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교와 사쓰마
1793. 12. 25. 유구도 나패 국제 자유 무역항.
“대단하군요.”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온 무역의 주도로 이룩한 것입니다.”
백련교를 이끌고 있는 교두 중 최고 지도자인 유지협(劉之協)이 국정원 중국과 이영달 과장과 가온 무역 이경식 상관장이 같이 동행하는 여정이었다.
이번 여정은 유지협의 자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백련교를 이끌고 있는 유지협은 그동안 송지청 등을 전면에 내세워 가온 무역과 협상에 나섰었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본인이 직접 최성용을 만나기 위해 유구를 방문하는 것이다.
유지협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가온에서는 이영달 과장과 이경식 상관장을 동행시켰던 것이다.
지금 그들은 타고 온 기범선 위에서 몇 년간 엄청나게 변해버린 나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항구는 이영달과 이경식이 봐도 감탄할 정도였다.
유지협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이건 광저우보다 더 큰 것 같습니다.”
이경식이 대답했다.
“저도 한참을 와보지 못했더니 이렇게 많이 변해 있군요.”
이영달 또한 항구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항구에 떠 있는 배들이 수백 척이 넘는 것 같습니다. 저것 좀 보십시오. 하역하는 물량도 상상 이상입니다.”
유지협이 말했다.
“가온 무역의 힘이 대단하군요.”
이경식이 말했다.
“우리가 대단한 것도 있지만 이곳이 항구로 최적지인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유지협이 항구에서 하역 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유구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 저 사람들은 마이소르 왕국이라고 인도 대륙에 있는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마이소르 왕국이오?”
“예, 그렇습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입니까?”
“중국에서 말하는 천축국이 있는 대륙의 밑에 있는 나라입니다.”
유지협이 그제야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군요. 그런데 저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우리 가온 무역과의 계약에 의해 마이소르 왕국에서 인력을 송출한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경식의 대답에 유지협이 말했다.
“우리 청국에도 먹고살기 어려운 빈민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저들같이 먹고살 길을 열어주실 수는 없는지요?”
이경식이 말했다.
“그 문제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일단은 우리 회사 사장님을 만나 뵙고 말씀을 나누시지요.”
“알겠습니다.”
유지협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교도들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 무렵 유구는 완전히 변화되어 있었다.
가온 무역의 영토로 편입된 지 3년이 넘어가는 때라서 모든 주민들이 능숙할 정도로 우리말과 한글에 능숙해 있었다.
3년 전부터 시작된 왜색(倭色) 털기 작업이 너무도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개량 한복을 입은 주민들이 활기차게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그동안 개방의 여파로 국제 거리 일대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말 그대로 국제 거리가 되어 있었다.
유지협 일행이 타고 있는 배가 항구로 들어오자, 곧 작은 배가 항구에서 나왔다.
줄사다리가 내려지고 곧 출입국 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배에 올랐다. 그들은 유구인이었다.
출입국 관리는 네 명이었으며, 그들은 능숙하게 이경식 일행을 보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관리들 중 선임자로 보이는 자가 일행을 보고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러자 가장 연장자인 이경식도 답례를 하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선임자가 다시 말했다.
“깃발을 보니 우리 가온의 배인데, 어디서 오시는 배입니까?”
“아, 나는 광저우 상관장 이경식입니다.”
그러자 그 관리가 몸을 바로 세우더니 공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총독 각하의 특명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신분 확인을 위해 증명서를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이경식과 이영달이 자신의 신분 증명서를 제출했다.
관리 중 나머지 사람들은 그 시간 선장을 만나 선원들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였다.
그들은 경험이 많은 듯 아주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증명서를 확인한 선임 관리자는 유지협을 보고 말했다.
“이분은 증명서가 없습니까?”
“그분이 우리가 모시고 온 귀빈입니다.”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관리는 유지협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경식에게 다시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상관장님께서 여기 이분에 대한 확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경식이 확인을 해주자 선임 관리가 말을 했다.
“출입국 절차가 조금 까다로워도 이해를 해주십시오.”
이경식이 말했다.
“항구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별일은 없었고, 다만 간간이 총기 사고가 발생을 해서 입국 시 무기류를 아예 보관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경식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철저합니다, 같은 식구인데.”
선임 관리가 고개를 숙여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령을 피우면 아래 사람들에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출입국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이경식이 말했다.
“별말씀을. 그런데 우리말을 아주 잘하십니다.”
그러자 그 관리가 표정을 풀고 약간 미소를 띠고는 말했다.
“이 정도면 보통 누구나 하는 정도입니다.”
