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9화 (9/354)

ILG009- 벼락 맞은 남자

“한가위네!”

“무슨 말이에요?”

“오늘만 같아라. 뭐 그런 거지.”

“잉? 가히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렴 어때! 경기가 잘 풀리고 있는데.”

“공감!”

2라운드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같은 코스에서 어제는 왜 타수를 잃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펄펄 날았다. 첫 홀에 이어 4번 홀에서도 버디를 낚았고 파 3홀 중에 가장 쉬운 5번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142야드지만 내리막을 감안해 134야드, 핀이 앞에 꼽힌 게 좀 부담스럽네요.”

“9번으로 가자.”

“좋습니다.”

스코어는 잘 나오지만 티잉 그라운드에 서면 상당히 어렵게 보이는 홀이다. 좌우의 무성한 나무와 그린 앞까지는 우거진 숲은 해저드다.

게다가 앞과 좌측은 커다란 벙커, 우측에도 작고 깊은 벙커 2개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포대그린인 탓에 운이 좋아 온이 되는 경우는 없다.

오로지 그린에 떨궈 세워야 한다. 그런데도 스코어가 잘 나오는 것을 보면 확실히 프로의 세계는 별천지였다.

안시현은 한 클럽 넉넉하게 잡고 띄우려는 것이다. 문득 어제의 14번 홀이 생각났지만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굿 샷!”

헤드가 아주 깔끔하게 들어갔다.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팬들은 이미 굿 샷을 외쳤지만 필상의 시선은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은 공에 닿아 있었다.

출발이 조금 좌측으로 치우쳤으나 페이드가 걸린 공은 정확히 핀을 향해 날았다. 다만 탄도가 너무 높은 탓에 살짝 짧지 않을까 우려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공은 에이프런도 아닌 경사지의 러프에 맞았다. 더도 말고 10cm만 더 날았으면 핀에 붙을 기막힌 샷인데 너무 아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

백스핀이 잔뜩 걸린 탓에 공이 그린으로 튀어 올라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골프는 확실히 운이 따라야 하는 운동이라는 말이 떠오른 상황이 펼쳐졌다.

오르막 러프에 맞고도 공이 기이하게 그린 위로 튀어 올라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자연스러운 진행방향이지만 구질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헛웃음이 나올 상황이다.

추측컨대 러프에 딱딱한 이물질이라도 있지 않았나 싶다. 그 느낌은 혼자 담당하기 어려울 만큼 짜릿했다.

“승리의 여신이 바짝 다가온 것 같아요!”

“큐피드가?”

“에이 진짜!”

“왜?”

“어서 가요. 누가 듣기 전에.”

“너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냐? 선수가 기가 막힌 샷을 하고 들어왔으면 춤이라도 춰야지 구박은 왜 하는데?”

“제가 잘못했으니까 어서 움직이자고요. 기자가 들으면 백치 미인을 다룬 기사가 나올지도 몰라요.”

“무슨 미인? 나 그런 기사 좋아하는데?”

“으이그!”

승리의 여신은 니케(Nike)다.

큐피드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비너스의 아들로 사랑의 신이다. 물론 헷갈릴 수는 있지만 기사화 되어 좋을 게 없다.

이제 학교에 들어간 딸아이가 있는 엄마라면 더더욱. 그것도 모르고 자신을 구박한다고 따지는 안시현을 보니 한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 좀 모르면 어떤가?

평생 운동만 해 왔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두 살 터울로 줄줄이 세 명의 누나를 가진 필상은 그녀에게서 누나들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배울 점도 적지 않고 배려해주는 마음을 알기에 누나 한 명쯤 더 있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누나!”

“응? 갑자기 왜 이래?”

“나처럼 잘 생기고 든든한 남동생 하나 정도 있어도 되지?”

“가만, 가만! 일단 라이부터 봐.”

당황한 듯 대답은 회피했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가족관계는 잘 모르지만, 또 전속캐디가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녀와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분명했다.

