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7화 (7/354)

ILG007- 네버 업 네버 인

“오랜만이에요?”

“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은 반갑다는 거죠?”

“물론입니다.”

클럽하우스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안시현이 다가와 반겼다. 내일 프로암에 참가하려면 미리 도착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시간 맞춰 필상을 기다린 것 같은 모습에 괜히 미안했다. 선수보다 먼저 도착해 갖은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 캐디의 역할인데 그걸 다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안 프로. 이럴 게 아니라 밥이나 먹으러 가지?”

“네. 저도 안 먹고 기다렸어요.”

최 프로는 안시현과 상당히 친해 보였다.

함께 식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흥미로운 소식도 들었다. 하라 에리카가 이번 대회에 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투어가 비는 주간이라 가능했는데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불참의사를 통보해 왔다. 그런데 최 프로의 분석은 필상이 캐디 제안을 거절할 당시 이미 그런 기미를 보였단다.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굳이 올 필요가 없다더라고.”

“에이, 제가 뭐라고요!”

“그건 나도 모르지. 모모카가 너에 대해 아주 좋게 소개를 했나보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사안은 내일 프로암을 시작으로 총 5번의 라운드를 함께 할 안시현과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면은 있지만 아직은 어색했다.

“필상씨. 편하게 대해 주면 좋겠어요. 친구처럼.”

“3살이나 많은 B형 누나인데 제가 감히 그럴 수 있나요?”

“어? 나름 저에 대해 조사를 했나 봐요?”

“1984년 9월15일 인천에서 태어났고 2002년에 입회, 2003년 LPGA 나인브릿지클래식 우승으로 화려하게 등장, 2004년 엑스캔버스오픈우승을 했고 LPGA 신인상을 받았으며...”

“그만 해요. 호호호.”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조금만 신경 쓰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라도 필상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것 자체가 뿌듯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면 그 뒤로 이어진 긴 방황의 시간이 언급되는 것이 싫어 필상의 말을 끊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말문이 트이자 정말 친구처럼 편해졌다.

원숙한 여인의 여유가 상황을 주도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2016년 한국여자오픈 우승할 때 경기장면을 구해 분석해 봤습니다.”

“하루가 다른 나이인데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최고의 컨디션에서 어떤 스윙이 나오는지는 확인했습니다. 지난 11월과는 차이가 꽤 있더군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최 프로님을 모셨는데, 필상씨가 분석을 했다면 프로님은 왜 오셨어요?”

“나? 그러게. 하하하.”

프로암은 아마추어들이 프로선수와 짝을 이뤄 대회가 열리는 코스에서 이벤트성 라운드를 진행하는 행사인데, 대개가 자선모금의 성격이 강하다.

경기 전에 한 번 더 코스를 경험할 기회이며 비용도 들지 않아 누구든 참가를 원하지만 모두에게 열려있지는 않다.

최근 우승했거나 지명도가 높아 아마추어들의 기부를 이끌어낼 인기 프로들이 주로 초청받는다. 안시현의 지난해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어도 여전히 그녀가 리그에서 주목받는 선수임을 보여주듯이 그녀도 38명의 참가자에 포함되었다.

물론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함께 연습을 진행했다.

“왜 말이 없어?”

“아직 몸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요.”

“실전까지 봐야 된다는 건가?”

“일단 오늘은 편하게 치세요. 제가 주제넘게 나설 상황은 아직 없는 것 같아요.”

“그거 칭찬이지?”

“글쎄요...”

필상은 말을 아꼈고 코치는 최 프로가 했다.

그는 내일 다시 여주로 돌아 가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시현의 스윙을 나름 분석했지만 아직은 어떤 판단을 내리기에는 데이터가 부족했고 그녀의 스윙이 의외로 일관되지 않은 점도 필상을 난감케 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했지?”

“왜요?”

“코스를 파악하는 모습이 완전히 시험 전날 집중하는 모범학생 같아서.”

“우리 동문이에요. 제가 06학번이니까 훨씬 선배이긴 하죠.”

“정말이야?”

사실이다. 안시현은 27살이던 2010년 성균관대학교에 스포츠과학을 전공하기 위해 만학도의 꿈을 안고 입학했다.

