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조선
1794. 10. 30. 조선.
서원 철폐에 반대하며 상경하였던 유생들이 훈련원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은 후 자신들의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 각 서원에는 이미 교사들이 배정되어 학교 교육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원에 있던 서책들은 각 지역의 민속 박물관에 별도의 장서각을 설치하여 모두 옮겨 놓았다.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난 며칠 후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한성은 물론 전국 각 지방의 관아와 장시 등에 설치된 관보 게시판에 엄청난 내용이 공표되었던 것이다.
관보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오늘 자로 조선의 노비와 천민은 혁파를 한다.
앞으로 조선에서 노비는 없다.
해방이 된 노비들은 모두 각지에 있는 관청에 신고를 하여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발급받아야 한다.
해방된 노비들은 3년간 정부에서 실시하는 정착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때 모든 숙식은 정부가 제공한다.
3년의 기간이 끝나면 그들의 앞길을 개척하기 위한 일정 금액의 정착 자금도 지급받는다.
천민들과 해방된 노비들은 이제 누구에게도 핍박을 받지 않고 양민의 신분이 된다.
만일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 반대를 하거나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국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갑인년 10월 30일 총리대신 채제공.
내무대신 김석태.
법무대신 이가환.
국방대신 서유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이날 조선 전역은 노비들과 천민들의 환호 소리로 가득 찼다.
이와 동시에 각 지방에 주둔한 군인들은 한 집 한 집 일일이 방문을 하며 만일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노비를 숨기려는 집이 있으면 가차 없이 주인들에게 철퇴를 내렸다.
하지만 모든 노비들이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
주인의 집을 벗어나 따로 거주를 하던 노비들은 이미 일정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지만, 수대에 걸쳐 주인집에 종속된 많은 노비들은 노비 해방에도 불구하고 주인집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이때 위력을 발휘한 것이 군의 정훈 참모부가 만든 홍보용 영화였다.
홍보용 영화 상영은 가온이 본토로 진출하기 수개월 전부터 이러한 일을 예견하고 준비한 것이었다.
영상 시스템이 부족하여 각 도에 1개 팀이 운영되었지만, 이 홍보용 영화 상영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노비 해방과 동시에 진행된 이러한 홍보 영화 상영은 군용 발전기를 사용하여 방영되었다.
조선의 앞날에 대한 희망과 누구나 열심히 하면 이전과 달리 잘살 수 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주민 홍보는 영화 상영과 함께 실시된 휴대용 확성기를 든 연사들의 격렬하고 열정적인 말솜씨에 주춤거리던 노비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민 홍보단의 활동은 노비들은 물론 모든 백성들에게 용기와 꿈을 실어주면서 전 조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이와 동시에 진행된 것이 철저한 인구 조사였다.
지난해 지방 공무원들이 업무를 보며 시작된 양전과 인구 조사가 다시 한 번 더 확실히 실시되었다.
연말까지 3개월을 예정으로 실시된 인구 조사는 군역을 위해 신고를 하지 않고 숨기려던 것에서, 신고를 하면 이제는 지원을 받게 된다는 정부의 지속적인 홍보와 지방 공무원의 노력으로 빠짐없이 등록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수의 유민들이 제주와 연해주로 빠져나간 탓인지 유민들도 거의 없어져 인구 조사는 순식간에, 그리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노력하여 조사한 인구 조사는 3개월 후 조선의 인구가 재외 국민을 합해 1,500만 정도가 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노비의 숫자는 전 인구의 1/3이 넘는 육백만 명에 이르렀다.
인구 조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동안의 위생 교육과 천연두 예방 접종 덕분인지 3세 미만의 영유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었다.
조선은 예로부터 다산 국가였다.
하지만 이 시기 대부분의 국가가 그러하듯 영유아 사망률이 엄청날 정도로 높았다.
오죽했으면 백 일이 되었다고 잔치를 하고, 1년이 되면 돌이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잔치를 했을 정도로 아이들이 태어나면 반수 이상이 5세를 넘기지 못하고 여러 원인으로 사망했었다.
그러던 것이 몇 년간의 위생 교육으로 영유아의 생존율이 기록적으로 높아졌던 것이다.
