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11- 몸이 기억한다
“굿 샷!”
골퍼라면 언제 들어도 지겹지 않은 소리다.
필상은 남은 거리를 유틸리티로 달래듯 부드럽게 때려 정확히 100m를 남겼다. 그리고는 피칭웨지로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려내자 미향의 흥분한 음성이 사위를 울렸다.
쓰리쿼터 스윙이면 충분했으며 1.5m 버디퍼팅을 성공한 필상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과감한 풀스윙을 했던 동반자 중에 2온에 성공한 선수는 없었다.
그나마 어프로치를 붙여 버디로 연결한 선수가 한 명, 벙커에서 철퍼덕 대더니 결국 보기를 기록한 선수도 나왔다. 그리고는 엄한 캐디에게 신경질을 내는 광경을 본 미향은 입을 삐쭉 내밀더니 필상에게 다가와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본선 진출 컷이 어느 정도나 되죠?”
“작년에는 2라운드 합산 162타였습니다.”
“명색이 프로선발전인데 싱글이면 된다고요?”
“네. 잘 친다는 사람은 많아도 실제 정규코스에서 규정대로 치면 언더는 그저 신의 영역인 거죠.”
“아! 그럼 쫄 것도 없네요.”
“그래서 열심히 해보려고요.”
“노보기 노보기 원츄!”
“하하하. 원더걸스가 울고 가겠습니다!”
미향은 정말 보기 드문 밝은 성격이었다.
때 지난 걸 그룹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면서도 얼굴을 붉히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게 다 필상을 편하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립에 힘이 들어가기까지 3일이 걸렸고 기껏 가능한 것이 하프 스윙이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매달인 끝에 그나마 쓰리쿼터 스윙까지 가능해진 것이 그저께 밤이다.
하마터면 대회출전을 포기할 뻔 했지만 끝 모를 어둠 속에서 필상은 자신에게 비추는 희미한 빛을 하나 발견했다.
마음껏 치지 못하는 것은 아쉽고 억울했으나 기이하게도 스윙의 일관성은 믿기 힘들 만큼 대단했다.
‘몸이 기억한다고 해야 하나?’
연습 스윙한 그대로 칠 수 있었다.
물론 100%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정 거리를 염두에 두고 빈 스윙을 한 뒤, 샷을 하면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연습스윙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자 용인으로 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수없이 봐오지 않았던가?
기껏 연습스윙은 멋들어지게 하고도 실전 샷은 힘이 잔뜩 들어가 엉뚱한 결과를 내는 골퍼들이 정말 허다하다.
하루에 수천 번의 스윙을 했던 자신도 그 실수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잃은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원하는 스윙의 구사가 가능해졌다.
물론 실전에서도 그러한지는 결과로 확인할 수밖에 없지만.
“남은 거리는 157m에요.”
“7번 주세요.”
“잘라가려고요?”
“네. 포대그린인데 무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프로치만 좋다면 그것도 괜찮지.”
2번 홀은 338m의 파 4홀이다.
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는 가뿐한 거리일지 모르나 필상은 페어웨이로 181m를 보낸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본인이 현재 보낼 수 있는 한계거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157m는 롱 아이언이나 유틸리티로 공략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느리디 느린 백스윙에 클럽헤드가 머리 위에서 멈춘 4분의 3스윙은 슬로우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답답했다. 하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임팩트가 이뤄졌고 공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아이언이 정말 깔끔하네요.”
“백스윙이 작아서 임팩트가 보다 편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욕심을 버리면 왕창 망가질 일도 없는데 막상 필드에 서면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되나 봐.”
“골프는 안 치십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거든. 괜히 펄럭대다가 패가망신하고 싶지도 않고.”
“요즘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알뜰한 골프를 즐기는 분들도 꽤 있거든요. 직접 쳐 보면 일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시도해 보기는 했지. 근데 영 아니더라고. 괜히 눈만 높아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이 골프다.
알뜰한 골프를 하려해도 이런 저런 욕심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여자들은 그런 경향이 좀 더 강하고.
