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8화 (8/354)

ILG008- 애매한 경계

“텅!”

뒷벽을 때린 공이 청량한 잔음을 남기며 버디를 알렸다.

동반자 두 명 모두 보기를 범한 가운데 얻은 버디라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그 홀을 기점으로 안시현의 샷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1번 338야드의 미들홀에서 85야드를 샌드웨지로 핀 하이(pin high- 공이 홀컵 바로 옆에 멈추는 것)를 하더니, 핸디캡이 높은 383야드의 12번 홀에서는 163야드를 7번 아이언으로 공략해 이글을 할 뻔 했다. 홀컵을 살짝 스치는 소름 돋는 샷에 갤러리들의 비명이 진동했다.

“살살 하죠?”

“뭘 살살해. 이제 겨우 언더로 넘어갔는데!”

3연속 버디를 잡고도 그녀는 허기가 지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강렬한 포스는 기회를 잡았을 때 치고 나가야한다는 경험과 간절함이 결합된 의지의 발로였다.

358야드의 13번 홀에서는 티샷 비거리가 261야드를 기록하며 완벽하게 샷이 살아났음을 만방에 알리는 듯 했다.

또 다시 공을 핀 바로 앞에 떨구며 인코스 첫 네 홀을 하트로 장식하는 그녀를 보며 깨달은 바가 적지 않았다.

상승세를 탔을 때, 확실하게 몰아쳐야 한다는 것이다.

“마의 홀이라는 이 14번 홀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내 생각은 달라. 오늘 세팅이 150야드잖아.”

“오케이. 뭘 드릴까요?”

“8번.”

살짝 불안했으나 샷 감각을 찾았기에 그녀가 원하는 클럽을 건넸다. 이 홀은 수많은 선수들에게 아픔을 안긴 홀이다.

일단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크기의 호수가 부담스럽고 실제 홀의 모양도 좌측만 통로가 이어진 아일랜드 홀이다.

하지만 투어프로라면 자주 만날 수 있는 홀이다. 웬만한 골프코스에는 이런 시그너처 아일랜드 홀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생각하다가 당한다.

이전과 달리 짧게 세팅을 했지만 지금처럼 핀이 뒤에 꽂힐 경우, 뒤가 높은 2단 그린을 감안해 짧게 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코스의 그린스피드는 압도적으로 빠르기 때문에 조금만 길어도 그린을 훅 넘어가 물에 빠지고 만다.

‘알아서 치겠지?’

그런 생각은 착각이었다.

워낙 샷이 좋아 높은 탄도를 형성해 공을 그린에 우뚝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결과는 덕 훅(Duck hook- 우에서 좌로 심하게 휘는 낮은 탄도의 샷), 어이없게도 탑핑(Topping)이 난 것이다.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공이 그린을 넘어 뒤편 해저드로 자취를 감추자 고개를 푹 숙이고 티 박스에서 내려왔다.

사방에서 위로하는 팬들의 응원이 쏟아졌으나 그녀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필상의 곁에 다가온 그녀는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후회의 말을 던졌다.

“내가 오버했나 봐!”

“아닙니다. 제가 괜히 불필요한 말을 해서.”

“아니야. 넌 네 역할을 한 거잖아. 그걸 무시한 내 자만이 문제지. 기본조차 못 지키다니... 나 벌떡 일어섰지?”

“그린에 공을 세우려고 스핀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 같아요. 하지만 서드 샷을 붙이면 되니까 깨끗하게 잊어요.”

“그래. 난 할 수 있어.”

이번 미스 샷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도 아니다. 수없이 많은 실전을 겪은 노련한 선수도 이런 실수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한 샷 한 샷에 집중하는 것은 옳지만 이런 실수까지 생각하면 어찌 과감한 샷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이스 어프로치!”

다행히 안시현은 드롭한 공을 핀에 붙였다.

스핀이 걸린 로브 샷으로 이 빠른 그린에 공을 세운 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당황스러운 순간에는 더더욱.

대체 어떻게 만든 버디들인가?

2오버에서 2언더까지 간 과정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런데 한 번의 실수로 그 환상적인 샷을 무위로 돌리게 되었으니, 그 생각을 하면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하지만 안시현은 담담했다. 수많은 갤러리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더 떨릴 것 같은데 오히려 냉정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모습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아쉽네.”

