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6화 (6/354)

ILG006- 뜨거운 겨울

*

사람에게 경험은 정말 중요하다. 진실을 규명할 판단의 근거가 되고 새로운 의지의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첫 실전투입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대해 크게 실망했으나 주변의 평가는 의외였다. 엄지를 치켜드는 동료들이 적지 않았고 특히나 최 프로는 엄한 말을 꺼내 심란케 했다.

“필상아. 반응도 좋은데 이참에 프로캐디로 한 번 나서 보는 건 어때?”

“전 그냥 제 일이나 열심히 하렵니다.”

“너만을 찾는 고객을 생각하면 골프장 입장에서는 좋지만 아까운 재능을 썩히는 것 같아서 그러지.”

물론 필상이 드러낸 입장과 속마음은 달랐다.

긍정적인 의견을 밝힌 이들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건데 필상은 확실히 좋은 캐디가 될 재능을 갖췄다.

일단 체력이 받쳐주고 똑똑해 손님을 만족시킬 줄 알고 코스를 파악하는 능력이나 거리감, 라이를 읽는 것도 정확했다.

하지만 프로캐디로 나선다고 선언한들, 당장 달라질 것은 전혀 없다. 최 프로가 선수를 소개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인 생활이 해결되어야 꿈도 꿀 수 있는 법이다.

특히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기에 스스로 과도할 정도의 확신이 생기기 전에는 움직일 의사가 없다.

“저 새벽과 저녁에 연습장을 좀 쓰고 싶은데, 직원할인이나 확실하게 해 주십시오.”

“본격적으로 연습 시작하려고?”

“네. 아는 척이라도 하려면 제가 직접 일정 수준까지는 올라가야겠더라고요.”

“흐흐.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괜히 넘겨짚지 마시고 오다가다 잔소리나 좀 해 주세요.”

“알았어. 내년도 프로선발전 일정은 내가 알아볼게.”

넘겨짚지 말라고 했지만 프로선발전 일정을 알아본다는 최 프로의 말에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실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입금되면 한 턱 쏘겠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잖아?”

모모카가 탑 10에 들면 상금의 5%를 보너스로 받는 계약을 했다. 공동 6위가 5명이나 되는 바람에 상금이 1,500만원이었고 그에 따라 75만원의 공돈이 생길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냥 넘어가고요.”

“아냐. 돼지갈비 좋다!”

“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프로타이틀을 다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필상이 원하는 것은 대한골프협회가 인정하는 준회원, 프로가 되는 것이다.

전에는 티칭, 세미, 투어프로로 구분했는데 지금은 프로와 투어프로로 단순화되었고 험난한 프로선발전을 통과하면 3부 리그인 프론티어투어 참가와 투어프로 선발전의 응시자격이 주어진다.

“아예 열쇠를 받았다면서?”

“저도 같은 직원이잖습니까! 하하하.”

“그래 어디 한 번 스윙 좀 보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며 골프장은 한가해졌다.

하지만 필상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매일의 새벽을 연습으로 열었고 직원들 눈치가 보일만큼 늦게까지 정진했다. 물론 마구잡이식 연습은 아니다.

검색하면 얼마든지 좋은 레슨과 동영상이 있었기에 잘 구분해서 자신에게 맞는 것들을 찾았고 실전에 적용했다.

하루에 2,000개를 때리는 것으로도 부족해 어프로치와 퍼팅까지 오로지 골프에만 매달려 주변 사람들을 질리게 했다.

하지만 최 프로가 뒤에 앉자 살짝 긴장이 됐다.

“따악!”

스윗 스팟에 맞은 공은 깨질 듯 공간을 가르며 날아갔다.

느린 백스윙에 비하면 엄청난 비거리였다. 7번 아이언으로 190야드를 일정하게 보내는 것은 아마추어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켜보던 최 프로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고 필상이 10개의 공을 친 뒤에야 첫 소감이 나왔다.

“굳이 강하게 때리지 않아도 정확한 임팩트가 만들어지는 스윙을 찾았구나.”

“그런데 왜 제 스윙은 예쁘지가 않을까요?”

“예뻐서 뭐 하게? 어차피 서른 넘어 시작했잖아.”

“으으으! 보다 멋진 스윙은 불가능하다는 건가요?”

“아니. 충분히 자연스러워.”

