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13- 허황된 바람
“정말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아직은 성적이 나와 봐야 하는 거 아냐?”
“에이 진짜!”
“내가 바라는 건 1등이야. 어서 가서 보자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아 필상은 얼른 샤워부터 하고 나왔다.
그래도 최종성적은 발표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미향이 사무실에 들어갔다 왔는지 필상을 보자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설마?”
“2등이야. 공동 2등.”
“엄지는 1등일 때나 세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에이 진짜!”
그녀가 잘 쓰는 표현이 또 다시 터졌다.
필상도 아까 그걸 흉내 냈는데 되돌려 받았다. 하지만 날아갈 듯 기뻤다. 작년에는 1라운드에 포기했는데 부상 중에도 예선을 통과했으니 실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조폭이 1등이야.”
“김 프로가요?”
“오늘 언더파를 쳤더라고! 미쳤나봐.”
“어제 3오버를 쳤으니까 비교대상이 없는 수석이네요.”
“응. 최종스코어가 이븐파였어. 오늘 버디를 5개나 잡았더라고. 한 턱 내라고 해.”
“그래야죠. 만나기로 했는데 잘 했네요. 하하하.”
조촐한 자축연을 열었다.
예선을 통과한 것도 기뻤지만 좋은 동료를 얻은 것도 그에 못지않게 좋았다. 김성호는 일주일 뒤에 펼쳐질 본선에서 다시 만나겠지만 미향은 기약이 없다는 생각을 하자 아쉬웠다.
“누님. 다음 주에도 제 캐디 좀 부탁드립니다.”
“본선은 다른 데서 열리잖아?”
“네. 태안에 있는 골든베이입니다. 저도 가보지 못한 코스라서 이번 주말에 한 번 가보려고요. 그 때 같이 가요.”
“나야 오케이지! 근데 나보다는 경력 있는 하우스캐디를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뇨. 제게 가장 좋은 캐디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오는 정성을 보여주신 누님 같은 분입니다.“
“어? 내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라 닭볶음탕인 거야?”
“왜 이러세요? 외모 따지면 누님한테 부탁하겠습니까!”
“에이 진짜!”
김성호도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주말에 레슨이 잡혀 있어 같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이미 골든베이 라운드 경험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주일 뒤로 다가온 본선을 통과하기 위해서 한시라도 허투루 보낼 수 없지만 식사 후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함께 보낸 시간과 친근감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김성호에게 쉽게 접할 수 없던 국내 투어프로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격하게 공감했다.
여자투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환경은 선수들의 몫이기도 하지만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
*
“본선이 코앞인데 일을 하는 거야?”
“네. 밥벌이는 해야죠.”
“알뜰하기는! 이번에 프로 자격만 얻으면 회사에서도 후원을 할 수 있으니까 잘해 봐!”
“후원이요?”
“그래. 대표님께서 긍정적으로 검토하신다고 하셨어. 우리 골프장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하하. 그래봐야 신인인데, 여하튼 고맙습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바람만 잡나? 하하하.”
최 프로의 배려가 고마울 뿐이다.
본선을 통과한들 수백 명 중에 한 명에 불과한 3부 투어 선수가 되는 것이다. 기껏 참가해도 팬들의 관심은 그다지 닿지 않는 프론티어 투어인데, 후원은 그림의 떡이다.
물론 대단한 지원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기본적인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 될 것이다.
아마도 최 프로는 자신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주고자 했던 것 같다. 때문에 더더욱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다.
아침 일찍 한 탕 해 치운 필상은 점심을 먹고 어김없이 연습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새 컨디션이 다시 상승해 있었다.
“뭐야? 이젠 거의 예전의 거리가 나오는데?”
확실하게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칭웨지가 130m 근방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이 아직 쓰리쿼터 스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풀스윙이 가능한지 여부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아니, 풀스윙을 하는 것이 옳은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왜냐면 쓰리쿼터 스윙의 장점을 이미 충분히 절감하고 있는데 구태여 스윙을 바꿔 혼란만 가중된다면 그건 원하는 바가 아니다. 비거리가 확보된다면 더더욱.
게다가 본선이 6일밖에 남지 않았고 당장 이틀 후에 연습라운드를 나갈 상황이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큰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아!”
