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激動)
1793. 9. 12. 창덕궁 선정전.
채제공을 탄핵한 일로 질책을 받았던 김종수를 한 달 만에 편전에 불러 만났다.
여기서 김종수는 노론의 당론대로 채제공을 사람들 마음을 현혹시키고 온 세상을 선동시키려 한다고 통렬히 비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이 틀리면 그 자를 직접 만나서 따지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다.
정조는 이에 탕평에 대한 미련을 거두었다.
정조는 장준하와 협의한 대로 내년에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날 밤, 정조는 장준하와 통화를 했다.
“위국공 잘 지내셨소?”
―예, 전하.
“오늘 몽오를 불러 그의 의중을 들어보았소.”
―그러셨습니까.
정조는 김종수와 만난내용을 말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장준하에게 말했다.
“후! 이렇게 신하들 마음을 모으는 일이 쉽지가 않구려.”
―이백 년이 넘은 당쟁입니다. 쉽게 파여진 골을 메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임오년의 일을 논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몽오 대감이 잘 알고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정조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것은 아니라 생각하오. 정말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이러다 나라가 절단이 나도 자신들 잇속만 채우기 급급할 것 같소.”
장준하가 낙심한 정조를 위로하며 말했다.
―힘을 내십시오. 전하 이제 일 년 남았습니다.
정조가 장준하에게 말했다.
“그래도 판부사는 과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는데 참으로 안타깝소.”
장준하는 그런 정조를 마음을 다해 위로를 했다.
잠시 후 정조가 물었다.
“이번 장용외영 병력 충원은 아주 잘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소.”
―그렇습니다. 계획대로 우리가 훈련시킨 병력을 전부 뽑을 수 있었습니다.
정조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하오. 어떻게 그 많은 지원자 중 원하는 사람을 선발할 수 있었는지.”
―저희들이 실시하는 훈련은 조선의 방식과 많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조선 백성들은 절대 우리의 선발 방식에 합격할 수 없습니다.
“그렇소?”
―물론 저희들 선발 방식이 좋은 것 많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에 정비한 무예도보(武藝圖譜)에 나온 24반 무예를 준용한 무관 선발 방법은 앞으로 현대식 군제에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조도 그 점에는 동의했다.
“하긴 과인이 그때 가서본 무력 시범에는 지금 조선의 무과는 어쩌면 전혀 필요가 없을 수도 있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화기를 내려놓고 일대일 대결을 할 경우에는 무예도보(武藝圖譜)의 24반 무예가 아주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저희 부대에서 이를 적극 연구하여 백병전에 활용할 교범을 만들고 있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올려드리겠습니다.”
정조가 그 말에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 그렇소? 결과가 궁금하구려. 결과가 나오면 꼭 보고 싶소. 그리고 오늘 연락을 한 것은 이번 장용외영 병력 충원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하니 여의도에 병력을 주둔시켰으면 하오.”
장준하가 말했다.
―화성에서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의도에도 그들이 머물 군영 공사가 거의 끝나가니 공사를 마치는 대로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병력은 얼마나 보내면 되겠습니까?
“이번 화성 성역 공사를 감독할 병력을 제외하고는 전부 올리는 것은 어떻겠소?”
그 말에 장준하가 물었다.
―너무 많은 병력이 올라가면 대신들을 자극하지는 않겠습니까?
“그 문제는 과인이 알아서 할 것이니 걱정 마시오.”
―그럼 일단 삼천의 병력을 여의도로 배치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리고 함경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함경도는 아시는 것같이 지난 7월부터 지정한 길을 제외하고는 병력을 배치해 전부 통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병력도 연말까지는 배치를 완료할 수 있습니다.
정조가 그 말에 힘을 얻는 듯했다.
“그래 잘되었소. 아랫사람에게 지시해 통제에 만전을 기하기를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전하.
처음과는 달리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정조의 목소리는 많이 밝아져 있었다.
