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10- 쓰리쿼터 스윙
“아줌마!”
“크르르.... 크르릉...”
피곤했는지 불러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았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에 깜짝 놀라 너무 힘을 줬던가?
누웠던 몸이 상하체가 함께 직각으로 꺾이며 다리를 베고 자던 안시현을 확 밀어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자다가 봉창을 맞게 된 그녀는 넘어지던 몸의 중심을 겨우 잡았고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신경질적인 반응부터 드러냈다.
“야! 너 지금 뭐 ...”
소리 지르다 말고 처한 상황이 파악된 그녀의 표정은 오묘하게 변했다. 방금 전의 마녀 같은 표정은 사라졌고 환하게 피어오르는 천사미소, 필상은 다시 한 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죠?”
“너. 멀쩡해?”
“힘이 좀 없고 등이 아프기는 하지만, 근데 내 등은 왜 이렇게 아픈 거지?”
“너 기억 안나? 벼락 맞은 거!”
“벼락을 맞았다고? 살다 살다 이젠 벼락까지...”
스스로 자신은 불운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골프를 시작하고 그 지겨운 굴레가 벗겨졌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새롭고 만족스러웠으니까.
하지만 백주대낮에 그것도 수백 명이 몰려다니던 와중에 어찌 자신만 혼자 벼락을 맞을 수 있단 말인가?
‘벼락 맞을 놈’이라는 비유는 아주 악질적인 인간을 지칭하며 그런 나쁜 인간인데도 벌을 받을 확률이 낮다는 말이다.
극히 희박한 확률을 표현할 때나 쓰는 그런 당치도 않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에 아득한 절망이 내려앉았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벼락 맞은 것 치고는.”
필상은 조심스럽게 몸을 다시 움직여 봤다.
힘은 없지만 사지를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병상에서 내려왔다.
“야. 왜 그래?”
“정말 멀쩡한 건지 확인하려고.”
“뭐가 이렇게 바빠. 너 벼락 맞았다니까!”
툴툴 거렸지만 그녀는 얼른 다가와 필상을 부축했다.
자리에 선 채 전신 이곳저곳을 움직여본 뒤 걸어봤다. 마치 알이 배긴 듯 뭉친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관절도 녹슨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힘들어 보이는데, 그만 앉자.”
“누나, 시합은 어떻게 됐어?”
“그게 지금 중요해!”
“응. 중요해. 내가 대체 얼마나 누워있었던 거야?”
“경기는 악천후로 하루 연기되었어. 사고가 난 순간에 바로 중단되었으니까 넌 아무 걱정하지 마.”
“캐디부터 알아봐. 아무래도 백을 메지는 못할 것 같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숙소로 돌아가 자.”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경기를 치러야할 그녀가 병원에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싫다는 그녀를 억지로 밀어낸 필상은 어두컴컴한 대기실 의자에 홀로 앉아 멍하니 상황을 되짚었다.
“휴우!”
걱정이 앞섰는지 한숨부터 쏟아졌다.
안시현이 자신 때문에 성적에 영향을 받는 것도 신경이 쓰였고 더 중요한 것은 8일 뒤로 다가온 프로선발전 참가다.
사고를 당해 쇠약해진 몸으로 과연 정상적인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독히 운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벼락을 맞고 이렇게 멀쩡하다면 그건 복이 아니겠는가!
온갖 걱정에 휩싸였으나 병상으로 돌아오자 금방 잠이 들었다. 약한 몸 상태로 힘들게 움직인 것이 부담되었던 듯.
“퇴원은 말도 안 됩니다!”
“서울 가서 진료를 받겠습니다. 퇴원절차나 밟아 주십시오.”
아침에 의사를 만난 필상은 몇 가지 검진을 받고 퇴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의사는 극구 말렸으나 어젯밤보다는 확실히 몸 컨디션이 좋아졌고 마음도 급했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돌아온 필상은 일단 깨끗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경기가 속개된 코스로 향했다.