7번 아이언으로 125m를 공략한 필상은 22m의 어프로치를 남겼다. 그린 정면의 페어웨이에 놓인 공에 다가간 필상은 차분하게 칩샷을 염두에 두고 연습스윙을 가져갔다.
띄우는 것보다 굴리는 샷이 홀컵에 들어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스핀을 감안해 15m지점에 떨어뜨려 칩인을 노렸다.
연습한 그대로 정확히 그루브에 긁힌 공이 원하는 지점에 떨어지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자신만 침착하면 실전에서도 연상한 그대로 공을 보낼 수 있음이 확인된 셈이다.
홀컵을 살짝 스쳐 지나가며 생각보다는 길었지만 무난히 파로 막아냈다. 대체적으로 그린의 경사는 크지 않아 필상은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뽐낼 수 있었다.
“이번 홀이 문제네.”
미향의 난감한 표정을 보노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3번 홀은 무려 191m의 파 3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르막 홀이라 캐리가 190m는 되어야만 온 그린이 가능하다.
드라이버로도 공략이 불가능한 파 3홀에 이르자 캐디인 자신이 공략방법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드라이버 줘요.”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짤순이라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인데 뭐 어떻습니까. 하하하.”
프로라면 이럴 일은 없지만 자신의 비거리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마추어들은 이럴 때 우드를 잡곤 한다.
힘이 더 들어간 샷으로는 평소의 비거리가 나오지 않을뿐더러 엉뚱한 등산을 하거나 물가를 기웃거리게 만드는데, 그게 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수일수록 그런 것에 초탈한 선택을 하며 하수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역시 배워야 해’라고 말하지만 몇 홀 가지 않아 까맣게 잊고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한다.
평생 보기플레이도 힘든 전형적인 스타일이라고 할까?
필상에게는 다양한 옵션이 있지만 그린 앞의 페어웨이가 제법 넓어 온 그린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가급적 가벼운 어프로치를 남기기 위해 드라이버를 잡았다.
“저 아저씨는 대체 뭐야?”
아너인 필상이 드라이버를 들고 나서자 동반자 중에 한 녀석이 핀잔 어린 말을 던졌다. 잘해봐야 스물 초반인데 앞선 홀에서 연속 보기를 범했으니 기분이 꿀꿀한 것은 이해한다.
그렇더라도 동반자의 플레이에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 것은 금물이여 매너가 아니다. 작은 소음에도 민감한 게 티샷인데.
필상은 애써 한 귀로 흘려들었지만 뜻밖의 반전이 있었다.
“크크크. 너나 잘 하세요!”
제 3자가 불쑥 끼어들어 살벌한 말을 던졌다. 흔하지 않은 거구에 인상도 제법 험악했기에 약효는 즉각 먹혔다.
여하튼 어드레스를 풀고 다시 루틴을 밟은 필상은 자신의 리듬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티잉!’
묘한 분위기가 샷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온 그린 할 작정은 아니었지만 정타를 내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더프(Duff- 볼을 정확히 맞추지 못하고 볼의 뒤땅을 치는 샷)가 났다.
“그래도 다행이네.”
미향이 쾌재를 부른 이유는 탄도가 낮았던 그 공이 생각보다 심하게 굴러 페어웨이 정중앙에 잘 도착했기 때문이다.
“부끄럽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그런 샷은 절대 원지 않습니다.”
“왜 그래? 좋은 게 다 좋은 거잖아.”
더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런 모습은 원지 않는다. 말 몇 마디에 멘탈이 흔들리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힘찬 샷으로 1온에 성공한 큰 덩치가 티잉 그라운드를 내려오더니 곧장 필상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험악한 분위기를 만드는 바람에.”
“아닙니다. 샷에 집중하지 못한 제 책임이죠.”
“전 속초에서 온 김성호라고 합니다.”
“공필상입니다. 아주 살기 좋다는 곳에서 오셨군요.”
“저보다 한참 위인 것 같은데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초면에 그럴 수는 없죠. 속초에도 좋은 골프장이 많다고 들었는데, 김경태 프로가 그곳 출신이지요?”
“네. 유명한 프로는 많지만 중요한 것은 한참 모자란 제 실력이지요. 하하하.”