정조는 통화를 마치고 편전을 나와 후원으로 갔다. 요즈음 대궐 내부는 정조가 완전히 장악을 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대비가 편전에까지 와서 자신도 죽이라고 할 정도로 정조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물론 대비전의 상궁 나인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들도 많은 수가 정비되어있었다.
“전하 밤이 너무 늦었사옵니다. 벌써 조석으로 찬바람이 드옵니다. 옥체를 보중하소서.”
상선이 모처럼 정조의 밤나들이를 걱정하며 말했다. 그런 상선을 보고 정조가 말했다.
“이보시오, 상선.”
“하교하시옵소서.”
“상선이 과인과 함께한 지가 얼마요?”
“사십 년이 넘었사옵니다.”
“허허… 그런가? 참 긴 시간이었소.”
정조는 부용지에 있는 정자인 택수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상선은 과인이 세손 시절부터 나와 함께했으니 잘 알 것이오. 과인은 이 나라 임금이긴 하지만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소.”
“받들기 망극하옵니다.”
“아니오. 지금까지는… 아니, 얼마 전 친위군을 만나기전까지는 그랬소. 상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이 대궐에도 누가 간세인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갔소.”
상선 김시묵이 말했다.
“이제는 모두 일소를 했사옵니다. 성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후, 그동안 임금이 신하를 믿지 못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하며 지내야 하는 과인의 속마음이 어떠했을 것 같소?”
상선은 그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마치 자신이 죄인인양 고개를 한없이 숙였다.
정조가 다시 말했다.
“어떻게 수십 년을 과인과 함께해 온 조정 중신들을 믿지 못하는 이런 일이 다 있소.”
정조는 그 말을 하고는 잠시 달빛이 비치는 부용지를 바라보다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원자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할 것이오. 내 여우를 피하다 범을 만나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것이오.”
처음으로 정조가 자신의 속내를 비치는 말을 했다. 정조 또한 엄청난 군사력을 가진 친위군의 만일 자신에게 총부리를 돌리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같이 당쟁만 일삼는 조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름달이 다 되어가는 달빛이 내리는 부용지가 여느 때보다 더 한층 가라앉아 보이는 밤이었다.
1793. 9. 27. 창덕궁 선정전.
한 장의 장계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니 그자들이 정녕 조선의 사대부인가?”
발단은 이렇다. 황해도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무고한 양민을 핍박하여 서원의 원노로 삼은 것이었다. 백록동서원은 1588년에 건립된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주자와 김굉필, 이이를 모시는 사액 서원이다.
백록동서원은 중국에 있는 주자가 강론을 하여 중국 제일의 서원이라고 하는 동명(同名)의 서원을 조선에 세운 것으로 아주 유서가 깊었고 해서 지역에는 상당한 위명을 자랑하고 있는 서원이었다.
이러한 일은 해서(海西, 황해도) 지역의 백성들을 위문하기 위해 파견된 위유어사(慰諭御史) 홍대협(洪大協)의 장계에 의해 밝혀진 것으로 조정은 이로 인해 바짝 경색되었다.
정조는 이미 몇 년 전 서원의 증설을 금하는 전교를 내린 적이 있었고, 서원의 폐해에 대해 수차 경고를 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 몇 달 전부터 천토상소를 비롯해 금등 문서의 공개 김종수의 격렬한 항의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태로 정국이 상당히 긴장한 상태에서 일어난 이 일은 정조에게 아주 좋은 빌미가 되었다.
“도대체 과인의 말을 희언으로 듣고 있는가. 서원의 원생이 되는 것이 무슨 벼슬이 된다고 무고한 양민을 그 지경으로 만드는 것인가.”
정조의 진노는 편전에 있는 세 명의 상신들과 대신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정조가 서탁을 내리치며 말했다.
“내 그토록 서원의 폐해에 대해 누누이 경고를 주었거늘 어떻게 이렇게 황망한 일을 벌이는 것인가. 경들은 가만히 잊지 말고 말을 해보라.”