1794. 11. 1 여의도 특별 재판소.
1개월에 걸쳐 전 조선에서 잡아들인 죄수들은 무려 10,000명에 가까웠다.
이날부터 잡아들인 죄수들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길게는 한 달, 짧게는 열흘 정도 동안 여의도에 수감되어 가혹할 정도의 혹독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잡혀온 이들은 60세 미만의 건강한 사람들과 60세 이상이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 등 모두 두 부류로 나누었다.
처음 여의도에 수감되자마자 실시하는 신체검사로 이들은 철저하게 분리 수용되었다.
노약자의 경우라도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훈련이 실시되었다.
교관들의 눈은 훈련원에서 유생들을 교육시킬 때와는 전혀 달랐다.
교관이 죄수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 개XX! 그것밖에 못하나.”
퍽!
“으악! 시정하겠습니다.”
그러자 다른 교관이 또 다른 죄수를 혹독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동안 네놈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피눈물을 뿌렸는지 알아?”
“왜, 부모 잘 만나 평생 먹고 살 돈 있으면 좀 베풀고 살지, 양민들이 그렇게 만만했어?”
“이 XX는 안 되겠군. 너, 대가리 박아.”
퍽! 퍽!
“으악.”
“앞으로 기어.”
퍽!
“욱!”
“어! 노려봐? 너, 양민들이 노려보면 어떻게 했어. 이 XX 눈깔을 확 빼놓을까?”
조선 출신 교관들이 때로는 너무도 잔인할 정도로 다루어 상관들이 오히려 말릴 정도로 교관들은 죄수들에게 인정사정 두지 않았다.
희한한 것은, 그렇게 가혹한 훈련을 받는 데도 단 한 사람 자살을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낮에 가혹한 훈련이 끝났다고 밤에 이들이 편안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밤이 되면 꼭 홍보 영화 상영이 있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교관이 반드시 이들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너희들은 단 한 번도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것이다. 천한 것들이니 천하게 살아야 한다고. 본래 너희같이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던 흡혈충들은 모두 죽어야 될 놈들이다. 주상 전하와 위국공 합하의 하늘 같은 성은이 너희들 살려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기뻐하지 마라. 앞으로 너희들은 평생을 그동안 저지른 죄를 속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네놈들이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짓을 했는지 똑똑히 봐라.”
그러면서 상영되는 홍보 영화는 이들이 저지른 비리와 백성들에게 자행한 가혹하고 더러운 짓, 그리고 공직에 있으면서 자행했던 수탈과 비리 등의 사례들이 조목조목 들어가며 방영되는 영화는 이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낮에는 비록 가혹할 정도의 육체적 훈련으로 힘들었지만, 저녁에 상영되는 여러 영상물과 계속된 강사들의 강연으로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차츰 교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두고 보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중 시작된 재판은 이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죄수들은 전 재산이 몰수되고 죄질에 따라 최하 10년~20년의 노역형이 처해졌다.
노역형이 처해진 이들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더하였다.
죄수들이 판결을 끝낸 것은 불과 열흘 만이었다.
이렇게 빨리 끝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재판 전 이미 죄수들에게 죄상이 적힌 서류를 넘겨주고 그것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다.
훈련과 동시에 실시된 이러한 확인 절차에 많은 사람이 반박을 했지만, 철저한 증거와 함께 증인까지 대동하자 모두 수그러졌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들의 죄를 숨기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가중 처벌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러한 행위는 곧 수그러들었다.
정부는 여기서 특단의 조치를 했다. 노역형에 처해진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판결을 마치고 난 10일 오후 이들은 모두 연병장에 집합되었다. 법무대신 이가환과 궁내부 대신 최성용, 그리고 내무대신 김석태가 이들을 찾은 것이다.
“일동 차렷!”
교관의 지시에 죄수들이 모두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이가환이 대표로 앞으로 나섰다.
“단상에 계신 분들을 향해 경례!”
“충성!”
일만 명이 일사불란하게 거수경례를 하였다.
이가환이 답례를 하자 교관이 곧 구령을 했다.
“바로.”
