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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가 좋아-1화 (1/354)

ILG001- 미치도록 좋아

PROLOGUE

나는 골프가 좋다.

미치도록 좋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골프를 시작한 뒤, 내 인생이 완벽하게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운의 아이콘이나 다름이 없던 나는 늘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인생을 반복해 왔다.

대학입시가 그러했고 취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니던 회사에서 과장으로 진급한 다음 날, 회사는 부도를 맞았고 어렵게 재취업에 성공해 기뻐했으나 며칠 뒤 나는 구속되었다.

당치도 않은 누명을 벗었으나 그나마 벌어놓은 것은 법률비용으로 홀라당 까먹었다. 그래도 실패에 익숙했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약혼했던 여인이 파혼만 선언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잃은 내가 향할 곳은 고향뿐이었다.

고단했던 노모의 말년에 짐이 되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인지하지 못했다. 늘 술독에 빠져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실의에 빠진 아들을 어떻게든 돌보려 했던 모친이 병환으로 들어 눕지 않았다면 방황은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캐디 일을 시작했다.

고향집 인근에는 발에 채일 만큼 골프장이 많았고 마침 누나들이 모두 캐디로 일하고 있어 취업에 어려움은 없었다.

서른을 넘긴 내가 쉽게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캐디라는 직업이 가진 열악한 환경과 불완전한 고용조건 때문이다.

여하튼 돈을 벌어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고 안정을 찾아갔지만 나는 남자가 캐디로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 여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하며 건강을 회복했고 난생처음 일하는 것에 대한 만족과 보람도 느끼기 시작했다.

비로소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

“어인 일이십니까? 최 프로님.”

‘어째 반가워하는 음성이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죠. 모처럼 쉬는 날인데 프로님 전화번호가 찍히는 순간, 불길한 느낌이 쫙 올라왔거든요.”

‘여하튼 급해. 나 좀 도와주라.’

“대회 때문에 이번 주 휴장인데 제가 뭘 도와드려요?”

‘일본어 되는 사람이 필상이 너밖에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저도 유창한 것은 아닙니다. 근데 왜요?”

‘일본선수가 캐디를 구하거든. 전속캐디가 일이 생겨서 같이 오지 못했다나?‘

“아, 진짜! 저도 좀 쉬고 싶다고요!”

지난 한 달여 동안 필상은 하루도 쉬지 못했다.

부킹이 꽉 찬 것은 물론 매일 오전 오후로 두 타임씩 일을 해 돈을 더 버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바빴다.

복에 겨운 일이지만 너무 힘들었기에 KLPGA 대회가 우리 골프코스에서 열리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모처럼 맞이한 휴일에 엄마를 모시고 바람이라도 쐬려 갈 생각이었다.

캐디 일을 시작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좋은 하우스캐디를 찾는 선수들로부터 수차례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 거절했다. 벌이도 중요하지만 정말 휴식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프장 관리이사이자 헤드코치인 최 프로의 제안을 거부하기에는 좀 께름칙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필상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친형처럼 편하게 대해주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부의 몸짓을 보냈다. 나름 투정 어린 말투로.

필상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웬만하면 그도 받아줄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필상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필상아! 네가 백을 맬 선수가 누군지 알기나 하고 그런 헛소릴 하는 거냐?’

“대체 누군데요?”

‘미우라 모모카.’

“우리가 전에 농담했던 그 모모카? 걔가 정말 맞습니까?”

‘그렇다니까!’

“일단 전화 끊어요. 조금 있다 제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미우라 모모카.

1999년생인 그녀는 일본여자골프의 황금세대를 이끄는 선두주자 중에 한 명, 귀여운 외모에 늘씬한 몸매를 지녔고 항상 웃는 얼굴로 벌써 수많은 팬을 확보한 신인골퍼다.

일전에 최 프로와 JLPGA 경기를 함께 본 적이 있는데, 당시 두 늑대는 남들이 들으면 큰일 날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이번 대회에 초청을 받았고 하필이면 필상에게 캐디를 부탁하는 믿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필상아. 난 괜찮으니까 일해.”