그제야 영의정 홍낙성이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백록동서원이옵니다. 원생 중 일부 불손한 자가 있어서 그렇게 된 일일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당사자를 발본하여 엄히 문책하겠사옵니다.”
그러자 정조의 분노가 홍낙성에게 그대로 떨어졌다.
“이보시오, 영상. 경은 과인이 지금 그들을 문책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오. 경의 말대로 다른 곳도 아니고 백록동서원이오. 어떻게 백록동서원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오. 원생을 선발할 때 아무나 뽑아 들이는 것이오?”
그제야 홍낙성이 아차 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정조가 다시 말했다.
“조정에서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학문의 도량이라는 서원의 폐해로 백성들이 입는 고통은 경들은 알고 있소? 장계에 보니 해서가 흉년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이런 일을 서원에서 벌일 수 있는 것인가.”
정조의 질책에 대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자신들이 서원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고, 서원의 폐해가 어떠한지는 정조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서원 문제를 파고 들다보면 자신들의 치부까지도 들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탕! 탕!
정조가 다시 서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아니! 경들은 뭐하는 것이오. 무슨 말들이 있어야 하지 않소.”
그래도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자신들이 불리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신들의 행태였다.
정조는 그런 대신들을 바라보며 화가 나다 못해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의 이익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면서도 이렇게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모두 꼬리를 내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 대신들을 보고 정조가 일갈했다.
“모두 물러가라.”
대신들이 일어나 우르르 나가자 갑자기 휑한 편전을 보고는 정조는 갑자기 혼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홍대협의 장계는 세 차례나 조정에 올라왔다.
물론 황해도 지방의 흉년과 구휼에 관한 장계였지만 그 말미에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서원의 폐해에 대해 계속 적고 있었다.
며칠간 조정은 뒤숭숭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1793. 10. 1. 창덕궁 선정전.
드디어 편전에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윤대(輪對, 조선 시대 각사의 낭관들이 돌아가며 왕에게 정치에 관한 문제를 고하는 일)를 하던 예조정랑 이복휴(李福休)가 뜨거운 감자와 같았던 서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복휴가 정조에게 고했다.
“서원(書院)은 학문을 장려하는 곳인데도 요즈음에는 선비들이 학문을 갈고 닦는 효과는 전혀 없고 한갓 잡인(雜人)들이 먹고 마시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복휴는 한마디로 서원 문제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이복휴가 다시 말했다.
“지금 서원에 의탁하여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자가 매 서원마다 거의 1백 명이나 되고 있으니, 지방 고을에서 군정의 수를 채우기 어려운 점도 여기에 연유하지 않는다 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서원을 설치한 목적이 어진 이를 높이기 위한 것이므로 이를 하루아침에 철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정조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조가 가만히 있자 이복휴가 계속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각 고을의 따로 설립한 서원을 모아서 향교에 함께 제향하고 향교의 수복(守僕, 향교에 딸린 지금의 관리인)을 시켜 지키도록 하는 동시에, 서원에 딸린 전토(田土)는 향교에 귀속시키고 노비는 본 고을에 소속시키며, 원생(院生)은 각기 군역에 돌아오게 한다면 지금 같은 서원의 폐해도 사라지고 각 읍의 군보(軍保, 군포)를 채우기 어려운 걱정도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이복휴가 말을 마치자 정조가 말했다.
“그래, 그대의 말이 지극히 합당하다.”
그러면서 정조는 이복휴가 제기한 문제를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이복휴의 진언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서원을 없애고 향교를 활성화하자는 말은 지금의 교육 체계를 사교육에서 공교육으로 완전 전환하자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조의 하교는 지켜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실무적인 문제로 향교에서 원생을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서원은 그 자리가 명예직이고 자신들의 사당(私黨)을 후원하는 일이었기에 원생을 가르치는 자리에는 사람들이 나서서 자원을 했지만 공교육인 향교는 그러지 못했다.
정조는 이러한 일을 보고를 받고도 이전과 달리 더 이상 대신들을 추궁하지 않았다.
