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15- 공 프로 파이팅!
“우측으로 반 클럽은 봐야할 것 같은데?”
“네. 제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프로 선발전 들어 첫 이글 찬스였다.
퍼팅은 자신 있지만 그래도 살짝 긴장된 것은 사실이다. 오르막이 제법 많아 짧게 치지 않기 위해 굳어진 어깨를 먼저 풀었고 경사도 처음 봤던 것보다 살짝 줄였다.
강하게 때리지 않는 대신 피니시를 길게 가져가며 홀컵을 향해 퍼터를 쭉 밀었다. 조금 길 것 같았으나 그것마저도 감안했던 퍼팅의 결과는 지켜보는 것이 떨릴 정도였다.
“텅!”
홀컵 뒷벽에 맞은 공이 다시 튀어나올 것처럼 붕 뜨더니 안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정말 이글을 기록한 것이다.
“갤러리들이 없는 것이 아쉽네!”
“하하. 축하는 누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7번 홀까지 무려 4타를 줄인 필상은 이후 지키는 플레이를 고수했다. 파 3홀인 8번 홀 티샷이 확 당겨지면서 공이 그린 좌측 벙커에 빠져 2온 2퍼팅으로 한 타를 잃었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잔뜩 흥분한 기분이 샷에 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주말 골퍼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흥분의 늪에 빠진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김 프로는 잘 치고 있겠죠?”
“내가 볼 때 밥은 조폭이 얻어먹을 것 같아.”
“조폭이 아니라는 거 알면서 왜 그래요. 알고 보면 다정한 성격입니다.”
“알고 난 뒤에도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
“하하. 그런가? 여하튼 잘 치고 있어야 할 텐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인코스에서 출발한 김성호도 펄펄 날았다. 어려서부터 골프를 시작했고 자질도 부족하지 않다. 참을성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한 것이 문제였으나 세월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준 듯.
“샤워하고 와. 내가 다른 애들 성적이 어떤지 알아볼 게.”
“혹시 씻는 거 싫어해요?”
“뭐?”
“늦게 출발한 선수들이 경기를 마치려면 아직 한참 남았거든요. 얼른 누님도 샤워부터 하고 와요.”
“땀 냄새 나?”
“아주 지독해요. 어서 가요.”
“이 인간이 진짜!”
자신보다 더 관심을 보이는 미향이 고마워 농담한 건데, 그걸 알면서도 발끈하는 모습이 귀여워 자꾸 장난을 치게 된다.
오늘 거둔 4언더라는 흡족한 성적이 가져다준 여유일지도 모르겠다.
“규정에 따라 역 카운트를 하면 제가 이겼다니까요!”
“그렇게 밥을 사고 싶냐?”
“이긴 사람이 사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십니까?”
“하하하. 알았어. 기필코 내일은 내가 사야 하는데...”
“4언더는 우리 둘 뿐입니다. 2언더가 한 명, 이븐파가 둘인데 상금은 없어도 형한테 우승을 양보할 생각은 없다니까요.”
김성호는 생각보다 강한 열의를 보였다.
이번 본선은 우승이 중요한 게 아니고 32위 안에 들어 프로자격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과욕을 부리면 오히려 좋은 플레이를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 한 마디 보태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이는 어려도 그가 지나온 골프 여정은 감히 비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름의 분석을 꺼내 놨다.
“작년에 2언더가 1등한 걸 보면 타수를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 오늘 세팅이 비교적 쉬워서 내일은 아주 빡빡할 것 같고.”
“그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언더를 찍어야지요. 하하하.”
김성호의 자신감이 나쁘게 않아 보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스포츠 중에 물체를 가장 멀리 보내는 운동인 골프는 여타의 스포츠와는 색다른 면이 많다.
보통의 스포츠는 대부분 일대일로 겨루기 때문에 패배의 확률이 낮고 의외의 반전도 자주 일어나 팬들을 열광시킨다.
그에 비해 골프는 100명이 넘는 선수가 동시에 우승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한다. 매번 굉장히 낮은 확률에 도전할뿐더러 우승이라는 결실은 선택받은 몇몇에 집중된다.