“아니야. 지금은 지켰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 만족할 수는 없지만 첫날 1언더면 크게 나쁘지도 않잖아.”

“전반 난조를 고려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15번 홀은 548야드의 롱홀이다. 호수가 페어웨이를 양쪽으로 갈라놓아 우측으로 갔다가 다시 좌측으로 공략해야하는 홀로 2온은 불가하기에 정확한 거리를 잘라갔다.

서드샷을 핀 근처에 잘 붙였으나 2.5m 버팅을 놓쳤다. 라이는 정확히 읽었지만 입스(Yips- 숏 퍼팅 시 손이나 손목의 근육에 영향을 주는 불안정한 컨디션)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기세가 꺾인 상황에서 파로 넘긴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리하다가 왕창 무너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16번 홀이 핸디캡 2번입니다. 오르막이 심한 335야드 파 4로 역대 대회기록을 보면 버디가 가장 적게 나온 홀이죠.”

“어떻게 공략할까?”

거리나 라이와 같은 부분적인 조언은 했지만 안시현이 완전한 홀 공략 방법을 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의견을 듣겠다는 것이고 결정은 그녀가 한다. 그녀도 나름의 구상이 있지만 자신의 스윙에 대한 확신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3자의 의견을 참조하려는 것이다.

필상은 뜻밖에도 공격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어려운 홀인 것은 알지만 버디를 잡기 어려울 뿐이지, 완전히 망가질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페어나 그린이 전체적으로 슬라이스라는 것을 감안해 좌측 벙커를 시원하게 넘겼으면 좋겠습니다.”

“오르막 감안하면 캐리만 230야드 이상 나와야 하는데?”

“그러니까요!”

“좋아!”

“몸에 힘 빼고요.”

“알았어.”

“허리띠도 조금만 더 풀어요.”

“그건 왜?”

하는 수 없이 귓속말을 해야 했다.

‘똥배 많이 나온 거 동네방네 자랑해요?’

구타를 부르는 말이던가?

그 말을 던지자마자 필상은 한 방 제대로 먹었다. 묵직한 어퍼컷의 진동을 느끼며 역시 진실을 규명하는 길은 험난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물론 그녀는 필상의 조언을 이행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시작했다. 허리띠를 푸는 모습을 남의 눈에 띠지 않으려고 페이크까지 동원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괜찮아?”

“네. 힙도 너무 내밀지 말고요. 무게중심을 잡으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너무 압도적이거든요.”

“야! 이따 두고 봐!”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는 곧바로 스탠스를 점검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드레스가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낮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거리보다는 정확성을 염두에 두다보니 일단 맞추려고 무릎을 더 구부렸던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일어선다는 느낌으로 서자 보다 안정된 자세가 나왔다. 그래봐야 1, 2cm 일어선 것에 불과하지만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왜 이제야 말을 한 거지?”

“확신이 없었어요. 근데 마음에 드나요?”

“결과를 봐야지. 최 프로님도 그 얘기를 하긴 했어. 와 닿지 않았는데, 네 적나라한 표현이 확 와 닿았나 봐. 호호호.”

골퍼이기 전에 여자다.

엄마골퍼지만 그녀에게 따라붙는 미녀골퍼라는 인식은 프로인 그녀의 이미지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다.

인기가 곧 수입과 직결되기에 성적을 위해서도, 이미지를 위해서도 체중조절이 필요하다는데 다시 한 번 공감했다.

그리고 터진 호쾌한 티샷도 환상적인 곡선을 그렸다. 스윗 스팟에 정확히 맞은 공이 파란 창공을 향해 쭉쭉 뻗어나갔다.

조금씩 페이드가 걸리던 타구가 오히려 살짝 드로우가 먹는 것이 걱정을 자아냈지만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좌측에 떨어졌지만 페어웨이 경사 탓에 중앙으로 굴렀기 때문이다.

“캐리가 얼마나 될까?”

“241야드 정도 됩니다.”

“호호. 거리 측정기가 따로 없네.”

일의 단위까지 정확하다고 믿지는 않지만 240야드를 넘긴 것은 분명해 보였던지 필상의 자신 있는 대답에 안시현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까이 지낸 필상은 그녀가 예쁘다는데 동의하지 않지만 지금 보여준 미소만큼은 가히 천사마냥 아름답다고 느꼈다.

