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12화 (12/354)

ILG012- 서른 셋

‘아직 괜찮아! 힘 내!’

그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그 말마저도 삼켜야 했다. 지금은 그 어떤 응원의 말도 곱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로지 스스로 이겨내야 할 상황인 것이다.

결국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한 김성호는 1벌타를 먹고 드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4번째 샷이 되고 말았다.

이제라도 그린에 올려 더블 이하로 막아야하건만 한번 끊어진 필름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드롭 위치도 발보다 낮은 곳이라 정말 집중한 스윙이 필요했건만 생크가 난 공은 다시 우측으로 튀었다.

그걸 보면서 자신의 샷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굿 샷!”

도망치고 싶은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는 필상의 그림 같은 아이언 샷이 그린에 올라가자 굿 샷을 외쳤다.

덕분에 필상도 그에게 다가가 힘을 보탤 수 있었다.

“스윙 템포가 좀 빠른 것 같아. 몸이 먼저 돌아가.”

“아! 제가 흥분하면 힘이 잘 빠지지 않거든요.”

“설사 양파를 해도 아직은 넉넉하다는 거만 생각하고 편안하게 쳐.”

“네.”

원래는 캐디가 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그의 캐디는 그저 안타까워 할 뿐, 그가 무서워 말도 한 마디 보태지 못하고 있었다.

“깽 짱 러이!”

치앙마이에서 배운 태국어다.

굉장히 잘 쳤다는 말인데 그걸 단번에 알아들은 김성호도 태국 전지훈련을 여러 번 다녀왔던 국가대표 출신이었다.

곧바로 고맙다는 인사말이 돌아왔다.

“커쿤 캅!”

“하하하. 우리 둘 다 1퍼팅으로 끝내자고.”

“좋습니다.”

의욕은 불탔지만 필상은 4.5m 퍼팅이 홀컵을 외면했다.

그러나 3m퍼팅을 성공한 김성호는 불행 중 다행으로 최악의 상황을 더블로 막아냈다. 5온, 추락의 위기에서 마지막을 1퍼팅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오르막 내리막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경우는 처음 봐.”

만약 일반 골퍼들처럼 화이트 티에서 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블랙 티에서 치도록 세팅이 되었기에 필상에게는 오르막 홀이 난제였다.

그걸 꼬집은 미향의 음성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저도 한 때는 300야드까지 날리고 그랬습니다.”

“그랬을 것 같아. 훤칠한 키에 몸도 아주 좋은 걸 보면. 그런데 무슨 부상을 당한 거야?”

“벼락을 맞았어요.”

“호호호. 나쁜 짓을 많이 했나?”

“그런 가 봅니다. 전생에.”

벼락을 맞았다는 말을 누가 사실로 믿겠는가!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 들였는데 필상의 싸늘해진 표정에 미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12번 홀까지 3개의 홀을 무난히 파로 막아내면서 1오버로 선전하던 필상에게도 뜻하지 않은 위기가 찾아왔다.

13번 홀은 176m의 그린이 약간 높은 파 3홀이다.

180m는 보는 게 좋다고 판단했기에 드라이브를 잡았다. 그런데 전과 동일한 샷을 구사했음에도 공은 그린에 바로 떨어지더니 확 오버하고 말았다.

비거리가 갑자기 10m 이상 훌쩍 늘어난 것이다. 현재 공이 어떻게 위치했는지도 중요했지만 이유부터 찾아야 했다.

“제 스윙에 문제가 있었나요?”

“아니. 스윙크기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힘이 좀 더 실린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어.”

“아!”

스윙크기는 자신이 확실하게 컨트롤했다.

그런데 헤드스피드가 좀 더 나왔던 것이다. 무척 반가운 일이지만 컨트롤이 되지 않는 힘은 도리어 위협이 된다.

경기 도중에 힘 조절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실로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그걸 조정할 여력은 없었다.

그린을 넘긴 공이 카트 도로까지 넘어 상당히 질기고 깊은 러프에 잠겨 있었고 잡목에 백스윙마저 원활치 않았다.

“어쩌지?”

“일단 꺼내야지요. 퍼터 주세요.”

“퍼터?”

“네. 세로로 세워서 찍으려고요.”

피칭과 같은 무거운 헤드를 지닌 클럽으로 쳐내도 된다. 하지만 테이크백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좁았다.

