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14- 고차 방정식
“아마 누님도 골프를 치면 퍼팅은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린 라이를 잘 읽고 어떻게 쳐야하는지도 알잖아요.”
“하기야 그렇기는 하지.”
캐디로 오랫동안 일을 하며 쌓인 노하우가 필상의 퍼팅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남다른 균형감각과 거리감은 훈련을 통해서도 좀처럼 단련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필상은 타고난 감각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옳다.
본인만 잘 모르고 있을 뿐.
“지금 언더파를 치고 있는 거 알아?”
“그런가요?”
“본선에서 이렇게 치면 참 좋을 텐데!”
사실 눈부신 기록을 작성하고 있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미향이 코스파악을 꼼꼼하게 하는 덕분에 필상은 샷을 가다듬는데 더 집중할 수 있었을 뿐.
클럽별 비거리는 물론 구질에 따른, 탄도에 따른 거리 함수를 하나씩 풀어나가며 상황에 따른 최적의 스윙을 찾기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았다.
라운드를 마칠 무렵에는 급기야 감을 잡았고 한 샷 한 샷 짜릿한 쾌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맛에 골프 치나 봐요.”
“언더 치는 거?”
“아뇨. 원하는 대로 공을 보낼 수 있는 거요.”
“그게 되면 프로 아닌가?”
“프로가 될 준비는 끝난 거 같아요. 하하하.”
3언더를 기록했다.
대회에서는 세팅이 달라지겠지만 블랙 티에서 라운드를 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년도 통과성적은 14오버 안팎에서 결정되었지만 올해는 과거에 비해 선발인원이 적기 때문에 10오버 안에 들어야 안정권이라고 판단했는데 이만하면 만족할 성적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네. 저도 즐거운 라운드였습니다.”
라운드를 마치고 동반자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유독 젊은 남자애 한 명이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말을 붙였다.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네?”
“오늘 한 수 잘 배웠거든요. 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 또 컨트롤 샷이 얼마나 중요한지도요.”
“제가 몸이 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네? 풀스윙을 하지 않는 게 건강 때문이시라고요?”
“괜한 자랑질로 들리셨다면 미안합니다. 그런 건 아닌데.”
동료들이 불러 마지못해 돌아갔지만 그는 굳이 자신의 이름이 박환이라며 밝혔다. 필상은 소개할 틈도 없었으나 그가 나중에 꼭 다시 보자는 말이 듣기 싫지 않았다.
“쟤도 아마 언더파 쳤을 거야. 다른 싸가지 없는 놈들은 다 엉망진창이었지만.”
“하하하. 그랬나요? 남의 샷은 아예 볼 겨를도 없어서.”
“하기야 얼마나 집중하는지 내가 말을 붙이기 힘들더라고.”
“오늘은 정말 집중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라운드를 마치고 샤워를 끝낸 두 사람은 클럽하우스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무척 비싸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오후 라운드를 나가기 전에 미향이 작성한 야디지북을 함께 분석하는 것이 지금은 더 중요했다.
“혹시 1시 5분에 티오프 하시는 공필상씨 되세요?”
“그렇습니다만.”
티오프 30분 전에 스타트하우스를 향해 움직이던 필상에게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이미 아침에 비용은 모두 지불한 상태였기에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간혹 엉뚱한 일이 벌어져 밀리거나 취소되는 경우도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같이 라운드하실 분이 조금 늦으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 네. 그럼 어떡하죠?”
“원하시면 그냥 치셔도 되고 괜찮으시다면 1시 30분 티오프로 바꿀 수도 있는데...”
“어려운 일도 아닌데 기다리죠.”
“고맙습니다.”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늘 뜻한 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최 프로가 힘들게 잡아준 라운드였고 할인까지 받아 그 정도 배려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 나타난 동반자는 3인이 아니라 혼자였다. 그것도 나이를 추정하기 참으로 애매한 중년의 여인.
“늦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다른 분들은 안 오시나요?”
“네. 그냥 저랑 둘이 치면 되요.”
다소 황당했으나 동반자가 적을수록 자신이 플레이하기에는 편해 싫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직원들이 우르르 마중을 나와 인사하는 광경에 약간 부담스럽기는 했다.
“여기 회장이라도 되나?”
