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19- 네가 꼭 필요한 나
- 윤 아나운서는 프로골퍼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아이고 이런! 갑자기 그런 난해한 질문을 던지시면 무지한 제가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 요즘 가장 잘 나가는 골프채널 캐스터가 아닙니까. 골프 실력도 출중하고. 저는 그저 아마추어들의 대체적인 생각을 듣고 싶어 그럽니다. 정답은 없으니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 굳이 대답하자면 역시 남다른 재능과 기술이 아닐까요?
살짝 부추기자 순식간에 걸려들었다.
평생을 골프에 몸 담아온 임 해설은 아마추어들이 흔하게 범하는 오류를 잡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 프로골퍼에게 기술이 중요한 덕목 같지만 사실 제가 만난 국내 투어프로들의 기량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였습니다.
- 아! 우리 선수들의 기량은 이미 세계적으로 검증을 받았죠. 10년 이상 고온에서 칼을 갈았으니 당연하죠. 하하하.
똑똑한 윤 캐스터는 자신이 덫에 걸렸음을 알아차렸다. 실제 경기의 향방은 멘탈이 좌우한다는 것을 그동안의 중계 경험을 통해 이미 인지하고 있었는데 엉뚱한 답을 낸 것이다.
하지만 임 해설은 그걸 물고 늘어지지 않고 다른 측면에서 이 주제에 대한 접근을 시작했다.
- 다들 주목하지 않지만 진짜 골프의 어려운 점은 경기시간이 다른 종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다는 겁니다.
- 그러네요. 축구는 90분이고 너무 길어서 팬들의 축소를 걱정하는 프로야구도 4시간을 넘지 않는데, 골프는 무려 나흘 동안 4라운드를 펼치는 가장 긴 경기로군요.
- 순수 경기시간만 20시간 안팎인 정말 길고 긴 대장정입니다. 오로지 캐디와 함께 다수와 겨루는 무한경쟁의 나흘 여정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 그렇군요. 그런 어려운 점을 유념하면서 안시현이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윤 캐스터가 안 프로에 대한 입장을 바꾼 적절한 타협이 이뤄졌고 골프의 특수한 측면을 잘 보여준 분석이기도 했다.
“체중을 제발 발바닥까지 바짝 내려요.”
“내 몸의 구조를 잘 알면서 그게 할 소리야?”
“이 아줌마가 진짜!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알았어. 힘 뺄게.”
아직도 농담을 던질 여유가 남은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숲길 코스 핸디캡 1번인 14번 홀은 지난 이틀간 선수들에게 큰 좌절을 안겼던 홀이다. 어제 성적 기준, 버디는 단 6개뿐이고 보기 이하를 적은 선수가 무려 41명이나 된다.
이미 전 홀에서 티샷이 흔들려 타수를 잃었던 안 프로에게는 승부의 축이 될 중요한 시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너무도 기본적인 조언이지만 안 프로는 고분고분 따랐다. 어드레스 자세에서 양발을 교차로 디디며 체중을 발바닥으로 느끼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좋아요!”
뒤에서 안 프로의 에이밍을 살핀 필상이 평소와는 달리 힘주어 던진 한 마디가 힘이 된 것일까?
땅에 붙은 듯 굳건한 하체가 받쳐준 가운데 그녀의 백스윙이 부드럽게 이륙하였고 잘 꼬인 스프링의 장력이 일거에 폭발하며 강력한 임팩트가 터졌다.
‘깡!’
소리마저 청명했던 드라이버 티샷은 385m의 오르막 파4 홀의 긴 전장을 성큼성큼 잡아먹으며 쭉쭉 뻗어나갔다.
좌우로 휨이 없는 정말 깔끔한 스트레이트 구질이었다. 앞서 티샷을 했던 젊은 선수들보다 비거리가 더 나왔고 공이 떨어진 지점도 페어웨이 정중앙이었다.
전율이 돋은 것은 필상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명에 가까운 응원소리가 일시에 터진 걸 보면.
“척추 각을 유지해야죠.”
“으으... 시어머니가 따로 없네!”
“멀쩡한 총각 할머니 만들지 말고, 척추 신경 쓰느라 다시 어께에 힘이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알죠?”
“고마해. 마이 무거따 아이가!”
“결과로 말해요!‘”
“윽!”
