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8화 (18/354)

ILG018- 인연이 아니었다

“둘 다 만만치 않네요.”

“겁 없는 애들이지.”

“김지인은 굉장히 섬세하고 하민영은 완전히 파워풀하네요. 하체 리드가 아주 기가 막혀요!”

“지금 경쟁자를 칭찬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아줌마도 아주 잘 하고 있으니까 구시렁대지 말고 샷에나 집중하세요. 경쟁자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것은 내 몫이니까.”

“별 걸 다하네!”

툴툴 거렸지만 안시현은 곧 신경 끄고 연습에 매진했다.

필상은 그동안 골프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다양한 선수들의 실전스윙을 보는 것은 더 좋은 공부였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배웠고 투어에서 상위 성적을 내는 걸 보면 둘 다 보기 드문 좋은 스윙을 구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 그 누구도 똑같은 체격조건은 없으며 근육의 발달이나 유연성은 물론 성격과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모두 제각각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스윙을 찾았고 시시때때로 바뀌는 컨디션에 따른 해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하나씩 분석하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다 나은 실력을 장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어? 이건 뭐지?”

둘의 상세한 기록을 확인하던 필상은 의외의 포인트를 발견했다. 분명 누가 봐도 하민영이 더 파워풀한 샷을 구사하는데 드라이브 평균비거리는 김지인이 10야드나 더 길었다.

더 흥미로운 기록은 페어웨이 안착률이다. 255야드를 보낸 김지인은 70% 안팎으로 리그 하위권인 반면 245야드를 보낸 하민영은 76%를 기록해 상위권이었다.

조금 더 멀리 보내면 세컨샷에는 도움이 되지만 방향성은 역시 비거리와 반비례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지난해 둘 다 선방했지만 우열을 가른 것은 거의 1타의 차이를 보였던 평균 퍼트 수, 그걸 주목할 필요를 느꼈다.

“퍼팅은 돈이라더니, 정말 그러네.”

하민영의 시즌 상금이 무려 2억 6천만 원이나 적었다.

페어웨이 안착률, 그린 적중률이 앞서는데도 평균 타수가 높은 것이 오로지 퍼팅 때문이라는 분석이 도출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민영은 셋 중에 가장 먼저 연습그린으로 향했고 상당히 많은 시간을 퍼팅연습에 할애했다.

본인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과연 실전에서는 어떤 결과를 나을지 두고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급기야 티오프 시간은 다가왔고 안시현은 수많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1번 홀을 향해 걸어갔다.

갤러리들의 과한 시선을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그런 모습은 필상도 필히 배워야 할 점이다.

“공 프로. 오늘의 전략은?”

“목표가 뚜렷한데 쉴 틈이 있을까요?”

“그렇지? 3타 차로 뒤지고 있는 마당에 지킬 이유가 없지.”

“일단 전반에 최대한 줄이고 상황에 따라 후반 전략을 다시 세우는 거로!”

“오케이!”

호흡이 쩍쩍 맞았다.

흔히 상위권 선수들은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신인인 경우이거나 우승이 목표가 아닌 선수들의 구상이다.

애초에 작정하길 안 프로는 우승을 마음에 품었다. 그렇다면 3타 차로 앞선 선두가 신중한 플레이를 펼치는 사이, 바짝 뒤를 추격해야 옳다.

- 역시 챔피언 조, 첫 홀부터 불꽃을 튀기네요!

- 추격하는 선수들도 대단하지만 단독선두인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버디를 잡은 김지인도 대답합니다.

- 두 젊은 선수들의 활짝 핀 기량은 이미 예상했지만 안시현 프로의 이번 시즌 출발도 굉장히 좋지요?

- 네. 그렇습니다. 개막전에서 3위를 거두고 다시 메이저대회에서 선두권에 나서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을 거라는 평가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 간혹 중견선수들이 우승을 거두지만 그래도 제 2의 전성기라는 평가는 다소 섣부르지 않을까요?

- 젊은 선수들의 기량이 출중하고 실제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인정하지만 골프는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는 경기입니다. 안 프로의 경험과 노련함 또한 소중한 자산이고 체력이 받쳐주지 않을 나이도 아니잖습니까!

캐스터와 해설자의 의견이 시작부터 갈렸다.