“회장 부인이나 며느리 정도는 되겠죠. 다들 쩔쩔 매는 걸 보면. 하지만 우린 그냥 우리 플레이에나 집중하자고요.”
“그래!”
사람을 두고 뒤에서 다른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여하튼 좀 특이한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저런 위치라면 1인 플레이도 가능할 텐데 싶었으나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그녀의 예약에 자신이 끼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라운드하면서 마땅히 지켜야할 매너라는 것이 있어 지켜봤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좋은 스윙을 보여줬다.
“굿 샷!”
“괜찮았나요?”
“네. 보기 드문 부드러운 스윙이었습니다.”
“그대도 마찬가지였어요.”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그녀도 필상이 좋은 샷을 터트릴 때마다 박수를 보냈다.
잠시 신경이 흐트러졌으나 이내 집중하기 시작한 필상은 무서운 기세로 홀들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1, 4번 홀에서 버디를 잡았고 다시 5번 홀 티샷도 기가 막히게 때리자 카트를 가까이 대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프로인가요?”
“아닙니다. 프로가 되고 싶어 다음 주 이곳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할 생각입니다.”
“아! 그렇군요. 필드레슨을 좀 부탁하려고 했는데 미뤄야겠네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하하하.”
그녀는 동반자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나온 것 같았다.
대회를 준비한다고 말해서 그런지 이후 조용히 자신의 플레이에만 집중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는 모습이 눈부시다는 생각은 들었다.
‘참 고운 여자네...“
가슴이 따스한 미향과 비슷한 연배 같은데, 성격이나 마음 씀씀이는 알 수 없어도 굉장히 끌리는 인상인 것은 분명했다.
귀하게 자랐고 곱게 나이 먹는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열 살 이상 많은 여인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생각을 하자 뜨끔했다. 자신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경기에 몰입한 필상은 오후 라운드도 언더파로 끝냈다. 아침보다 코스파악이 잘 되었음에도 2언더,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언제부터 언더파를 쳤다고.
*
주말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번 본선이 자신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쉰 것은 아니다.
실전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페럼CC에서 라운드를 했고 연습보조 러프에서 트러블 상황에 대한 집중훈련을 진행했다.
회사 내에 필상의 대회 참가 소문이 짝 퍼져 보는 이들마다 응원을 보탰지만 좀처럼 꿀꿀한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문득 생각났다.
일요일은 성희가 결혼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뭔 미련이 남았다고!”
그 영향을 받은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초라해지는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비록 남들에게 쉽게 터놓기 힘든 꿈을 꾸지만 필히 성공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은 분명했다.
파혼하고 헤어졌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 것인지,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둘러쌓던 불운을 시원하게 깨부수고 누구에게든 존중받는 귀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본선이 시작되기 하루 전 필상은 용인으로 건너가 미향을 픽업해 꿈을 이룰 골든베이GR로 이동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만큼 열심히 하기는 했지.”
“저도 모처럼 발에 땀이 날 정도로 집중했습니다. 하하하.”
김성호를 만났다. 일주일 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무척 반가웠다. 같은 길을 가는 동지라는 느낌이 강해서 그런 듯싶다.
김 프로가 며칠 사이에 살이 쪽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그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향이 슬쩍 필상의 연습라운드 성적을 귀띔하자 컨디션이 올라온 것을 축하하면서도 내기를 하자며 달려들었다.
“지는 사람이 저녁 사는 거로 하죠.”
“이기는 사람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전 사고 싶지 않은데요?”
“내가 사고 싶어서 그러지.”
“으아아! 졌습니다. 기필코 제가 밥을 사고 말겠습니다.”
그날 밤에도 두 경쟁자는 연습장 불이 꺼질 때까지 샷을 가다듬었다. 필상의 쓰리쿼터 스윙은 이제 낯설지도 않았고 그만의 독특한 트레이드마크처럼 느껴졌다.
이미 거리는 충분히 나왔고 필요에 따라 페이드나 드로우까지 구사할 기량을 보유했기에 만반의 준비는 끝이 났다.
“굿!”
1번 홀에서 비교적 쉬운 퍼팅을 놓쳐 파로 마무리 한 것은 아쉬웠으나 필상은 2번 홀부터 시작해 연속 3개의 버디를 잡으며 펄펄 날았다.