이경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들이 대화를 하는 사이 관리의 배려로 선상에서 출입국 수속을 모두 마쳤다.
이들이 출입국 수속을 마치는 사이 이경식 일행이 항구에 도착한 것이 식명원 총독부에 알려졌다.
유지협을 기다리고 있던 최성용은 항구로 영접을 나가기로 했다.
총독의 전용 마차를 빌려 탄 최성용이 선착장에 도착하자 이경식 일행이 막 하선을 하고 있었다.
최성용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최성용의 인사에 이경식도 반갑게 악수를 하였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여~ 이 과장도 오랜만이오.”
이영달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며 말했다.
“제독님께서도 별일 없으셨습니까?”
“나야 늘 그렇지.”
이경식이 옆에 있는 유지협을 소개를 했다.
“여기 이분은 백련교에서 오신 유지협 대인이십니다.”
그러며 이경식은 최성용을 중국어로 소개해 주었다. 그러자 유지협이 포권으로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유지협입니다.”
그의 입에서는 놀랍게도 우리말이 나왔다.
최성용도 놀라서 이경식을 보고 말했다.
“아니! 우리말을 하시네.”
그러자 유지협이 다시 우리말로 말했다.
“약간, 아주 약간 합니다.”
최성용이 그의 말에 놀라 웃음을 지었다.
“허허, 이거 참 대단하십니다.”
이경식이 말했다.
“지금 백련교에서는 우리 교관들이 군사 훈련과 더불어 간단한 우리말과 글 교육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잘 따라오는가 보네?”
“청국 말이 우리말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익히는 데 어렵다고 합니다만, 교관들이 무조건 강행을 하니 이제 조금씩 말문들이 트인다고 합니다.”
최성용은 물었다.
“한글 교육을 제대로 따라하는가?”
“저들은 한글이 우리글이라는 자체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르치기가 훨씬 쉽다고 합니다.”
최성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럴 만도 하군. 청국의 강남은 예로부터 자신들의 문화가 제일이라는 자부심이 많은 지역인데, 그나마 잘 따라온다니 다행이군.”
옆에 있던 이영달이 말했다.
“고급 군사 교육에 들어가면 거의 우리말로 교육을 시켜서 간부들은 우리말을 배우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흠, 좋은 생각이네.”
그러다 최성용이 아차 하는 얼굴로 유지협에게 인사를 했다.
“이런, 우리가 귀빈을 모셔놓고 결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최성용은 그러면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유지협은 그것을 보고 같이 절을 하며 말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자,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최성용은 그러면서 유지협과 이경식, 이영달을 자신이 타고 온 마차에 오르게 했다.
마차는 뚜껑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열려 있었다.
네 사람이 마차를 타고 총독부가 있는 식명원으로 가는 도중 유지협이 말했다.
“길이 아주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예, 시멘트 포장을 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멘트가 무언가요?”
최성용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석회에 여러 성분을 섞은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유지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최성용도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저도 연초에 방문을 하고 이번에 온 것인데 그동안에도 엄청난 발전을 했군요.”
그들이 지나가는 국제 거리는 이제 완연히 각국의 독특한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경쟁하듯 들어서 있었다.
특히나 오스만 제국과 마이소르 왕국의 건물들은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로, 다른 건물과는 또 다른 풍광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경식도 처음 방문하는 나패시를 보고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경식이 말했다.
“저는 첫 방문인데 도시가 아름답다고 해야 될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군요.”
이영달 과장도 감탄을 하면서 말을 했다.
“아마도 박용현 총독께서 공을 많이 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마차는 어느덧 식명원 정문을 통과해 총독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가 서고 일행들이 내리자 건물 앞에는 해군 정복을 입은 박용현 총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총독 박용현입니다.”
“총독 각하, 안녕하십니까. 백련교의 유지협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는 궁 안으로 들어갔다.
박용현의 안내로 일행들은 넓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원탁이 놓인 회의실은 상당히 넓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 곧 차가 나왔다.
박용현이 차를 권하고는 한 모금 마셨다.
이경식이 말했다.
“커피 향이 상당히 좋습니다.”
“예, 이번에 오스만 상인을 통해 조금 구입을 했습니다.”
최성용이 유지협을 보고 물었다.
“차 맛이 어떻습니까?”
처음 커피를 마시는 유지협이지만, 그래도 입에 맞는지 한두 모금을 더 마시더니 말했다.
“상당히 향이 진합니다. 마시기가 참 좋은 차입니다.”
이경식이 그것을 보고는 최성용에게 물었다.
