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를 가하는 개혁
1795. 2. 10. 경복궁 중건 현장.
“전하, 누르십시오.”
“그럽시다.”
펑!
“와아!”
경복궁의 중건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겨울은 혹독했다. 이 시기 조선은 현대의 겨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그래도 연해주에서 경험을 쌓은 기술자들이 있었기에 2월의 한성에서 경복궁 중건의 첫 삽을 뜰 수가 있었다.
경복궁의 중건은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고전과 현대의 만남이었다. 가온의 건축가들은 경복궁의 모든 시설을 새롭게 설계했다.
경회루와 향원정 같은 건물은 최대한 살렸지만 정궁의 대전인 근정전은 나라의 위상에 맞게 아주 장엄하게 대리석으로 설계하였다.
정조가 차일이 처진 경복궁 현장에서 도면을 보며 물었다.
“참으로 웅장하오. 어떻게 이렇게 큰 건물을 지을 수가 있소?”
옆에 동석한 총리대신 채제공이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지난번 신이 본 화성 행궁의 궁성보다 몇 배나 크옵니다.”
정조가 물었다.
“수원 행궁도 진척이 많이 되었지요?”
채제공이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현장 소장의 말로는 장마가 되기 전에는 준공을 볼 수 있다고 하옵니다.”
장준하가 물었다.
“공기가 예상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청국 운남의 대리석 수송이 조금 늦어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채제공의 말에 정조가 말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요. 가온의 기술진이 아니었으면 조선에 어디 오십 칸, 사십 칸짜리 건물을 지을 수가 있었겠소. 너무 독촉하지 마시오.”
그렇게 말하는 정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아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려했던 노비 해방에 대한 문제가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조가 물었다.
“이번에 해방된 노비가 오백만이 넘는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과인은 믿을 수가 없었소.”
장준하가 말했다.
“다 그동안 잘못된 법 제도 때문에 비롯된 일입니다. 이제라도 바로잡았으니 다행입니다.”
정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백성들의 수가 갑자기 배로 늘어나 1,500만이나 되니 어깨가 갑자기 더 무거워진 느낌이오.”
채제공이 말했다.
“너무 성려(聖慮, 왕의 걱정) 마시옵소서. 이제 조선은 천오백만이 아니라 삼천만도 능히 거느릴 수 있사옵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총리대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제 조선은 다산정책을 실시하여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일억 명이 되나가 문제입니다.”
그러자 정조도 놀랐지만 채제공이 더 놀랐다.
“일억 명요?”
“그렇습니다.”
“청국도 이제 겨우 일억 명이라고 하는데, 조선이 언제 그렇게 되겠소?”
“몇십 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올 하반기부터 보건부에서 전국에 설치한 보건소에서 본격적으로 영유아들 예방 접종이 실시되면 영유아 사망률이 현격하게 떨어질 것입니다. 너무 길게 보시지 않아도 됩니다. 인구는 늘기 시작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늡니다. 그리고 우리 조선은 이제 사람이 없지 땅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채제공도 웃으며 말했다.
“하긴, 이제 개척지에 널린 게 땅인데 자식이 10명이면 어떻소.”
“맞습니다. 10명이면 어떻습니까?”
그러자 채제공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보급된 축구란 것이 참으로 재미있던데, 이참에 신도 손자와 증손자들을 모아 축구 팀이나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그 말에 정조도 웃으며 말했다.
“오! 총리 생각이 기발하오. 한번 해보시오. 내 궁내부에 지시해 후한 상급을 내리리다.”
채제공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이고, 전하. 말씀만 들어도 황송하옵니다.”
“하하하하.”
모여 있던 군신들이 그 말에 모두 파안대소를 지었다. 정조가 보고 있는 경복궁 설계도면은 근정전의 모양이 특이했다. 도면에 나와 있는 근정전은 뒤편 북악산과의 조화를 감안하여 높지 않은 삼층으로 되었으며, 건물 외벽은 화강석으로 시공을 하게 되었고, 근정전 앞뜰을 좌우로 ‘ㄷ’ 자 형식으로 길게 감싸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내부는 바닥을 전부 운남의 대리에서 공수되는 최상급 대리석으로 깔았고, 특히 모든 창문은 유리로 시공이 되어 있었다.