곁에서 통화내용을 들었던지 엄마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같이 강릉으로 바람 쐬러 가자는 말에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생각하면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오! 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큰 시련을 주시나이까!’

“가만 있어봐. 일단 누나들한테 전화 좀 해 보고.”

직접 모시지 못한다면 누나들한테 부탁이라도 하려 했다.

경비를 모두 대는 조건이라면 싫어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왕창 덤터기를 썼다. 세 누나가 가족들까지 모두 데려가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줄어들 통장 잔고가 눈앞에 스쳐갔지만 흔쾌히 동의했다.

무뚝뚝한 아들보다는 딸들이 편할 것이고 손주들까지 데려간다면 엄마도 무척 좋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아들의 소견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모모카의 캐디를 보는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그저 미녀 골퍼의 백을 매는 것에 흥분했을 뿐.

*

그녀가 걸어온다.

나풀나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확대되는 그녀의 모습에 드라이빙 레인지가 마치 아이돌 가수가 등장하는 무대 같았다.

KLPGA에도 미녀 골퍼가 많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하얀 가로 줄무늬가 그려진 하늘색 티에 깔 맞춘 짧은 치마는 현기증이 일게 할 만큼 상큼했다.

그런 모모카가 자신을 향해 손짓을 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괜히 둘러본 필상은 재빨리 다가갔다.

움직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한쪽 어깨에 무거운 골프백이 걸려 있었다.

“이리 주세요.”

“미스터 공?”

“네. 반갑습니다. 모모카.”

“저도요. 그런데 이렇게 일찍 만날 필요가 있나요?”

“연습라운드는 오늘 한 번 뿐이고 곧 사람들이 몰려들면 집중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일 얘기가 나오는 순간, 필상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오늘부터 그녀를 돕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귀엽고 상큼해도 만남의 목적을 잃을 만큼은 아니었다.

아니, 그렇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미리 좋은 타석을 잡았던 필상은 연습을 위해 클럽을 진열하고 그녀에게 같이 몸을 풀자고 제안했다.

“자! 어깨부터 풀어볼까요?”

“네. 이곳은 아침 공기가 상쾌한 것 같아요.”

“하나 둘 하나 둘!”

일부러 구령을 붙였다. 그녀의 말을 받아 주다보면 생각했던 스케줄대로 연습을 할 수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상이 너무 무뚝뚝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모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얼마나 귀여운지 순간 아찔했지만 필상은 애써 외면했다.

지루하다 싶을 만큼 충분히 준비운동을 한 필상이 웨지부터 하나 건네주며 드디어 스윙연습이 시작되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적어요?”

“스윙 크기에 따른 거리 체크합니다.”

“아직 풀스윙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요?”

“임팩트가 좋아서 굳이 풀스윙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지금처럼 대략 70%의 힘으로 모든 클럽을 체크해 봐요.”

“음... 제가 지금 70% 정도의 힘을 쓰는 것 같나요?”

“네. 그 느낌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해 봐요.”

말이 쉽지, 클럽을 바꾸면서도 일정한 힘을 유지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보통은 몸이 풀리면서 점점 더 강한 스윙을 하게 마련이다.

모모카는 난생 처음 보는 캐디의 말을 백분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은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착하네!’

성적이나 나이에 비해 일찍 매스컴을 탔기 때문에 이미지와는 달리 별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무역회사를 다닐 적에 일본 출장을 여러 번 다녀봤지만 친절한 보통의 일본여인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연습이 시작되자 오로지 스윙에만 집중했다.

바람직한 태도라는 생각을 하며 필상도 그녀의 스윙에 집중했다. 보통 여자프로들의 어드레스보다 스탠스가 넓어 파워풀한 스윙을 한다고 알려졌는데, 힘을 줄이자 안성맞춤이다.

