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화 (2/354)

ILG002- 미우라 모모카

“이런 세팅이라면 언더파는 서른 명도 되지 않을 겁니다.”

“맞추면 내일 저녁은 제가 살게요.”

“저는 그럼 메뉴를 골라놔야겠네요. 하하하.”

어려운 17번 홀은 파로 막았고 마지막 18번 홀에서 버디를 잡은 모모카는 결국 연습라운드를 이븐파로 마쳤다.

기분 좋은 결과에 활짝 웃으며 클럽하우스에 들어섰는데, 아침과는 달리 엄청난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초청선수가 많지 않기도 했지만 최근 한국에서도 삼촌 팬을 확보한 모모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얼마나 큰지 짐작되는 장면이었다.

“어쩌죠? 전 인터뷰 준비가 전혀 안됐는데?”

“그럼 얼른 라커로 들어가 샤워부터 해요. 여긴 제가 해결할게요.”

“그럼 전화주세요.”

“오케이!”

졸지에 연예인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를 기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시킬 수는 없다는 일념에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189cm의 거구는 이럴 때 유용했다.

힘들게 그녀를 라커에 골인시킨 필상은 때 아닌 카메라 샤워를 하게 되었다. 기자들이 일본인 전속캐디로 오인한 듯.

“저는 여기 캐디입니다. 한국 사람이라고요!”

“아까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셔서... 그럼 인터뷰 일정을 좀 잡아주시죠. 매니저가 따로 없다면.”

“저는 그런 권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만 하시죠. 아직 첫 라운드도 하지 않은 외국 선수에게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지. 캐디 주제에...”

훅 달았지만 필상은 자리를 피했다. 자신의 행동이 선수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참은 것이다.

물론 개 건방을 떤 기자의 얼굴은 잊지 않았다. 다시 볼 날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미스터 공!”

“아, 네.”

필상을 부른 사람은 모모카의 엄마라고 생각했던 중년여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커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을 따라온 것이 좀 이상했다.

“전 모모카의 고모에요.”

“고모시면 얼른 들어가서 모모카와 함께 샤워라도 하시죠.”

“잠시 얘기 좀 해요.”

느낌이 별로 기껍지 않았는데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하루 내내 두 사람을 쫓아다니며 많은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말을 꺼냈다.

“그냥 캐디의 본분에만 집중해 주세요.”

“네?”

“너무 나서는 것 같아서 그래요.”

“알겠습니다.”

이런 강력한 태클이 들어올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그동안 수많은 손님들을 대하며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봤다. 그래서 나름의 수칙도 정립했고 웬만해서는 높은 직업의식을 유지하려고 애써 왔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프로선수의 백을 매면서 이런 황당한 대접을 받게 될 줄이야. 하지만 필상은 흔쾌히 동의했다.

여섯 번째 수칙, 손님은 왕이다.

그 놀라운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며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닿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한 것이다.

골프백을 그녀에게 넘긴 필상은 퇴근했다.

“얼마를 준데?”

“120.”

“나흘 동안 일하고 너무 적은 거 아냐?”

“적기는 뭐가 적어. 하루 일당 30이면 금방 부자 되지.”

“그래도 보너스는 있을 거 아냐?”

“우승하면 10%, 탑 10에 들면 5%.”

“그거 짭짭하네. 보너스 타면 나한테도 한 턱 쏘는 거지?”

“누나한테 왜? 김칫국 마시지 말고 얼른 집에나 가.”

“네가 맡은 선수가 무지 예쁘다면서?”

“미스코리아야! 예쁜 걸로 스코어 매기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대충 잘 치기는 하더라고.”

“잘해봐. 혹시 아냐? 프로캐디로 섭외될지. 요즘은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고.”

왜 그런 마음이 없을까?

그보다 더한 꿈도 꿨다.

남들이 알면 웃을지 모르지만 최 프로의 권유로 프로 선발전에도 나가봤다. 첫 라운드에 82타를 치며 그냥 집에 돌아왔지만 프로골퍼가 되는 꿈은 아직 접지 않았다.

입문한지 1년도 되지 않아 70대 타수를 기록한 자질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자타 공인 페럼 클럽의 최강자인 것은 분명했다.