티샷 비거리가 짱짱했음에도 남은 거리는 147m다.
오르막을 감안하면 151m, 투어프로라도 그린보다는 좌우의 벙커가 더 크게 보이는 이런 오르막 상황에서는 6번 아이언으로 온 그린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안 프로는 핸디캡 1번 홀에서 환상적인 아이언 샷으로 갤러리들의 뜨거운 환호를 이끌어냈다. 그린 앞 러프에 맞은 공이 크게 바운드 되어 홀컵에 성큼 다가간 것이다.
“인 더 홀!”
누군가의 외침처럼 정말 들어갈 뻔했다.
만약 그게 들어갔다면 확실하게 기세를 올릴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홀컵 위를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탭인 버디를 기록한 안 프로는 다시 선두와 2타 차로 따라붙었다. 버거운 홀들은 동반자들에게도 공평하게 어려움을 안긴 가운데 안시현은 남은 홀에서 다시 1타를 줄였다.
결과적으로 오늘도 4타를 줄여 12언더로 올라섰고 뜻하지 않은 공동선두에 오른 채 무빙 데이를 멋지게 마무리했다.
또 다른 선두는 역시 김지인이었다. 오늘 1언더에 그쳤지만 차분한 그녀의 플레이는 처했던 수많은 난관을 돌파하게 만든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마지막 퍼팅을 마친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말을 건넸다.
“수고했어요.”
“공 프로님도 수고하셨어요.”
“어?”
“선생님이 부르는 걸 엿들었거든요. 프로신가 봐요?”
“햇병아리죠. 하하하.”
김지인은 무슨 의미인지 못 알아들은 것 같다. 필상의 나이에 이제 겨우 준회원이 되었다고 믿기지는 않았던 듯.
하지만 경쟁자와 다정한 인사를 나눈 모습에 안 프로가 쌍심지를 켜고 보복을 감행했다. 걷다 말고 실수를 가장해 발을 슬쩍 걸은 것이다.
수많은 갤러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넘어지려다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필상의 손을 잡아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녀와 같은 미소를 보며 깨달았다. 그게 다 유치한 보복이었음을.
“젊은 남자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다리 힘이 빠지면 남자는 끝이라고 하던데!”
“이렇게 비겁하게 나온다 이거죠?”
“무슨 소리야? 비겁하다니...”
“막판에 내 마음에 쏙 들게 쳐서 그나마 오늘은 봐 줄게요. 하지만 다시 도발하면 눈물 찔끔 나게 만들 겁니다.”
“어떻게?”
“내가 위로 누나만 셋입니다. 두 살 터울로. 그 험난한 가정사를 한 번 추론해 봐요.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진짜 궁금한데?”
“카메라 덕에 눈물 아낀 줄 아세요.”
급기야 선두에 올라섰으니 사실 누구보다 기쁘고 즐거워야할 타이밍이다. 하지만 둘은 다시 티격태격, 마치 사춘기 절정의 누나와 남동생 같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부러워했다.
팬들은 미녀 골퍼와 늘 붙어 다니는 게 부러웠고 경기를 같이 했던 프로선수들은 캐디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안 프로님. 인터뷰 좀 해 주시죠?”
“내일 해요. 오늘은 무리라는 거 알잖아요.”
“그럼 간단히 한 가지만. 저 캐디 분과는 어떤 사이시죠?”
“네?”
안 프로는 물론 그녀의 뒤를 따라 걷던 필상도 움찔했다.
기자의 펜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 때문이다.
물론 꺼리 낄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벌써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부터가 묘한 뉘앙스를 풍겼기에 찜찜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설 수도 없는 입장, 첫 마디가 날카로웠던 안 프로가 그나마 빨리 수습한 것은 다행이었다.
“우리 공필상 프로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캐디에요. 지난번에 한 번 언급했다시피 전 그의 도움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불필요한 상상은 사양할 게요.”
“아! 프로선수였군요.”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말부터 꺼내서 오늘은 그만 해야겠어요. 내일 성적이 나빠도 김 기자님 인터뷰는 오케이, 됐죠?”
안 프로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잠시 김 기자와 서 있자 다른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 태세였기 때문이다.
“미안해.”
“뭐가요?”
“괜히 구설수에 오르게 해서.”
“일부러 퍼트린 것도 아닌데 뭘 미안해해요. 전 아무 상관없으니까 어서 샤워나 하고 와요.”