정조가 집무를 보는 중앙 건물과 각부의 궐내각사가 좌우로 들어서게 건설되었으며, 건물과 건물은 복층으로 지붕 덮인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건물의 외양은 화강석으로 시공을 하지만 조선의 전통 문양을 살리는 형식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의 건물들은 전통을 그대로 살리도록 설계되었으며, 특히 별도의 현대식 2층 건물을 지어 정조 내외가 머물도록 배치하여 놓고 있었다.
“완공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겠소.”
장준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행히 해방된 사람들로 인해 인력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어 아무래도 3년으로 예상한 공기가 많이 단축될 것입니다.”
정조가 말했다.
“지금 해방된 사람들이 모든 국가 기반 시설 공사에 투입되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상하지 않도록 특별히 관리를 하라고 이르시오.”
그 말에 채제공과 장준하가 동시에 고개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이날 한성 일대에는 3곳의 착공식이 동시에 거행되었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이전 시대 서울역에서 인천을 잇는 철도 공사, 그리고 한강에 인도와 철교를 놓는 다리 공사였다.
기존에 건설되고 있었던 한성에서 부산, 의주, 목포 간 고속도로도 공사한 지 2년이 되어가자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조가 물었다.
“이번에 고속도로에 대대적으로 인원을 파견하여 옆에 철도를 깔고 다리 공사를 시작한다고 하는데, 완공에는 얼마나 걸리겠소?”
장준하가 대답했다.
“부산진에서 의주까지와 한성에서 나주까지는 금년 내로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고 도로 포장에 이 년 더 걸릴 것입니다. 그때쯤이면 곳곳의 다리 공사도 어느 정도 가시화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번에 시작하는 한성과 연해주를 잇는 도로 공사인데, 이게 끝나는 시점이 조선의 동맥인 도로와 철도 공사가 끝나는 시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전체 기간은 5년을 보고 있습니다.”
채제공이 말했다.
“그래도 수많은 인력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그나마 빨리 마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다음 달부터 전 국민 징병제가 시행되면 오히려 시간이 많이 단축될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궁으로 돌아가서 관계 부서 대신들을 참석시켜 회의를 개최하겠습니다.”
“그럽시다.”
장준하의 말에 정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자 정조의 앞에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승용차는 이전에 장준하가 타던 차로 최신형 체어맨 리무진이었다.
이 리무진은 시간 여행 전 당시 대통령이 장준하에게 특별히 하사한 차로, 당시로서도 파격적일 만큼 옵션이 좋았었다.
장준하는 자신이 타던 차가 있었기 때문에 이 전용차는 거의 대부분 차고에 서 있었다. 장준하는 이 차를 국왕의 전용차에 맞게 외양을 약간 손을 보아 새롭게 단장을 하여 정조의 전용차로 선사를 하였다.
정조는 전용차를 보고는 아이들처럼 기뻐하며 조금만 움직여도 전용차를 타고 다니려 했다.
정조가 기분 좋게 전용차를 타고 출발하는 것을 보고 장준하도 채제공도 차에 올랐다.
이 무렵 조선의 대신들은 물론 부대신 이상과 군의 장성급은 모두 시간을 넘어온 차들 중 수배를 하여 모두에게 전용차를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차가 다니는 것이 신기해 차만 나오면 사람이 몰리던 것이, 몇 개월 시간이 지나자 한성 주민들은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그러려니 했다.
이 전용차가 지급되자 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신들이 타고 다니던 사인교와 남여를 비롯한 사람들의 힘으로 움직이던 가마였다.
관용차의 지급은 보건대신 유득공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였다.
유득공은 가온에서의 교육 이수 후 보건 복지에 눈을 떠 이번 개각에 교육부 대신에 선정되었으나 자신이 원하여 보건 복지부 대신을 맡게 되었다.
그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관리들이 타고 다니는 가마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신들이 가마의 대용으로 인력거를 이용하였으나 모양이 좋지 않다는 장준하의 지시로 부대신 이상 각료들 전원에게 관용차가 지급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시간 여행 때 넘어온 승용차는 많은 수가 가온의 주차장에 그대로 있었다. 그것은 가온 주민들의 상당수가 개척지로 이주를 했기 때문이다.