그래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공을 가운데 둔 상태에서 다리를 벌리고 퍼터를 세워 조준한 필상은 헤드 무게를 그대로 실어 공을 때렸다.

무엇보다 정확성이 필요한 시도였는데 러프에서 멋지게 벗어나기는 했다. 하지만 다시 그린을 넘어 반대편 에이프런까지 굴렀다.

“멋지십니다!”

“어쩔 수 없었어.”

“그러니까요. 저도 한 수 배웠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홀컵에 붙여 보기로 마무리 했다.

아쉬웠으나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2오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애초 대회에 참가하며 목표로 잡았던 스코어는 하루에 6오버였다.

세 홀에 두 홀은 파를 해야 하는 버거운 목표였지만 실전 공략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해 없던 용기도 치솟던 차였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느닷없이 강해진 힘을 어찌 조절하느냐는 것인데, 자신의 힘을 가늠해 컨트롤 하려면 경험적 분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아! 미치겠네.”

“7번이 137m정도 날아가는데? 대충 10%정도 더 비거리가 나온다고 보면 되는 거 아냐?”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드라이버 티샷도 200m 가량 날아갔으니 대략 계산은 나왔다. 문제는 어프로치마저 그렇다면 조절해야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결국 타협한 필상은 남은 21m 어프로치를 20m만 보고 때렸다. 그런데 숏 게임은 강해진 힘과는 상관없이 짧았다.

순간 멘탈이 흔들린 필상은 14번 홀에서 다시 1타를 잃고 말았다. 연속해서 보기를 범한 필상은 이를 악물었지만 그게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17번 홀에서 다시 보기를 기록하며 1라운드를 결국 4오버로 마친 것이다.

“좀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고했어.”

“누님이 더 고생하셨죠.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샷을 점검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아서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그래. 그럼 수고해.”

필상은 샤워도 하지 않고 곧바로 연습장으로 향했다.

이미 경기를 끝낸 선수가 많은데 의외로 썰렁했다. 하지만 필상은 곧바로 자리를 잡고 연습을 시작했다.

한 샷 한 샷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집중한 결과 수정된 거리를 분석해낼 수 있었다. 어차피 우승이 목표인 대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윙의 크기는 바꾸지 않았다.

“샤워도 하지 않고 연습하십니까?”

“어? 김 프로 왔어?”

“네. 유혹의 손길이 뻗어왔지만 문득 형 생각이 나더라고요. 연습장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김성호는 오랫동안 골프계에 몸담았기에 아는 선수들이 많다. 반가운 얼굴들끼리 모여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데 작년에도 반주로 마신 술 때문에 2라운드를 망친 경험이 있던 터라 마음을 독하게 먹고 연습하러 왔던 것이다.

그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는 그를 보며 필상도 잠시 휴식을 취했다.

“형. 등에 피가 나는 거 아닌가요?”

“아! 무리하니까 터진 모양이네. 미안하지만 좀 도와줄래?”

등에 입은 화상은 가만히 요양했다면 벌써 나았을 상처다. 하지만 하루도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험하게 굴렀으니 상처가 나을 턱이 없다.

매일 약을 바르고는 있지만 집중 연습을 감행하자 급기야 터지고 만 것이다. 화장실로 가 웃통을 벗은 필상의 등을 보자 김성호는 벌컥 화부터 냈다.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이런 상처를 입고 왜?”

“......”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합니까?”

“응. 서른셋이 된 나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김성호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부끄럽다 생각했다. 진즉에 더 열심히 정진했다면 이미 투어프로가 되고도 남았을 경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7살이 된 지금 되돌아보니 과연 자신이 목숨을 걸고 열심히 했는지 의문이 남았다. 더 늦기 전에 다시 한 번 꿈을 위한 도전을 하려고 독심을 품고 연습해서 대회에 참가했는데 필상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상처 관리는 하셔야죠.”

“크게 아프지도 않은데 뭘! 괜히 추한 꼴 보여 좀 그러네. 하하하.”

“아닙니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녁이나 먹으로 갈까?”

“네. 가시죠.”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서미향이 음식을 잔뜩 싸 왔던 것이다.

“내가 한 것은 아니고 단골집에서 사왔어.”

“누님. 뭐 이렇게까지...”

