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17- 무빙 데이
“어서 씻고 밥 먹으러 나가자.”
“밖에 나가자고요?”
“응. 이렇게 잘 친 날은 내가 나에게 상을 줘야 하거든!”
“그럴 자격 충분합니다.”
“웬일이야? 태클도 걸지 않고?”
“밥은 일단 얻어먹어야 하니까요. 하하하.”
참가선수가 135명인 탓에 경기는 2부로 진행된다.
아침 7시에 시작한 팀들이 경기를 마치면 11시 반부터 2부 팀들이 출발해 성적이 다 나오려면 6시가 지나야 한다.
그래서 궁금할 것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6언더는 아주 훌륭한 스코어였기에 샤워를 마친 필상과 안 프로는 차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진짜 배고프네요. 우리 뭘 먹으러 가죠?”
“이 동네 하면 떠오르는 거.”
“아! 부대찌개요?”
“응. 내가 아주 잘 하는 집을 알거든. 난 12번 홀부터 그 생각이 간절해 침이 꼴깍꼴깍 넘어 갔었어.”
“에이 어쩐지! 클럽이 축축하다 했더니 그게 침이었어요?”
“호호호. 아마 굉장히 향긋했을 텐데?”
“그랬다 쳐요.”
“어?”
“라면사리는 넉넉히 시켜도 되죠?”
“에라 이 인간아!”
6언더면 선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동 4위였다.
7언더가 무려 3명이나 나왔는데 버디를 8개나 잡은 선수가 둘이고, 7번 홀에서 이글을 잡은 선수도 선두권에 나섰다.
“실로 무시무시하군요.”
“요새 애들이 워낙 짱짱하잖아.”
“하지만 지속성은 좀 떨어지겠죠?”
“그러기를 바라는 건 좀 그렇고 내가 잘 쳐야지.”
“와아! 어쩐지 좀 많이 먹는 것 같더라니, 속이 많이 불편해요?”
“하여간! 연습이나 하러 가자.”
“그건 마음에 드네요.”
안 프로가 연습을 시작하자 필상은 조용히 뒤에 자리를 잡고 오늘 확인한 코스의 특징들을 야디지북에 정리했다.
다행히 오늘은 코스세팅이 쉬웠지만 내일은 확 어려워질 것이다. 명색이 메이저대회인데 오늘 언더파가 무려 39명이나 나왔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서 각 홀을 하나씩 떠올리며 행여나 생길지 모를 트러블 상황에 대비해 숨은 지뢰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10, 13, 14, 16번 홀은 공히 파4 홀인데 오늘도 쉽지 않았지만 조금만 어렵게 비틀면 사람 잡을 홀이 될 것 같았다.
경기 시작과 더불어 와르르 무너지지 않으려면 다부진 대비를 해야겠다는 자체 진단을 내렸다.
*
“연습 안 도와주고 어딜 가?”
“한 바퀴 빙 돌고 올게요.”
여느 때처럼 일찌감치 아침을 열었고 식사를 마친 필상은 안 프로와 함께 연습장에 진을 쳤다. 오늘은 2부 티오프라 12시 정각에 인코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부 팀들이 절반쯤 출발한 뒤, 느닷없이 필상이 자리를 뜬 것이다. 사적인 시간을 가질 성격이 아닌지라 의아했지만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그 때는 몰랐다.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나타난 필상은 클럽을 정리하더니 어프로치 연습장으로 안 프로를 끌고 갔다.
“세팅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네?”
“네. 러프를 어제보다 길게 잘랐더라고요. 게다가 우린 오후라서 그동안 더 자랄 겁니다. 얼른 숏 게임 연습하고 벙커샷도 좀 점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케이!”
안시현은 필상의 의도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따랐다.
그녀도 대충 감은 잡은 것 같았으나 절대적인 신뢰가 없다면 귀찮게 생각할 수도 있는 번거로운 연습을 진행했다.
기본적으로 캐디로서의 자질도 우수하지만 필상도 프로선수라고 인정한 것이다. 직접 경기모습을 본 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언니!”
“어?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는데 어쩜 한 번 마주치지도 않지?”
“그러게. 올해 아주 펄펄 날던데?”
“치. 3위 한 번 한 거 가지고 뭘.”
익히 필상도 안면이 있는 홍진주가 한 조였다. 지난해 모모카와 함께 동반 라운드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없이 스쳐 지나간 동반자의 캐디 중에 한 명일 테니까.
그런데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아, 네.”
