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화 (3/354)

ILG003- 하루하루가 전쟁

필상의 조언과 모모카의 선택은 적중했다.

낮게 깔린 공이 그린 앞부분에 떨어지더니 핀을 향해 굴렀다. 살짝 홀을 지나쳤지만 1.6m 버디 퍼팅을 성공한 모모카는 이후 아이언 샷의 방향성이 잡혔다.

17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전반 9홀을 2언더로 마친 모모카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관록의 동반자들이 1오버로 부진한 가운데 상대적 풍요라고나 할까?

그런데 아웃코스로 이동하는 중에 뜻하지 않은 태클이 들어왔다. 선수가 아닌 안시현의 캐디라는 것이 특이했지만.

“이봐. 캐디 일은 얼마나 했어?”

“올 초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님은 KPGA 프로시죠?”

“어? 날 알아?”

“네. 성공적인 전문 캐디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오늘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하하하.”

사실 그는 호의로 말을 건 것이 아니다.

필상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캐디로 전업한 그가 성공적인 결과를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나이가 겨우 한 살 차이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들이받아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 몸을 낮췄다. 당장 기분은 풀릴지 몰라도 분위기를 타고 있는 모모카에게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그럴 수 없다.

전반 홀을 도는 내내 그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지 못할 만큼 둔감한 사람은 아니다. 나름 코스정보를 취합했지만 필상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은근히 엿듣기까지 했다.

“야디지 북을 거의 보지 않던데?”

“매일 도는 코스니까요.”

“그래도 완전히 외우는 건 아닐 거 아냐. 뭐가 적혀 있는지 궁금해서 그러니까 나중에 한 번 보여줘.”

“네. 그러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캐디에게 있어 야디지 북은 생명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다. 자기 선수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정당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대가를 확실하게 지불하겠다면 모를까, 공을 들인 시간과 땀의 가치를 얼마로 산정해야 할지도 난감한 문제였다.

게다가 필상은 지금 경쟁자의 캐디가 아니던가.

‘프로 캐디라고 별 다른 건 아니구나!’

그의 무례한 행동을 경험하며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자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상대적인 호성적을 기록한 것이 무리한 욕심을 낳을까 우려했지만 모모카는 후반에 들어서자 더욱 침착해졌다.

프로선수의 갑작스러운 샷의 난조는 욕심보다 긴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섯 홀을 파로 막아내던 모모카는 급기야 15번째 홀에서 버디를 낚았다.

흥분한 나머지 비교적 평이한 7번 홀에서 미스 샷이 나오지 않았다면 더없이 좋았겠으나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으며 바운스 백에 성공한 모모카의 최종 성적은 –3였다.

“공동 3위랍니다.”

“정말이에요?”

“밥 사세요.”

“언더파가 몇 명인데요?”

“24명입니다. 제 예상이 맞았죠?”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모모카는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주목받는 신예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그녀의 올 시즌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Q스쿨을 34위로 통과한 일본투어 단년 등록자인데 현재까지 성적은 상금순위 81위로 내년시드를 보장받지 못했다.

때문에 한국투어 초청에 응한 것에 대한 질타의 소리도 없지 않다. 어떻게든 성적을 올려야 할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류가 일본투어를 잠식한 가운데 그녀의 한국초청대회 성적이 좋다면 여론은 급격하게 바뀔 가능성이 높다.

“불고기 사드릴게요.”

“고모님은요?”

“공항에 갔어요. 신경 쓰지 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잠깐!”

필상은 밖으로 나가려는 모모카를 데리고 직원전용 출구로 빠져나왔다. 로비에는 모모카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기에 라커 앞에서 그녀를 낚아낸 것이다.

몰래 빠져나온 것이 재미있었는지 모모카는 살짝 들뜬 얼굴이었다. 대회 중에는 보통 모든 행동거지를 조심하는데 결과도 좋아 그런 것들은 싹 잊은 것 같았다.

“시내로 가요.”

“이거 타고요?”

“그럼 걸어갈까요?”

