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G004- 오빠?
“6언더면 챔피언 조에 포함될 것도 같은데?”
“정말이에요?”
“응.”
결국 마지막 조의 플레이가 끝나며 모모카의 최종성적이 확인되었다. 선두에 1타 뒤진 공동 2위, 주체하기 힘든 기쁨에 서로 손을 맞잡고 자축했다.
필상도 마치 제 일인 양 설렜지만 모모카도 마지막 라운드를 챔피언 조에서 출발한 것은 프로데뷔 이후 2번째다.
JLPGA 악사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에서 이틀 내내 선두를 달리다 마지막 날 3타를 잃으며 공동 10위로 마친 적이 있다.
떠올리기 싫을 것 같았는데 그녀가 먼저 입에 올렸다.
“3월에는 얼마나 떨렸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대만 선수 야오가 우승했지?”
“어? 봤어요?”
“그럼! 내 선수의 경기기록인데.”
“내 선수라고요?”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모모카는 얼굴을 붉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어이없었으나 하필이면 그 때 의문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녀가 정색한 것이 그와 동시였다.
그는 다짜고짜 악수부터 청했다.
“수고가 많았네.”
“이게 제 일입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나. 모모카의 아빠일세.”
“아!”
“같이 식사하러 가지.”
“네.”
스타일이 일본영화에서나 봄직한 야쿠자를 연상시켰다.
몸집이 건장했으며 행동에도 거침이 없었다. 남자다운 점은 아주 보기 좋았으나 식사 중에 들은 말은 귀를 의심케 했다.
“내일은 내가 백을 메지.”
“아빠!”
필상이 반응을 보이기 전에 모모카가 먼저 발끈했다.
짐작컨대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었는지 그녀의 반응은 생각보다 신경질적이었다. 때문에 함부로 나서기 애매했다.
이미 모모카가 자신을 신뢰하는 마당에 고용자인 자신이 나서는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모카의 부친, 쇼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약속한 수고비는 지불하겠네. 성적에 따른 보너스도.”
*
집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착잡했다.
젊은 남자가 캐디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일단 경기보조 업무가 여성들의 서비스라는 인식이 강한 탓이다.
게다가 아직 골프는 여유 있는 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터라 되지도 않을 푸대접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비록 실직했지만 필상은 유수의 대학을 졸업했으며 건강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다. 혹자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권면하지만 그것부터가 상처가 된다.
자신은 정말 이 일이 좋고 보람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이없는 대접을 받곤 한다. 이젠 인정받는 손님에게 부킹만 받아도 되는 입장이라 한결 나아졌지만 쇼타의 태도는 정말이지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딸이 잘되는 것을 방해할 부모가 어디 있겠어!”
게다가 일을 하지 않아도 보수는 준다지 않은가!
그렇게 자위했지만 그래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곳에 미니연습장을 만들어뒀는데 오밤중에 땀이 날 정도로 몸부림 스윙을 한 뒤에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편히 잠을 자지 못했다. 지난 이틀 동안 정성을 다한 마무리를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딱히 할 일도 없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골프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밥도 안 먹고 꼭두새벽에 어딜 가냐는 엄마의 타박이 들렸지만 모모카의 연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 드디어 ADT캡스 챔피언십의 최종라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싸늘한데 비까지 내려서 경기하는 선수들에게는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 그런데도 엄청난 갤러리들이 이곳 페럼 골프장을 찾아주신 것을 보면 역시 KLPGA의 인기는 상종가로군요. 이번 대회는 이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겠죠?
- 그렇습니다. LPGA 퀄리파잉 시리즈에서 우승한 이정은6 가 부진한 가운데 대상과 신인상 수상이 유력한 최혜진이 선두와 2타차 공동 4위인 것이 눈에 띨 뿐, 상금순위 상위에 랭크된 선수들이 대체로 부진합니다.
- 그래도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있죠?
- 네. 초청선수로 참가한 미우라 모모카가 챔피언 조에서 최종라운드를 치릅니다. 첫날 –3, 둘째 날 –3, 아주 안정적인 스코어를 기록했는데 플레이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파워풀한가 하면 세밀한 플레이도 잘 하더군요.