그리고 갤러리들 숲에 섞여 안시현의 경기를 따라다녔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자 몸이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벼락을 맞은 것은 불운이지만 그 결과는 불행 중 다행이었고 빠른 시간에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퇴원을 강행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크게 자리하고 있던 터라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
그날 저녁 비행기로 필상은 집에 돌아왔다.
가족들의 염려도 가라앉혀야 했지만 일단 안정을 취하고 몸을 추스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안시현은 8언더, 단독 3위로 시즌 개막전을 마쳤다.
경기를 끝까지 지켜본 필상은 지켜보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하우스 캐디를 급히 구했는데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아 그녀가 홀로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차마 보기 힘든 장면을 보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전신에 힘이 들어갔고 확 끼어들어 돕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아픈 녀석이 어딜 나가?”
“병원이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엄마 아들은 건강하니까!”
“병원 갔다가 바로 와. 누나들이 장어 사온다고 했어.”
“네에.”
하루 쉬고 다시 집밖을 나서는 필상이 안쓰러웠는지 엄마는 문 앞까지 나와 일찍 들어오라고 신신당부했다.
누나들이 장어까지 사온다는 것을 보면 걱정을 많이 하기는 한 것 같았다. 딸 셋에 막내아들까지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다한 엄마를 위해서라도 목표를 앞두고 물러설 수 없다.
오랜만에 차를 몰고 골프장에 도착한 필상은 연습장으로 가기 전에 최 프로부터 만났다.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네. 제가 몸 하나는 튼튼하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집에 멍 하니 있자니 좀이 쑤셔서요. 가볍게 운동이라도 하는 것이 컨디션을 찾는데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하기야. 매일 죽어라 운동하던 네가 집에 짱 박혀 있을 수 없겠지. 하지만 절대 무리는 하지 마.”
“대회가 코앞인데 그럴 수는 없죠.”
“설마 너, 대회 나가려고?”
“일단 준비는 하려고요.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누워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필상의 강한 집념은 익히 아는 바였다.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게 큰일을 겪고도 용기를 잃지 않은 모습이 그의 눈에는 오히려 듬직하게 느껴졌다.
다만, 사고의 여파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 무리하다가 행여 큰 부상을 입는 것에 대해서는 누차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연습장에 돌아온 필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이 극에 달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싶었다. 그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 어찌 스윙인들 제대로 되겠는가.
별별 짓을 다해 보다가 결국 클럽을 내려놓은 필상은 밖으로 나와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쉽지 않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질끈 깨문 입술에 피가 번진 것도 모른 채.
“절대! 절대 포기할 수는 없어!
몸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미리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미룰 만큼 자신의 삶에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독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중간에 안시현이 병문안 차 방문했으나 하루 종일 붙들려 필상의 스윙코치를 해야만 했다. 좋은 음식도 사절하고 햄버거로 때운 필상이 극구 연습해야한다고 우기니 어쩌겠는가!
*
전투가 치러질 용인프라자 CC에 도착했다.
사전에 연습라운드가 필요했지만 필상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서서히 올라오는 컨디션에 맞춰 스윙을 다듬는데도 숨이 가빴기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을 아는 최 프로가 직접 나서 이 코스의 베테랑 캐디를 섭외해 줬다. 물론 오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코스 공략에 대한 나름의 분석은 했으나 실전은 다를 것이다.
클럽하우스는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프로지망생들로 붐볐다. 인파를 뚫고 커피숍에 도착하자 후덕한 인상을 지닌 중년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혹시 서미향씨?”
“네. 제가 공필상씨의 캐디를 맡을 서미향이에요.”
“반갑습니다. 저도 일찍 온다고 서둘렀는데 저보다 더 먼저 오셨네요?”
“어차피 끌려나왔으니 기왕 할 거면 열심히 해야죠. 그런데 필상씨를 만나보니 오기 참 잘 한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생긴 남자한테는 굉장히 약하거든요. 내가 너무 솔직했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 푼수 끼가 보이는 서미향은 아무리 어리게 봐줘도 마흔은 넘어보였다. 적지 않은 그 나이에도 캐디로 일한다는 것은 그녀가 프로페셔널하다는 말이다.