“우리 회사 커피는 언제쯤 맛볼 수 있습니까?”
최성용이 대답했다.
“아마 내년부터는 조금씩이라도 수확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경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맛을 음미했다.
최성용이 유지협을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유 대인께서 이렇게 직접 저를 찾아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유지협도 바로 대답했다.
“말씀하시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유지협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했다.
“소총과 실탄, 그리고 포가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칠만 정의 소총을 공급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소모품도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대포도 100여 문 필요합니다. 물론 포탄도 함께 말입니다.”
최성용이 유지협이 말하는 양이 너무 많아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모든 병력을 제이스 소총으로 무장하시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최성용이 다시 물었다.
“그렇게까지 무장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유지협이 말했다.
“귀측에서 파견해 준 군사 교관들에게 간부 교육을 받다 보니, 아무래도 보다 철저한 무장이 필요할 것 같다는 간부들의 중지가 모여졌습니다.”
최성용이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너무 많은 양입니다.”
유지협이 말했다.
“이번에는 무상이 아닌 적당한 가격을 지급하겠습니다. 물론 귀측과 늘 거래해 왔던 방식대로 금(金)으로 지급하겠습니다.”
최성용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대량의 군사 무기가 보급되는 관계로 저희들도 관계자들과 협의가 있어야겠습니다. 잠시 여기서 며칠 휴식을 취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회의를 마친 최성용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비행장으로 갔다.
비행장에는 최성용이 타고 온 금강호 비행선이 그대로 대기하고 있었으며, 최성용은 비행선에 올라 곧바로 가온으로 돌아왔다.
가온으로 오는 도중 장준하와 교신을 하여 백련교가 요구한 무기 구입에 대한 보고를 미리 해놓았다.
1793. 12. 26. 가온 본부 회의실.
25일 오후 유구를 출발한 최성용이 밤을 달려 다음 날 새벽 가온에 도착을 하였다.
최성용은 쉴 사이도 없이 곧바로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에서는 최성용이 발의한 안건으로 회의를 열기 위해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무슨 말을, 밤새워 달려 왔는데. 자, 자리에 앉게.”
최성용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장준하가 참석자들을 보고 말했다.
“보고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백련교가 7만 정의 소총과 대포의 공급을 바라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형구 대장이 먼저 말을 했다.
“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지금 저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위권 차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김석태 지사가 말했다.
“그래도 너무 많은 장비가 넘어가면 백련교가 딴생각을 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이전 시대 미국이 중동에서 저지른 실수를 우리가 또 저지를지 걱정입니다.”
이형구 대장이 말했다.
“미국과 우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미국은 끝없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이미 확보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종철이 동의하며 말했다.
“의장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는 미국과 추구하는 바가 아예 다르지 않습니까?”
권오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잘못하면 미국과 똑같은 우(愚, 어리석음)를 범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지금 시대 누가 우리를 제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철저한 기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에 참석해서 거의 말을 하지 않던 권오인이 말을 하였다.
회의장을 둘러본 권오인이 말했다.
“우리는 곧 있으면 본토로 들어갑니다. 본토로 들어가면 어차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기술들이 노출됩니다. 또, 그래야 하고요. 만일 우리가 지금 도덕적으로 확고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천오백만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들이 10년 정도 우리의 기술을 습득한 후의 상황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부분을 권오인이 지적하자 일순 회의장이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권오인이 다시 말했다.
“그동안 우리 민족은 알게 모르게 핍박을 받아왔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대 양반들은 명나라가 망하고 200년이 지난 지금 조선의 문화가 천하제일이라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때 손에 칼을 쥐어준다면 어디로 휘두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형구가 그 말에 반박을 했다.
“우리가 철저히 통제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권오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양반들의 압제를 벗자마자 바로 우리들의 지배를 다시 받는 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독제를 할 것입니까?”
권오인의 입에서 독제라는 말이 나오자 회의실 분위기가 일순 무거워졌다.
김석태가 말했다.
“지금 훈련소에서는 교육을 프러시아 식 군사 학교 체계로 교육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오인이 말했다.
“그것은 단기간에 백성들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이지 앞으로도 계속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석자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장준하가 말했다.
“회의의 논지가 다른 곳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우리들 문제는 다시 심도 있게 논의하기로 하고, 백련교 문제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장준하의 말이 끝나자 최성용이 말했다.
“그들에게 무기를 공여해 주는 대가로 우리말과 글을 교육시키도록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최성용의 말이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장준하가 말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최성용이 대답했다.