캐디 일도 잘 하고 싶고 앞으로 선수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경험이 많은 그녀의 조언은 금과옥조일 수 있지 않겠나.

“나이스 터치!”

2m가 조금 넘는 슬라이스 오르막 퍼팅이었다.

살짝 부족하나 싶던 공이 홀컵 끝에 걸리더니 쏙 들어갔다. 5번 홀까지 3타를 줄인 안시현은 6언더로 올라섰고 드디어 카메라 마사지를 받기 시작했다.

긴장할 것 같은데 그녀는 오히려 기운이 생생해졌다. 본시 스타 체질인 듯, 표정관리에 들어갔고 더 신중해졌다.

“신데렐라가 따로 없네!”

“아깐 큐피트라더니?”

“헉! 이런 영어로 어떻게 LPGA에 도전 했나 몰라!”

“그래서 일찍 돌아왔다 왜!”

“아! 그랬구나. 충분히 이해가 되네. 근데 신인상 그거 영어테스트라도 하고 줬어야 하는데 너무 허술하네. LPGA.”

“넌 카메라한테 고마워 해. 네 목숨을 살렸으니까!”

하루 종일 화창할 것 같았으나 그렇지는 못했다.

전반에 4타를 줄이며 중간순위가 공동 3위까지 치솟았으나 후반에는 버디와 보기를 주고받으며 7언더로 경기를 마쳤다.

그래도 순위는 어제보다 상승해 공동 6위, 선두와 3타차지만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만했다. 미디어의 분석도 그러했다.

경기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선수들이 보통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데 그녀는 마다하지 않았다. 자꾸 같이 가자는 걸 사양했는데 나중에 보니 캐디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쑥스럽게.

마지막 라운드를 앞둔 저녁에도 늦게까지 연습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뒤에야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런 일정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저리도 좋을까?’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역시 딸과 통화할 때였다.

스스로 밝혔듯이 지금의 그녀를 지탱하는 지주는 어린 딸이었다. 개인적인 성취도 중요하지만 모든 열정을 골프에 쏟는 이유 중에 그보다 앞서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필상도 문득 떠오른 얼굴이 있었으나 애써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이를 갖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필상은 묘한 꿈을 꿨다.

잠을 설칠 만큼 끔찍한 고통을 느낀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아침에 일어나니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개꿈이네?”

“뭐라고?”

“아니에요. 식사하기 전에 가볍게 러닝이나 하죠.”

“오케이!”

우승을 노리는 설레는 아침이 밝았다.

일기예보에 흐린다는 말은 있었으나 구슬구슬 봄비가 내리는 새벽의 기온은 몸을 잔뜩 움츠리게 만들었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컨디션을 찾았고 오늘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수 있었다.

“비가 변수겠네요.”

“난 좋아. 무너지기도 쉽지만 역전하기도 쉬울 테니까.”

“긍정적인 마인드, 아주 좋습니다.”

최종라운드에 참가 컷은 1오버였고 참가자는 65명이다. 안시현은 마지막에서 세 번째 조에 편성되었다.

작년에 악천후로 3라운드가 취소되었는데 묘하게 올해도 3라운드는 우중경기가 펼쳐질 것 같았다. 게다가 바람까지 심상치 않아 타수를 잃지 않고 버티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다.

문제는 필상이 바람의 적응에 대해서는 취약하다는 점이다. 말로만 듣던 제주의 억센 바람은 멘탈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굿 샷!”

“한 클럽 더 보기 잘 했지?”

“맞바람이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바람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순응하는 게 좋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공부 열심히 해봐.”

“공부는 제 주특기죠. 하하하.”

그나마 경험 많은 안시현이 비와 바람에 강했다. 좌우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은 몰라도 앞뒤로 부는 바람에 대해서는 필상도 서서히 적응이 되어갔다.

전반 6개 홀을 파로 막는 사이, 동반자들이 허물어졌다. 아직 리더보드 상단의 선수들이 뒤에서 따라오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은 파악되지 않았으나 이대로 버티다 한두 타만 줄이면 우승 가시권에 들 것 같았다.