개척지에서는 기름의 수급 문제와 도로 사정으로 승용차의 사용이 거의 힘들었고, 차가 필요하다고 해도 R/V차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가온에서는 이들 개척민들에게 이들이 타던 승용차를 승차감을 좋게 하는 스프링 완충 장치를 장착한 최고급 마차로 전부 교환해 주었다.
정조의 차가 희정당 전각 앞에 내렸다.
창덕궁 희정당도 워낙 차를 좋아하는 정조 때문에 창덕궁 담장을 일부 허물어 전용차가 다니는 철문을 새로 만들어 정조가 승용차로 바로 희정당 전각 앞까지 들어가서 하차할 수 있도록 전용 도로를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희정당을 개축하여 정조가 차에서 내릴 때 비가 젖지 않도록 건물에 돌출부를 만들어 건물이 변모되었다.
정조는 장준하에게 입궐을 할 때 자신의 전용 도로를 이용하라고 했으나 장준하는 사양하고 돈화문 옆에 만들어진 주차장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차를 세우고는 항상 걸어서 들어갔다.
희정당에는 장준하와 총리대신 채제공, 국방대신 서유대, 내무대신 김석태, 건설대신 정병국과 궁내대신 최성용 등 주요 대신들이 배석해 있었다.
희정당 내부는 현대식으로 이미 개축되어 있었다.
정조가 일상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조선 최고의 목공 장인이 만든 책상과 의자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십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어 사람들을 접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조가 대신들이 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말했다.
“전 국민 징병제를 실시하는 데 따른 준비는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까?”
국방대신 서유대가 말했다.
“병무청에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입영 대상자들에게는 이미 징병 검사 통지서가 발급되었습니다.”
채제공이 물었다.
“징병 검사를 받으면 바로 입대를 합니까?”
서유대가 대답했다.
“그 자리에서 현역과 대체 근무를 판정합니다.”
정조가 물었다.
“현역 판정을 받았어도 양반 출신들은 군 입대를 극력 기피할 것인데, 이럴 경우 그들을 강제로 입대를 시키면 군의 사기 문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그러자 궁내부 대신 최성용이 말했다.
“그 문제는 서 대신님보다 제가 설명을 드리는 것이 편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서유대가 반색을 했다.
“그렇게 하시오. 실무에 적극 참여한 최 대신이 설명해 준다면 고맙겠소.”
최성용이 서유대의 대답을 듣고는 설명했다.
“징병 검사 대상에는 양반들과 양민들은 물론 지난번 해방된 노비 출신들과 천민 출신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만 19세에서 30세 사이의 징병 대상자는 전 조선 인구의 삼 분의 일인 육백만 명에 육박합니다.”
정조가 놀라서 물었다.
“입영 대상자가 그렇게나 많소?”
“그렇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번에 실시되는 전국의 건설 현장에 투입할 인력이 그만큼 많다는 것과도 같은 말입니다. 이번 징병은 군에서 필요한 병력을 선발하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인원의 효율적인 배치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군에서 필요한 병력은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대체 복무에 투입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징병 검사에 현역 입영 대상인 1급 판정을 받는 숫자는 채 일 할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입영이 시작되는 3월 5일까지 한성일보와 관보 게시판을 비롯한 모든 홍보 수단을 이용하여 이를 적극 홍보할 것입니다.”
서유대가 말을 이었다.
“신은 이것이 가장 맘에 들었사옵니다.”
서유대의 말에 정조가 물었다.
“무엇이 국방대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것이오?”
정조의 하문에 고개를 숙이고는 서유대가 말했다.
“이번 징병 검사의 일급에 합격하여 입대를 하게 되어 3년의 복무 기간이 끝나고 나면 근무 성적 우수자에게는 장기 복무의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이옵니다. 여기에 더해 부사관으로 승진할 기회가 부여됩니다. 부사관이 되어 하사만 되더라도 종8품의 품계와 봉급을 받는 직업 군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위관으로 진출을 하지 못하더라도 열심히만 하면 종6품의 원사까지 승진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양반들은 물론 조선 인구의 칠 할에 이르는 양민들, 특히 노비나 천민 출신 양민들에게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 점을 적극 홍보하는 것도 징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채제공이 바로 말을 받았다.
“신의 생각도 국방대신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것도 적극적인 국정 홍보가 있어야겠습니다.”
정조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과인은 조선에 무려 육백만의 입영 대상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군왕으로서 너무 행복하오.”