“지금 백련교를 훈련시키는 교관들이 고급 군사 교육은 아예 우리말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련교 간부들 대부분이 우리말을 어느 정도는 가능하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권오인도 그 말에 부정적으로 말했다.
“중국어와 우리말은 어순부터가 다른데 가능하겠나?”
최성용이 말했다.
“물론 청국의 강남은 문화적인 자부심이 대단한 지역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은 이민족도 상대적으로 많이 있습니다. 지금 중국은 남쪽 말과 북쪽 말이 사투리 정도가 아니라 통역이 없으면 대화가 곤란할 정도로 아주 상이합니다. 이 점을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권오인이 물었다.
“어떻게 말인가?”
“공용어로써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민족별 고유의 말은 보존시켜 주는 정책도 병행하고 말입니다.”
장준하가 최성용에게 물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더 없이 좋겠는데, 백련교가 과연 수용을 할까?”
최성용이 말했다.
“안 되면 강남을 묘족과 같은 각 민족별로 몇 개의 나라로 나누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권오인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세대 정도면 우리말과 글로 바뀌는 것이 가능할 법도 합니다. 지난 시대 중국이 한자가 배우기 어렵다고 해서 백여 년간의 논의 끝에 한자를 약자화한 간화자(簡化子)를 공식 문자로 사용했다는 것이 기억납니다.”
최성용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조선도 그렇지만 지금 중국의 문맹률이 90%를 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련교가 나라를 세우면 이전과는 다른 정책이 필요합니다. 이때가 우리말과 글을 보급할 수 있는 적기라고 판단됩니다.”
장준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점점 최성용의 논리에 젖어들었다.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되던 것이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권오인이 처음으로 동의하는 말을 했다.
“한자를 병행해서 가르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군.”
최성용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백련교의 고급 간부들도 아무리 우리 교관들이 교육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들이 배우기 어려우면 그렇게 빨리 습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형구도 동의하는 말을 처음으로 했다.
“하긴, 우리가 2000년대의 시선으로 지금 청국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물론 일 할에 이르는 식자(識者)들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새롭게 건국하는 백련교가 그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우리말과 글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수도 있겠군.”
최성용이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도 고토를 회복하면 가장 먼저 우리말과 글을 강제로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준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말의 세계화가 여기서부터 시작되겠군.”
권오인이 말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왔을 때, 우리말을 세계 공용어로 만들자는 생각을 누구나 했을 것입니다. 단지 어떤 방법으로 하나 하는 고민이 없었습니다. 최 제독이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준 듯합니다.”
최성용이 말했다.
“맞습니다. 원하지 않게도 이 시대에 우리가 왔지만, 기왕 온 거 우리 것을 세계 제일로 만들 사명이 우리에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준하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비록 인구는 작지만 유구도 성공한 일입니다.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보다 문화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그들을 영원히 이기는 길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여러분들 중 반대 의견이 있습니까?”
그러자 참석자들 모두가 없다는 말을 합창했다.
장준하가 다시 말했다.
“최 제독이 생각지도 않게 우리의 사명을 다시금 깨우쳐 준 듯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이 시대로 보냈다면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번 채제공 대감의 일화와 같이, 이번 우리말과 글을 논의한 사항을 가온의 모든 주민들이 알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하겠습니다.”
최성용은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유구로 돌아가려고 회의실을 나서려는 순간 장준하가 말했다.
“최 제독, 잠시 나 좀 보고 가게.”
“알겠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만이 있게 되었다.
장준하가 말했다.
“자네가 백련교에게 우리말과 글을 조건으로 무기를 공급하려는 것을 보니 이제 어느 정도 우리가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가 보네.”
“그렇습니다. 정조께서도 스스로 일정을 앞당기자고 하실 정도면 충분히 여건은 조성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장준하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을 했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일본에 대한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지 않나?”
“예,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것도 시작을 해보면 어떻겠나?”
최성용이 놀라 말을 했다.
“예?”
장준하가 다시 말했다.
“왜? 그리 놀라나?”
“그 문제는 전체 회의에서 논의를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까?”
장준하가 말했다.
“본래 내 계획은 1800년에 우리가 본토에 들어갈 때쯤 시작을 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자네가 이번에 백련교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일정을 앞당겨도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을 하는 것이네.”
최성용이 조금 생각하다가 말을 했다.
“시기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준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네. 이번에는 자네와 나, 그리고 실무진들만 알고 추진해 보세.”
최성용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장준하가 말했다.
“이 시대는 영웅의 시대이네. 이종찬 중령이 벌써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있네. 자네도 이제는 하나의 큰일을 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네.”
최성용이 대답했다.