필상은 캐디가 손님의 좋은 플레이를 지원하는 다소 독특한 전문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리고 예쁜 캐디만 찾는 골퍼들을 보면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하튼 필상은 솔직한 그녀가 마음 편하고 든든했다.
“우리 코스 플레이 해 봤어요?”
“네. 작년에 한 번.”
“호호호.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 용감하네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누님이 많이 도와주셔야합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나가요.”
어딜 가나 싶었는데 그녀가 데려간 곳은 클럽하우스 옥상이었다. 직원만 다닐 수 있는 곳일 텐데 베테랑인 그녀는 관리자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높은 곳에 서자 그녀가 왜 뜬금없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짐작이 됐다. 다는 아니지만 몇몇 홀들이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저게 1번 홀, 저게 3번 홀...”
“야디지북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건넨 야디지북은 겉장이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오색 형광펜을 이용해 야디지북을 한 편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 조잡하죠?”
“아닙니다. 제가 본 그 어떤 야디지 북보다 아름답습니다.”
“정말이죠?”
“물론입니다. 저도 손님용 야디지북은 따로 준비해 두는데 이걸 본 손님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합니다.”
“이건 손님용이 아니에요. 얼마나 귀한 건지 알잖아요. 특별히 부탁을 받아 가져왔지만 다른 걸 줄 수도 있었는데...”
한참 연상이지만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자신의 첫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는 건데, 그만큼 정성이 들어간 정보라는 것에 동의하기에 필상은 감사부터 표했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시는 만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그걸 보면서 전투의지를 맘껏 불태워 봐요.”
“네.”
한 홀 한 홀 확인하고 분석했다.
자신이 미리 숙지했던 것이 의미 없을 만큼 꼼꼼했다. 자신과는 다른 스타일이지만 그녀에게서 배울 점도 눈에 띠었다.
“이제 연습하러 가요.”
“네.”
“이 대회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라면서요?”
“전국 7개 골프장에서 펼쳐지는 예선에 980명이 참가하고 그 중에 240명만 본선에 오릅니다. 물론 본선에서 다시 선택받은 64명만 프로타이틀을 얻죠.”
“15대 1쯤 되네요.”
“계산이 굉장히 빠르시네요.”
“학교 다닐 때 수학은 못했어도 산수는 꽤 잘했거든요.”
급기야 연습장에서 결전을 위한 몸 풀기에 들어갔다. 미향은 뒤에 앉아 클럽별 거리를 파악하고 기록했다. 선수의 비거리를 알아야 보다 정확한 도움을 줄 수 있기에.
“풀스윙은 안 하네요?”
“네.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요.”
“우리 코스 긴 편인데...”
미향이 염려하는 부분은 필상도 알고 있다.
개장한지 40년이 된 이 코스는 전장이 길고 페어웨이가 넓어 남성적인 코스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이번 시합은 블랙 티에서 치러지기 때문에 총 전장이 7,000야드에 달한다.
그러니 풀스윙을 하지 못하는 필상이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게 아닌지 그녀로서는 의아했을 것이다. 샷은 아주 정확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선통과도 버거울 것만 같았다.
“캉!”
급기야 필상이 1번 홀 첫 티샷을 했다.
이 홀은 514m의 상당히 긴 파 5홀이지만 내리막이 심해 장타자들은 2온이 가능한 좌측으로 휘는 도그렉 홀이다.
앞선 동반자들이 페어웨이 좌측 벙커를 넘기는 과감한 샷을 선보였지만 필상은 차분하게 정중앙을 노리고 때렸다.
그나마 내리막을 타고 굴러 230m에 이르렀지만 다른 선수에 비하면 턱없이 짧아 대략 60m 안팎의 거리차이를 보였다.
‘쓰리쿼터 스윙으로는 어쩔 수 없지!’
그 모습을 바라보는 미향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필상은 클럽을 건네며 오히려 싱긋 웃어보였다.
자신이 그런 상황도 모르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필상은 아주 흐뭇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