일사불란했다. 최성용도 그런 죄수들을 보고 놀랐다. 김석태도 놀라서 말했다.
“훈련의 효과가 대단하군요. 어떻게 한 달 만에 사람들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최성용이 대답했다.
“저도 이 정도로 훈련되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봐도 대단합니다.”
“열중쉬어!”
교관의 지시에 모든 죄수들이 열중쉬어 자세를 하자 최성용이 곧 앞으로 나섰다. 최성용이 말했다.
“우선 시간이 걸리니 교관들은 죄수들을 모두 자리에 앉도록 하라.”
그러자 교관이 다시 명령했다.
“모두 자리에 앉아!”
풀썩.
잠시 죄수들이 자리에 앉는 시간을 주고는 최성용이 말을 시작했다.
―본인은 궁내부 대신 최성용이다. 나는 주상 전하의 어명을 갖고 왔다. 주상 전하께서는 그대들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려고 하신다.
그러자 앉아 있던 죄수들이 눈빛을 빛내며 최성용을 바라봤다.
최성용이 그런 죄수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이미 전 재산 몰수형과 함께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20년의 노역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여러분의 나이로 봐서는 형이 만기가 되면 더 이상의 사회생활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거기다 그대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고생할 가족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자 모든 죄수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주상 전하께서 이런 그대들을 불쌍히 여겨 단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신다는 어명이 계셨다. 그것은 여러분도 영상 기록물을 봐서 알고 있는 새로운 개척지로의 이주다.
그러자 죄수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관들이 이들을 제지하자 곧 조용해졌고, 최성용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대들이 개척지로의 이주를 원한다면 그 시간 이후로 모든 죄는 사면된다. 단, 가족들이 모두 이주해야 하며 구형받은 기간 동안은 본국으로 귀국할 수 없다는 조건이다.
그러면서 법무대신 이가환이 가져온 사면장을 죄수들에게 보여주었다.
―여러분들은 이미 전 재산이 몰수되어 조선에 남아도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주상 전하의 성은에 따라 개척지로 간다면 지금의 개척민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고, 그들과 똑같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이는 주상 전하께서 성심을 베푸셔서 그대들에게 주는 마지막 배려다. 내일 오전부터 삼 일간 접수를 받는다. 어떻게 인생을 살지는 그대들이 선택하라.
그러고 물러서자 이번에는 내무대신 김석태가 앞으로 나섰다.
―본인은 내무대신 김석태입니다. 앞에 궁내부 대신이 말하는 개척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갈 개척지는 부여주, 고구려주(북미 지역), 가야주(호주)이고, 백제주와 연해주는 이번 개척지 신청에서 제외가 됩니다. 물론 가장 오지인 사백력 또한 제외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번 이주 계획이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함이지 유형을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러자 바로 법무대신 이가환이 앞으로 나섰다.
―본인은 법무대신 이가환이오. 그대들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연좌제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될 것이오. 물론 이전의 죄과는 크나 우리 정부에서는 여러분들의 갱생을 돕기 위해서 혹 개척지로 가지 않더라도 후손들에게는 연좌제에 대한 불이익은 없을 것이오. 그리고 개척지로 간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기간 동안 훈련을 받을 것이고, 농사를 짓겠다면 일정한 면적의 토지 또한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원해 줄 것이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기 바라오.
세 명의 대신들이 말을 마치자 이미 연병장에는 십여 개의 자리가 마련되어서 그들의 신청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교관들은 곧바로 이들에게 신청서를 나눠 주었다.
최성용이 신청서 교부를 하는 것을 보고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앞으로 여러분의 인생과 가족의 삶이 걸린 일이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서 지난 시절 같은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지 않기 바란다.
최성용의 말이 끝나자 세 명의 대신들이 단상을 내려와 곧 여의도를 떠났다.
최성용이 떠나자 바로 이주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주 신청은 삼 일이 가지 않아 끝났다.
죄수들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버려야 했지만 가족들과의 이주와 이주 후의 정착을 정부가 지원해 준다는 말에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지원을 하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이 그동안의 잘못으로 고향에서조차 버림받을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며칠 후 이러한 사실이 장준하를 통해 정조에게 알려졌다.