화려한 성공, 은퇴, 결혼, 출산, 이혼, 그리고 다시 재기하기까지 그녀가 걸어온 삶의 여정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필상의 삶도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오픈 우승 뒤, 그녀가 했던 인터뷰 구절은 상당히 인상 깊었다.

“어느 누구든 빛을 발할 수 있어요. 그 장소와 시기가 다를 뿐이죠. 갖가지 유혹과 좌절로 힘들지만 결국 자신의 몫이에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 무엇 때문에 노력해야 하고 어디서 빛을 발할 것인지 의문을 갖고 빛을 찾기 바랍니다.”

“너...”

안시현은 자신이 과거에 했던 말을 그대로 재현하는 필상을 마주보며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자신의 생각이었지만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새삼 돌아보는 것 같았다.

물론 필상이 그런 것까지 정확히 기억해내는 것을 보며 적잖이 감동을 받은 듯, 그 뒤로 그녀의 시선은 아주 묘했다.

이성적인 판단에 앞선 신뢰가 형성된 순간이었다.

“내가 좀 봐도 돼?”

“그냥 보지 말고 아주 자세히 보세요. 저랑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으면 얘기하고요.”

프로암을 마쳤다.

필상은 안시현의 스윙도, 스코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코스를 파악하는데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고스란히 담긴 야디지북을 확인하는 안시현의 표정은 진지했다. 빼곡한 기록 하나하나에 필상의 정성이 담겨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거리마저도 수정할 만큼 세심한 거리 측정, 러프의 길이와 벙커의 높이, 빗금으로 표현된 잔디의 결, 하다못해 스프링클러의 위치까지 적혀 있었다.

“빈틈이 보이지 않네.”

“아직 완성본은 아닙니다. 내일 조금 더 추가해야죠. 특히 그린이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아요.”

“나도 도와줄게. 그런데 우리 저녁은 뭐 먹을까?”

“제주도에 왔으면 반드시 먹어야하는 게 있지 않나요?”

“오케이. 가자고.”

“일단 샤워부터 하고요. 혹시 씻는 거 싫어해요?”

“이 인간이!”

“대체 누가 아줌마를 미녀골퍼라고 개뻥을 친 거죠?”

“더는 못 참아!”

페럼에서 열렸던 대회와는 달리 제주도는 낯선 타지다. 때문에 선수와 캐디는 늘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삼시세끼를 같이 먹고 커피도 함께 마시고 투룸인 콘도까지 같이 쓰다 보니 남녀의 경계가 어느 순간 확 허물어졌다.

하기야 누나 셋과 함께 자란 필상은 쉽게 적응했다. 안시현도 편하다고는 하지만 움찔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어 필상은 가급적 혼자만의 시간을 주려고 신경 썼다.

공식 연습라운드를 안시현은 이븐파로 마무리했다. 썩 마음에 드는 스코어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점 더 샷이 정확해졌다는 점이다.

필상이 클럽 선택과 조언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너무 과식하는 거 아닌가요?”

“진짜! 이젠 내가 먹는 것까지 간섭하는 거야?”

“투어를 뛰는 169cm의 여자선수에게 가장 적합한 체중은 얼마일까요?”

“야!”

“농담 아니에요. 운동량이 적지 않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몸이 좀 더 가볍게 느껴져야 클럽 컨트롤도 쉽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로라 데이비스, 펑 샨샨 몰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죠. 원래 덩치는 좀 있었지만 지금처럼 편안한 몸매는 아니었잖아요. 작년과 비교해도 5kg은 더 붙은 것 같은데.”

그 말을 아껴왔다.

육아까지 감당하는 남들과 다른 입장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투어를 소화하려면 좋은 체력은 기본이다.

겨울 동안 늘어난 체중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당장의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말을 꺼냈다.

정색하는 필상의 의도를 알아챈 그녀는 밥맛이 없다며 수저를 내려놓고는 쌩하니 고개를 돌린 뒤, 말이 없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했을지 몰라도 지금 당장 인정하기 싫은 감정은 어쩔 수 없는 듯.