정조의 말에 이전과 같이 대신들이 허례(虛禮)로 ‘하례드린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장준하가 대표로 말했다.
“조선의 개혁이 시작되고 가장 큰 성과는 백성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도 입영 대상자가 육백만이나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는 조선의 인구가 충분히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앞으로 내각에서는 백성들의 건강을 위한 홍보와 지속된 위생 교육으로 영유아의 사망률을 지속적으로 줄이고, 식생활 개선을 통해 국민들의 평균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린다면 인구가 배로 늘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정조가 더욱 흐뭇한 용안으로 말했다.
“고맙소. 일국의 군주로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는 일을 없애고, 굶주리는 백성이 없어지고, 오히려 식생활 개선으로 평균 수명이 늘어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그러자 이번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충심으로 받들겠습니다.”
“고맙소. 내 오늘 가장 행복한 군주가 된 기분이오. 허허허.”
최성용은 잠시 기다렸다 다시 말을 시작했다.
“방금 전 두 분의 말씀대로 입영 자원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대체 복무자는 대부분 건설 현장 등에 투입되어 육체적인 노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양반 출신들이 굳이 대체 복무를 원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양반 출신 중 일급 입영 대상자인데도 불구하고 대체 복무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그러자 정조가 물었다.
“일반 백성들은 반드시 입대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 아니오?”
최성용이 대답했다.
“앞으로 당분간은 부사관과 사관들은 일반 사병 출신에서만 선발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무관으로 진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번에 입영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이번에 입영을 하지 않겠다는 자들은 전원 따로 모아서 대체 복무를 시킬 예정입니다.”
총리대신 채제공이 물었다.
“그들을 따로 모아 어떻게 대체 복무를 시키려고 하오?”
“전부 함경도의 광산 지대와 사백력의 오지의 개척 현장에 투입시킬 예정입니다. 정부가 그토록 혜택을 주는데도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자들은 혹독한 상황에서 대체 복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계획을 입안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정조가 그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결정했소. 반드시 그렇게 하시오. 앞으로 정부의 정책에 순응을 하면 그에 따른 충분한 혜택을 누리게 하고, 만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빠지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손해를 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시오.”
그러자 모든 대신들이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명심하여 거행하겠습니다.”
정조가 건설대신 정병국을 보고 말했다.
“한성의 도시 계획을 새롭게 한다고 하던데 도면은 나왔소?”
정병국은 참모장 출신으로 최성용과 함께 입각한 현역 장성이었다. 정병국이 대답했다.
“경복궁 일대 육조 거리에 대한 설계는 나와서 곧 본안 설계에 들어갈 것입니다.”
장준하가 물었다.
“기존의 건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육조 거리에 있는 궐외각사 중 도로에 접해 있는 행랑 부분은 미관을 해치기 때문에 철거를 하고 나머지 건물들은 도로변으로 이설을 하여 민원실과 기념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각부의 건물들은 일률적으로 삼층 높이로 건설될 예정에 있습니다.”
장준하가 다시 물었다.
“삼층이라면 근정전과 같은 높이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삼층이기는 하나 근정전은 조선의 정궁으로 그 높이가 일반 건축물보다는 훨씬 높게 건설될 예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부의 건물은 근정전보다 낮은 높이로 건설됩니다.”
정조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전면에는 기존의 건물을 도로변으로 이설하여 건축하고, 그 뒤에 새로운 3층 건물을 건설한다는 계획이구려.”
정병국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광화문 앞의 시야가 탁 트여 경복궁의 근정전과 뒤에 있는 북악산이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성의 도시 계획은 신구의 조화를 이루는 설계가 될 것입니다. 도로 확장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철거를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새로운 건물을 건축할 때는 반드시 심의를 거치게 하여 앞으로 인구가 늘어나면 도성 인근에 신시가지를 조성하려고 합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성은 그 나라의 얼굴이오. 심사숙고하여 잘 설계하기를 바라오.”
“명심하여 거행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정병국은 대략의 계획 방안을 설명했다.
“지금 계획하고 있는 방안은 흥인지문에서 종로를 지나 훈련도감 앞길을 지나 돈의문까지의 도로를 기점으로 한성을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은 철저한 보전과 남쪽은 개발이라는 주제를 갖고 입안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쪽에 있는 건축물도 보전할 가치가 있는 건물은 철저히 보전을 할 계획으로, 지금 한성 일대 건물에 대한 전수 조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장준하가 물었다.