정조가 앞에 놓인 서류를 보고 말했다.
정조는 이때 선정전이 아닌 희정당(熙政堂)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다. 희정당은 그동안 내부를 수리하여 입식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정조가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전부 지원을 하리라고는 예상 밖이오.”
“그렇습니다. 아마도 전 재산이 몰수되자 근거를 잃게 되었고, 더구나 그동안의 잘못으로 주변에서의 손가락질을 감당하기가 아마도 어렵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들이 개척지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데 걱정이오. 그동안 하인들의 보살핌만 받았을 것인데.”
“그래도 이번 수형 기간 동안 받은 육체적은 훈련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하였던 것입니다.”
“과인이 생각하기에 처음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도 했었는데, 이제 와 보니 그것이 이번에 이들이 전부 이주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겠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수감되어 훈련을 받지 않고 옥사에만 있었다면 이번 판결에 실망한 다수의 죄수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도 노비 해방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들 처지로는 암담한 조선보다 힘들지만 미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개척지가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좋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모쪼록 결과까지 좋았으면 하오.”
“잘될 것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이들의 이주는 곧바로 실시되었다.
대부분의 죄수들이 한성 일대에 가족이 한두 명씩은 있었기 때문에 곧 이들의 연락으로 고향에서 가족들을 불러올리기 시작했다.
전 재산이 몰수된 이들이었기에 이주를 위한 짐은 간단했다. 특히 모든 의복이 무상 지급된다는 말에 귀중품만을 가져오는 이들의 이삿짐은 아주 적었다.
이주는 한성 일대에 살던 사람들부터 시작되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각 지방의 사람들을 고루 배정하였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이 걸려 이주가 진행되었다.
이들의 이주는 12월까지 계속되었고, 가족들을 포함하여 총 50,000명이 이때 각지로 이주했다.
1794. 11. 20. 창덕궁 인정전.
이 무렵 한성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 북한산성에서 영상 기록물을 상영하려던 계획을 바꿔 10월 중순부터 경복궁터에 대형으로 조립식 건물을 설치하고는 하루에 4차례씩 영상 기록물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로 옆에도 조립식 건물이 설치되었다.
이 건물은 수십 개의 방으로 나뉘어 조선 각지의 지도층 인사들을 위한 교육장이 설치되었다.
이 건물에서 가온이 가져온 새로운 문물에 대한 홍보용 영화 상영도 동시에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연일 강도 높게 가온에서 선발된 사람들과 이가환, 이현호를 비롯한 40여 명의 문관과 무관들이 각 분야에 걸쳐 자신의 경험담을 말해 주면서 이들의 머리에 뿌리박인 구폐를 몰아내는 의식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한 달간의 이러한 의식 개혁 운동의 성과는 놀라웠다.
먼저 이번 작전으로 가온군의 가공할 무력과 자신들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눈으로 목격했던 조선의 지도층 인사들은 점차 자신들의 위치와 앞으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각하기 시작했다.
오늘 창덕궁 인정전에는 500명의 선발된 인원들이 정조를 알현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내관의 외침이 있자 위국공 장준하와 총리대신 채제공을 비롯한 각부 대신들과 500명의 선발대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평신.”
내관의 말에 몸을 일으킨 각부 대신들과 선발대는 놀라운 모습을 목격했다.
정조의 복식이 바뀐 것이다. 정조가 새롭게 만들어진 군 예복을 입고 있었다.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대단했던 정조가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곤룡포보다 더 잘 어울리는 듯했다.
짙은 청색에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견장과 금으로 만든 단추, 그리고 어께에서 허리까지 가로지르는 금실로 뒤덮인 붉은 띠를 두른 모습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이러한 정조의 변신은 사전에 장준하와 치밀한 각본에 의해서였지만, 소매 깃이 좁아 호복 같아 보이는 복식에 대해 놀라기는 했지만 채제공을 비롯한 누구 한 사람도 거기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이들은 장준하를 비롯한 가온 출신 각료들의 복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장준하의 눈짓으로 궁내부 대신이 된 최성용이 마이크를 잡았다.
