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6화 (16/354)

ILG016- 즐기는 자

“에이. 집에 들려 옷도 좀 갈아입어야 하는데...”

“내가 빨래도 다 해준 다니까!”

“어이구! 됐습니다요.”

“이제 교육받고 나면 프론티어 투어에 참가할 거야?”

“글쎄요. 하도 험난한 길이라 이것저것 알아보고 결정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일부터 펼쳐질 대회부터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맞다.”

“레이크우드CC라고 했죠?”

“자. 야디지북.”

기가 막힐 일이다.

당장 내일이 대회 개막일이다.

아무리 필상이 실력 좋은 캐디라도 연습라운드도 함께 돌지 못했고 코스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는데 왜 굳이 200km를 달려와 데려가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갸륵한 정성을 알기에 거부할 수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그만한 가치를 해야 한다는 부담은 무거웠다. 지난 번 제주에서 단독 3위를 기록한 것이 만족스러웠을지 모르나 그로 인해 필상도 적잖은 수입을 올렸다.

체류경비를 빼고 기본수당을 200만원 받았는데, 탑 10에 들 경우 7% 성과급 계약을 했기에 336만원이 추가로 입금되었다.

“운전 내가 할까?”

“아닙니다. 이건 천천히 봐도 되니까. 한숨 자요.”

“잠이 와야 자지. 재워줄 것도 아니면서!”

“하하하. 재워드리고 싶지만 운전을 해야 해서! 근데 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요?”

“난 네가 편하거든. 믿음직하기도 하고.”

“기대에 부응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코스는 내가 이미 잘 파악해 뒀으니까 넌 그냥 내 곁을 지켜주기만 하면 돼!”

“저의 전문성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네요. 하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싫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픈 자신을 위해 아침에 중요한 경기가 있음에도 병실을 지켰던 그녀다. 예쁘다고 생각지 않는 그녀가 가끔 여자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정을 느낀다.

추후 한 길을 가는 동료애로 발전하기를 바라고.

저녁 늦게 대회가 열리는 양주에 도착했다. 시즌 첫 메이저대회라서 그런지 이틀간 자신이 경기를 했던 골든베이GR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늦은 시간인데도 취재진들이 사방에 서성였고 연습장에도 TV에서나 보던 유명 프로들이 내일을 위한 마지막 점검에 여념이 없었다.

“난 몸 풀고 있을 테니까 공부 시작해.”

“우승 상금이 2억이네요?”

“우승하면 20% 줄게.”

“우승 못할 거라고 막 던지는 건가요?”

“아니. 기필코 우승하고 싶다는 거야. 자신 없는 거야?”

“일단 공부해야 하니까 말 시키지 말고 샷이나 해요.”

“어? 지가 말 시켜 놓고!”

총상금 10억 원의 대회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세계였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삶에 푹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꿈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프론티어 투어에 참가하는 것보다 전속캐디로 활약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3부 투어의 상금이라고 해봐야 탑 10에 들지 못하면 오히려 마이너스다. 참가비와 체류비용이 더 들기 때문에.

“한 방이 필요해!”

“뭐라고?”

“아, 아닙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오늘 따라 공부하는 학생의 집중력이 영 시원찮은데?”

“그러게요.”

“많이 피곤해?”

“아니에요. 집중할 테니까 저 신경 쓰지 말고 연습해요. 오른팔이 닭 날개인 것은 알죠?”

“어? 팔이 떨어져?”

“피곤하면 그냥 쉬던지.”

“야!”

반격의 농담의 빽 소리를 지르는 광경이 낯설지 않고 편안했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친구를 해도 될 듯.

그녀는 이번 대회를 위해 부단히 칼을 갈은 것 같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체중 조절도 성공한 것 같다.

야디지북을 분석하는 필상의 귀로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샷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우승을 위한 마지막 퍼즐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 깊은 곳에서 강한 의지가 끓어올랐다.

자신이 프로 자격을 얻어 발전했듯이 캐디로서의 능력도 더불어 나아졌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이젠 적어도 선수의 고충과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라운드 티오프 시간이 좋네요.”

“동반자들도 부담이 없어서 딱 그만이지?”

첫째 날 아침이 밝았다.

전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 주변에서 러닝으로 몸을 풀었고 든든하게 식사를 마친 둘은 1번 홀을 향해 이동했다.

7조로 편성된 안 프로는 7:30 아웃코스에서 외국선수 한 명, 그리고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선수와 출발한다.

