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05- 간절한 기도
“빈 스윙을 최대한 많이 해. 팬들이 좋아하잖아.”
“알았어요.”
팬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낮은 기온으로 굳어진 몸에서 평소의 스윙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모카도 알고 있다. 다만 그걸 그렇게 둘러대는 필상이 귀엽게 느껴졌을 뿐.
10번 홀은 일단 파로 넘어갔다.
버디를 낚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게 아니라 파로 버틴 것에 만족하며 서서히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 수단은 다른 게 아니라 시시껄렁한 잡담이었다.
남들이 보면 오해를 살 만큼 수다를 떨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모모카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것저것 다 따져서 114야드. 마음 놓고 때려 봐!”
“52도 웨지라면 너무 크지 않을까요?”
“커도 상관없어. 다만 오버스윙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훨씬 중요해.”
좌측의 커다란 호수 때문인지 드라이버 샷은 살짝 밀렸다. 그래도 비교적 짧고 페어웨이가 넓은 홀이라 무난했다.
중요한 것은 벙커를 넘겨야하는 이 세컨샷이다. 필상은 자신감을 강조했다. 스스로 자신의 샷을 컨트롤 할 수 없다면 그 어떤 스윙도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뜻을 알아들은 모모카는 자신의 스윙 자세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연습 샷을 했다. 아주 좋다는 필상의 격려에 눈을 찡긋한 그녀는 오늘의 베스트 샷을 만들어냈다.
- 와우! 백스핀이 엄청나군요.
- 저 거리에서 저런 스핀을 먹인다는 것은 파워와 기술이 함께 받쳐준다는 말입니다. 왜 그녀가 일본 팬들이 기대하는 황금세대인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샷이었습니다.
- 보통 일본선수들은 우리 선수들에 비해 파워가 부족하죠?
- 꼭 그렇지는 않지만 정교함을 보다 더 강조하는 경향은 뚜렷합니다. 그러나 주타누간이나 박성현에게서 확인되듯이 장타자가 점점 유리해지는 추세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 귀엽고 예쁜 여자선수가 남자 못지않은 파워 스윙을 한다면 더 매력적일 것 같네요. 모모카처럼 말이죠. 하하하.
홀컵 앞에 떨어져 한 번 튄 공이 오버하는가 싶더니 쭉 빨려왔다. 마술이 걸린 듯 끌려오는 공에 팬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런 모습에 가장 힘이 날 사람은 단연코 모모카였다. 격정을 이기기 힘들었는지 하이파이브에 주먹을 부딪쳤다.
“어! 이건 폭력인데?”
“흥! 무슨 남자가 툭 하면 엄살을 부리죠?”
“내가?”
“네. 오빠는 은근히 비겁한 스타일이에요.”
“윽!”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되지만 오빠라는 호칭에 다시 한 번 푹 녹고 말았다.
아마도 부친의 억지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타 같은데, 그게 필상에게는 귀여운 투정처럼 느껴졌다.
그녀 입장에서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 캐디라는 일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기 어렵다. 생각을 밝힐 수는 있지만 그게 정답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민감한 감정적인 문제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다.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넘겨짚을 수 있겠는가.
10번 홀에서 버디를 낚으며 한숨 돌린 모모카의 샷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2언더까지 내려갔던 모모카가 어느새 2타를 회복했네요?
- 11, 12번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공동 6위로 올라섰습니다. 이정은6가 -4를 기록하며 데일리베스트를 작성한 걸 빼면 선두권이 주춤한 사이, 어느새 선두와 2타 차로 접근했습니다.
- 오늘 코스세팅도, 날씨도 도와주지 않아 누가 마지막에 웃을지 정말 기대가 되네요.
- 모모카도 아직 기회는 남은 것 같습니다. 그녀의 캐디가 얼마나 남은 홀들을 잘 풀어줄지 저도 굉장히 궁금합니다.
- 하하하. 선수보다 캐디의 역할을 더 강조하시네요? 하기야 캐디를 바꾼 뒤, 결과가 확연히 달라지기는 했죠.
-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선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해설자는 투어프로 출신이다.