가온 무역은 별무사와 함께 궁내부에 소속이 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제1회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발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먼저 주상 전하께 대한 경례가 있겠습니다.
잠시 후 인사를 마치자 정조가 인사말을 했다.
―오늘 과인은 조선의 미래를 보는 듯하다. 그대들은 수많은 지원자 중 선발된 자들이다. 그대들이 가서 보는 것은 가온 친위군이 그동안 열고 성을 다해 우리 조선의 미래를 위해 개척한 곳이다. 가서 하나하나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담아오라. 조선은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꿈과 희망을 가져오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과인은 그대들을 믿는다.
정조의 인사가 끝을 내자 신사유람단이 인사를 마치고 인정전을 나와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어? 저게 무언가?”
이들의 앞에 있는 것은 버스였다.
한성의 성문은 버스가 드나들 정도의 넓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숭례문 옆에 새로운 문을 만드는 것이었다.
조선에 입성을 하고 난 후 최성용은 장준하에게 보고를 하여 정조의 제가를 얻어 성벽을 절개하고 이중 철문을 만들어 대형으로 문을 만들었다.
이 문은 좌우로 문을 계폐할 수 있어서 전차까지 드나들 수 있게 크게 만들었다.
이 문으로 지금 수송된 버스 15대가 500명의 인원을 태우기 위해 창덕궁 정문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한성의 백성들은 구경을 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버스에서 경적이 울렸다.
빵!
“에구머니.”
“어이쿠, 이게 무슨 소리야?”
“야, 신기하네. 무슨 소리가 그렇게 커?
빠앙.
버스가 둘러싼 사람들을 비켜나게 하기 위해 경음기를 울리자 처음에는 화들짝 놀라던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해했다.
하는 수 없이 병력을 동원하여 인파를 헤치고 버스가 억지로 길을 열어 종로를 지나 숭례문 옆에 새로 만든 문을 통해 마포로 갔다.
이들은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배에 올랐다.
마포 나루에서 배를 타고 밤섬을 통과하던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이 앞에 보이는 당인리 방향을 보고 소리쳤다.
“저게 무언가?”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발전소라는 것이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바로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상(喪)을 당해 그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다 이번에 정조의 특명으로 신사유람단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발전소가 뭐요?”
옆에 있던 사람의 물음에 정약용이 자신의 지인들에게서 들은 말을 해주었다.
“저 발전소는 지금 창덕궁과 운현궁의 밤을 밝히는 전기라는 것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하오.”
“그대는 그런 것을 어떻게 잘 알고 있소?”
정약용이 당인리에 건설되고 있는 발전소를 보고 말했다.
“이번에 입각되신 분들 중 지인들이 몇 분 있어 알게 되었소이다.”
그 사람이 고개를 돌려 정약용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 사람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대는 사암(俟菴) 아니신가?”
그 소리를 듣고 정약용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대는 풍고(楓皐) 아니신가?
정약용과 말을 주고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김조순이었다. 두 사람은 김조순이 초계문신일 때부터 안면이 있었다.
김조순과 정약용은 철저하게 다르고도 같은 길을 걸은 사람들이다.
김조순은 명문 중의 명문인 안동김문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정조의 총애를 받아 초계문신이 되었다.
지금은 규장각 직각으로 있다 규장각이 교육부로 변하면서 지금은 교육부 국장이 되었다.
철저하게 양지에서만 살았었던 김조순은 지금에 이르러 집안의 많은 사람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지만, 본인만은 비리에 연루되지 않아 이번 신사유람단에 정조의 특명으로 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은 영, 정조 시대 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동안 권력의 언저리에만 머물던 기호남인 집안 출신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약용의 집안은 개혁적 성향이 강한 가풍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족들 대부분이 초기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교세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3년 상을 마치고 돌아와 마찬가지로 정조의 특명으로 신사유람단에 참여를 하였지만, 이들 두 사람은 당시대의 극과 극을 달린 사람이었다.
성격 또한 판이하여 김조순은 집안의 영향 탓인지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품이 곧고 너그러웠다. 반면에 정약용은 철두철미했다.