“소문은 들었는데 정말 멀쩡하네요?”
소문이라는 단어에 순간 움찔했지만 멀쩡하다는 말을 듣고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녀도 자신이 벼락 맞은 사건에 대해 들었던 모양이다.
당시 그 경기는 TV 중계가 되었는데 카메라에 잡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 절감했다. 원지 않는 유명세를 타고 그 영상이 천지사방을 돌아다니지 않았겠는가!
그저 씩 웃고 말았다.
왈가왈부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안 프로랑 전속 계약한 건가요?”
그건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안시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당연하지. 내가 태안까지 가서 귀한 몸을 모셔 왔는데.”
“참 정성도 대단하네. 근데 페럼에서 일하는 거 아니었나?”
“우리 공 프로가 주초에 치러진 프로선발전에 참가했거든.”
“프로? 준회원이 된 건가요?”
질문은 필상에게 던졌지만 이번에도 안 프로가 대답했다.
“그럼 36홀 스트로크에 4언더를 쳐 수석으로 통과했어.”
“와!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축하의 악수를 다시 나누자 안시현이 흘겨봤다.
대체 무슨 심사인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행동은 삼가야했기에 슬쩍 뒤로 빠졌다.
아마 다른 선수의 캐디를 하는 것은 원지 않는 것 같았다. 무한신뢰의 이면에 붙은 집착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두 기센 언니 사이에 낀 20대 초반 선수는 말도 붙이지 못한 채 얌전히 몸만 풀고 있었다. 어제 이븐파를 쳤으니 오늘 성적이 중요할 텐데 대진 운이 나쁘다고 봐야 할지.
첫 홀부터 험난한 여정이 기다렸다. 티샷은 다들 무난했지만 377m의 오르막 파4 홀이었기에 세컨샷의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홍 프로 치는 거 잘 봐요.”
“왜?”
“어제 4오버를 쳤기 때문에 바로 핀을 노릴 겁니다. 하지만 우측 벙커에 바짝 붙은 핀을 공략하면 무조건 짧아요.”
그린 주변에 자연림이 우거져 바람은 신경 쓸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필상이 장담한 대로 홍진주의 샷은 턱없이 짧아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느낄 수 없는 맞바람이 강했던 듯.
게다가 비슷한 거리를 남긴 방윤지에게 먼저 치라고 했더니 그린 중앙을 보고 때린 공이 그린을 살짝 넘겼다.
“좋네!”
“아닐 걸요!”
“그럼 난 어떻게 치라고?”
“핀을 바로 봐요. 150m친다고 생각해요.”
“150?”
현재 남은 거리는 141m다.
오르막을 감안해도 145m면 충분해 7번 아이언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필상은 떡하니 6번 아이언을 건넸다.
그러며 한 마디를 더 보탰다.
“6번으로도 띄울 수 있죠?”
“띄울 수는 있지만 그럴 바에는 7번이 낫지 않을까?”
“짧으면 안 되지만 훅 지나가면 어프로치가 만만치 않아요. 더도 말고 홀컵을 맞춘다는 느낌으로 스핀을 거세요.”
“오케이.”
웬만해서는 이렇게 강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상은 이미 셋 중에 한 명이 이 홀에서 타수를 잃는 걸 봤다.
핀이 벙커에 바짝 붙어 벙커샷은 악몽을 선사했고 퍼팅도 오르막을 남기지 않는 한 붙이기도 쉽지 않은 경사면에 홀컵을 뚫었다.
“굿 샷!”
“어? 웬일이야?”
“공이 그린 우측 끝에 잘 선 것 같아서요.”
“버디는 어려운 거리잖아.”
“버디요? 일단 가서 봐요.”
한 마디로 가장 악랄한 위치에 핀에 꽂혀 있었다.
홍 프로의 벙커샷은 턱에 맞고 탈출에 실패했으며 재차 친 공이 방윤지의 공보다도 더 멀리 떨어졌다. 낙심한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준비된 방윤지가 먼저 퍼팅을 한 것도 실수였다.
보기보다 경사가 심해 방향도 맞지 않았을 뿐더러 그린을 넘어 반대편 에이프런에 겨우 멈춰선 것이다.
“이걸 보러 돌아다녔던 거구나!”
“붙인다는 생각으로 쳐야 합니다. 라이는 볼 것도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프로가 그럴 수 있나!”
자존심을 세우며 라이를 확인하던 안시현은 홍 프로의 5번째 시도가 방윤지와 비슷한 결과를 낳자 거리에 더 집중했다.