쟁쟁한 선수들과의 매치업을 피한 것은 성적을 위해서는 바람직하다. 함께 잘 칠 수도 있지만 괜히 힘이 들어가 자기만의 플레이를 펼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안 프로의 전투력은 지상 최강이라 믿지만 시작은 차분한 것이 낫다.

“558야드 파 5홀이면 괜찮네요.”

“그래도 2온은 무리더라고.”

“그럼 3온 작전으로 가야겠네요.”

“일단 티샷 거리 좀 보자고.”

드라이버 샷은 딱히 조언할 것이 없는 홀이다.

IP지점 우측의 징그럽게 생긴 벙커를 피해야 하고 좌측의 벙커는 도달하기 힘든 거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2온을 노리기 힘들다고 보면 정확히 한가운데로 보내면 된다. 어드레스 자세도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샷도 파워가 넘쳐 공은 파란 하늘을 가르며 멋지게 날았다.

“어? 드로우를 걸었나?”

그제야 티샷 거리를 보고 결정하자던 의미를 깨달았다.

최근 몸 상태가 좋아진 그녀는 과거와 같은 비거리를 되찾았다. 더불어 자신감도 충만했는데 그 부작용이 드러났다.

훅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페어웨이 좌측에 떨어진 공이 데굴데굴 구르더니 페어웨이 좌측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무려 241m 거리였기에 필상은 깜짝 놀랐다.

“아깝지?”

“벙커에 빠진 게 아까운 건가요? 아니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은 게 아까운 건가요?”

“둘 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필상은 일단 꾹 눌렀다.

샷 하나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섣부르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안 프로는 벙커에서도 세컨샷을 깔끔하게 뽑아냈다.

벚꽃 나무 좌측에 떨어진 공은 동반자들보다는 멀지만 핀을 공략하기에 무난한 위치였다. 92m를 샌드웨지로 공략한 공은 이번에도 살짝 왼쪽으로 휘어 좌측 에이프런에 멈췄다.

뭔가 2% 부족하다는 것을 본인도 느낀 것 같지만 아직 무언가를 바꾸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한 필상은 그린의 라이부터 살폈다.

“좌측으로 세 컵.”

“과감하게?”

“네.”

에이밍은 정확했으나 스트로크 순간, 퍼터 페이스가 살짝 닫혔다. 공이 홀컵 왼쪽으로 볼 하나 차이로 빠졌고 아쉬운 파로 첫 홀을 끝냈다.

외국 선수가 편안하게 버디를 기록하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 아주 씁쓸했다. 안 프로도 충분히 타수를 줄일 수 있는 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해.”

“네?”

“인상 쓰지 말고 그냥 말 하라고.”

“아직 초반인데요, 뭘.”

“아니야. 네 말 들을 게. 그러려고 모셔온 거잖아.”

1라운드에 임하는 필상은 가급적 코스파악에 집중하려고 했다. 늦어서 미진한 제 몫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기에.

그런데 아는 것이 죄인지, 그녀의 오버페이스가 자꾸 마음에 걸렸고 그게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타수를 잃지는 않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녀가 먼저 마음을 열었다는 점이다.

다소 신경질적인 음성이었지만.

“왜 훅 구질을 구사합니까?”

“요즘 내 구질이 그런 걸 어떡해.”

“구질이 그런 게 아니라 거리를 의식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제 나는 과거처럼 비거리가 짱짱하다는 뭐 그런.”

“......”

“아픈 곳을 찌를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굳이 드로우를 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스트레이트로 칠 수 없다면 모를까 휘는 각도까지 조절할 수는 없다는 거 모르지 않잖아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얼굴이 좀 붉어졌을 뿐, 파3 홀에서 행동으로 보여줬다.

128야드의 상당히 짧은 2번 홀, 그녀는 9번 아이언을 잡았다. 그리고는 한 치의 휨도 없는 깨끗한 샷을 선보였다.

필상의 트레이드마크인 쓰리쿼터 스윙으로 컨트롤 샷을 보여준 것이다. 결과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3m 버디 기회를 맞이한 그녀는 티 박스에서 내려오며 씩 웃어 보였다. 이제야 마음이 풀린 것이다.

“됐어?”

“몇 근이나 뺀 거예요?”

“내가 고깃덩이냐! 근 수로 말하게!”

“열 근이면 우리 가족이 한 달은 먹을 양인데, 좀 아깝기는 하네요.”