“저는 지금 하는 일로도 많이 힘이 듭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자네의 일을 잘 활용해서 해보게.”
“예? 제 일을 활용해서요?”
“그래. 내 생각에는 충분할 것으로 보이네.”
최성용은 장준하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던 최성용이 말했다.
“시간은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하지만 너무 길게는 기다리지 않게 하게.”
“알겠습니다.”
최성용은 그렇게 장준하와 대화를 마치고는 곧바로 비행선에 올라 유구로 돌아갔다.
1793. 12. 17. 유구 총독부.
최성용이 유지협을 보고 말했다.
“며칠 기다리느라 지루하셨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곳의 풍광이 하도 수려해 지루한지 몰랐습니다.”
유지협은 자신의 말대로 이틀간의 시간 동안 유구에 있는 군부대를 제외하고는 유구 일대를 둘러보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다.
박용현 총독과 이경식, 이영달 등을 입석시키고 최성용은 유지협에게 가온에서의 협의 내용을 말해 주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유지협이 대답했다.
“생각지도 않은 제안입니다. 우리말(가온은 한국어를 조선어라고 하지 않고 우리말이라고 명칭을 통일하였다)과 글을 배우는 조건이라니요.”
최성용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한문은 너무 어려워 평생을 배워도 다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말과 한문을 혼용하여 교육을 시키면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는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백련교에도 손해는 아닐 것입니다.”
유지협도 이 문제는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심을 하던 유지협이 말했다.
“저도 이 문제는 돌아가서 전체 간부 회의를 거칠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성용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말과 글이 귀 교가 세우는 국가의 공인 언어와 글이 된다면 우리 가온 무역에서는 우리말과 글의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유지협이 식명원에 있는 별궁(御殿)으로 물러가고 가온 사람들만 모여 회의를 했다.
박용현 총독이 물었다.
“최 제독,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최성용이 대답했다.
“어차피 우리말과 글을 세계 공용어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긴, 그렇지.”
“바로 옆에 있는 곳부터 하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입니다.”
“잘 생각했네. 내가 봐도 눈이 번쩍 뜨이는 생각이네.”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경식이 말했다.
“안 그래도 광저우의 외국 공관들 사이에서는 우리말과 글을 배우는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그런가?”
“예, 이곳 유구를 출입하는 상인들이 우리말과 글을 배우지 않으면 불편해서 배우기 시작한 것이, 광저우에서는 먼저 영국 공사관과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시작되는 바람이 각국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국제 자유 무역항인 나패 항은 모든 것이 한글로 되어 있고, 우리말을 모르면 거래하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물론 각국의 상관과 영사관에는 자국의 글들이 일부 적혀 있었지만 모든 것은 한글 일색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곳을 드나드는 상선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말과 글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유구에서는 어느덧 공용어가 우리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성용이 말했다.
“좋은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 과장.”
“예, 제독님.”
“유지협과 같이 백련교를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는 곧바로 청국의 광저우로 배를 몰았다.
이들은 광주로 돌아간 후 곧바로 사천 분지에 있는 백련교 본부로 갔다.
새로운 말과 글을 채택하는 일이라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으나, 이미 간부들 대부분이 1년 이상을 우리말과 글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쉽고 편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최성용의 의도대로 우리말과 글을 그들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기로 한다.
이렇게 쉽게 채택이 된 까닭은 이미 한어와 다른 언어가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만주어였다. 청국에서는 처음부터 모든 문서에 한어가 아닌 만주어를 기본 언어로 채택하고 한어를 덧붙이는 만한합벽(滿漢合璧)의 방식으로 문서를 작성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에게 새로운 글을 배우는 것이 처음이 아니어서 많은 논쟁은 있었지만 채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벌써 이들 간부들 대다수가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던 것도 크게 한몫했다.
이에 따라 모든 백련교도에게 본격적인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사천 분지에 있는 인원부터 시작되었다.
가온에서도 이를 위해 다시 300명의 교관들이 사천으로 급파되었다.
물론 이들 교관은 모두 군 출신들이어서 군사 훈련도 병행할 수 있는 사람들로 선발하였다.
1793. 12. 29. 나가사키.
유지협과 헤어지고 난 최성용이 찾은 곳은 나가사키였다.
“반갑습니다, 제독님.”
“오랜만입니다, 상관장님.”
“어서 오십시오.”
“석 과장도 그동안 잘 있었소?”
최성용은 나가사키 가온 무역 조계지에 붙어 있는 선착장에서 기정진 나가사키 상관장, 그리고 석원형 국정원 과장과 반갑게 해후를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최성용이 말했다.