젊은 캐스터는 아무래도 신인들의 돌풍을 우위에 뒀지만 투어프로 출신인 중견 해설자는 경험이라는 자산을 강조했다.

실제 세계적인 추세가 젊은 선수들의 우승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남자투어에 비해 여자투어는 20대 초반에 세계 랭킹에 이름을 올린 선수도 많다.

대부분 한국선수라는 것이 자랑스럽지만 늦게 골프를 시작한 필상으로서는 그다지 반가운 추세는 아니었다.

여하튼 1번 홀에서 셋 다 버디를 기록하며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을 경쟁의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128야드의 파3, 2번 홀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그린 좌측 능선의 상층부에 핀이 꽂혔으나 아너인 김지인은 그린 한가운데를 노렸고 본대로 정확히 떨어뜨렸다.

“굿 샷! 안전하게도 치네.”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 내리막 훅 라이라서 5m 거리에서 버디를 노리기에는 버거워요.”

“그런가?”

뒤를 이은 하민영은 그린 중앙을 보고 드로우 샷을 구사했는데 아마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훅이 많이 걸리고도 짧아 좌측 경사면에 떨어진 공이 데굴데굴 굴렀다.

하마터면 공이 그린에 바로 붙어 있는 워터해저드에 빠질 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경계면의 좁은 러프에 섰다.

긴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표정은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는 듯 했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파악한 바, 그 러프는 제법 긴데다가 역결이라서 어프로치가 상당히 어려운 위치였다.

“9번으로 바로 갈게.”

“스트레이트.”

“오케이!”

안 프로의 티샷도 조금 짧았다.

하지만 탄도를 높인 컨트롤 샷이었기에 그린에 떨어진 공은 거의 구르지 않고 경사면 아랫부분에 우뚝 멈춰 섰다.

“아! 짧았네. 맞바람이라도 있었나?”

“탄도가 기가 막힌 탓이죠. 그게 아니라면 공이 두려움에 벌벌 떤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떨긴 왜 떨어?”

“타이트한 바지주머니에 너무 오래 끼어 있어서.”

“뭐야? 설마 내 패션에 이의를 제기하는 거야?”

“제가 감히 베스트 드레서한테 그럴 리가요!”

낮으로는 기온이 제법 따스했다.

그래서인지 안 프로는 반바지를 갈아입고 나왔는데 필상이 보기에는 너무 타이트했다. 유난히 눈에 박히는 하체 라인이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름의 개성이라 꾹 참고 있었는데 엉겁결에 흘러나온 것이다. 째려보는 안 프로의 시선이 따가워 얼른 백을 매고 앞장서서 걸어야만 했다.

실수인 것은 분명했다. 연습스윙을 하다말고 자꾸 옷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집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 꼬집기에는 좀 무서웠다. 정말 한 방 맞을 것 같아서.

“틱!”

프로도 실수를 한다.

그런 장면은 화면에 잘 보여주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의 하민영처럼 깊은 러프에 빠진 공을 띄우려다 클럽헤드가 공의 아랫부분만 살짝 훑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 결과 공은 오르막을 타기는커녕 안 프로의 마크 뒤에 서 버렸다. 실망스러운 결과지만 안 프로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정확한 라이를 미리 보여줄 테니까.

그리고 실수는 또 실수를 부른다.

홀컵 우측으로 한 컵 정도 경사를 읽은 것은 필상의 생각과 일치했지만 실제 퍼팅 스트로크는 연습을 무색케 했다.

퍼터 헤드의 테이크백부터 흔들렸다. 부드러워야할 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멈추고 다시 치면 되는데 그냥 밀었다.

페이스가 살짝 열렸고 파 세이브에 실패하고 말았다.

‘쉬운 홀에서 타수를 잃어 타격이 좀 있겠는데?’

안 프로가 그걸 참조해 바로 치면 좋을 타이밍에 비슷한 거리를 남긴 김지인이 먼저 퍼팅 자세를 잡았다.

나름 미묘한 견제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필상은 상당히 어려운 퍼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굴러가는 공의 스피드나 라이가 아주 정확했다. 그대로 홀컵에 쏙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홀컵을 빙그르 핥은 공은 다시 돌아 나왔다.

“우우...”

“아깝다 진짜!”

사방에서 아쉬움의 탄식이 터졌다.