괄괄한 성격이 상대로 하여금 쉽게 마음을 열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속초 특유의 이북 사투리가 섞여 안 그래도 큰 덩치에 위압감을 더하지만 사실 이런 사람이 더 다정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는 필상이 부상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대회에 참가한 것을 높이 평가하는 듯 추켜세웠다. 낯간지러운 일이지만 그만큼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그는 27살이고 고향에서 티칭프로로 작은 골프연습장을 운영하는데 프로가 되려고 부단히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미처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은 없지만 함께 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동반자였다.
“52m. 띄우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60도 웨지 주세요.”
로브 샷(lob shot- 공을 높이 띄워 치는 샷)을 구사하기에는 다소 멀지만 연습 스윙을 통해 감을 조정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스윙을 통해 거리를 맞추는 일은 운에 맡길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연습을 통해 감각을 익혀야 한다.
다행히 하프스윙에 헤드 무게를 이용하면 적절한 샷으로 필상에게는 이미 준비된 거리였다. 왼발을 연 오픈 스탠스로 부드럽게 백스윙을 가져간 필상은 과감하게 헤드를 던졌다.
타격 소리도 나지 않았으며 깔끔하게 디봇을 만들어냈다.
“나이스 로브 샷!”
헤드업을 하지 않았던 필상은 공이 어떻게 날아가는지 알 수 없다. 미향의 음성을 통해 온 그린은 확신했지만 샷을 한 본인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쩍 붙을 좋은 샷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홀컵에 바로 들어갈 뻔 했다. 강하게 걸린 백스핀이 홀컵 위를 스치며 지나갔던 환상적인 샷이었다.
티샷이 불안했지만 파로 막아낸 필상은 이어진 4, 5번 홀을 다시 파로 막아냈다. 하지만 6번 홀에서는 1타를 잃었다.
393m의 아주 긴 파 4홀에 2온은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서드샷이 핀에 붙지 못하며 어쩔 수 없이 3온 2퍼트로 마칠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장이 설 수는 없겠지!’
자신의 샷 일관성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실전을 통해 확인했지만 매번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모든 홀을 파 세이브를 목표로 임하기 때문에 간혹 피치 못할 보기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자위했다.
539m의 파 5인 9번 홀에서 2m퍼팅을 놓쳐 보기를 범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하지만 전반을 1오버로 마친 필상은 자신감을 찾았다.
버디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경기를 망칠 수도 있지만 버디를 노리는 샷이 되어야 파가 수월하다는 점이 난센스였다.
무리한 욕심과 공격적인 전략의 차이는 오로지 마음가짐에 달린 미세한 차이에 불과했다. 스스로 자제하고 흥분하지 않는 평정심의 유지가 관건이었다.
“작년에 언더파는 1명뿐이었어요. 이븐파도 없었고요.”
“그럼 김 프로는 따 논 당상이네?”
“형님도요. 하하하.”
그새 격의 없이 친해진 김성호는 대단하게도 아직 1언더를 유지하고 있었다. 필상도 1오버였으니 작년 성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둘 다 출발은 아주 좋다고 봐야했다.
하지만 347m, 10번 홀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내리막이 많은 파 4홀이라 필상은 차분하게 페어웨이 정중앙을 노렸고 무난하게 200m가량을 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앞서서 아너로 나선 김성호의 티샷은 확 당겨지면서 좌측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어차피 1온을 할 것도 아닌데 왜 무지막지하게 때린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착하게!”
“네. 공 있을 겁니다.”
물론 공을 찾기는 했다.
하지만 필상이 보기에는 레이 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스탠스도 좋지 않을뿐더러 공이 놓인 지점에 나무뿌리가 툭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야가 확보된 것이 좋았던지 그는 바로 그린을 공략했다. 공이 발보다 한참 낮아 구질이 자연스럽게 페이드가 걸릴 텐데 현 위치에서 나무를 피해 그린을 노리려면 드로우를 걸어야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성적이 나쁘다면 모를까, 결코 무리할 이유가 없는 상황인데 고를 외친 그 샷의 결과는 참담했다.
의도적으로 감아 치려다 보니 탑핑이 나왔고 공은 좌측의 소나무에 맞아 더 깊은 숲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