그는 필상의 아이언을 뺏더니 직접 샷을 했다.

‘역시 프로가 맞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멋진 스윙이었지만 그는 냉정하게 자신을 비판했다.

“멋지면 뭐 하냐? 일관성도 없고 원하는 거리도 나오지 않는데!”

“그야 연습을 안 하시니까 그러죠.”

“아니야. 한 물 가서 그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면 아무리 스윙이 예뻐도 원하는 곳에 떨어뜨리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거야. 최소한 네 스윙은 그게 가능하잖아.”

“제가 너무 폼에 신경 쓴다는 말입니까?”

“그래. 좋은 폼이 나오면 더 좋겠지만 모든 사람이 어떻게 다 똑같은 스윙을 할 수 있겠냐. 프로라도 그건 가능하지 않아. 딱히 교정할 필요가 있다면 모를까, 네 스윙은 현재 네게 가장 알맞아.”

정말 가슴이 따뜻해지는 조언이었다.

수없이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지만 과연 자신이 걷는 길이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남들의 걱정처럼 너무 늦게 시작했기 때문이다.

필상은 87년생이다. 만으로 31살에 골프를 시작했고 며칠 뒤에는 우리 나이로 33살이 된다.

포털 검색을 하다가 전문가의 답변에 서른 넘어 프로를 꿈꾸는 것은 망상이라는 표현을 본 적도 있다.

그런데 최 프로는 전에도 그러더니 다시 한 번 용기를 북돋아줬다. 적어도 노력에 대한 보상은 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

“돼지갈비는 아직 재우고 있나?”

“아뇨. 오늘 가시죠. 하하하.”

*

“너 태국어도 좀 되냐?”

“‘싸왓디 캅!’은 압니다.”

“그럼 내가 더 낫겠네. 전지훈련을 수도 없이 다녔거든.”

“치앙마이는 요즘 날씨가 아주 좋다던데요?”

“그렇기는 한데 너무 비싸졌어. 한국골퍼들이 너무 많이 몰리거든. 하루에 700명씩 매일 쏟아 놓으니 별 수 없겠지.”

“원 없이 공이나 실컷 쳤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많이 와 골프장이 휴장에 들어갔다.

그래도 연습을 쉬지 않는 필상에게 최 프로가 여행을 제안했다. 놀러갈 생각은 없었으나 좋은 코스에서 무제한 라운드를 즐길 수 있다는 말에 혹해 비행기에 올랐다.

“후덥지근하네요.”

“파커나 벗지?”

“아, 네.”

공항에서 나오자 밤인데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러니 한국 골퍼들이 겨울만 되면 태국에 몰려들겠지 싶었다. 최 프로의 지인을 만나 골프장 주변 숙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필상은 하루에 54홀을 소화했다. 최 프로는 질리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오후라운드에는 함께 나와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저 한 마디 툭 던져도 그게 다 돈인 특급 프로의 레슨을 지겨울 만큼 듣는 일이 어디 값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여기도 골프 배우는 어린애들이 많네요?”

“주타누간 키즈잖아.”

“아! 우리나라 세리 키즈 같은 거네요?”

“응. 골프 환경도 좋고 의외로 재력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앞으로 PGA나 LPGA에서 태국 프로들을 종종 보게 될 거야.”

필상이 주로 라운드를 하는 노스힐 골프클럽에는 어린애들의 레슨 광경이 자주 보였다. 물론 한국처럼 치열한 느낌은 없다.

민족성과도 연관이 있겠으나 저변이 넓어지면 강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흥미로운 것은 필상이 연습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구경한다는 것이다.

“한국 프로야?”

“그렇겠지. 아마추어가 저렇게 잘 칠 수는 없잖아.”

“정말 잘 생긴 것 같지 않아?”

“그래. 모델 해도 되겠다.”

“스타일도 너무 괜찮은 것 같아.”

“그니까! 호호호!”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젊은 엄마들도 모인다. 그녀들의 수다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중한 필상의 태도가 득이 되기도 했다. 프로라고 생각한 몇몇이 아이들의 필드레슨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최 프로가 중간에 나서 중재한 덕분에 공짜 골프는 물론 식사까지 대접받으며 태국의 골프여정이 가벼워졌다.

“아니라는데도 왜 자꾸 저를 프로라고 부르죠?”