시간이 넉넉하다면 당연히 스윙을 교정할 것이다.
초보자도 아니고 이미 풀스윙으로 다져진 자신의 실력을 신뢰하기에 정상적인 과정을 밟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필상은 일단 현재 자신의 샷부터 상세하게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7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스윙 템포나 임팩트는 기가 막힌데 비거리가 들쑥날쑥했다.
150m에서 160m까지 무려 10m의 격차를 보였다. 자신은 분명히 일정한 힘을 준다고 생각하는데.
“연습 부족이야!”
필상의 결론은 간단했다.
컨디션이 계속 올라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시합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추후 겪어야할 과정이 더 있다면 연습을 통해 앞당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잡념을 떨치고 한 샷 한 샷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많은 샷을 때리고도 비거리가 확정되지 않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대체 몇 개의 공을 때렸는지 몰라도 저녁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연습에 매달린 필상은 집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상아. 밥 먹어!”
막내 누나, 소희의 높은 옥타브에 잠이 깼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필상은 굳이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새벽 5시가 되면 기계처럼 눈이 저절로 떠졌다.
기상나팔이 없어도 칼 같이 기상했던 특전사 시절 생긴 버릇이 캐디 일을 하고 난 뒤에 다시 습관이 되었는데, 시계가 8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부킹된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심신이 지쳤던 것이 분명했다. 어이없었지만 모처럼 푹 잤기 때문인지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야?”
“어제 준석이 아빠가 낚시 갔다 왔거든!”
“아무리 그래도 아침부터 붕어찜은 좀 심한데?”
“세수는 하고 와. 눈곱이 덕지덕지 붙었어.”
“싫어. 먹고 씻을래.”
막내 자형의 취미가 낚시였다.
모처럼 붕어를 잔뜩 잡아온 모양이다. 그래도 남동생 생각해서 아침부터 음식을 싸들고 온 것이 고마워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몇 술 뜨기도 전에 밥맛이 떨어지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 주말에 성희, 그 계집애 결혼한데!”
“넌 왜 쓸데없는 소릴 해.”
“그런가? 너무 얄미워서 그러지.”
엄마가 나서서 꾸짖었지만 어차피 필상도 알게 될 일이다. 좁은 동네 구조상 남들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는 낫다고 누나는 생각한 것 같았다.
담담하게 밥을 먹었지만 사실 필상도 속이 멀쩡하지는 않았다. 성희는 어려서부터 한 동네 살던 오랜 친구다.
그녀가 원해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 사대를 나온 그녀가 임용고시에 계속 떨어져 힘들어할 때도 늘 중심을 잡고 도왔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남자가 치과의사래.”
“그만해. 알고 싶지 않아.”
결국 소희는 엄마에게 쫓겨났다.
아들의 속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 서둘러 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을 대신해 그녀가 울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온 동네 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두 집안은 진즉에 사돈처럼 지냈고 성희를 돕고 아껴준 필상의 노력을 알기에 동네 사람들은 성희의 일방적인 파혼에 대해 수근 거린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언제까지 가겠는가. 결국은 다들 시집 잘 갔다고 축하하겠지.
쉬쉬하지만 필상이 실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캐디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동네사람들의 구설에 오르내릴 것이다.
아직은 허황된 바람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꿈꾸는 성공을 위해 고향을 떠날 날이 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진짜 왔네?”
“그럼요. 어서 타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여주에서 용인을 거쳐 태안에 있는 골든베이GR까지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필상은 새벽 3시에 집에서 출발해 4시에 서미향을 차에 태웠고 파란 서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올 무렵, 골프장에 도착했다.
아침 6시와 오후 1시에 2번 라운드를 잡아놨는데, 최 프로가 도와줘 어렵게 부킹이 되었다. 아침 라운드는 마침 대회에 참가할 선수들과의 동반라운드였다.
“굿 샷!”
천혜의 황금빛 서해 바다와 푸른 해송이 우거진 아름다운 코스였지만 필상은 그런 것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코스점검과 더불어 실전감각까지 잡아야할 아주 중요한 라운드였다.