“나 먼저 씻어?”
끈적끈적한 음성이 아주 그럴 듯했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만 아니었다면 홀딱 속았을지도 모를 만큼.
“에이 진짜! 배고프니까 20분, 20분 뒤에 주차장에서 봐요.”
“호호호. 알았어.”
*
정말 숨 가쁘게 달려왔다.
마지못해 시작한 캐디 일이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석 달 만에 골프채를 휘둘러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연습장에 있던 중고 하우스클럽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게 뜻밖에도 적잖은 운동이 됐다. 그저 선 채로 채만 휘두르는데 무슨 운동이 되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손으로 직접 던지거나 발로 차는 게 아니어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었고 쉽지 않다는 사실이 오기를 불러 일으켰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스윙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잡념이 침범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밥 먹다 말고 웬 멍 때리기?”
“아! 그냥 지난 1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서요.”
“골프 시작한지 정말 1년밖에 안 된 거 맞아?”
“그럼요. 사실은 1년도 안 됐죠. 최 프로님이 지금 쓰는 클럽을 선물해 준 게 한참 더워질 무렵이었으니까요.”
“기가 막히네.”
“하지만 연습한 시간이나 열정은 절대 적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래? 지독한 구석은 나도 잘 알지. 하지만 골프라는 게 그렇게 매달린다고 열리는 건 아니거든.”
“운동신경은 좀 있었죠. 사실은 어릴 때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요. 우리 엄마한테 아들은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식사하며 옛날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자 자신의 급변한 처지가 보다 확연하게 보였다. 돌아갈 마음도 없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깊숙이 골프에 함몰된 자신을 확인했다.
이제는 죽으나 사나 골프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
다행히 캐디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걱정이 없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은 아직 안개에 가린 듯 확연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3부 투어부터 착실하게 참가해 상위 리그에 올라갈 기반을 닦고 동시에 투어프로 선발전에도 출전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그 길이 너무 멀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모모카와는 연락해?”
“가끔 연락이 와요. 일본으로 오라는데 무작정 갈 수도 없고 그냥 간단히 안부만 주고받아요.”
“비행기만 타면 2시간도 안 걸려. 전에도 일본에 자주 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는 업무 때문에 간 거죠.”
“모모카도 결국 일 때문에 오라는 거 아닌가?”
“하하하. 그렇긴 하네요.”
“네가 꼭 필요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일본어가 된다면 일본투어가 훨씬 매력적이지.”
“JGTO 말입니까?”
“연간 대회가 30개 정도 열리고 이벤트 대회도 많거든. 물론 상금 액수도 비교할 수 없지.”
“깊이 생각해 봐야겠네요.”
“내가 미쳤어. 왜 잠잠한 너한테 바람을 불어 넣느냐고!”
안시현은 자신의 입술을 쥐어뜯었다.
물론 장난스런 제스처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알고도 남는다. 굳이 동료들에게 전속캐디라고 소개하는 걸 보면 앞으로도 그녀는 필상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둘의 실전 호흡은 기가 막히며 그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공부에 유익할뿐더러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어가 가능한 필상에게 일본투어에 대한 가능성을 솔직하게 언급한 것은 그만큼 필상의 능력을 높이 산다는 증거였다.
아직 공식대회에 참가조차 못해본 세미프로인데.
*
“나 긴장한 거 같아?”
“아니요. 제발 긴장 좀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나 좀 흥분한 것 같아. 그냥 몸이 붕붕 뜨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최종라운드의 아침이 밝았다.
언제나처럼 러닝으로 하루를 열었고 밥을 먹은 뒤, 연습을 시작했다. 너무 담담한 그녀의 모습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티오프 시간이 다가오자 엉뚱한 말을 꺼낸 것이다.
2016년 한국여자오픈을 우승했던 관록의 안시현이 이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당시에도 굳건한 플레이를 보여줬기에.
“나와요.”
“어딜 가게?”
“나랑 한 바퀴 돌아요.”
“사람들이 많은데?”
“없는 데로 가야죠. 이럴 때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게 가장 좋더라고요.”
“아! 뛰자고?”
“네. 발에 땀이 나게 뛰면 잡념은 사라질 겁니다.”
그게 정답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변화가 필요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티오프 시간은 흥분을 더 가중시킬 것이기에.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