“여기도 엄청나게 변했군.”
기정진도 같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렇죠?”
이 무렵 나가사키는 가온 무역의 상관이 조계지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풍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개량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방이 뛰어난 일본인답게 가온 무역에서 마이소르 왕국 인부들을 관리하는 직원들의 개량 한복을 보고는 그 옷이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한 결과였다.
다른 지역은 아직까지 그렇게 많이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나가사키 주변과 가온 무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쓰마 번에는 상당히 많이 보급되어 있었고, 그들 스스로 비슷하게 직접 만들어 입을 정도였다.
이는 사쓰마 번의 상관에 있는 관리들을 비롯한 사무라이들도 상당수가 개량 한복을 착용하고 있을 정도였다.
최성용이 한복을 입고 사무라이들을 보고 말했다.
“묘하게도 저들이 개량 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이 어울려 보이네요.”
최성용의 말에 기정진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잘 어울리죠?”
“그렇네요.”
기정진이 다시 말했다.
“지금이야 많이 입고 있지만 처음에는 상당히 고위 관리들만이 입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기정진이 말했다.
“우리 직원들이 개량 한복을 입고 마이소르에서 온 인부들을 관리하는 것을 보고 고급 옷으로 인식해서 고관들이 입기 시작한 것이 차츰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성용이 말했다.
“우리는 양복에 길들여 있는데 저들은 우리 한복에 길들여가고 있군요.”
기정진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한복을 조금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한복이라고 양복처럼 세계화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최성용이 말했다.
“괜찮은 생각입니다. 돌아가거든 우리의 복식을 적극 연구해 보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며 상관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는 몇 사람들이 최성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성용이 들어서자 그들이 90도로 절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90도로 절을 하는 그 사람들은 사쓰마 번의 숙노인 카바야마 치카라와 사쓰마 번의 관리들이었다.
최성용이 그들을 보고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사쓰마 번은 이번 최성용의 방문에 숙노 카바야마 치카라와 10여 명의 번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환영하였다.
“옷이 보기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전부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자리에 앉읍시다.”
최성용의 말에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성용이 웃으면서 말했다.
“번주님은 잘 계시지요?”
“예. 안 그래도 저희 상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여기서 차 한잔하고 그리로 옮기지요.”
“알겠습니다.”
숙노인 카바야마 치카라가 인사를 하고 일어서며 말했다.
“저는 그만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최성용이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카바야마 치카라가 인사를 하고 돌아가자 기정진이 최성용에게 물었다.
“오늘 여기로 오신 이유를 알면 안 되겠습니까?”
최성용이 대답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 기밀을 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국정원장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릴 것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최성용이 기정진과 석원형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사쓰마의 독립 때문입니다.”
쨍그랑!
기정진이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석원형 또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기정진이 떨어진 찻잔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최성용에게 물었다.
“사쓰마의 독립이라니요?”
최성용이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위국공 합하와 나는 몇 년 전에 일본에 대한 말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최성용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을 지금 그대로 놔두거나, 지난 시대처럼 일왕이 통치를 하여 힘이 결집될 경우 늘 우리의 우환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북해도는 합병, 나가사키가 있는 큐슈우(九州)와 시코쿠(四國)는 각각 독립, 혼슈우(本州)는 중앙에 중립 지대를 만들어서 남북으로 분할하는 방법을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정진과 석원형은 최성용의 말에 넋이 나간 듯 듣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백련교의 지도자인 유지협을 만난 것을 보고 드리러 가온에 들어갔을 때 합하께서 본격적으로 일본에 대한 공작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극비리에 받게 되었습니다.”
기정진이 말했다.
“다른 분들은 모르십니까?”
“일단 합하께서 저보고 먼저 시작하라는 지시입니다.”
기정진과 석원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원형 과장이 말했다.
“제독님, 그렇다면 작전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최성용은 두 사람 쪽으로 머리를 가까이 대고는 장시간 설명을 해주었다.
두 사람은 그 설명을 들으며 때로는 머리를 끄덕이고 때로는 질문을 하였다.
설명을 마치면서 최성용이 말했다.
“군사력 동원은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하고 공작을 진행해야 하니 두 사람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울 것입니다.”
석원형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 같은 요원들로서는 한번 해보고 싶은 공작입니다. 밀어주신다면 해보고 싶습니다.”
기정진 또한 말을 했다.
“실패를 해도 별다른 타격이 없을 것이니 우리에게는 큰 손해가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한번 해볼 만한 작전입니다.”
최성용이 말했다.