진심과 상관없이 자신이 다소 성급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필상은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안 하니만 못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기에.

식당을 나서자 필상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어서 와서 같이 뛰어요.”

“야! 아직 소화도 안됐어. 나 아프면 네가 책임질 거야?”

대꾸도 없이 멀어지자 그녀도 마지못해 따라오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일찍 티오프인데 무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콘도에 도착한 필상은 조깅코스를 지나 연습장으로 향했다. 아직도 연습하고 있는 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필상은 안시현의 백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그의 어깨에는 골프백이 하나 더 걸려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은 표정을 짓던 안시현은 자리를 잡더니 클럽을 골라 연습을 시작하는 필상을 한참 쳐다봤다.

그가 스윙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또한 느닷없이 왜 이곳까지 와서 연습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도 못했다.

‘제법 틀이 나오네?’

‘근데 쟤 프로 준비하나?’

‘으음... 샷 좋네.’

그냥 넋 놓고 바라보던 안시현의 뇌리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화난 척 하고 있지만 필상의 충고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묘하게 기분이 상해 받아주지 않았는데, 필상의 스윙을 보며 서서히 떠오르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간절함.

낯설지 않은 그 모습이 자신의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과 겹쳐졌다. 그러다 문득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필상은 자신에게 말한 것은 체중이 아니라 바로 간절함이 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골프 몇 년 했어?”

“이제 꼬박 1년 됐어요.”

“1년? 정말이야?”

“네. 15일에 프로선발전 나갈 겁니다.”

“그런데 여길 온 거야?”

“배울 게 많을 것 같았어요. 실제 잘 배우고 있고요.”

“나쁜 자식!”

“왜요?”

“알았어, 알았다고!”

안시현은 클럽을 들더니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샷을 때리기 시작했다. 안시현은 자신에게 뭔가 배우고 있다는 말에 근거를 만들어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둘 이외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연습했다. 필상에게는 흔한 일상이지만 안시현은 참으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지독한 연습이었다.

한국여자오픈우승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형편이 나아졌고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엄마골퍼의 대명사로 인정받았다.

최소한의 이름값은 했다고 생각했고 항상 최선을 다한다고 믿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태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좋은 아침!”

“몸은 괜찮아요?”

“괜찮겠어?”

“어디가 불편해요?”

“아니야. 괜찮지 않은 것이 너무도 좋아. 국내 개막전을 이렇게 뜨겁게 맞이할 수 있게 내 속을 긁어준 거 고마워.”

“네?”

“정말 고맙다고.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 우리 이번 대회 최선을 다해보자. 아니, 간절하게 우승을 갈구해 보자.”

“당연하죠. 이 멀리까지 왔는데 보너스는 챙겨야죠.”

“으이그!”

1라운드 시작은 좋지 못했다.

어젯밤에 무리한 것이 영향을 미친 듯 뭔가 부족했다. 동반자들이 타수를 줄여나가는데 전반에 오히려 2타를 잃었다.

그 찜찜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필상은 담담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다들 어려워하는 10번 홀에서 안시현 홀로 기가 막힌 아이언 세컨샷으로 온 그린에 성공한 것이다.

4m 버디 찬스, 물론 라이는 그다지 쉽지 않았다. 문제는 올 시즌부터 캐디가 그린에서는 선수 뒤에서 라이를 함께 보지 못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살피지 못했는데도 필상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좌측 한 컵 어때요?”

“더 봐야 하지 않을까?”

“네버 업 네버 인(Never up never in). 오르막 퍼팅에 많은 생각은 오히려 독입니다.”

“우와! 영어 좀 하네?”

“저 공부 좀 했다니까요. 하하하.”

안시현이 차분하게 공을 정렬 후 어드레스에 들어갔다 사선에 서 있어도 필상은 느낄 수 있었다. 정확한 방향임을.

‘네버 업 네버 인’이라는 말은 짧은 퍼팅은 결코 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교훈적 표현으로, 과감하게 치라는 의미다.

라이가 제법 크지만 오르막에서는 방향에 대한 의심이 퍼터의 뒤를 잡아끄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에 공감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