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20- 멘탈 갑
“어때요?”
“아직! 조금 더 뛰자.”
그저 집중력을 높이려고 했다.
그래서 1km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봤는데, 안 프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더 뛰자고 제안했다. 아마도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얼굴에 스치는 바람에 날려 보내고 싶었던 듯.
정말 숨이 턱 차오를 때까지 뛰고 난 뒤에야 멈췄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어느 한 순간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 좋네.”
“힘들지 않겠어요?”
“들뜬 기분도 가라앉았고 적어도 몸에 힘이 들어갈 일은 없을 것 같아.”
“그럼 이제 전투모드로 돌입하는 건가요?”
“오케이! 고, 고!”
자신의 선택이 틀렸더라면 어땠을까?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러닝이 플레이에 지장을 줬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의 가장 기본인 러닝을 통해 컨디션을 끌어올리자는 판단은 적중했다.
굳이 담담함을 가장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팬들에게 인사하는 태도와 표정이 그녀의 진면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화장발보다 더 무서운 가면을 지녔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긴장하면 오히려 그걸 감추려고 표정이 사라지는 거죠?”
“아마 그랬을 거야.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닐 걸?”
“그런가요?”
안 프로 정도의 경력을 지니고도 그렇다면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최종라운드에 임하는 우승가시권의 선수들은 대개가 비슷한 심리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샷이 가능한 것은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거나 그럴 수 없다면 연습으로 굳어진 습관처럼 스윙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원하게 날려요.”
“첫 티샷인데 안전하게 때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심리적으로 밀리면서 시작할 수는 없죠. 아너이기 때문에 더더욱 강인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케이!”
왜 안전한 샷을 바라지 않겠는가.
한번 삐걱하면 흔들린다는 것을 알지만 용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결국 승리는 용기 있는 자의 몫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안 프로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차분하게 루틴을 밟은 그녀는 힘들이지 않으면서도 호쾌한 스윙스피드를 만들어냈고 까마득히 떠오른 공은 페어웨이 정중앙에 안착했다.
“오늘따라 예뻐 보입니다.”
“스윙이?”
“당근이죠. 설마 외모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 보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시끄럽고! 저녁에 우리 뭐 먹을까?”
“아 진짜!”
“역시 부대찌개가 최고겠지?”
“그럼요. 라면사리 팍팍 넣자고요.”
무슨 엉뚱한 소리나 싶었는데 그게 다 긴장을 푸는 방법이었다. 그 사이 안 프로의 뒤를 이어 타석에 올라선 공동선두 김지인의 표정은 어제와 달리 상당히 굳어 있었다.
디펜딩 챔피언인 장하나와 멋진 선방을 날린 안 프로의 기에 눌린 듯, 터무니없는 드라이브 티샷 미스를 하고 말았다.
‘교과서도 소용이 없는 건가?’
교본에나 나옴직한 정확한 스윙을 보였던 그녀가 몸이 먼저 돌면서 악성 슬라이스 샷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우승에 대한 중압감에 완전히 압도당한 샷이 터졌고 공은 우측의 벙커를 넘어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기어들어갔다.
아마 레이업도 쉽지 않을 듯.
KLPGA 챔피업십은 여타의 대회와 구분되는 메이저대회다. 상금액수도 클뿐더러 우승하면 5년간 투어시드를 보장 받고 메이저 퀸의 위상까지 덤으로 받는다.
그에 상응하는 부담도 더 클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디펜딩 챔피언인 장하나가 문제야.”
“왜요?”
“정말 탄탄한 선수거든.”
“제가 확인한 기록은 다른 말을 하던데요?”
“무슨 기록?”
“지난해 2승을 거뒀지만 사실 각종 지표는 그리 아름답지가 못하더라고요.”
필상은 동반자인 장 프로에 대한 분석을 이미 마쳤다.
66.6%의 페어웨이 안착률은 리그 하위권이고 평균 퍼팅 수도 31개를 넘어 순위가 무려 87위였다. 다만 그린 적중률이 최고 수준으로 아이언 샷은 확실하다는 의미다.
그런 기록을 술술 읊어대자 곧바로 질문이 나왔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장 프로의 당당한 플레이에 기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녀가 잘 쳐서 우승하기도 하지만 경쟁자들이 스스로 무너지는 경향이 강하다는 거죠.”