“보전을 하는 종로 북쪽은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가?”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단, 사람이 살기 편하게 개량을 하거나 초가를 허물고 기와로 신축을 하는 경우는 예외로 할 것입니다. 물론 주민들의 재산상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처음부터 일정한 보상은 해줄 계획입니다. 다행인 것은 종로 북쪽의 많은 부분이 궁성이 있거나 관청이 밀집되어 있고 북촌과 같이 기와집이 대규모로 밀집되어 있어 관리가 아주 용이합니다.”
장준하가 다시 말했다.
“전통을 보전하는 것은 당연히 권장할 일이나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또한 정부가 할 일이니 이 점 유념하고 설계를 해주기 바라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한성의 도시 계획이다.
철저한 신구의 조화를 갖춘 한성의 도시 계획은 이후 전 세계 모든 도시들의 표본이 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운현궁으로 돌아온 장준하에게 국정원에서 급보가 날아와 있었다.
신경식 원장이 직접 급보를 갖고 들어왔다.
“합하, 드디어 백련교가 3월에 거병을 한다고 합니다.”
장준하가 기다렸던 소식이라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어디까지 준비가 되었나?”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강남 일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병을 한다고 합니다. 주력은 사천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병력으로, 바로 중경 함락을 시도한다고 합니다.”
“알겠네. 내일 국가 안보 회의를 소집하게.”
“알겠습니다.”
1795. 2. 11. 창덕궁 희정당.
장준하의 주재로 국가 안보 회의가 개최되었다.
장준하가 먼저 말을 했다.
“그동안 우리가 도와주고 있던 백련교와 묘족이 드디어 봉기를 한다고 합니다. 이에 따른 정부의 대비 태세와 문제점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국가 안보 회의를 개최합니다.”
이형구 합참 의장이 말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우리 가온에서는 청국 공략의 일환으로 백련교와 묘족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형구가 그간의 설명을 해주었다.
정조는 그 말을 들으며 연신 감탄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특히 무기를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 우리말과 글을 배우게 했다는 데 놀라워했다.
이는 채제공과 서유대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정조가 물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날 것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었소?”
채제공도 말했다.
“청국의 강남은 역대로 물산이 풍부하고 수많은 걸출한 인재들이 배출된 곳이라 문화적인 자부심이 극에 달해 있을 것인데 그게 가능한 일이오?”
우리말과 글을 보급하자는 계획을 입안했던 최성용이 대답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은 전 인구의 일 할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조선 또한 문맹률이 구 할이 넘는 마당에 청국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백련교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 하고 있고, 그들의 지휘부는 대부분 우리 군사 고문단의 영향으로 우리말과 글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수준입니다. 지금 상당히 진척이 되고 있습니다.”
“정말 그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최성용은 정조에게 백련교의 지도자인 유지협을 백제 유구에서 만난 일을 말해 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저희가 제안을 할 수 있었고, 그들도 회의를 거쳐 배우기 어려운 한문을 포기하고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우리말과 글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들의 교육으로 백성들이 바로 국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정조를 비롯해 조선 출신 대신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정조를 비롯해 채제공과 서유대는 그 사실을 몇 번을 확인하며 물었다.
잠시 후 채제공이 심각한 얼굴로 먼저 말했다.
“그들까지 정음을 받아들일 정도라면 우리 조선의 교육 정책은 앞으로 일대 개선을 해야겠습니다.”
정조가 말을 받았다.
“허! 청국, 그것도 문향(文鄕)이라고 자부하던 강남에서 우리의 정음이 공식 문자로 채택이 되다니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로다.”
서유대도 말을 했다.
“그동안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우리글이 중국에서 공식 문자가 된다는 것을 조선의 선비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최성용이 말했다.
“이제 세상은 우리가 주도를 합니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먼저 백련교와 묘족이 세울 국가에 그런 제안을 한 것이고, 그들도 격론 끝에 백성들 교화가 쉬운 우리말과 글을 채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정조가 물었다.
“중국의 말은 우리와 어순이 아주 다른데 그게 가능하겠소?”
최성용이 대답했다.