“아뇨.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필상이 안내한 직원 주차장에는 작은 오토바이가 한 대 서 있었다. 주로 골프장 내에서 급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인데 몰래 빠져나가기에 최적의 수단이었다.

차를 가져오지 않았고 택시를 부르기도 애매해 가까운 점동면 시가지로 가는데 이보다 좋은 교통편은 없었다.

필상이 시동을 걸고 방향을 잡자 모모카가 폴짝 올라탔다. 그리고는 둘만의 저녁을 위해 좁은 도로를 타고 달렸다.

골프장 출입구는 대회로 인한 사람들이 붐비지만 지금 달리는 길은 직원들만 이용하는 숲길이다. 싱그러운 초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쳐 가는데 이보다 더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감사하죠. 맛있는 저녁까지 얻어먹었는데.”

“저 한국 오기 참 잘 한 것 같아요.”

“저도 모모카의 캐디를 볼 수 있게 되어 행복합니다.”

“정말이죠?”

“그럼요. 우리 내일도 최선을 다해야하니까 어서 들어가 푹 쉬세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모모카를 숙소에 내려준 필상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가벼운 여정이었으나 생각지 못했던 일정에 피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서 빨리 들어가 쉬게 하고 싶었다. 좋은 경기력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최우선이니까.

숙소로 들어가던 모모카가 필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바라본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보자!’

시내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며 모모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평생 그렇게 많은 수다를 떨어본 적이 없을 만큼.

덕분에 부쩍 친해졌고 중간에 알아듣지 못한 일본어도 꽤 있었으나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번역기를 돌리면 되는데 모모카가 표정과 손짓, 몸짓으로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상의 마음을 움직인 내용이 적지 않았다. 열아홉에 불과한 여자아이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화려한 듯 보이지만 어려서부터 큰 기대를 모은 유망주였던 그녀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고 표현했다.

오로지 골프만을 위해 달려온 그녀의 나날을 듣자 괜히 부끄러웠다. 자신은 너무도 골프를 가볍게 여겼던 것이다.

*

“표정이 왜 그래?”

“별 일 없어요. 몸부터 풀어야죠?”

“응.”

둘째 날부터는 성적의 역순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여유가 있다. 11시 아웃코스 티오프라서 8시에 연습장에서 만났다.

그런데 모모카의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사람처럼 부스스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본인이 극구 아니라며 웃어 보이는데 캐물을 수도 없어 그냥 함께 몸을 풀었다. 그나마 연습을 시작하자 집중하기 시작한 모모카는 금방 평정심을 되찾은 것 같았다.

“제 스윙 괜찮아요?”

“좋아. 자신 있게 쳐.”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모모카는 몇 번이나 자신의 스윙에 대한 평가를 원했다.

어제와 달리 마뜩찮은 부분이 있지만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했다. 지적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고, 그게 현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정답이라는 확신도 없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샷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다.

4번 홀에서 1타를 잃었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스코어를 지켰다. 필상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기는 했다.

혼자 다니던 모모카의 고모 곁에 중년 남자가 동행하는데 경기 내내 굳은 표정으로 지켜봤다. 아마도 모모카가 그에게 부담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인가?’

어제 저녁 모모카가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성공을 바라는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너무 버겁다는 고민을 털어놨었다.

그 대상이 바로 그라는 예감, 만약 아버지가 그가 느끼는 부담이라면 쉽게 넘기 힘든 마음의 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선수들 중에도 그런 일화를 가진 경우에 대해 들었지만 모모카도 같은 케이스라는 생각을 하니 왠지 맥이 빠졌다. 자신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라도 정신 차리자!’

마음을 다잡았지만 8번 홀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173야드의 파 3홀인데, 아름다운 정경과는 달리 핸디캡이 높은 홀이다. 투어프로가 좌우의 계곡에 때릴 확률은 낮지만 그린을 감싸고 있는 3개의 벙커는 위협적으로 보일뿐더러 실제로 빠지면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지옥을 경험케 한다.

어제도 많은 선수들이 보기 이상을 기록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어려운 홀이다. 그런데 모모카의 샷이 살짝 밀리며 공이 우측 벙커에 떨어지고 말았다.