깜직한 외모를 갖춘 그녀가 지난 이틀간 눈부신 샷을 선보이며 단독선두에 나섰으니 응원하는 팬들이 왜 없겠는가.

굳이 팬이 아니더라도 입장권을 사서 대회의 갤러리로 찾아올 정도면 골프를 모를 리가 없다. 매번 선수들의 플레이에 감정이입을 하는 탓에 절묘한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열광한다. 지금 퍼팅도 버디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라이에서 정확한 스트로크를 했음에도 너무 아깝게 버디를 놓치자 주먹을 움켜쥐려던 주인공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만약 안시현이 버디를 잡지 못했다면 그나마 위로가 되었겠으나 잡은 기회를 놓칠 안 프로가 아니었다.

“나이스 퍼팅!”

“이제 한 타 줄였네?”

“스코어는 내가 신경 쓸 테니까 샷에만 집중해요!”

“너무 집중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재미있는 얘기 좀 해 봐.”

“이 시끌벅적한 상황에서요?”

“왜 아직 결혼은 안 한 거야? 멀쩡히 생겨 가지고.”

머리 아플 그녀의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푹 찌르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하필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난감했지만 꾸며대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역정 또한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채였어요. 남자구실을 잘 못할 것 같아 보였나 봅니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남자구실을 못해?”

“다니던 회사에서 잘렸고 소송에 휘말려 탈탈 털렸거든요.”

심각한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필상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하던 안 프로가 더는 묻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그러자 이변에는 필상이 오히려 어색해졌다. 그녀가 원한 것은 어둡고 무거운 화제가 아닌데 너무 솔직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서 한 발 더 디뎠다.

“이젠 괜찮습니다. 악몽에서 헤어 나왔거든요.”

“그래. 지금 공 프로는 누구든 원하는 프로캐디고 이제 투어도 뛸 거잖아. 아마 누군지는 몰라도 후회할 거야.”

“남의 여자가 되었는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제 길을 묵묵히 가렵니다.”

“그 여자 결혼했구나!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해.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뭐!”

그래. 인연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좌절에 몸부림치는 자신을 두고 돌아 설 여자였다면 함께 했어도 언젠가는 자신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이성은 분명 그렇게 소리치지만 감정의 찌꺼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 화제가 나오자 기분이 우울해진 것을 보면.

“괜찮았지?”

“네. 완벽한 샷이네요.”

미안했던지 안 프로는 더 집중했다.

좋은 플레이를 펼치는 것이 마치 필상을 위하는 것처럼 멋진 샷을 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칭찬을 갈구했다.

여하튼 그런 노력은 결과로 이어졌다.

목표한 대로 전반을 4언더로 마쳤고 선두와 한 타차까지 따라붙었다. 안타까운 것은 하민영이 버디와 보기를 맞바꾸며 타수를 줄이지 못한 것이다.

[-13 김지인/ -12 안시현, 장하나/ -11 이지현, 최혜진]

리더보드에 쟁쟁한 선수들의 기록이 올라왔다.

“위보다 아래가 더 무섭네.”

“그러네요. 하지만 후반은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일단 선두가 가시권에 들어왔으니까.”

그러겠노라 말은 했지만 안 프로의 도전의식은 시도 때도 없이 발휘되었다. 자신감에서 비롯된 공격본능은 좀처럼 누르기 힘들었는지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10번, 13번 홀에서 보기를 기록하며 어렵게 쌓은 공든 탑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무너지면 내일이 보장되지 않을 것 같아 필상은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있을 것 같지만 어떤 상황에서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기본을 지키는 것이다.

- 전반을 무서운 기세로 치고 나가던 안시현 프로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다소 힘에 부친 것 같지 않나요?

- 힘이 부치기보다는 의욕이 너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이번 대회 들어 내내 샷이 좋았는데 코앞까지 다가온 선두의 냄새를 맡자 살짝 페이스가 오버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오버페이스라는 거죠? 그러고 보면 아무리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해도 흥분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아요.

캐스터는 기존의 자기주장을 은근슬쩍 끼어 넣으며 화제의 포인트를 흐렸다. 경험이 큰 자산이 아니라고 치부한 것이다.

그의 접근방향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해설자는 차라리 더 중요한 부분을 부각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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