“야!”

샷 하나에 울고 웃는 게 골프다.

필상의 피 같은 조언이 구박처럼 들려 대꾸도 하지 않더니 구질을 바꾸고 결과를 내자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2번 홀에서 버디를 낚은 뒤, 안 프로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좋은 샷을 만들 여건은 충분히 조성되었지만 들떴고 약간의 욕심이 눈을 가려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연습 때는 쭉쭉 맞아나가던 공이 실전에서 엉뚱한 결과를 만들면 누구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체하기 힘든 오버페이스를 누르고 방향을 잡자 그동안 다듬었던 샷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괜찮았지?”

3번 홀은 360야드의 파4 홀로, 페어웨이가 우에서 좌로 흐르는 상당한 오르막 홀이다. IP지점에서 그린이 보이지 않아 평상시에는 핸디캡 1번으로 평가받는 난해한 홀이다.

벙커가 페어웨이와 그린의 우측에 조성되었고 그린 좌측에는 어프로치가 가능한 공간이 있어서 왼쪽을 공략하는 좋다.

제법 높은 나무들이 티 박스 우측으로 길게 늘어선 탓에 드로우 구질보다는 페이드를 거는 것이 낫지만 거리를 손해 보지 않으려면 역시 똑바로 치는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안 프로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스트레이트 구질을 정확히 구사했다. 힘찬 스윙이 만들어낸 멋들어진 포물선을 바라보다 얼른 내려온 그녀는 필상의 칭찬을 갈구했다.

“그런대로.”

“뭐야? 이 뜨뜨미지근한 반응은?”

“나중에 얘기해.”

“뭔데 그래?”

“지금 들으면 후회할 텐데?”

“에이 진짜!”

“힙 턴이 너무 무거워.”

“제대로 되는 것 같은데? 무겁다는 건 무슨 말이야?”

“골반이 너무 커서 어쩔 수 없나?”

“이 인간이 정말!”

다소 과한 농담이지만 둘은 이미 적응을 마쳤다.

서른을 넘긴 성인 남녀가 티격태격 즐길 농담은 많지 않다. 상대에 따라 조심할 부분이지만 묘하게도 야한 농담을 주고받는 게 둘에게는 거부감이 없었다.

일찍이 US오픈을 3차례나 석권한 주인공이자 최고령 챔피언(우승 당시 45세)이었던 헤일 어윈이 이르길, 골프를 즐기는 것이 바로 이기는 조건이 된다고 했다.

격의 없는 농담이 골프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다행히 위험한 선을 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이 어린 모모카와는 교감할 수 없었던 여유와 편안함이 만들어준 각별한 관계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린 왼쪽 끝을 보는 게 어때?”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자신 있게 중앙을 노리죠!”

“뭐지?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넋 나갔던 선수가 정신을 차렸으니 이제 캐디인 저라도 파이팅을 좀 하려고요.”

“오케이. 8번 줘.”

남은 거리는 118m, 오르막을 감안하면 125m는 쳐야 한다. 안 프로는 그린 우측에서 전면의 절반까지 기어 나온 벙커를 의식해 좌측으로 올리고자 했다.

하지만 필상은 느낌이 좋았다. 8번 아이언으로 컨트롤하면 충분히 핀에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쓰리쿼터 스윙도 아주 안정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쑤어이!”

“뭘 그렇게 사람을 앞에 두고 칭찬하고 그래!”

‘쑤어이’는 보통 여성에게 예쁘다고 할 때 쓰는 태국 말이다. 단번에 알아들은 안 프로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하지만 필상은 가차 없었다.

“아마 핀에 쩍 붙었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건 외모가 아니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면서 왜 자꾸 그래요.”

“야! 한 마디도 지질 않네. 내가 누나거든, 3살이나!”

“언제는 친구하자더니 불리할 때만 누납니까?”

“에이 씨! 알았다고, 알았어!”

누가 보면 다투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

본시 좋은 캐디란 존재감이 없어야 한다. 선수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제 역할을 해야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러기 쉽지 않아 보였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샷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만끽하는 이날의 플레이는 코스를 미처 점검하지 못한 아쉬움을 덮고도 남았다.

전반에 보기 없이 4타를 줄인 안 프로는 후반에도 2타를 줄였다. 16번 홀에서 칩샷 미스가 없었다면 거의 완벽한 라운드라고 해도 좋을 멋진 출발이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