“말했잖아. 잘 생긴 남자한테 무한정 약하다고. 근데 우리 조폭 아저씨까지 있는지는 몰랐는데?”

“아줌마!”

“아, 알았어. 넉넉히 대짜로 사왔으니까 자기도 걱정 말고 같이 먹자고.”

“진즉에 그렇게 나왔어야죠. 근데 냄새가 아주 끝내주네요, 뭐에요?”

닭볶음탕이었다. 게다가 큼직한 파전까지.

공깃밥이 3개인 것이 아쉬웠지만 아쉬운 대로 맛있게 나눠먹었다. 커피로 입가심을 마친 필상이 다시 클럽을 쥐자 못 말리겠다는 웃음을 터트린 미향이 급기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처럼 이러기는 정말 쉽지 않다.

수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따스한 인정을 느낀 필상은 뭐래도 해 주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안다면 그나마 다행이려나?

필상이 연습을 재개하자 김성호도 나란히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조명이 밝혀진 연습장에 공을 때리는 소리만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문이 닫힐 때까지.

“열심히 해!”

“네. 우리 예선 통과하고 한 잔 해야죠?”

“그래. 이따 연습장에서 만나자고.”

“연습장이요?”

“거기가 가장 한산할 것 같아서. 하하하.”

2라운드의 아침이 밝았다.

아쉽게도 조 편성이 달라져 김성호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4오버로 나름 선전했지만 오늘은 기필코 더 나은 성적을 내자고 굳게 다짐하며 1번 홀에 들어섰다.

그리고 미향이 활짝 웃을 일을 연이어 만들어냈다.

“이러다 언더까지 가는 거 아냐?”

“비거리가 나오니까 훨씬 파를 잡기 수월하네요.”

“매 홀 버디 찬스를 맞으면서 나한테까지 그렇게 겸손을 떨 필요는 없거든!”

“이게 다 훌륭한 캐디 덕분이지요.”

“예쁜 캐디라고 하면 더 힘이 날 것 같은데?”

“알다시피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이번 생에서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야?”

“대신 아름답다고는 말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이 인간이 진짜!”

전반에 2타를 줄였다.

보기 하나에 버디를 세 개나 잡으며 굉장한 선전을 펼쳤다. 이대로라면 예선전 수석도 할 것 같았다. 큰 의미는 없지만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좋은 지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사는 항상 뜻한 대로 흐르지 않는 모양이다.

10번 홀에서 아까운 버디를 놓치고 들어선 11번 홀에서 처음으로 티샷 미스가 나왔다. 382m에 오르막인 홀이라 다소 강한 임팩트를 넣으려던 것이 문제였다.

쭉쭉 뻗어나가던 공이 최고점에서부터 갑자기 페이드를 먹더니 우측 숲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내가 미쳤나봐. 슬라이스 바람이 있는 홀인데 왜 그걸 얘기하지 않았는지, 미안해!”

“아니에요. 야디지북에 나와 있어서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근데 또 비거리가 확 늘어난 것 아냐?”

“네. 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 저도 이렇게 멀리 날아갈 줄은 몰랐거든요.”

“어제처럼 그런 건가?”

“네. 다시 건강이 좀 더 회복된 것 같아요.”

“야 이거 정말 웃픈 얘기다. 몸이 좋아졌는데 그게 지금은 반갑지 않다는 거 아냐?”

“그러게요. 하지만 어제 한 번 겪어 봤으니까 오늘은 잘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경험은 중요했다.

거리에 대한 확신이 없을 경우, 안전하게 치면 그만이다.

이미 2오버로 안정권에 들어섰기에 남은 8개 홀은 모두 보기를 기록해도 예선통과가 가능한데 뭘 두려워한단 말인가!

해저드에 빠진 공을 드롭한 필상은 서드샷을 그린 가까이에 보냈다. 그린 좌우에 도사리고 있는 벙커에 빠지면 최악의 스토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감안한 침착한 공략이었다.

안전을 선택한 필상은 네 번째 샷을 핀에 붙여 결국 보기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무난하게 극복해냈다.

이후에도 위기는 찾아왔으나 절대 흥분하거나 무리하지 않고 침착하게 경기를 펼친 필상은 결국 최종스코어 5오버로 경기를 끝마쳤다.

적어도 34위 안에 들어야 예선을 통과하는데, 전혀 부족하지 않은 아주 훌륭한 성적이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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