“일단 내가 번주를 만나 운을 띄워놓을 것이니 나머지를 부탁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알겠습니다.”
최성용이 장시간의 밀담을 마치고 허리를 펴는 것을 보고 기정진이 물었다.
“유황도에 추진하고 있는 군수 무기 공장은 어떻게 됩니까?”
최성용이 대답했다.
“취소 예정에 있습니다.”
기정진이 다시 물었다.
“취소가 되면 소총은 모르지만 대포 같은 경우 청진에서 개발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예정보다 빠르게 본토로 들어가는 마당에 유황도에 공장을 건설할 필요성이 떨어져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포는 급한 대로 연해주에 시험 사격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기정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본토로 들어가면 이제는 그런 부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입니다.”
최성용은 그렇게 두 사람과 밀담을 마치고 다시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아 사쓰마 번의 상관을 방문했다.
“반갑습니다, 제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번주님.”
사쓰마 상관의 접견실에는 특별히 번주가 오면 묵는 집무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모처럼의 나가사키 방문과 최성용을 만난다는 생각에서인지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나리노부(島津?宣)는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 최성용을 반겼다.
1773년에 태어나 이제 약관(弱冠, 20세)이었다.
최성용은 시마즈 나리노부를 볼 때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번주 직위를 물려받아서인지 나이보다는 한참 조숙해 보인다고 생각이 들었다.
최성용이 그런 생각을 가지며 물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시마즈 나리노부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건 가온 무역이 항상 도와주셔서 그런 가 봅니다.”
최성용은 속으로 역시 번주다운 말투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번의 어려운 문제는 모두 해결을 보셨습니까?”
시마즈 나리노부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 모두가 사장님 덕분입니다.”
그러면서 최성용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최성용도 마주 인사를 하면서 시마즈 나리노부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참을 인사치레의 말이 오고 간 후 최성용이 기정진에게 눈짓을 했다.
기정진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저희 사장님께서 번주님과 독대를 하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시마즈 나리노부가 약간 놀란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서 시마즈 나리노부가 숙노를 돌아봤다.
그러자 숙노인 카바야마는 고개를 숙이더니 주위에 있는 가신들에게 손짓을 하여 그들을 전부 물러나게 했다.
기정진 또한 석원형 과장과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일본 주택 특유의 이중, 삼중으로 된 모든 문들이 닫히자 최성용이 입을 열었다.
“지금 번주님께 드리는 말씀은 제 개인의 의견임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최성용이 약간 뜸을 들이다가 말을 했다.
“번주님께서 지금 전대 번주님 때문에 힘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마즈 번주의 얼굴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는 최성용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에도에 있는 모든 분들과도 사이가 불편하다는 것도 익히 들었습니다.”
그러자 시마즈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최성용이 에도에 있는 모든 분들이라고 지칭하는 중에는 자신의 누이인 쇼군의 정실 부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마즈가 말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연유가 궁금합니다. 부자간이나 남매간은 왕왕 불편한 관계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 도가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번주님은 실권이 없고 번의 모든 일이 에도에 계시는 전대 번주께서 좌지우지한다는 말은 이제 비밀도 아닙니다.”
“후~”
시마즈는 이렇게까지 최성용이 말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쉰 시마즈가 드디어 속내를 비치기 시작했다.
“최 사장님은 우리와는 무관하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답답합니다. 처음 가온 무역과 협상할 때도 아버님께서 모든 번의 정사를 주무르고 계셨습니다. 그나마 오사카 상인들의 부채 문제 해결을 제 체면을 봐서 가온 무역에서 제가 주도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그나마 얼굴이 섰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가온 무역과의 모든 일도 제가 아닌 아버님이 주도하셨을 것입니다.”
시마즈는 자신이 말을 하고도 답답한지 앞에 놓인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시마즈를 예의 주시하던 최성용이 말했다.
“번의 수하들 중 믿을 만한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절반 정도는 믿을 만합니다.”
최성용이 다시 말했다.
“지금 에도에도 혼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마즈 번주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지난 7월 로주 상석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실각되면서 개혁이 지지부진 지면서 상당히 어수선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후임 로주 상석이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정책을 계승한다고는 하나 막부는 다시 이전같이 사치와 향락이 판칠 것은 불을 보듯 훤합니다.”
최성용은 시마즈 번주의 말을 들으며 과연 ‘역대 사쓰마 번에 어리석은 영주는 없다’는 일본 속담이 생각 날 정도로 시마즈는 정확히 정국을 진단하고 있었다.
최성용이 물었다.
“전대 번주님이 가지고 있는 실권을 찾고 싶지는 않습니까?”