그러니 아마추어인 캐스터는 더 이상 대꾸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모모카의 경기를 보며 캐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도 깨닫고 있었다.
물론 선수보다 더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합당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4, 5시간을 홀로 싸워야하는 선수에게 유일한 동지가 캐디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필상은 리더보드를 확인하며 모모카가 우승하려면 남은 6개의 홀을 어떻게 공략해야할지 구상해 봤다.
‘18번 홀은 오늘 가장 쉽게 플레이가 되는 홀이야!’
우승을 노리는 선두권 선수들이 대부분 버디를 노릴 것이고 긴장이 고조된 상황이라 의외의 실수가 나올 수도 있다.
문제는 18번 홀로 가기 전에 1타를 더 줄일 수만 있다면 모모카도 충분히 우승을 넘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3번, 16번이 승부 홀인데, 이미 13번 홀로 향하는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과연 지금 자신의 그런 생각을 선수와 공유할 필요가 있는지 그게 상당히 애매했다.
행여 괜한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필상의 심각한 표정을 봤는지 모모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모모카. 지금 우리 스코어가 어떤지 알지?”
“4언더잖아요. 6언더가 둘, 5언더가 셋이라는 거도 알아요.”
보통 경기 막판에는 아예 스코어를 쳐다보지 않는 선수들도 있다. 자신의 것은 물론 경쟁자의 것도 보지 않음으로서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발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확인했는데 모모카는 모든 것을 다 인지하고 있었다. 경기 중에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들 수 있는 배포를 지닌 선수는 드문데, 같은 선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상은 결정했다.
“18번 홀은 오늘 가장 쉽게 플레이가 돼. 14, 15, 17번 홀은 지켜야하는 홀이고.”
“쉽게,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 줘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13번, 16번 홀 중에서 버디 하나만 더 하자고!”
“호호호. 알았어요. 내가 우승하게 해 줄 거죠?”
“간절히 기도할게. 하하하.”
모모카의 당찬 성격을 믿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생각한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 티샷이 나오고 말았다. 페어웨이가 좁아 보여 왼쪽을 보고 페이드 샷을 권했는데 그냥 쭉 뻗어나간 공은 휘지 않았다.
그 결과 공은 좌측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괜찮아요!”
‘난 안 괜찮아!’
그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필상은 묵묵히 앞장서서 걸었다.
벙커에 들어간 공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승리의 여신은 구름에 가린 오늘의 태양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필이면 배수가 되지 않아 얕게 고인 물에 공이 잠겼고 그나마 벙커 턱 앞에 놓인 터라 2온을 노리는 것은 불가했다.
잔디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아 레이 업 이후 서드샷을 핀에 붙인다는 보장이 없어 실로 당황스러웠다.
“오빠.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한 샷 한 샷에만 집중할게요.”
“응. 그래.”
필상은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이 코스에서는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프로선수의 캐디로 최적의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남았다.
오히려 자신을 격려하는 모모카를 보며 낯 뜨거웠다.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나마 다행일지도.
결국 갈 길 바쁜 모모카가 13번 홀에서 한 타를 잃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었다.
“설명 안 해 줄 거예요?”
“음... 14번 홀은 167야드, 비의 양을 고려하면 175야드 정도 보면 적당할 것 같아.”
“방향은요?”
“안전하게 그린 중앙을 보자고.”
“오케이!”
14번, 15번 홀을 파로 막았다.
앞서 있던 선수들 중에 3명이 1타를 잃어 공동 8위로 올라선 것은 상대적인 만족감을 보태줬다. 문제는 자신이 비교적 쉽다고 언급했던 16번 홀에 왔다는 것이었다.
담담하게 홀에 대한 정보부터 설명했다.
“186야드. 생각보다 길게 쳐야한다는 거 알지?”
“195야드 정도 보면 될까요?”
“응. 뭐로 칠래?”
“23도 유틸리티 주세요.”
4번 아이언을 요구할 줄 알았다.
평소 190야드를 공략할 때 적절한 클럽이다. 그에 비해 200야드를 넘기는 유틸리티는 길지 않을까 싶었으나 필상은 일체의 고심도 없이 원하는 클럽을 건넸다.