“더도 말고 100야드 보면 되겠네요.”

“샌드.”

“빈 스윙 많이 해요.”

“당연하지.”

결국 16번 홀에서 버디를 낚은 안시현은 18번 홀에서 다시 장타를 선보이며 1타를 줄이는데 성공했다.

전반을 2오버로 마쳤고 14번 홀의 보기도 아쉬웠으나 후반에 버디를 무려 6개나 기록한 안시현의 최종 스코어는 3언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어지러웠던 경기를 끝마쳤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필상씨도 정말 수고했어. 근데 왜 가끔 그렇게 딱딱한 어투를 쓰는 건데? 내가 부담스럽나?”

“아뇨. 무섭죠.”

“뭐?”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123명이 기록한 모든 성적이 나와 있었다. 놀랍게도 7언더를 기록한 선수가 있고 6언더가 3명, 5언더도 5명이나 나왔다.

18홀을 돌아본 필상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보기 없이 버디만 7개를 기록한 김수지가 대체 어떤 선수인지 궁금해 검색해봤다.

9살 때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골프를 시작했단다. 귀여운 외모 뒤에 숨겨진 놀라운 재능에 할 말을 잃었다.

한참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는데 안시현이 나타났다.

“뭘 봐?”

“오늘 성적 좋은 선수들 신상정보 털고 있죠.”

“치. 밥이나 먹으러 가자.”

갈치조림을 먹으러 갔다.

유명한 맛집이 많지만 동네 사람들이 찾는 허름한 집을 소개받았는데 둘의 입맛에는 그저 딱이었다.

운동 후의 식사는 무엇이든 맛있을 수밖에 없다. 일단 허기를 면하자 드디어 오늘 경기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었다.

연습라운드를 마친 뒤에 한 번 겪어봤던 터라 오늘은 더 치열했다. 대부분 필상이 먼저 문제를 제기했고 안시현도 당시 상황과 샷 결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혔다.

남들이 보면 다투는 것처럼 보일 만큼 서로가 빡빡하게 의견을 개진했고 이견도 표출하며 길었던 18홀을 낱낱이 해부했다.

“너 정말 머리가 좋나봐.”

“며칠 지난 것도 아니고 오늘 일인데 어떻게 잊어요.”

“난 네가 말하기 전에는 잘 생각나지 않아.”

“좋겠습니다. 단순해서.”

“단순해서 좋은 점도 많거든!”

“그건 확실한 것 같아요. 지난 플레이에 집착하는 것만큼 나쁜 버릇은 없는데 아줌마는 금방 잊더라고요. 그 딱딱한 머리가 정말 부럽습니다.”

“적당히 하지! 그것도 다 내공이 필요한 거야. 앞으로 너도 경기를 직접 해 보면 내 말뜻을 알게 될 거야.”

“그렇겠지요.”

“그리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때로는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거야.”

“사실? 뭐가 사실이죠? 지금 자신의 딱딱한 머리를 인정하는 건가요?”

“야!”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이 기껍지 않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녀도 거기까지, 포기한 듯 더는 말하지 않았다.

누나처럼 편하고 좋지만 그녀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한 치도 없으며 그녀가 그걸 아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여자들이 보다 감성적이며 선수와 캐디라는 특수한 관계로 인해 각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심각한 도발도 농담으로 받아들일 만큼 친숙해졌지만 필상이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이날 이 때까지 오로지 한 명만 사귀었고 그나마 결혼약속까지 한 여인에게 파혼을 당한 처지에 누굴 마음에 담는단 말인가?

선수와 캐디는 서로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만 때로 냉정한 말도 아끼지 말아야할 관계다. 애매한 경계에 걸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 적정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가자.”

“어디로요?”

“연습해야지.”

“괜찮겠어요?”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할 거야. 그 대신 내가 오늘 하루 네 일일 코치해 줄게.”

“혹시 화장 안한 얼굴이 훨씬 예쁜 거 알아요?”

“이 인간이 정말!”

이 날도 드라이빙레인지 문을 닫을 때까지 연습했다. 클럽을 가져오는 걸 주저했는데 가져오길 정말 잘 한 것 같았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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