골프 TV중계진의 칭찬이 아니더라도 모모카의 인기는 대단했다. 여자선수는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 여자선수들이 JLPGA를 정복하다시피 상위권을 휩쓸고 몇몇 선수는 과도한 인기를 누리고 있어 한국 사람이 그녀의 팬을 자처하는 것이 이상하거나 부담되지 않았다.
귀여운 외모에 늘 활짝 웃는 밝은 인상, 게다가 늘씬한 몸매는 필상이 봐도 아찔했다. 프로필에 나온 체중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힘을 써야 할 운동선수인 탓에 그 부분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플레이마저 멋졌으니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이틀간의 핫 플레이만 편집해 방송되었고 호의적인 기사도 여럿 나오다보니 오늘 가장 많은 갤러리를 몰고 다닌 선수는 단연 모모카였다.
“모모카! 모모카!”
그녀가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오르며 소개 멘트가 나오자 삼촌 팬들의 열렬한 응원이 솟아졌다.
추운 날씨에도 패셔너블한 복장을 갖춘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팬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은 필상의 마음도 흔들어 놨다.
하지만 왠지 불안해 보였다.
연습이라도 돕고 싶었지만 제지받았다. 한참 전에 도착해 기다렸지만 고모가 먼저 나타나더니 자리를 피해달라고 부탁해 하는 수 없이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졸지에 삼촌 팬에 포함된 것이다.
모모카가 유난히 갤러리들을 오래 둘러본 것이 자신을 찾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워낙 많은 팬들의 성화에 눈길이 마주치지는 못했다.
“따앙!”
호쾌하게 때린 티샷이 토우 부분에 맞으며 공의 탄도는 낮게 깔렸다. 게다가 심한 드로우를 먹더니 페어웨이 좌측 러프에 빠지고 말았다.
과도한 긴장에 몸이 굳어 스윙타이밍이 맞지 않았고 그걸 느낀 그녀가 순간적인 보정에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그녀를 격려해야할 캐디는 무뚝뚝한 얼굴로 클럽을 받았을 뿐, 오히려 모모카를 꾸짖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저 양반이 대체!’
1번 홀은 난이도도 높을뿐더러 첫 홀에 대한 부담감이 큰 탓에 캐디는 선수를 편하게 대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개념 자체가 없어 보였다.
“141야드. 러프가 질겨.”
대체 누구에게 한 말인가?
캐디도 아니건만 필상은 버릇처럼 읊어댔다.
그런데 8번을 잡아도 부족할 판에 아무리 봐도 그녀의 캐디가 건넨 것은 9번 아이언으로 보였다.
그린 좌측으로 긴 벙커가 둘러져 시각적으로도 부담스러운데 그녀의 부친은 긴장한 그녀에게 풀스윙을 요구한 것이다.
그래도 묵묵히 연습스윙을 한 그녀가 세컨샷을 했다. 그런데 연습한 것과 실제 샷은 차이가 컸다. 발목까지 잠긴 러프에 대한 부담이 컸는지 지나치게 강하게 때리려 했고 결과는 최악이었다.
공이 좌측 벙커보다 더 왼쪽으로 감기더니 급기야 해저드에 빠지고 말았다. 프로선수로서는 보기 드문 미스 샷이다.
- 이런, 이런! 오늘 샷이 왜 저러죠?
- 오버스윙에 임팩트 순간 확 당겨 치는 샷은 저로서도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왜 저렇게 세게 치려고 한 걸까요? 차라리 한 클럽 길게 잡고 살짝 오버해도 된다는 느낌으로 쳐야할 것 같았는데, 클럽 선택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 그러고 보니 캐디가 바뀌었군요. 어제는 젊은 한국캐디가 도움을 줬던 것 같은데요?
- 그렇습니다. 하도 플레이가 좋아 제가 알아봤더니 이 코스에서 베스트캐디로 알려진 하우스캐디였습니다. 그의 도움이 상당했던 것 같은데, 지금 백을 맨 분은 모모카의 아버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 이런! 호흡이 좋은 캐디를 제치고 본인이 나선 건가요?