“실력이 프로니까 그러지. 애들이 좋아하고 실력도 는다는데 뭐가 문제야. 하하하.”

필히 프로선발전을 통과해야할 이유가 더 생겼다.

적어도 자격을 갖추면 캐디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열흘을 예정하고 왔지만 최 프로는 먼저 귀국했고 필상은 2월 중순까지 치앙마이에 머물렀다. 좋다는 골프장은 두루 다니며 다양한 코스를 경험했고 지겨울 만큼 라운드를 즐겼다.

영어를 쓰면 오히려 더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든 것은 찜찜했지만 태국의 천국 같은 골프 환경은 필상의 부족함을 착실하게 채워줬다.

*

유독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인 탓에 페럼CC의 개장은 예년보다 2주가 늦어졌다. 골프를 즐기지 못했던 골퍼들도 답답했지만 수입이 없는 캐디들에게는 날씨만큼이나 추웠던 7주였다.

물론 치앙마이에 푹 빠졌던 필상에게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반가웠다. 다만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코스로 인해 1부만 운용한 터라 일은 적었다.

본의 아니게 오후에는 마음껏 연습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2월이 가고 새싹이 돋는 3월에 접어들며 필상은 비로소 겨울의 결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만약 모모카의 백을 다시 맨다면 보다 정확하고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연습장 귀신이 다 됐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응. 손님이 와서.”

최 프로가 연습장까지 찾아왔다. 부르면 냉큼 달려갈 텐데 아무래도 연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예선 일정 나왔어.”

“크으... 어딘가요?”

“용인 플라자 CC. 4월 15일, 16일. 하지만 접수는 다음 주부터 시작하니까 네가 직접 확인하고 접수해.”

“네.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그건 그렇고 4월 초에 제주도에 좀 같이 가자.”

“제주도는 왜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들어왔다.

4월 4일부터 개최되는 롯데 렌터카 여자오픈에 출전하는 선수의 전속캐디 제안이 들어왔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너를 원한 선수가 두 명이야.”

“하하하. 확실히 기분 좋은 농담이네요.”

“일 가지고 농담하지 않아. 지난번에 모모카랑 같이 플레이했던 안시현이 네가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문의하더군.”

“음... 좋네요. 그리고 다른 선수는 누구죠?”

“하라 에리카.”

“19살, 아니 이제는 20살이 됐네요. 그 에리카 맞습니까?”

“응. 모모카가 추천했다고 하더군.”

모모카와는 가끔 라인을 통해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녀도 전지훈련을 갔던 터라 시간이 많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나름 좋은 인연이 이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추천까지 하다니, 갑자기 모모카가 보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에리카의 캐디 제안은 사양했다. 모모카와 쌍벽을 이루는 미녀골퍼로 유명하지만 왠지 부담스러웠다.

반면에 산전수전 다 겪은 안시현의 캐디를 하면 자신도 배울 것이 적지 않을 것 같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다.

그 대회 뒤에 자신도 중요한 일정이 있어 제주도까지 가야한다면 보다 편안한 선수와 호흡을 맞추는 것이 나았다.

- 고마워

- 저도 고마워요

- 왜?

- 사실 제가 추천한 거는 아니거든요. 제 한국투어 기사를 봤는지 오빠 연락처를 물었는데 모른다고 했어요.

- 크! 시기와 질투인가?

- 착각은 자유! 하지만 저 축하해 줘요.

- 싫어!

- 저 투어 시드 받았어요. 지옥의 Q스쿨을 통과했거든요.

- 와우! 축하해!

- 약속은 잊지 않았죠?

- 물론!

모모카에게 좋은 일이 생겨 기뻤다.

그녀의 성공이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또 다시 약속을 언급했는데 그 당시와는 달리 필상은 ‘물론!’이라는 대답을 보냈다.

모모카 못지않게 필상도 그녀의 투어 첫 우승을 꼭 보고 싶다. 자신의 손으로 이뤄낸다면 더 의미가 깊지 않겠나.

4월 1일, 필상은 최 프로와 함께 제주도에 도착했다. 경기가 열리는 롯데 스카이힐 제주CC는 동화속의 한 장면처럼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을 띠워놓고 필상 일행을 맞이했다.

에메랄드 빛깔을 머금은 바다, 아직 눈을 잔뜩 이고 있는 한라산까지, 어서 필드에 나가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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