“그래서 처음 백련교에서 난색을 표하며 먼저 글부터 수용할 뜻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300명의 교관들을 파견하여 교육을 시킨다고 하자 그제야 본격적으로 수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교육을 시작한 지 1년하고도 6개월이 되어가니 교육을 받은 교도들의 수준은 상당한 정도까지 올라 있을 것입니다.”
정조가 말했다.
“허허, 그거 참. 과인은 도무지 꿈만 같소.”
최성용이 말했다.
“백련교의 나라는 시작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고토를 회복한다면 그곳도 당연히 우리의 말과 글이 전파될 것이고, 앞으로 일본을 공략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할 것도 우리말과 글의 보급입니다.”
정조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가온에서 그동안 수많은 곳에 개척지를 건설하여 영토를 넓히고 있으니 우리말과 글이 세계에 보급되는 것은 시간문제겠소.”
최성용이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지금은 청국의 강남에서 시작하지만 앞으로 전 세계에 우리말을 하지 못하면 외교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앞으로는 외교 전쟁의 시대가 다가옵니다. 본토가 안정이 되는 몇십 년 후부터는 전 세계 각지에서 유학생들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여 우리의 문물을 전수해 주면서 우리의 말과 글 등 우리 문화도 동시에 전수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변방의 소국이라고 생각하면서 단지 명나라의 사상과 전통을 이었다고 자위하며 살던 조선이 이제 전 세계에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문화를 전파하는 나라가 된다는 사실에 정조를 비롯해 채제공과 서유대는 가슴이 벅차 말을 하지 못했다.
채제공이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대단하오. 우리가 당파 싸움이나 하며 제 살 뜯어먹기나 하고 있을 때 그대들은 천하를 경영할 계획들을 하고 있었다니.”
정조도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 모든 것을 앞으로 실시될 의무 교육에 앞서 전 조선에 알리도록 하시오. 지금 조선에서 불고 있는 개혁의 바람은 조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경영하는 바람이라고.”
최성용이 정조의 말에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형구가 말했다.
“이제 점차 청국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청국이 변화하는 조선에 대한 간섭을 정면 돌파를 하느냐, 아니면 잠시 피해가야 하느냐입니다.”
채제공이 말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분간 청국에서는 사신이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 현 황제인 건륭제가 제위를 강희제가 재위한 60년을 넘기지 않겠다고 몇 년 전부터 공언을 하였으니 분명 내년 초 황위를 넘겨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청국 예부의 문서만 잘 넘기면 당분간은 별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정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총리의 말이 맞을 것이오. 과인의 생각으로도 당분간은 청국의 사신이 조선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오. 우리 조선이 매년 네 번씩 보내는 사신들과 역관들, 그리고 호종하는 상인들을 철저히 선별하여 청국에 우리의 말이 들어가지 못하도록만 하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오.”
정조가 단언하듯 말을 하자 장준하가 말했다.
“국경에 있는 후시무역 때 상인들의 입을 단속하도록 하고 국경 지대의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국방부에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서유대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후로도 상당 시간 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 말미에 장준하가 물었다.
“러시아와 오스만, 그리고 영국과 마이소르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
국정원장 신경식이 대답했다.
“러시아와 오스만과의 전투는 우리에게 구입한 무기로 잘 버티고 있습니다. 비록 코사크 기병대가 참전을 하여 오스만이 더 이상 진군을 하지 못하지만 끝없는 소모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선방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우리로는 아주 좋은 현상이군. 특히 시비르 왕국의 서진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되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시비르 왕국은 지금 거의 큰 전투 없이 서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군사 고문단의 조언을 받아 천천히 점령지를 다지며 진격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우랄 산맥에 도달했을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정조와 채제공 서유대는 장준하와 신경식의 말이 아직까지는 생경하게 들렸다.
물론 가온이 그동안 전개한 일에 대하여 수차에 걸쳐 극비 사항까지 모두 듣고 확인도 하였지만, 아직까지는 실제로 와 닿지 않은 얼굴이었다.
장준하가 그런 얼굴을 한 채제공을 보고 말했다.
“총리께서는 아직 낯섭니까?”
채제공이 숨김없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그렇습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모두가 사실입니다. 이 모두 극비 사항이라 지금까지는 각료들밖에는 알려드릴 수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우리 역사의 한 장을 당당히 차지할 것입니다.”
채제공이 말했다.