다만 연습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수없이 많은 간접경험을 하지만 보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플레이와의 차이를 극복하기에는 자신의 골프인생이 너무 짧았다.

*

ADT 캡스 챔피언십 2018.

드디어 개막의 아침이 밝았다.

필상은 6시에 일어나 골프장까지 뛰어서 이동했다.

11월의 아침 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평소 지론에 따라 늘 러닝으로 아침을 연다.

그나마 오늘은 여유가 넘쳤다. 평소 새벽 티업이 있는 날이면 5시전에 기상하기도 했었기에. 물론 오늘은 각별한 날이라 골프장에 들어서는 기분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어제는 너무 했어요!”

“네?”

“날 두고 그냥 가면 어떡해요!”

“고모님께서 돌봐주신다고 하셔서...”

알고 봤더니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모모카는 기자들에게 붙들려 곤혹을 치렀다. 팬들의 알 권리를 빙자한 기자들의 만행에 언짢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어제 일은 어제 일일 뿐, 오늘은 맑은 정신으로 라운드에 임해야한다. 캐디의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플레이어가 편안하게 경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미안해요. 모모카. 오늘부터는 필히 숙소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확실하게 경호할게요.”

“치! 고모 때문인데 당신이 미안해할 것까지는 없죠.”

“하하하. 그럼 깨끗하게 잊고 연습 시작할까요?”

“네!”

필상은 어제처럼 모모카와 함께 몸을 풀었다. 누군가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묘한 동질감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환한 미소를 띤 그녀의 시선이 반가운 걸 보면.

곧 1라운드를 시작할 선수들은 이미 새벽에 일찍 나와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얼굴이 익숙한 선수들도 보였다.

TV 중계에서나 보던 투어프로들의 완벽한 스윙을 보노라니 정신이 없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닐지...

“60도 웨지 줘요.”

“아! 네.”

사방을 휘휘 둘러보는 필상의 모습이 얄미웠나보다.

모모카의 얼굴에 삐친 기색이 역력했다. 선수의 마음을 편하게 하자고 마음을 먹었건만 10분도 지나지 않아 심란케 만든 자신을 반성하며 그녀의 스윙에 집중했다.

아무리 봐도 멋진 스윙이다.

테이크백이 다소 가파르게 올라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스윙 템포가 좋고 임팩트가 쩍쩍 맞아 떨어지는데 문제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어제보다는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 염려스러웠다.

“모모카. 내가 잘못했으니까 힘 좀 빼지?”

“네...”

필상은 캐디일 뿐, 전문코치가 아니다.

프로인 그녀가 필상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실은 주제 넘는 행동이다.

어제 고모의 지적까지 받고도 지나친 관여를 하는 것은 불필요한 혼란을 줄 수도 있어 삼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 수칙, 플레이어가 질문하기 전에는 가능한 입을 열지 않는다. 스스로 정한 그걸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드라이버를 끝으로 한 바퀴 연습이 끝났다. 필상은 준비해 뒀던 음료를 건네며 라운드에 필요한 부가정보를 전달했다.

“오늘 동반 플레이어에 대해 설명할게요.”

“아! 대단한 분들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설명까지 들어야 하나요?”

“미리 알고 있으면 아무래도 신경이 덜 쓰일 겁니다.”

이번 대회 참가선수는 87명, 3인 플레이였기에 29개 조로 편성되었고 모모카는 첫날 12조에 편성되어 인코스 6번째 팀으로 9시 30분에 출발한다.

그런데 첫날 동반자들이 관록의 선수들이었다.

한때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선수로 주목받았으나 지금은 나란히 엄마골퍼로 불리는 베테랑, 홍진주와 안시현이 모모카와 함께 배정되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선수들이라 매치 업을 한다는 느낌으로 경기에 임하면 득보다 실이 훨씬 많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어? 한국말 할 줄 알아?”

미리 티잉 그라운드에 가 있던 모모카는 동반자들이 나란히 걸어오자 꾸벅 인사했다.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하지만 신기하게 여긴 안시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 필상이 가르쳐줘 겨우 구사하는 인사말일 뿐, 한국어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상이 나서려는 찰나, 유창한 일본어가 들렸다.