5번 홀에서는 티샷이 페어웨이 벙커에 빠지며 순간 흔들렸지만 침착한 샷으로 그린 근처로 보내 파로 막아냈다.
전반 플레이의 하이라이트는 상당히 긴 전장의 파 5홀인 7번 홀에서 나왔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내려다보이는 홀의 전경은 굉장히 위협적이다.
뱀의 몸통처럼 좁아 보이는 페어웨이에 좌측 경사면에 공이 들어가면 여지없이 굴러 떨어져 OB로 설정되었고 우측도 긴 러프에 나무가 많아 웬만하면 레이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필상의 스윙은 과감했다.
“깡!”
다른 홀보다 조금 더 공격적인 스윙을 감행했다.
살짝 우측으로 출발했지만 드로우 바람을 탄 공은 페어웨이 우측에 떨어졌고 엄청난 런이 발생하며 한없이 굴렀다.
“내리막을 아주 제대로 타는데?”
“네. 잘 하면 2온도 가능할 것 같아요.”
“2온? 220m도 더 남았을 텐데?”
“일단 가서 보죠.”
웬만하면 무리하지 않는 성격인 것을 알기에 미향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세컨샷 지점에 도착해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제법 장타자로 보이는 동반자의 공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무리 내리막을 잘 탔어도 풀스윙을 하지 않고 300m를 넘긴 샷은 불가사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공에 마법이라도 걸었나?”
“최적의 탄도가 낳은 런의 미학이죠. 하하하.”
내리막을 타고 구른 거리만 대략 70m를 넘었으니 그렇게 부를 만도 했다. 정확히 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은 결과였다.
남은 거리는 208m, 아직 필상이 공략하기에 적절한 클럽이 없었다. 하지만 필상은 3번도 아닌 5번 우드를 원했다.
“그린 우측을 보고 굴리려는 건가?”
“넵! 핀을 보다가는 앞에 놓인 벙커를 피할 수 없거든요. 그리고 실제 거리는 190m만 봐도 됩니다.”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요...”
“하하하. 한 번 지켜보세요.”
좌우로 흩어져 동반자들이 힘든 샷을 하는 동안 필상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그리며 연습스윙을 몇 차례 휘둘렀다.
그러다 마침내 최적의 공략 방법을 찾아냈다.
크기와 탄도, 그리고 방향과 구질까지 굉장히 변수가 다양한 고차방정식이지만 해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진지했고 정답에 다다르자 소름이 돋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다시 한 번 에이밍을 하고 어드레스에 들어선 필상, 2온을 노린다는 말에 미향의 긴장한 눈빛이 그의 뒷모습에 꽂혀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서서히 이륙하는 항공기처럼 백스윙이 차분하게 돌아갔고 한껏 조여진 스프링이 갑자기 끊어진 듯 일시에 폭발한 힘이 실린 클럽헤드가 공을 부술 듯이 때렸다.
‘카앙!’
낮게 깔려 날아가던 공이 바람을 타고 오르듯 치솟았다. 그런데 마치 푸시가 난 것처럼 지나치게 우측으로 출발했다.
그린 우측을 보고 때린 것은 알고 있지만 미스 샷이 난 것 같아 미향의 표정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그녀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필상의 어드레스 했던 발의 모양이 왼발보다 오른발이 살짝 뒤로 빠졌고 아주 미세하지만 평소보다 인아웃 스윙에 더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보통 아마추어들은 기술적인 샷을 구사하려고 과한 액션을 취하지만 사실 구질은 아주 작은 부분의 변화에도 민감하다.
미향이 미처 느끼지 못할 변화를 줬지만 그 결과는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어? 어? 인텐셔널 드로우였어?”
최고점에 이르기 전부터 살짝 휘기 시작하더니 우측 법면까지 갔던 공이 그린을 향해 차츰 고개를 돌렸다.
의도한 만큼 휘지는 않았으나 그린 우측 전면 20m 지점에 떨어진 공은 그냥 서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시 칩샷이라도 한 것처럼 팍 튕기더니 에이프런에 떨어져 구르기 시작했다.
낙하지점이 러프였지만 그린을 향한 경사지인 것을 필상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보다는 훅이 덜 걸렸지만 그래도 그린에 우뚝 멈춰선 공은 2온에 성공했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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