“붙었을까?”

“4m 이내일 겁니다.”

“드디어 나도 버디 하나 노릴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럴 겁니다.”

7번 홀은 오르막이 심한 파 4홀이다.

안시현은 드라이버를 안전하게 보낸 뒤, 137야드를 7번 아이언으로 공략해 그린에 올렸다. 문제는 세컨샷 지점에서 그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충 감은 오지만 얼마나 붙었을지 기대하며 부지런히 그린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벼락이 쳤다.

‘우르르르... 과앙!’

소름이 돋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번개가 날려 섬뜩했다. 또한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며 이러다 정상적으로 경기를 마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오늘로 대회가 끝나면 필상은 내일 하루 인근 골프장에서 36홀 라운드를 돌 예정이었기에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자신에게 닥칠 엄청난 위험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그린에 올라 보니 생각보다 짧은 퍼팅이 남았다는 것에 흐뭇했을 뿐.

안시현이 마크를 하고 동반자들이 어프로치 하는 동안, 필상도 백을 내려놓고 그린의 라이를 살폈다. 7번 아이언이 제대로 닦이지 않은 걸 보고 그걸 들고 움직인 것이 문제였다.

‘어?’

필상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신을 잃은 당사자는 볼 수 없었지만 그에게 다가오던 안시현은 똑똑히 봤다. 벼락이 필상의 바로 옆에 작렬한 것을.

들고 있던 클럽 탓인지 눈부신 빛 덩어리가 필상의 몸을 확 휘어감은 장면도 목격했고 감전된 그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넘어지는 것도 지켜봤다.

“아악!”

그녀만 본 것은 아니다.

이 팀을 따라다니던 수백 명의 갤러리들도 너무도 끔찍한 광경에 깜짝 놀라 너도나도 비명을 질러댔다.

어찌 백주대낮에 사람이 벼락을 맞을 수 있단 말인가!

*

“정말 기이한 일입니다.”

온갖 검사를 다한 전문의의 첫 소견치고는 너무 간단했다. 분명히 자신의 눈앞에서 벼락을 맞은 끔찍한 감전 사고다.

그런데 정신을 잃었을 뿐, 연상되던 심각한 외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등에 입은 화상은 이미 치료했으며 검사 상에서 나타난 특별한 이상 징후도 없단다.

“근데 왜 깨어나지 않죠?”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그 말을 남긴 의사는 엉거주춤 도망치듯 물러났고 안시현은 병상 옆에 앉아 누워있는 필상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창백한 얼굴에 그려진 표정은 벼락 맞을 당시의 고통을 그대로 투영이라도 하듯이 찡그린 채 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게 왜 이리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

“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지만 어서 깨어나 자신을 놀려대던 모습을 보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깨어나도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일지만 그래도 소리쳤다.

“야! 빨리 깨어나! 내일 내 캐디는 누가 하냐고!”

경기는 대회규정에 따라 하루 순연되었다. 비바람이 더욱 거세어졌고 안전사고까지 발생했으니 당연한 조치다.

하지만 안시현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었다. 일단 최 프로에게 연락해 가족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고 당장 필상을 돌볼 사람이 자신뿐인 것이 불만인 것도 아니다.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저 필상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할 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미 사위는 어두워졌고 응급실도 이날따라 조용했다. 안시현은 병상에 기댄 채 잠이 든 것 같았고.

‘으음...’

필상은 서서히 깨어났다.

눈을 떴지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본 시간이 꽤나 길었다. 깨어났지만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일단은 자신이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린 라이를 살피던 도중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극심한 고통을 느꼈고 그 뒤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고막을 울리는 굉음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는 한데.

‘병원인가?’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하체에서 느껴진 거한 무게감에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떡하니 베고 잠들어 있는 안시현을 확인했다.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픽 웃음이 터졌다.

그녀가 크르릉 대며 코를 골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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