“인사말만 배운 거지?”

“네. 미스터 공에게 조금 전에 배웠어요.”

“저 잘 생긴 캐디?”

홍진주는 일본과 인연이 깊어 일본어 구사에 능통한데 필상이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면전에서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덕분에 나서려던 필상은 멈칫했다. 문제는 모모카가 인정하지 않는 듯 검지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는 점이다.

여하튼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동반자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붉어진 낯빛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누이들이기에 부끄러울 것은 없었다.

“모모카 캐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일본어 할 줄 알아요?”

“조금이요.”

“호호호. 잘 생긴 건 맞잖아. 언니.”

“그래. 아줌마가 뭐 어때. 호호호.”

안시현이 투어입문은 1년 빠르지만 홍진주보다 한 살이 어리다. 둘 다 오랜 공백을 깨고 2016년에 우승하면서 저력을 인정받았다. 올해 성적은 아직 기대에 못 미치지만.

여하튼 경험 많은 두 선수는 친한 사이였는지 격의 없이 웃어넘겼다. 그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 다행이었다.

프로답게 금방 시합에 임하는 준비에 돌입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필상도 드라이버를 건네며 10번 홀의 정보를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파 4홀로 거리는 378야드, 편안하게 쳐도 돼요. 한 가지 추가 정보를 드리자면 페어웨이 잔디가 좌측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바운드가 된 공은 왼쪽으로 구를 가능성이 높아요.”

모모카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였다.

캐디가 코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페어웨이의 잔디 결까지 언급하는 것은 처음 봤던 것이다.

티오프 시간이 되었고 아너인 홍진주가 티잉 그라운드에 먼저 올라섰다. 174cm의 큰 키에서 품어 나오는 장타는 언제 봐도 일품인데 특히나 임팩트 순간의 힙턴이 환상이었다.

공도 페어웨이를 정확히 갈랐다.

그런데 내려오던 그녀가 느닷없이 필상에게 물었다.

“어땠어?”

“판타스틱한 스윙이었습니다.”

“그치?”

필상의 칭찬이 기분 좋았는지 팔짱을 낀 그녀가 안시현의 티샷을 느긋하게 쳐다봤다.

안시현도 신장이 169cm로 한때 250야드의 평균 비거리를 보이던 장타자다. 하지만 올해는 거리보다 정확도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파워보다는 정확한 스윙을 하려는 경향, 목표를 향해 길게 끈 피니시가 그녀의 공을 페어웨이로 안내했다. 물론 거리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모모카인데, 앞선 선수들이 호쾌한 스윙을 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역시 당찬 19세였다.

‘까앙!’

힘차게 때린 공이 엄청난 거리를 날아 페어웨이 우측에 떨어졌고 필상의 예상대로 좌측으로 굴러 자그마치 255야드의 무지막지한 비거리를 기록했다.

한국에서의 공식 첫 티샷이 만족스러웠는지 환하게 웃는 모습에 필상의 우려는 수증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전체적으로 좋은 컨디션을 보였다. 다만 좋은 샷에도 불구하고 버디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50cm만 더 길었으면 홀컵에 붙었을 것 같은 세컨 샷, 아깝게 홀컵을 스치는 퍼팅이 있었지만 첫 네 홀을 이븐파로 지나온 것은 다행이었다.

안시현이 모모카와 똑같이 파 행진을 기록한 가운데 홍진주가 버디 하나, 보기 둘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걸 보면 경기 초반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167야드. 핀이 살짝 우측이라서 그린 중앙을 보는 게 좋겠습니다.”

“뭘 잡을까요?”

모모카는 지금까지 필상에게 클럽 선택을 묻지 않았다.

다소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제공한 거리를 공략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필상은 괜찮다고 판단했지만 그녀는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처음으로 필상의 의견을 물었다.

필상은 2개의 클럽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전처럼 칠 것 같으면 7번이면 충분하죠. 하지만 방향이 조금씩 비틀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6번으로 가볍게 펀치 샷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방향성을 잡으라는 거군요. 좋아요!”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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