어. 벙커샷 하듯이.”

다시 한 번 행운을 빌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까처럼 믿는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어프로치 칩샷을 감행한 장 하나의 공이 그린에 떨어졌는데 이상하게도 구르지 않았다. 스윙은 무난했는데.

백스핀이 걸리기도 했지만 그린에 고인 물로 인해 우뚝 멈춰 섰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했다. 파 퍼팅이 힘겨울 듯.

그 장면을 바라보던 안 프로는 급기야 난이도 최고의 상황에 도전했다. 아무리 진흙에 잠겼어도 헤드가 무거운 피칭으로 찍어 치면 그린을 훌쩍 오버할 수도 있다.

그 생각에 잠긴 필상의 심장이 요동을 쳤다.

‘과앙!’

마치 누군가 해머로 바닥을 내려친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무슨 너무 긴장한 탓에 과장된 소리였으나 그렇게 느껴질 만큼 과감한 샷이었다.

녹색 풀대기 덩어리와 함께 시커먼 흙이 사방에 분사되는 가운데 하얀 물체가 쑥 튀어나왔다. 슬로우 화면처럼 보인 그 공은 당장이라도 그린 밖으로 쑥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공은 높은 고도로 치솟더니 더도 말고 벙커샷처럼 갑자기 뚝 떨어졌다.

“어?”

홀컵보다는 짧게 떨어졌지만 백스핀이 걸릴 리 없었던 공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린 엣지까지 구를 것 같았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공보다 먼저 바닥에 떨어진 흙덩어리가 공의 진로를 막아 힘이 팍 줄었고 방향까지 바뀐 공이 절묘하게 홀컵을 향했다.

절로 입이 쩍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 기적,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주먹을 불끈 쥔 필상도 어퍼컷을 마구 날렸다.

“나이스 칩인 버디!”

“와아아!”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피가 머리에 몰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안 프로가 달려와 가슴을 마구 때리는데도 아프지 않았고.

족히 비명과 함성이 1분은 홀을 휘감았던 것 같다.

“나 예쁘지?”

“응. 정말 섹시했어.”

“호호. 그랬단 말이지!”

“샷이. 샷이 정말 섹시했다고. 그건 그렇고 진단서 첨부할 거야.”

“뭐? 무슨 남자가!”

“카메라에 다 찍혔을 거니까 발뺌할 생각하지 마.”

“좋아. 뭐든 다 받아 주겠어. 호호호.”

세 홀이 더 남았지만 거기서 승부는 결정되었다.

안 프로는 –14로 달아났지만 장 프로는 파 퍼팅에 실패하면서 –11로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빗줄기가 잦아들고 바람도 잔잔해진 것이 마치 우승을 축하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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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스타성을 지닌 선수였다.

우승과 함께 각종 스포츠 방송과 지면에서 일제히 그녀의 활약상을 쏟아냈고 인터뷰가 쇄도했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 그린으로 달려 나온 귀여운 딸을 부여안고 동료와 후배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는 사진 귀퉁이에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가족들이 몰려왔기에 필상은 슬쩍 빠졌다. 쫓아 나와 만류하는 안 프로와는 곧 다시 만나 회포를 풀기로 약속했다.

*

“엄마. 나 왔어.”

“뒤풀이 안 하고 바로 왔네?”

“응. 엄마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어이구. 내 새끼!”

진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반기는 엄마를 보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드러눕자 곧바로 잠이 든 걸 보면 엄마의 품보다 포근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무심코 지나쳤지만 그녀는 자신이 캐디로 나온 대회를 모두 시청했다. 그래봐야 몇 장면 스쳐간 것에 불과했지만.

“필상아. 밥 먹어.”

“으응?”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10시도 안된 시간에 집에 도착했는데 큰누나 목소리에 깨어 시계를 보니 아침 8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엄마는 곤히 자는 아들을 미처 깨우는 게 조심스러웠으나 큰누나는 여지없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상은 받고 다시 자야한다는 원리원칙에 투철한 스타일이다.

물론 필상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얼굴에 슬쩍 물만 묻힌 필상이 거실로 나오자 네 명의 여인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누나들이 모두 집결한 것이다.

명절도 아닌데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다.

“왜? 아침부터 가족회의라고 하나?”

“일단 앉아. 밥 먹으면서 얘기해.”

“무슨 일인데 똑순이들이 일도 안 하고 모였어?”

뭔가 주제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으나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더니 역시 큰누나가 말을 뗐다.

“너. 프로선발전 통과했다면서?”

“응. 그거 별로 어렵지도 않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너 이제 일 그만 두고 투어에 참가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누나들이 십시일반 할게.”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다.

사실 누나들은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듯이 필상이 새로운 기회를 얻자 다시 모여 남동생을 지원하기로 의논한 것 같았다.

갑자기 목이 매여 국을 몇 술 뜬 필상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내 일은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 마음은 고맙게 받을 게.”

“우리도 농담 아니야. 너 어릴 때 축구하게 해달라고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난리친 거, 그걸 말린 죗값이라고 생각해.”

“에이 왜 이래. 난 안 그래도 살만 해. 안시현 프로 우승해서 보너스도 4천 받는다고.”

“정말이야?”

“응. 나 캐디만 해도 금방 부자 될 걸?”

4천만 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누나들의 눈빛이 변했다. 보너스를 그렇게 많이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프로캐디로 나갈 거야? 아니면 투어에 참가할 거야?”

그래도 누나들이 모두 캐디로 일하기 때문인지 관심이 많았다. 아는 것도 적지 않았고 여기저기 물어도 본 것 같았다.

하나뿐인 남동생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만 해도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살기 때문인지, 아니면 캐디 일을 하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나선 것이다.

누나들이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이런 양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설득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누나들 동생인 나, 내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거야. 그치?”

“누가 뭐래!”

“그럼 그냥 좀 믿고 지켜봐 줘. 또 다시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발끈했다면 모를까, 침착하게 말을 꺼내자 거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담담하게 말하는 필상도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누나들은 출가외인이 아니었다.

아직도 근처에 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된 어머니를 모시기 싫어서도 아니다.

필상이 성공하는 것이 곧 집안이 바로 서는 것이고 자신들의 자랑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필상의 성공이 곧 누나들의 자부심이었던 것이다.

충분히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지난 주말에 결혼한 성희가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확 구겨진 자존심, 누나들도 필상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

“십시일반?”

그 단어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힘을 보태겠다는 누나들을 겨우 달래서 보냈지만 그녀들이 보인 태도를 통해 필상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패한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거, 또한 책임감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당연하다고 여겼으나 갚아야할 빚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엄마는 물론 누나들에게도 든든한 가족이 되어야만 한다.

“공 프로 왔나?”

“최 프로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이리와 앉아 봐. 자네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 있거든.”

오늘은 일할 생각이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향한 발길은 골프장으로 향했다. 나선 김에 최 프로에게 인사하러 들렸는데 그는 필상을 위한 특이한 선물을 꺼내 놨다.

“후원이요?”

“내가 전에 말했잖아. 프로선발전 통과하면 도와줄 거라고. 물론 그보다 훨씬 대단한 것을 구해놨지만. 하하하.”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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