“괜찮을까요?”

“아니.”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기는. 꺼내면 되지. 무리하게 붙일 생각은 하지 말고 일단 탈출을 목표로 삼자고.”

골프가 참으로 묘한 것이 뜻하지 않은 일로 반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동반자 중에 다른 한 명도 같은 벙커에 빠졌는데 하필이면 2개의 공이 거의 붙었다.

정상적인 샷이 불가능한 경우, 누가 먼저 쳐야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뒤에 치는 선수는 모래에 살짝 잠긴 공을 일단 마크하고 앞 선수의 샷을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이 놓인 상태는 그대로 유지해야하지만 아무래도 수리를 한 뒤라 보다 나은 상태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나.

“운이 좋네.”

“그러게요.”

“잘 봐. 의외로 탈출이 쉽지 않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최악의 벙커샷을 보게 되었다.

제대로 친 것처럼 보였지만 묘하게도 원하는 탄도가 나오지 않은 공은 벙커 턱에 맞고 끔찍한 자리에 놓이고 말았다.

“왜죠?”

“모래가 보는 것보다 훨씬 무거워. 그래서 5야드 정도는 더 보낸다는 느낌으로 쳐야 해. 이미지를 정확히 완성하고 쳐.”

“네.”

일단 탈출을 목표로 홀을 넘겨도 좋다는 느낌으로 강하게 퍼 올렸다. 지켜보던 갤러리들이 고개를 갸웃할 만큼 컸지만 공은 홀컵 앞에 맞더니 일단 크게 한 번 튀었다.

그런데 그게 홀컵으로 빨려 들어갈 줄이야!

‘텅!’

“와아아아! 나이스 샷!”

“모모카 파이팅!”

홀인원처럼 지극히 낮은 확률인데, 벙커샷 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깊은 벙커 아래서 그린의 상황을 보지 못한 모모카는 어리둥절했지만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고 알았다.

벙커에서 나오던 모모카가 수리하러 내려가던 필상의 옆구리를 퍽 때렸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과격한 반응이었다.

“이제 잡념은 버리고 오로지 샷에만 집중하자고.”

“네. 그럴 게요.”

파 5인 9번 홀은 523야드지만 내리막이 크고 우측으로 휘어진 도그렉 홀이다. 장타자는 2온도 노릴 수 있는 기회의 홀이지만 무리하지 않고 정확히 잘라가도 버디를 낚을 수 있다.

하지만 모모카는 과감히 드라이브 샷을 때렸다.

엄청난 함성이 터진 이유는 무려 296야드의 비거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내리막을 타기도 했지만 자신감 어린 임팩트가 제대로 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워워... 진정해.”

“호호호. 흥분하기는 했지만 이건 긍정적인 아드레날린의 효과라고요.”

“오케이, 오케이. 딱 거기까지만 가자고.”

“반드시 2온하고 싶어요.”

“좋아. 이글 한 번 가자고!”

선수를 진정시키는 것이 캐디의 역할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를 때가 아니다. 전반 내내 뭔가에 억눌렸던 답답함을 스스로 깨고자 하는 노력인 것을 알기에 필상도 장단을 맞춰줬다.

그리고 결국 2온에 성공했다. 공이 적당히 우측으로 굴러준 덕분에 215야드를 유틸리티로 정확히 공략한 결과였다.

“보기보다 오르막이 크니까 우측으로 2컵만 보고 과감히.”

“좋아요.”

어제 오늘 버디는 무려 34개나 나왔지만 아직까지 이글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모모카의 과감한 퍼팅은 홀컵 뒷벽을 때리더니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보는 이들의 가슴을 진동시키는 멋진 이글이 터진 것이다. 두 홀에서 3타를 줄이면서 중간 합계 –5, 다시 공동 4위로 올라섰다.

인코스 홀은 어제보다 세팅이 까다로워 보기를 2개나 기록했지만 자신감 어린 샷은 환상적인 버디도 3개나 만들어냈다.

구름처럼 따라다니던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굉장히 환상적인 플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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