‘러프는 길게 그린은 짧게’
시각적으로 감지하기 힘든 미세한 변화지만 그걸 인지하지 못한 선수들에게는 암담한 결과를 선사했다.
안 프로는 잘 붙여 파로 막았지만 방윤지는 보기, 홍 프로는 트리플보기를 기록하며 희비가 엇갈렸다.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야.”
“하하하. 군대도 가보지 않고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쓰죠?”
“다 들은 풍월이지. 호호호.”
연속해서 7개 홀을 파로 막아낸 안 프로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빈곤 속 상대적 풍요라고 해야 할까?
다른 조의 선수들 성적은 어떨지 궁금했으나 지금까지 플레이를 했던 선수 중에 인코스 7개 홀에서 타수를 잃지 않은 선수는 135명 중에 2명뿐이었다.
가히 자랑할 만한 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험지를 무사히 넘긴 뒤, 이어진 홀에서 타수를 2타밖에 줄이지 못한 것은 좀 아쉬웠다. 좋은 찬스가 많았지만 행운이 외면한다는 느낌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11언더가 있다고?”
“네. 어제 버디를 8개나 하더니 오늘도 7개를 잡았답니다.”
“그럼 보기를 총 5개나 했단 말이야?”
“어제는 보기 하나였고 오늘은 더블 하나에 보기 2개요.”
“그럼 해볼 만 하네.”
자신에 비해 기복이 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동 2위인 안 프로를 3타 차로 앞선 주인공은 송암배를 우승했던 국가대표 출신 김지인 프로였다.
2016년 데뷔한 해에 2위를 두 번 기록하더니 이듬해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을 우승했고 작년에도 4억 가량을 벌어 상금 순위 13위를 마크한 24살의 신예 강자다.
안 프로의 자신감과는 달리 우승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그 밖에도 장하나, 최혜진과 같은 신성들이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다음에 꼭 한 번 봐요.”
“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힘든 하루였죠. 이제 공 프로도 투어에 참가하면 이런 기분 종종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헉! 악담은 사양하겠습니다.”
컷 탈락이 확정된 홍 프로와 인사를 나누는 기분은 아주 묘했다. 남의 일이 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프로 자격을 얻은 것이 많은 것을 바꿔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거운 2라운드 때문에 예선통과 컷은 1오버로 결정되었고 64명이 본선 3, 4라운드에 진출했다. 그 말은 곧 71명의 프로들은 오늘 저녁 짐 싸서 돌아간다는 의미다.
“이제 진정한 승부인가?”
저녁을 먹고 연습장에 왔는데 지난 이틀보다 더 붐볐다. 이미 떠날 사람은 떠나갔음에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현역 선수들 중에는 거의 최고참인 안 프로 나타났지만 가볍게 목례나 눈인사만 건네고 각자 연습에 집중했다.
그게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살벌하네요.”
“만약 내가 겨우 턱걸이를 했다면 살갑게 대했겠지.”
“하하하. 설마요.”
“여자프로들의 승부욕이 얼마나 대단하지 모르는구나. 승부가 결정되거나 상관이 없는 때는 선후배가 확실하지만 지금처럼 경쟁 중일 때는 오히려 열 받은 일이 많다니까!”
물론 안 프로는 잘 적응했다.
본인도 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선을 통과하고 진검승부에 나서는 선수들의 각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연습광경을 지켜보며 필상도 내일을 준비했다.
그저 캐디 일을 잘 하는 것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곧 투어에 참가할 포부를 지녔기에, 비록 내 손으로 치는 것은 아니지만 최고의 성적을 받고 싶었다.
다행히 안 프로는 샷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자신이 조금만 더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우승도 일궈낼 것이다.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지만 결국 기본에 충실한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다. 동시에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
무빙 데이의 아침이 밝았다.
결승전의 첫날인 3라운드가 진행되는 토요일을 ‘무빙 데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성적의 변화가 극심한 날이기 때문이다.
리더보드 최상단의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우승을 목표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순위가 심하게 요동친다.
하위권 32명은 인코스에서 출발하지만 상위권 32명은 아웃코스에서 성적의 역순으로 출발하며 따라붙는 팬들의 숫자도, 방송중계 카메라의 수도 훨씬 많다.
안 프로는 챔피언 조에 포함되어 11:50 티오프로 배정되었는데 동반자는 11언더 김지인과 8언더 하민영이었다.
연습하던 중에 그 두 선수의 스윙을 볼 수 있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