다행히 이 코스는 홈페이지에 코스공략 정보가 비교적 상세하게 제공되었기에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필상의 스윙은 신중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했다. 다만 쓰리쿼터 스윙은 그대로였다. 동반자들 중에는 필상의 작은 스윙에 쓴웃음을 지은 이들도 있었다.
캐디까지 데려온 걸 보면 본선에 참가하는 선수 같은데 나이도 많아 보였고 스윙도 통상적이지 않았으니 그럴 만 했다.
하지만 샷 결과를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가볍게 정타를 내려는 듯 부드럽게 쳤지만 비거리가 220m를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은 휨이 없이 한가운데로 쭉쭉 뻗어나갔다.
“시작이 아주 산뜻한데?”
“말도 마십시오. 정말 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랬을 것 같아. 처음 볼 때보다 티샷 비거리가 50m 이상 늘어난 걸 보면. 어디 아픈 데는 없지?”
“네. 샷만 좋으면 아플 이유가 없지요. 하하하.”
실제 비거리를 확인해 본 결과 230m 가량 나왔다. 물론 풀스윙에 비하면 아직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거리에 대한 부담 없이 대회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151m야. 뭘 줄까?”
“7번 주세요.”
“오케이.”
사실 지금 컨디션으로는 8번 거리다.
하지만 필상은 쓰리쿼터 스윙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컨트롤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강하게 칠 경우 더 많은 거리가 확보되지만 미스가 나거나 방향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
그래서 힘을 빼고 부드럽게 컨트롤 하는 방법을 고심했고 급기야 최적의 거리에 대한 해법을 찾아냈다.
실전을 통해 검증하고 가다듬는 일만 남았을 뿐.
푹신한 잔디 위에 놓인 공을 향해 어드레스를 취한 필상의 테이크백이 부드럽게 이뤄졌고 머리 뒤에서 멈춘 클럽헤드는 이전보다 아주 미세하게 높아진 듯 보였다.
“쉭!”
올라가는 속도는 더뎠지만 내려올 때는 가차 없었다.
정확한 중심이동은 이뤄지지만 크게 오버하지 않는 가운데 쭉 당겨진 헤드가 공을 찌그러뜨릴 듯 때렸고 공 뒤로 족히 20cm는 됨직한 잔디가 푹 떨어져 공과 함께 날아갔다.
시선은 여전히 자신이 만든 디봇에 꽂혀 있었다.
그야말로 흠 잡을 때 없는 완벽한 샷이었다.
“나이스 샷!”
미향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자세를 푼 필상도 날아가는 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하는 대로 좌측으로 휘어지는 고탄도 드로우 샷이 환상적인 곡선을 그리며 그린에 떨어졌다.
“좀 짧네!”
“치! 3m면 개가죽이지. 욕심은!”
“하하하. 개가죽이 뭡니까! 언어 좀 순화 하세요. 아줌마!”
“아줌마라니!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너무 하는 거 아냐!”
깜짝 놀랐다. 개인사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설마 마흔 중반인 그녀가 싱글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여하튼 ‘개가죽’은 흔히 쓰는 표현은 아닌데 어원은 확실치 않아도 그녀는 아주 축하할 일이라고 표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의 샷의 감각을 정확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탄도가 높아 거리의 손해는 있었으나 드로우 구질이 비교적 거리가 더 나간다는 것을 고려하면 148m는 생각보다 짧았다.
“원래 퍼팅은 잘 했어?”
“네. 가장 쉬운 게 퍼팅인 것 같아요.”
“그야 사람마다 다르지. 그러고 보면 자기는 참 침착한 성격 같아.”
“퍼팅은 성격도 중요하지만 결국 수학이라고 생각해요. 라이를 정확히 읽고 어느 정도의 힘으로 칠 것인지 결정되면 그대로 시행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어이구. 잘 나셨어. 말이야 쉽지.”
필상이 3m 퍼팅을 어렵지 않게 성공하자 미향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상대적으로 퍼팅연습을 적게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매일 36홀씩 일을 하며 퍼팅 간접경험은 셀 수 없이 많다. 아마추어들이 저지르는 다양한 실수를 목격했고 자신이 좋은 캐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확한 라이를 읽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