‘스타가 탄생하기도 좋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패배자를 낳는 종목이기도 하지!’
지난해 KPGA의 예를 봐도 연간 150여 명이 투어에 참가하지만 대회는 고작 17개, 고루 나눠도 9년에 한 번 우승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승자도 나오고 매년 우승하는 스타가 존재하기에 그 그늘에 가린 수많은 투어프로들은 절망에 허우적대다가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하고 만다.
물론 우승이 없다고 그들의 노력이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스타가 되기도 힘들며 남다른 자질을 지녔거나 지독한 행운이 따라주지 못하면 고지에 이를 수 없다.
*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필상은 언제나처럼 새벽에 일어나 러닝으로 하루를 열었고 환한 미소로 반기는 미향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는 바로 연습장으로 향했다.
이미 어제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무리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결코 수비적인 경기를 펼칠 생각은 없었다.
기왕 주어진 라운드, 특히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정규코스였기에 다시 한 번 가능성을 시험할 무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 부족하다고 여기는 부분들을 하나씩 점검하며 경기에 나설 태세를 갖췄다.
“역시 세팅이 만만치 않네요.”
“숏 게임하고 퍼팅이 중요할 것 같아.”
코스 세팅은 주최 측이 원하면 얼마든지 까다롭게 만들 수 있다. 거리의 변화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핀을 어디에 꽂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공략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인데, 특히나 해저드나 벙커에 붙여 놓거나 포대그린에서 핀을 앞에 꽂으면 샷을 하는 입장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세컨샷부터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숏 게임이 정확한 필상은 전반을 이븐파로 마칠 수 있었다.
보기를 2개나 기록한 것은 아쉽지만 버디도 2개를 잡은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운틴 코스로 이동하던 중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공 프로. 파이팅!”
“어? 여긴 웬일이세요?”
“왜긴! 모셔가려고 왔지?”
“시합 중인 사람을 모셔가긴 어딜 모셔가요?”
“이젠 프로가 됐으니 특급 대우를 해줘야 하나?”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어요. 그런 말이 게임에 영향을 준다는 거 모르십니까! 아줌마!”
“어?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의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나?”
“친구는 무슨! 여하튼 응원이나 열심히 해요. 하는 거 봐서 친구를 해 줄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반가운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안시현이었다.
필상이 알기로 이번 주에 메이저대회인 KLPGA 챔피언십이 있는데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추론은 가능했다. 데려간다는 말은 곧 자신을 전속캐디로 채용하고 싶다는 말이다. 미리 얘기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필상이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혼자 온 것은 아니다.
안시현의 옆에 빙긋이 웃으며 서 있는 최 프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보였으나 그냥 필상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잘 하고 있다는 무언의 격려였다.
하지만 홀로 이동하는 사이, 미향은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
“어떻게 아는 사이야?”
“제가 지난 3월에 전용 캐디를 해줬었거든요.”
“이젠 같은 프로인데 또 일을 부탁하려는 건가?”
“프로도 같은 프로는 아니죠. 투어카드가 있는 스타와 이제 겨우 프로 자격을 얻은 햇병아리니까요.”
“그래도 좀 그러네.”
“일거리를 준다는데 저야 고맙죠 뭐.”
미향은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묘한 시기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안시현의 등장에 경기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안시현 아냐?”
“이야! 실물이 훨씬 나은데!”
기껏해야 선수 가족이나 지인들이 갤러리로 따라다녔다. 그런데 유명 프로가 나타났으니 동반자들이 술렁일 밖에.
흥미로운 것은 덩달아 필상에게도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홀로 짱짱한 기록을 만들고 있어 원지 않는 견제의 눈길을 받았는데, 그게 순식간에 호의로 바뀐 것이다.
엄연히 성이 다른데 친누나냐고 묻는 것부터 시작해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냐는 둥, 어림도 없는 질문을 마구 던졌다.
일단 경기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그저 씩 웃고 말았다.
“공 프로. 멋지다!”
“으이그!”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운데 좋은 샷을 날릴 때마다 보란 듯이 크게 외치는 안 프로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11번 홀의 아이언 티샷은 누가 봐도 멋졌다.