웨지부터 시작해 5번 아이언까지 쭉 한 바퀴 도는데 대략 한 시간이 걸렸다. 지친 기색은 없었으나 미리 준비해뒀던 음료수를 건네며 10분간 쉬자고 제안했다.

“한국 선수들은 왜 그렇게 공을 잘 치죠?”

“자기 스윙에 대한 확신의 차이 아닐까요?”

“자신감 말인가요?”

“스윙만으로 보자면 모모카도 전혀 밀리지 않습니다. 이 골프코스에서 가장 좋은 캐디를 만났으니 결과도 좋을 겁니다.”

“호호호. 미스터 공은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 같아요.”

많고 많은 칭찬 중에 재미있다니?

필상은 대꾸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엉성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도 내용은 정확히 전달하는 한국인 캐디가 그저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기대했던가?

*

연습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많은 선수들이 지난 이틀에 걸친 프로암을 통해 한 번 더 라운드를 한 것에 비하면 모모카는 오늘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그래서인지 연습라운드에 임하는 그녀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렸다. 그러나 몇 홀 지나지 않아 표정이 밝아졌다.

공이 어느 곳에 떨어지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이 안정감을 줬던 것이다. 단순히 거리만이 아니었다.

특이한 지형지물이나 경사, 심지어 바람과 잔디의 결까지 상세히 조언하는 필상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야디지 북은 어디 있어요?”

“여기!”

“네? 호호호.”

필상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는 모습에 모모카는 까르르 웃었다. 정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필상은 대략 500번의 라운드를 캐디로 돌며 차곡차곡 코스의 특징들을 저장해왔다. 적당히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핀의 위치만 정확히 알면 거리측정기보다 정확했고 심지어 러프의 깊이나 그린 주변의 잔디 결이 어떤지도 알고 있다.

그 정보들이 모두 캐디인 자신의 재산이라는 것을 진즉에 파악하고 허투루 넘긴 적이 없다. 때문에 그 진가를 아는 손님은 무조건 필상을 지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거리는 161야드. 방향은 벙커 왼쪽 끝을 봐요.”

“어? 7번이면 되나요?”

“지금 모모카 샷이 살짝 드로우 구질이니까 제 말을 믿고 한 번 편하게 샷을 해 봐요.”

16번 홀, 170야드 아일랜드 파 3홀이다.

내리막이 적지 않지만 호수에 접한 든든한 바위 면이 제법 높아 내리막을 무시한 대부분의 골퍼들이 길게 치는 홀이다.

물론 그 대가는 예상보다 잔인하다. 그린 뒤에 위치한 그라스벙커의 러프가 굉장히 깊고 거칠어 적응되지 않은 선수는 세컨 샷을 핀에 붙이기 어렵다.

“오케이!”

모모카는 필상이 시키는 그대로 쳤다.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살짝 드로우를 먹은 공은 그린 앞부분에 떨어지더니 백스핀이 먹지 않고 핀을 향해 굴렀다.

‘팅!’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핀에 맞은 공이 빨려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탭인 버디 거리에 우뚝 멈췄다.

“와아! 대단해요, 대단해요!”

모모카는 팔짝팔짝 뛰며 필상에게 매달릴 듯 다가왔다. 두 손을 들어 세우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리던 영화의 한 장면이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온 중년여인이 모모카의 엄마라는 눈치를 챘기에 결과는 두 손 하이파이브!

“설마 시합 때도 이러지 않죠?”

“물론이죠. 호호호.”

원래 명랑한 성격 같았다.

하기야 골프는 생각이 많아 좋을 것이 없는 운동이다.

신경 쓸 것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자신의 샷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잡념을 버리고 자신 있게 스윙하는 것이 최고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모모카는 성장 가능성이 넉넉한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이렇게 인연을 맺은 프로가 승승장구한다면 그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지난 15홀을 돌며 버디가 하나, 보기가 셋이었는데 잘하면 이븐파로 마칠 것 같았다. 결코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행여 실망할 것 같아 뜬금없는 예언을 했다.

선작과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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