“솔직히 남의 나라의 일에 개입하여 그들 나라의 앞날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이해하십시오.”
채제공의 솔직한 답변에 장준하가 말했다.
“지금까지 조선은 총리 같은 생각을 하시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 새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이십 년, 삼십 년 후의 우리 후손들은 전 세계의 분쟁을 조정하러 자신의 열정을 다 바칠 것이고, 때로는 국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그들이 만들어갈 것입니다.”
이날 창덕궁 희정당은 이전 정조가 영상 기록물을 보고 결심을 할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있었다.
그것은 이제 우리 조선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신경식의 보고는 인도에서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을 가온 무역의 김영석 국장이 나서서 극적으로 휴전을 하였다는 보고까지 듣고 끝이 났다.
1795. 3. 5. 여의도 징병 검사장.
이날 전 조선에 징병이 실시되었다.
정조의 지시로 우리말과 글이 청국의 강남에서 공식 문자와 언어로 채택되었다는 것이 한성일보와 관보 게시판에 실리자 조선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혀졌다.
심지어 일부 선비들은 그동안 공부했던 사서삼경과 자신들의 집에 있던 서적을 불사르는 일도 생겨날 정도였다.
서원이 철폐되어 지방의 유림들이 모일 장소가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각지의 유력한 집의 사랑채에서는 연일 토론과 격쟁이 오가고 있었다.
이는 그동안 자신들이 섬기고 있던 청국에 대한 환상과 주자학의 발상지라고 하는 청국 강남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깨지는 것이었기에 양반들이 받은 문화적인 충격은 오히려 가장 격렬했다.
특히나 그동안 영상 기록물과 지속된 홍보 영화를 보면서 깨어나기 시작한 의식은 가온이 나서서 세계정세를 움직이고 있다는 자각으로 발전하며,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일대 혼란과 함께 조선 전체가 들끓었다.
그렇게 격정의 이십여 일이 지나고, 이날 조선은 두 가지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었다.
“전체 차렷.”
“어이, 저기 징병 검사를 받으러 왔으면 지시에 따라야지. 돌아가고 싶나?”
그러자 허름한 차림을 한 사람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럼 징병관의 지시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알았나?”
“예.”
“그리고 거기 도포 입고 갓 쓴 사람.”
“나를 불렀소?”
그러자 징병관이 기가 찬 듯 말했다.
“그래, 너.”
그러자 그 사람이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요?”
징병관은 살살 열이 오르는 목소리였다.
“나 참, 기가 차서. 야! 여기가 네 집 안방인 줄 알아? 처음 집결했을 때 분명 말투 고치라고 한 말 들었지? 그런데 말투를 못 고쳐?”
그러자 양반 출신인 그 사람이 말했다.
“어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찌 양반 체면에 말을 쉽게 바꿀 수가 있소. 그건 곤란하오.”
그러자 화가 난 징병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한 따까리 하고 시작해야겠네. 야! 너, 이리 나와.”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아니, 한 따까리가 뭐요?”
“이게 사람 뚜껑 열리게 하네. 너 오늘 죽어봐라.”
“아니, 이보시오, 징병관 양반. 사람 뚜껑은 어떻게 열리는 거요?”
그러자 징병관의 얼굴이 거의 폭발 직전까지 붉어졌다.
“뭐? 이 자식이 사람을 놀려?”
“아니, 내가 뭘 놀린다는 거요? 억! 으악~”
퍽! 퍽! 퍽! 퍽!
징병관은 징병 검사장에 모인 수많은 징병 검사 대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양반 출신 검사 대기자를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가혹하게 다루었다.
이날 조선의 각지에서는 입영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한 징병 검사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징병 검사를 맡은 사람은 대부분이 훈국 출신 부사관들이었다.
이들은 6개월간의 가혹한 훈련을 참고 견디어 전원이 부사관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전국 각지의 징병 검사장의 징병관이 된 것이다.
그들은 가온 출신 징병관들보다 더 가혹했다. 하지만 가온 출신 사관들이나 조선 출신 사관들은 그러한 그들의 행위를 모른 척했다.
가온에서는 조선의 징병을 이들 4,000명의 부사관과 훈련에서 낙오한 1,000명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징병할 수 있도록 일정한 재량권을 부여했다.