한 번은 정조가 내린 어주(御酒) 한 양푼을 한꺼번에 마시고도 흔들림이 없었을 정도로 정신력이 대단하였다.
평소에는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은 사람이 그 정도였으니, 그의 정신력이 어떠했는지는 미뤄 짐작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김조순은 정치가, 정약용은 학자풍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의 역사에서도 이들의 인생은 극과 극을 달렸다. 하지만 세상이 격변하여 이들 두 사람은 한 배를 탄 것이다. 이들이 조선에 돌아올 6개월 후, 그들은 똑같은 것을 각자 어떠한 눈으로, 또 무엇을 어떻게 보고 올지 궁금한 일이었다.
김조순이 이번 신사유람단에 다른 사람도 아닌 장준하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장준하는 이러한 두 사람의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을 알고서 정조에게 품의하여 특별히 이번 신사유람단에 참여를 시킨 것이다.
이들 외에 향후 조선 정계를 주름잡을 이상황, 남공철, 심상규, 서영보 등 비록 명문의 후예이기는 하나 아직 세사에 물들지 않았던 30대의 젊은 인재들이 대거 참여한 1기 신사유람단이었다.
김조순을 신사유람단에 참여시키게 한 것은 권오인이 장준하에게 적극적으로 권유해서였다.
권오인은 이때 정식으로 나라의 연구 기관이 된 국사 연구회와 국사 편찬 위원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권오인이 장준하를 찾은 것은 11월 초순이었다.
노비 해방으로 정신이 없던 때 권오인이 운현궁을 방문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바쁘신데 늙은이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퇴근하고 쉬고 있던 참입니다. 앉으십시오.”
장준하는 운현궁의 사랑채를 개조하여 입식으로 만들어 자신의 서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당시 운현궁은 처음에는 가온 사람들이 숙소로 많이 사용을 하고 있었으나 권오인의 권유로 북촌에 있던 99칸짜리 가옥 몇 채를 정조에게 하사받아 그곳을 개조하여 한식 호텔로 사용을 하고 있었다.
장준하가 물었다.
“호텔에서 지내시기는 어떻습니까?”
“아주 편리합니다.”
“이곳에 계셔도 되는데 구태여 북촌까지 가실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권오인이 그 특유의 깐깐한 모습으로 말했다.
“저희들이 운현궁에 너무 몰려 있으면 조선인의 특성상 분파를 조장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남인과 서인 같이 또 다른 당파로 인식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러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기 전 아예 우리가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장준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리 스스로가 채찍질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권오인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벌써 저잣거리에 우리들을 보고 천인(天人)이니 신인(神人)이니 하는 말들이 오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조그마한 일에도 조심을 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가 서인을 몰아낸 또 하나의 정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준하도 그 말에는 얼굴을 긴장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국정원과 경찰청에 지시해 철저하게 그런 말이 돌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일 때문에 오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때 장준하의 집무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합하, 접니다.”
최성용이었다. 장준하가 권오인을 바라보자 들어와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궁내부 대신인가? 들어오게.”
최성용은 내무대신 김석태와 신경식 국정원장과 함께 동행을 했다. 장준하가 권오인에게 말했다.
“국내 상황을 알아보려고 모두 오라고 했습니다.”
권오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정무에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회장님께서도 정무로 오신 것 아닙니까?”
권오인이 말했다.
“저는 이번 신사유람단에 한 사람을 추천할까 해서입니다.”
“말씀하십시오.”
“규장각 직각으로 있다 이번 개편 때 교육부 국장이 된 김조순입니다.”
장준하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예? 김조순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최성용이 물었다.
“김조순이라면 안동김씨 세력의 시발점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사람을 추천하시려고요.”
다른 사람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였기에 모두 권오인을 바라봤다.
“물론 김조순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안동김씨 세도의 시발점이네. 하지만 이는 역사의 한쪽만을 바라봐서이네. 만일 김조순이 성격이 편협하고 자신만 아는 사람이고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면 단지 국구(國舅, 왕의 장인)라는 신분만으로 단숨에 조선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 것 같나?”
김석태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김석태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사를 전공한 적이 있던 최성용이 말했다.