해설자도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으나 마침 화면이 바뀌자 화제를 돌렸다. 아주 민감한 부분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결국 공을 드롭한 모모카는 35야드 러프에서 어프로치에 집중했고 핀 근처 2.5m에 붙이며 보기 샷을 앞두게 되었다.
그만하면 미스 샷에 대한 리커버리는 될 만한 조건이건만 보지 말아야할 것이 또 눈에 띠었다. 아버지는 모모카가 더 과감하게 치지 못한 것에 대해 지적했다.
과연 그녀를 위한 캐디인지 의문이 들었다.
일본어라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어색한 분위기마저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또한 모모카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어어어!”
“와 진짜 아깝다!”
모모카의 퍼팅이 홀컵을 돌아 나왔다.
필상이 보건데 라이도 잘 봤고 과감한 스트로크도 좋았다. 하지만 안 되려니 그 좋은 퍼팅도 홀컵을 외면하고 말았다.
첫 홀부터 더블보기를 기록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는데 그녀에게는 더욱 차갑게 느껴질 것 같았다.
“꼴좋다!”
누가 분노에 불을 지피나 싶었는데 돌아보니 최 프로였다. 모모카를 소개해준 이 골프장의 수석코치이자 관리감독이다.
“다된 밥에 재 뿌리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게 지금 제게 할 말입니까?”
“그러니까 거부하지 그랬어. 어차피 정식계약 된 거였잖아.”
“아버지가 딸을 위해 나선다는데 제가 어떻게 거부합니까.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고집이라도 피울 걸 그랬습니다.”
“그러게. 하늘이 내려준 귀인도 몰라보고 이래저래 아쉽게 되었어. 하지만 네 능력과 가치는 인정된 거 같은데?”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전반에 4타를 잃으며 리더보드에서 그녀의 이름이 사라졌다. 그래도 아직은 2언더 공동 11위, 후반에 분전하면 탑10 진입은 가능할 것 같았다.
홀이 거듭될수록 씁쓸한 마음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는데 엉뚱한 상황이 벌어졌다. 인코스 10번 홀로 이동하는데 느닷없이 웬 여자가 필상의 어깨를 뒤에서 붙잡았다.
“미스터 공!”
“아! 왜요?”
모모카의 고모인 것을 확인한 필상의 반응은 냉담했다. 굳이 예의를 차릴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좀 도와줘요.”
“제가 도울 방법이 없는 것 같은 데요?”
“쇼타가 곧 쓰러질 거예요. 그러면 백을 멜 사람이 필요하겠죠?”
황당한 말이었으나 이해할 수 있었다. 혹독한 현실을 깨달은 쇼타가 칭병을 핑계로 캐디교체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필상에게 책임을 떠맡기려는 의도도 엿보였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성적이 어떻든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모카를 도울 수 있다면 그 어떤 방법도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캐디가 다치면 선수 혼자서 플레이를 할 수는 없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필요하다면 경기 도중이라도 캐디는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다.
- 어? 캐디가 다시 바뀌었나요?
- 네. 방금 전에 모모카의 아버지가 이동 중에 넘어졌습니다. 화면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다쳐 백을 맬 수 없어 교체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틀간 최고의 호흡을 맞췄던 그 캐디라는 것입니다.
- 하하하. 뭔가 냄새가 좀 나지만 그 또한 규정에 어긋난 것은 아니죠. 그나저나 4타를 잃었던 모모카가 후반에 분발한다면 저 하우스캐디야말로 진정한 능력자가 되는 거로군요.
- 캐디가 선수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골퍼들이 무심코 넘기지만 캐디의 역할은 선수의 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거든요.
“모모카.”
“오빠!”
“오빠?”
“네. 제가 누나는 아니잖아요?”
농담을 던진 그녀, 그보다 반가운 표정은 없을 것 같았다.
전반 내내 특유의 밝은 표정이 사라졌던 모모카의 얼굴에 드디어 옅은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3타를 잃은 뒤부터 지속적으로 아버지를 다그쳤다. 제발 지금이라도 미스터 공을 불러 캐디백을 넘기라고.
그러니 좋은 플레이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선수가 불신하는 캐디, 좋은 성적이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