낙오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나이가 많아 체력이 달린 사람들이었기에 병무청의 기능직 공무원으로 특채를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조선 역사의 한 장이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이러한 징병은 엄청나게 많은 입대 자원으로 인해 징병 검사가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다.
이날 다른 한 곳에도 또 다른 시작이 있었다.
“전체 차렷.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안녕하세요?”
“그래, 여러분도 안녕하세요?”
이날 전 조선에는 학교의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정조는 후일 선조가 될 원자를 보기 위해 창덕궁 옆에 세워진 왕립 초등학교 입학식에 직접 참석을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장준하도 동행을 하였다.
“우리 원자가 잘 해낼지 걱정이오.”
정조는 여느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입학식을 하는 원자를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정조의 마음을 헤아리며 장준하가 대답했다.
“잘 해내실 것이옵니다. 이번에 원자마마와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가온에서 온 선생님들이 교육을 담당하십니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고마운 일이오. 모두 위국공이 애써서 그리 된 것을 과인은 잘 알고 있소. 고맙소.”
“아닙니다. 앞으로 원자마마께서 새로운 신지식을 배우고 익히셔서 조선의 백성들을 바른길로 이끌어주신다면 그것이 바로 저희 가온 친위군이 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조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자가 시작이오. 앞으로 왕실은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남보다 가장 먼저 솔선을 보이겠소.”
장준하는 그러한 정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왕립 초등학교는 종학(宗學, 조선 시대 왕실 자제 교육 기관)과 같이 왕실과 관련된 가문의 자제들과 주요 관리들의 자제를 교육하는 초등학교였다.
장준하는 내심 정조의 결단에 감탄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학교가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본래 가온에서는 원자를 위한 별도의 교육을 실시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원자(후일 순조)를 원자만을 위한 별도의 교육이 아니라 정식으로 학교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했다. 그것이 왕실에서 백성들에게 솔선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 이러한 정조의 생각은 조선 출신 관리들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렇지만 앞으로 원자를 군대까지도 보내겠다는 생각을 한 정조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번에 실시하는 새로운 학제에 의한 의무 교육에 누구도 예외를 둘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장준하는 이러한 정조의 의지를 반영하여 왕립 초등학교를 개교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왕립 초등학교에는 원자뿐이 아니라 종학을 다니던 왕실의 자제들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보통 사람들의 자제들도 입학을 시켰고, 이 학교 또한 여학생들도 전부 입학을 시킨 것이다.
물론 남녀를 구분하여 반이 나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이전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초등학교의 교육은 특별히 가온 출신 교사들이 대부분 담당을 하였다.
이는 장준하와 권오인이 생각한 방식이었다.
특히 권오인은 앞으로 조선의 대통을 이을 원자나 왕실의 자제들이 보통 사람과 어울려 똑같은 교육을 실시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교육에서는 누구나 예외가 없다는 권오인의 주장은 정조의 생각과 맞물려 곧바로 채택이 되어 왕립 초등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물론 제왕학을 비롯한 원자로서 필요한 교육은 하교 후 궁 안에서 별도로 실시되었고, 여기에도 가온에서 파견된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가온에서 실시하는 의무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철저한 군사 교육을 겸한 교육이었다.
이형구가 주창한 이러한 군사 학교식 의무 교육은 처음으로 전 국민 의무 교육을 실시하는 조선에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후일 완벽할 정도로 국민 통합을 이뤄내 조선이 전 세계 초유의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엄청난 밑거름이 되었다.
1795. 3. 10. 청국 강남 상공.
우웅~
청국 강남 상공에 허큘리스가 정찰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백련교가 난을 일으킨 3월 초부터 청국과 일본에 정밀 항공 촬영을 시작하였다.
이 항공 촬영에는 허큘리스를 포함하여 비행선까지 동원되었다. 이러한 항공 촬영은 곧 이어질 청국과의 전투와 일본 공략에 필요한 기초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백련교의 봉기는 철저한 준비를 한 탓인지 초기부터 엄청난 속도로 확장을 하였다.
당황한 청국 조정은 이에 강남의 전 병력을 양양(襄陽) 일대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청국과 백련교 간의 최초의 대접전인 양양 전투는 청군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이 났다.
바야흐로 기세를 얻은 백련교군은 무주공산과 같은 강남을 본격적으로 평정하기 시작한다.
점차 전황은 가온의 의도대로 진흙탕 수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