“권 회장님 말씀대로 김조순 개인의 성품은 상당히 너그러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있을 때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혹독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의 첩이 김조순의 세도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린 적이 있었지만 김조순도 이 또한 강력하게 제재를 하지는 않았었습니다.”
권오인이 모두를 보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도 정치만을 놓고 김조순을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조 또한 김조순을 총애할 정도면 그의 능력은 이미 검증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자 김석태가 물었다.
“어쨌든 조선을 수렁에 빠트린 원죄는 면하기 어려운 자 아닙니까?”
권오인이 말했다
“당시 안동김씨 세력이 득세를 한 까닭은 역설적으로 정순 왕후와 벽파에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순조 즉위 후 그들은 정조의 친위 세력을 제거하고 천주교를 이용하여 정적인 남인들을 멸문에 이를 정도로 몰락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정순 왕후가 죽고 김조순이 정권의 전면에 나온 후 그동안 득세를 한 벽파를 몰아내자 남아 있던 정치 세력이 김조순 일파 외에는 거의 없을 정도로 당시 조선 조정에는 인재의 씨가 말랐었습니다. 안동김씨의 득세는 결코 그들이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실내를 둘러보고는 권오인이 다시 말했다.
“김조순은 인물입니다. 그것도 천하를 경영할 정도의 배포도 있습니다. 지금 조선에는 탐관오리들과 지금까지 권세를 누리던 명문들이 거의 몰락했습니다. 심지어는 김조순의 안동김문 또한 거의 몰락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신사유람단에 김조순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송곳은 주머니에 있으면 언젠가는 비집고 나옵니다. 이전의 역사에서 본 그 모습을 보지 말고 새롭게 바뀐 김조순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오인의 말에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각자 생각에 빠졌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장준하가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이전 역사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회장님 말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은 새로운 세상입니다. 물론 김조순이 후일 자신의 당을 만들어 정치인으로 나설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국가를 위하는 생각으로 정치를 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입니다.”
국정원장 신경식이 말했다.
“이번에 저도 김조순의 조사를 하면서 놀란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김조순은 명문의 집안에서 자라 민초의 삶은 확실히 알지 못하였지만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나라를 걱정하는 지인들도 많았고, 그 자신 또한 아직은 세파에 물들지 않은 상태입니다.”
장준하가 물었다.
“그럼 추천을 하지 그랬나?”
신경식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의 김조순은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굳이 추천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말씀을 들어보니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김조순이 송곳이라면 당연히 저도 추천합니다.”
장준하가 권오인을 보고 말했다.
“회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의 시각이 상당히 편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조선에 이전 시대의 시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재고하겠습니다. 국정원에서도 이 점 각별히 명심해 주게.”
“알겠습니다.”
장준하가 권오인을 보고 말했다.
“정약용은 어떻습니까?”
권오인이 말했다.
“저는 지난 시대 다산의 책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그를 스승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 시각이 편향된 면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권오인은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말했다.
“저는 만일 정약용이 이전 시대같이 18년의 유배를 받지 않거나 그 이전 천주교의 탄압으로 집안이 몰락하지 않고 그대로 조정에 남아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면 과연 지난 시대와 같은 만고에 남을 명저를 남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권오인의 말은 누구나 한번쯤을 생각해 본 일이라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하께서 이번에 두 사람을 모두 정조께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이상황, 남공철, 심상규, 서영보 등도 참여를 시켰으면 합니다. 이들은 모두 김조순 집권기 활약했던 사람들로, 이번 유람단에 꼭 참여를 시켜야 합니다.”
장준하가 권오인의 생각을 이해하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전하를 뵈올 때 모두 추천을 해서 신사유람단에 참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권오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신사유람단은 누가 생각해 낸 것입니까?”
그러자 최성용이 웃으며 말했다.
“합하께서 운현궁이라고 작명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생각해 냈습니다. 괜찮지 않습니까?”
그러자 김석태도 웃으며 말했다.
“하긴, 곧 국명도 대한 제국으로 바꿔야 하니 우리가 조선 말기 개화파가 되나?”
그 말에 모두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그들의 웃음소리가 운현궁을 넘어 한성의 하늘로 넓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