캐디가 주저하면 선수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명을 보탠 것은 오히려 모모카였다.
“그린이 비에 젖어 런이 많지 않을 거예요. 또 제가 탄도 높은 유틸 샷을 제법 잘 하거든요.”
“나 보너스 받고 싶어.”
“이번에는 제가 간절히 기도할게요. 호호호.”
농담을 농담으로 받을 줄 아는 모모카, 외모가 깜찍한 한참 어린 여자애로 봤는데 확 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물론 추행으로 잡혀가기 전에 그녀를 사모하는 수많은 삼촌 팬들에게 먼저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높은 탄도임에도 다소 강한 임팩트가 들어갔다 싶었는데 생각한 것만큼 뻗어나가지 못한 공은 그린 앞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적당히 굴러 홀컵을 향했다.
“굿 샷!”
필상은 마치 자신이 친 것처럼 짜릿했다.
방향은 기가 막혔으나 공이 홀컵을 지나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웬 걸, 물을 잔뜩 머금은 그린은 런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진 것은 공이 홀컵 위를 살짝 지나쳐 멈췄기 때문이다. 순간 홀컵에 쏙 들어가는 줄만 알았다.
“차 한 대 타는 줄 알았어요!”
“진짜 미치겠다. 모모카!”
“왜요? 내가 그렇게 미치도록 예뻐요?”
“끄응! 그런 거로 하자고.”
“어?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빈말이라도!”
왜 예쁘지 않겠는가!
세상 누구보다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림의 떡, 좋은 인연으로 오래 남기를 바라기에 사적인 감정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진즉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도 심하게 울렁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 고개를 돌린 필상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마주친 쇼타의 시선, 그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눈빛이었다. 시기와 질투? 아니, 살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어쩌면 스스로 찔리는 것이 있어서 그리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씩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 정말 환상적인 샷이로군요!
- 날씨도 좋지 않은 최종라운드에서 탭인 버디가 가능한 샷을 날릴 수 있는 재능과 실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방금 전에 기록한 보기를 리커버리하고도 남을 아주 멋진 스윙이었습니다.
- 그러고 보면 모모카는 팬을 몰고 다닐 수밖에 없는 스타성을 지닌 선수인 것은 분명하네요.
- 마지막까지 승부의 끈을 놓지 않는 근성, 프로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한다고 봅니다. 앞으로 주목해서 볼 만한 좋은 선수인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 한국에까지 팬을 확보했으니 초청한 주최 측도 기쁠 것 같네요. 하하하.
실제 더 좋은 경기력을 보인 선수도 적지 않다.
특히나 다양한 부문에서 안정적인 기록을 보여준 20살의 박민지, 7년 만에 우승에 도전하는 박유나는 어제 무려 버디 7개를 기록하며 신들린 샷을 선사했다.
그런데도 모모카가 주목받는 것은 좀처럼 한국투어에서 볼 수 없는 일본선수의 희귀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16번 홀까지의 기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골프가 참으로 어려운 스포츠라는 것을 절감케 한 상황이 벌어졌다.
살벌한 홀인 것은 알았지만 17번 홀에서 생각지도 못한 미스 샷이 나왔고 운마저 따라 주지 않아 타수를 잃고 말았다.
기껏 우승 경쟁에 가까워졌다 싶은 순간, 다시 고배를 마시며 3언더로 떨어진 것이다. 실로 허망한 결과였다.
그래도 당당하게 18번 홀에서 버디를 잡은 모모카의 최종스코어는 4언더, 아쉽지만 공동 6위로 경기를 마쳤다.
“일본에 초대하면 올 거죠?”
“글쎄... 보고 싶을 것 같기는 해.”
“치! 안 오면 나 정말 화낼 거예요. 내게 한 약속은 지켜야할 거 아니에요?”
“약속?”
“우승시켜 준다고 했잖아요!”
“아!”
고개는 끄덕였지만 다시 인연이 닿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처음과는 달리 스스로가 부족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와 자신은 노는 물이 다르다. 그녀가 내년에도 투어시드를 확보할지는 미지수였으며 필상도 프로캐디로 나서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확연히 줄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