“음... 그냥 아예 신경을 끄면 된다는 거네.”
“딩동댕! 정답을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주인님.”
“7번 유틸을 다오! 공 노예.”
“노예는 좀 심한데?”
“힘도 좋고 성실한데 너무 똑똑해서 노예로 부리기에는 좀 부담스럽지. 호호호.”
장하나는 지금처럼 선두권에 오르면 동반자들을 압도할 만큼 위협적이다. 대회마다 기복이 큰 편으로 왕창 무너지기도 하지만 한 번 샷이 살아나면 상승세가 아주 무서운 선수다.
그렇다 보니 상세기록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필상은 의도적인 교정을 거친 분석을 꺼내 놨다. 그게 안 프로에게 가장 득이 될 조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티샷을 위해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포스는 정말 강렬했다. 7년간 KLPGA 10승, LPGA 4승에 빛나는 진정한 강자의 품위가 느껴졌다.
특히나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LPGA 최초로 파4 홀에서 홀인원을 했던 영상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홀인원해서 차를 타게 해달라고 홀 앞에서 절을 했다는 인터뷰는 그녀의 솔직하고 당당한 자세를 그대로 투영한다.
“카앙!”
역시 파워풀한 스윙으로 탄성을 자아냈다.
김지인이 레이업에 성공한 가운데 세컨샷을 먼저 하게 된 장 프로의 클럽은 놀랍게도 3번 우드였다.
2타 차로 앞선 선두주자들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엿보였으나 그게 도리어 안심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
분명 제대로 잘 맞았으나 공은 절묘하게도 벚꽃나무 가지에 살짝 스치더니 그린 앞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저항력이 없었다면 족히 온 그린이 되고도 남았을 좋은 샷이었기에 서로의 희비가 더 강하게 엇갈렸다.
“누런 이빨 보이지 말고 우린 차분하게 가죠.”
“정기적으로 스케일링하기 때문에 괜찮아. 얼마나 하얗고 윤기가 반짝이는데. 크크크.”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게 골프다.
카메라를 의식해 웃음기는 싹 지웠지만 터지는 웃음만은 감추기 힘들었는지 필상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이듯 웃었다.
그러더니 클럽까지 바꿨다.
“6번 아이언 줘.”
“남의 플레이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더 안전하게 가야지.”
“짜이 옌옌!”
“오케이!”
침착하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상대가 흔들릴 때는 그저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공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안 프로는 6번 아이언으로 151m를 안전하게 보냈다.
김지인이 3온에 실패한 가운데 안 프로는 122m를 9번 아이언으로 공략해 4m 버디 퍼팅을 남겼다.
라이가 썩 좋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버디를 노릴 수 있는 기회이건만 아쉬움에 계속 툴툴거렸다.
“너무 가볍게 쳤어. 그치?”
“지금 샷 하나하나에 너무 신경 쓰는 거 알아요?”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합리화시키지 마세요. 정신 차리지 못하면 한 순간에 훅! 잘 알잖아요.”
“......”
그녀는 필상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는 것이 서운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마저 그녀처럼 흔들리면 산으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벙커에 빠진 공의 상태가 좋지 못해 한 발을 러프에 기댄 상황에서도 자신감 넘치는 샷으로 온 그린에 성공한 장 프로가 포효하는 모습에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희희낙락했지만 그녀가 남긴 결과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마음의 짐처럼 무겁게 느껴진 것 같았다.
“라이를 살피면서 한 바퀴 더 돌아요.”
“그래...”
다행히 말귀를 알아들은 안 프로는 반대편까지 크게 돌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먼저 준비가 되었다고 퍼팅하는 것이 절대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4온에 성공한 김지인까지 세 명이 모두 4m 안팎의 퍼팅을 남겼다. 안시현이 자세를 잡지 않고 다시 라이를 살피자 김지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오르막 퍼팅을 남겼음에도 거리가 짧아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아직은 긴장이 풀리지 않은 듯 퍼터헤드를 쭉 밀어주지 못한 안타까운 결과였다.
그 뒤로 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벙커에서 나온 장 프로가 퍼팅준비를 서두르지 않는 모습은 먼저 하라는 강요였다.
“좌측 한 컵 반.”
“더 봐야하는 거 아냐?”