152m의 아일랜드 파 3홀인데, 그린 앞의 벙커에 핀을 바짝 붙여놔 굉장한 부담을 안기는 세팅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두려움을 떨치고 8번 아이언으로 고탄도의 샷을 만들어냈다.
그린 중앙에 떨어진 공이 한번 튀었으나 브레이크라도 걸릴 듯 다시 제자리에 멈춘 것은 실력을 검증하는 증거였다.
인코스 초반에 1타를 줄인 필상은 5언더로 단독 1위를 달렸다. 물론 다른 선수들의 스코어는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필상이 경기를 압도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최 프로와 안시현의 표정은 밝았으나 나누는 대화는 상당한 진지했다.
“당장 투어에 나서도 경쟁력이 있을 것 같아요.”
“집중력이 좋아 컷 탈락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스윙은 좀 바꿀 필요가 있지.”
“쓰리쿼터 말인가요? 제가 보기엔 그게 오히려 더 좋아 보이는데요? 박인비 스윙이랑 비슷하지 않나요?”
“조금 더 가다듬으면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남자투어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의 비거리로는 버거울 거야.”
“아! 그렇겠네요. 그래도 골프 시작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저렇게 칠 수 있는 건 기적 아닌가요?”
“자질이 아주 특별하다고 봐야지.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격이야. 아주 근면하고 냉철하거든!”
“똑똑한 것은 맞는 것 같아요. 아마 현역 프로들 중에 가장 공부를 잘 하지 않았을까요?”
“하하하.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
오르막이 심한 우측 도그렉 홀인 16번 홀에서 그린 벙커에 빠져 1타를 잃었지만 마지막 홀까지 차분하게 파를 기록한 필상은 결국 4언더로 경기를 마쳤다.
스코어카드를 제출하고 나오려는데 벌써 사람들이 축하인사를 건넸다. 대회 관계자가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 황당했지만 그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124명이 본선 경기를 2라운드 스트로크 플레이로 펼쳤는데 그중에 언더파는 필상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듣자 궁금한 사람이 있었다.
어제 자신과 함께 4언더를 기록했던 김성호, 하지만 그것까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공식발표가 나기 전에 묻는 것이 규정에 어긋난 행동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대신 해줄 사람은 있었다.
“최 프로님. 속초에서 온 김성호의 성적 좀 알아봐 주세요.”
“김성호가 누군데?”
“먼저 예선전에서 친해진 동생인데, 어제 4언더를 쳤는데 최종 스코어는 언더파가 저 혼자라고 해서요.”
“기다려 봐.”
최 프로가 사무실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안시현이 격렬한 축하를 건넸다. 두 손을 들고 다가오기에 하이파이브를 하는 줄 알았더니 확 끌어안은 것이다.
순간 아찔했지만 사심이 없는 걸 알기에 따스한 축하에 감사를 표했다. 사람들 눈길이 좀 매서웠지만 그녀도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라고 생각하기에 쑥스러움은 엉뚱한 상상을 하는 그들의 몫일뿐이다.
“어디야?”
“저 갑자기 일이 생겨서 급하게 집에 가요.”
“어? 밥은 먹고 가야지.”
“죄송합니다. 밥은 다음에 얻어먹을 게요. 축하해요. 형님!”
음성이 어두운 걸 보니 정말 일이 생긴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고 가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김성호의 최종성적은 2오버파였다. 2라운드에서 무려 6타를 잃었는데 급한 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도 프로선발전을 무난히 통과했다. 추후 3부 투어에서 같이 경기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은 하지 못했고 속초에 한 번 놀러가겠다는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
“하여간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는 탁월해!”
“이틀간 죽어라고 고생한 나를 집에도 가지 못하게 납치하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물론 그녀의 말뜻은 알고 있다. 바로 눈앞에서 벼락을 맞은 것보다 더 사람을 놀라게 만들 일이 어디 있겠나?
거기에 보태 프로선발전에 불과하지만 수석으로 통과한 것도 그녀가 보기에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골프라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필상의 경력이나 현재 나이를 고려하면 어려서부터 골프에만 매달린 쟁쟁한 경쟁자들을 이긴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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