“후~”
시마즈 번주는 대답은 하지 않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잠시 시간을 두고 최성용이 다시 말했다.
“이제 번주님도 스무 살로 현 쇼군과 같은 나이입니다.”
시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성용이 말했다.
“사쓰마 번은 이제 일본의 300개 번 중 혼슈(본주)에 있는 가가번을 누르고 이제 명실공히 일본 제일의 번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시마즈 번주가 말했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걱정이라니요?”
“지금 에도의 아버님의 씀씀이가 자꾸만 커져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가온 무역과의 교역으로 번의 제정이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에도에서 헛되게 낭비되는 그것을 번을 위해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최성용이 말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홀로 서기입니다.”
“홀로 서기라니요?”
“말 그대로 홀로 서기입니다.”
그러면서 최성용은 앞에 놓인 종이에 글씨를 써 보였다.
<-서체 시작
獨立
<-서체 끝
그 글씨를 본 시마즈 번주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최성용을 바라봤다.
“독립이라니요? 그러면 막부에 반기를 들자는 말입니까?”
최성용이 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라뇨?”
“번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는 전폭적으로 번주님을 지원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파격적으로 말입니다.”
시마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문제는 생각하기 곤란한 문제입니다.”
최성용은 시마즈의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이 큐슈우(九州)를 전부 아우르는 나라를 건국하는데도요?”
“예, 큐슈우 전부를요?”
“그렇습니다. 이 지역은 본래 왜국(倭國)이 있던 곳으로 혼슈우와는 모든 것이 아주 다릅니다. 번주께서 마음만 정하신다면 우리는 번주를 이 큐슈우의 왕으로 만들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최성용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자 시마즈 번주는 약간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 눈치였다. 시마즈가 말했다.
“저를 위하는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 말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최성용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번주님을 힘들게 하고 싶은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몇 마디 환담을 나누었다.
환담이 끝이 나고 헤어져야 할 즈음에 최성용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십시오. 설사 숙노라 할지라도 저도 번주님께서 마음을 정하실 생각이 없으시면 아예 잊어버리겠습니다. 단, 혹여 생각이 바뀌시면 우리 상관장에게 저를 한번 만나자는 전갈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최성용은 곧바로 얼굴을 활짝 펴고는 말했다.
“이런 제가 번주님의 바쁜 시간을 많이 뺏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앉은 자리에서 손을 바닥에 대고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시마즈 번주가 그 인사에 같이 답례를 하였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소국의 작은 영주를 위하는 사장님의 마음만은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최성용이 웃으며 말했다.
“부디 다음에는 마음만이 아닌 다른 것도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최성용은 자신의 아들뻘 되는 시마즈 번주를 깍듯이 예우하며 번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밖에서는 기정진과 석원형 등이 최성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노 카바야마 치카라의 환송을 받으며 세 사람은 가온 무역 상관으로 돌아왔다.
기정진이 결과가 궁금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최성용에게 바로 물었다.
“번주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최성용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예상대로이네.”
석원형이 물었다.
“가능성은 보였습니까?”
최성용이 석원형을 보고 말했다.
“가능성이 없으면 우리가 만들면 되네.”
석원형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최성용이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절대 무역에 있어서는 지금과 똑같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첫째 할 일이네. 그리고 에도 쪽에 선을 넣어 시마즈 번주를 압박하는 방법을 취하게.”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시마즈 현 번주가 그의 아버지의 신임도 별로 받지 못하고, 그의 누이인 쇼군의 정실 부인에게도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 그나마 오사카 상인의 문제를 우리의 도움으로 풀어서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믿음이 약할 것이네. 그것을 이용해 보게.”
기정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 시마즈 번주가 후일 결심을 하더라도 자신의 아버지와 누이에 대한 짐을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석원형이 말했다.
“현재 사쓰마에서 번주의 힘이 많이 약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최성용이 대답했다.
“그 문제는 시마즈 번주가 손을 벌리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해결해도 늦지 않네.”
석원형이 바로 인정했다.
“알겠습니다.”
최성용이 말했다.
“지금 국정원에 신 원장님께 말씀을 드려 요원들을 대폭 확충할 것이니 이에 대한 준비도 하고 있게.”
“알겠습니다.”
최성용은 그렇게 이들과 회의를 마치고는 곧바로 항구로 가서 가온으로 이동을 했다.
가온에 도착한 최성용은 장준하에게 보고를 한 후 곧바로 국정원 신경식 원장을 만나 밀담을 나눈 후 일본으로 요원들을 대거 파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