“아뇨. 절대 살살 치면 안돼요. 쫄았다고 생각할 거 아닙니까! 조금 지나도 좋다는 느낌으로 자신 있게 밀어요.”
“그래! 역시 공 노예!”
“사랑합니다, 주인님! 제발 쏙 넣어 주세요.”
“오냐. 흐흐흐.”
누가 들으면 정신 병력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여유는 긴장이 고조된 이런 상황에서는 굉장히 요긴했다. 실실 웃으며 움직였지만 퍼팅 루틴에 들어간 안 프로는 일체의 흔들림도 없는 터치를 선보였다.
- 과감하군요!
- 드, 들어갑니다. 정말 멋진 퍼팅입니다.
- 굉장히 까다로운 라이였고 심적으로도 부담스러운 상황인데 역시 안시현 프로의 멘탈은 갑이로군요.
- 캐디와의 호흡도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얼마 전에 프로선발전을 통과했다는데, 선수의 가려운 부분을 아주 잘 긁어준다고 합니다.
- 긁어준다고요? 성격이 아주 좋은가 보네요. 하하하!
- 우리가 캐디의 역할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투어프로에게 좋은 캐디는 성적과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프로 자격까지 갖춘 캐디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요.
- 힘만 좋은 캐디는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캐스터는 해설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경험한 캐디는 그저 클럽이나 날라주는 심부름꾼이었다. 미모가 출중한 여성이라면 더 산뜻한 날일뿐이었고.
실제 국내 투어에서는 캐디의 소중함이 부각된 경우가 흔치 않아 그게 전문직이라는 의식도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골프 중계를 맡은 전문캐스터라면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건만 윤 아나운서의 단순한 반응이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안 프로의 버디는 그 자체로도 소중했지만 이어진 장 프로의 퍼팅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정확히 라이가 반대인 내리막 퍼팅이었다.
“어?”
“너무 쎄!”
과감한 것은 나무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뭐든 지나쳐서 좋을 것은 없다.
안 프로의 과감한 퍼팅을 머리에 그렸던 그녀도 자신감 넘치는 스트로크를 시도했다. 하지만 밀지 못하고 때렸다.
절대 퍼터 페이스에 공이 맞는 소리가 들리면 안 될 퍼팅인데, 필상은 물론 안 프로도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우측으로 반 컵이나 빗나간 퍼팅은 실실 굴러 반대편 2m 지점에 겨우 멈췄다. 쉽다면 쉽지만 실수도 흔한 거리였다.
붉어진 표정에 그녀의 당혹감을 대변했다.
‘3온 3퍼팅을 생각하는 순간, 빗나갈 건데?’
필상도 안 프로와 함께 다음 홀로 몸을 틀었지만 청각은 그린 위에 남겨 뒀다. 홀컵에 떨어지는 청량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갤러리들의 나지막한 탄식이 그 자리를 메웠다.
“거저먹어 좋겠습니다.”
“그러게. 하지만 무임승차는 아니지. 내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닿았다고 봐.”
“그 하늘에 비 소식이 있던데 어째 감감무소식이네요?”
“위성까지 쏴 올렸다더니 일기예보가 영 시원찮더라고. 비 올 날씨는 아닌 것 같은데 바람은 좀 강해진 것 같아.”
“변수가 많은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죠. 시작이 좋으니까 이렇게 차분하게 가자고요.”
단독선두로 올라선 안 프로는 기세를 몰아 2위와의 격차를 3타차까지 벌렸다. 마지막 라운드의 코스세팅도 만만치 않았지만 갑자기 거세진 바람을 의식한 안전한 선택이 돋보였다.
하지만 9번 홀을 벗어나는 순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빗방울이 두둑두둑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갤러리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면서 선수들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둘이 함께 했던 지난 제주도 경기에서도 엉뚱한 날씨가 기이한 작용을 했던 터라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거부터 입는 게 낫겠어요.”
“넌?”
“제 것도 있어요.”
필상이 얼른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한낮이지만 비가 내리는 4월 말의 기온은 갑작스러운 체온강하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윙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요소는 미리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 와중에 필상은 안 프로의 마음을 읽었다. 그녀가 이 비에 대해 상당히 염려하고 있음이 느껴진 것이다.
하필 선두에 나선 상황에서 새로운 변수가 생긴 것은 실체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심리적 위축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