단 전 조선의 서원을 실상을 파악하도록 각지의 지방관에게 하교를 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장준하와 협의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정조가 서원 문제를 건드리려고 하는 것을 설득해 내년 이후로 미루도록 했기 때문이다.
곧 폭발할 것 같았던 서원 문제가 미봉을 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대신들은 이러한 정조의 서원 문제 처리에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각 정파끼리 삼삼오오 모여 영조 시대 300곳이 넘는 서원을 정비할 때와 같은 수준이 될 것이라는 등,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대대적으로 정비를 할 것이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대책 논의를 하던 중 정조가 슬그머니 서원의 현황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것으로 말을 바꾸자 의문을 갖은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이것이 대신들을 더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나서서 서원을 정비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에 앉고 있는 것 같은 기분들이었다.
1793. 10. 8. 창덕궁 선정전.
이날 편전에 또 다른 하나의 일이 생겼다.
병조참판 임제원(林濟遠)의 상소로 불편한 조선 군복의 복식 개정에 관한 상소였다.
정조는 임제원의 상소에 즉각 이유가 있음을 표시하고 이를 의정부에서 논의하도록 하였다.
본래의 역사에서는 대신들은 융복을 폐지하고 군복을 착용하자는 쪽으로 진언을 했지만 정조가 융복을 그대로 두도록 하면서 100년의 역사를 더 가진다.
장준하는 대궐에서 군복 문제가 나왔다는 것을 두고 최성용과 관련자들을 집무실로 불렀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장준하가 말했다.
“지금 한성에서 군복의 복식 문제를 놓고 논의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안이 있으면 말해보기 바랍니다.”
최성용이 먼저 말을 했다.
“합하께서 회의를 소집하신 것을 보니 이번 기회에 정조를 설득해 복식을 개정하시려고 하십니까?”
“그러네, 조선의 군복은 그 화려함이 지나쳐 전시에는 표적이 되고 특히 소매가 넓어 아주 불편하다고 들었네. 나는 이번기회에 복식을 전면 개정했으면 하네.”
이형구 합창의장이 말했다.
“아예 이참에 현대식 복제로 바꾸는 것이 어떻습니까?”
“현대식 복제로?”
“그렇습니다. 몇 년 있으면 대대적인 군사 작전이 실시되어야 하는데 그때는 최소한 우리와 같은 군복은 착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성용이 대답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당장은 지금 우리가 입은 제복을 만들 방직 기술이 없습니다.”
“아, 그래 아직은 기술이 부족하지?”
“예, 그렇습니다.”
장준하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말을 했다.
“내 생각에는 대한제국의 군복을 전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권오인이 말했다.
“당시 대한제국 군복은 러시아 군복을 모방하여 만들어서 독창성이 부족합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저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그 옷을 만든다고 해도 우리가 처음 만든 옷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형구가 말했다.
“맞습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군복도 미군의 군복을 모방한 것이니 순수 우리의 군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권오인이 말했다.
“내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 정조와 협의하여 새로운 군복을 제정하려면 조선의 복식을 첨가하는 방법이 없겠는가 하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조선의 군복은 전투용 군복으로는 아주 불편합니다. 혹 예복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조선의 복식을 새로운 군복에 첨가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권오인이 장준하에게 물었다.
“그렇게나 조선의 군복이 불편합니까?”
이번에는 우종철 합참부의장이 말했다.
“제가 알기로도 효종대왕 때 군복 제정에 관한 아주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권오인이 물었다.
“그럼 그때 왜 바뀌지 않았습니까.”
우종철이 대답했다.
“융복이 명나라 복제(服制)를 빌려온 것이라는 간관(諫官)들의 상소가 이어져 융복을 폐지도 못하고 소매를 좁게 하자는 것조차도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예, 이번에는 아마도 정조가 융복을 폐지하지 않고 유지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최성용이 장준하에게 물었다.
“합하, 복식 개정이 급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네, 이번 기회에 복식을 제정하면 여러모로 보아 좋네. 안 되면 장용외영과 용호영만이라도 정조에게 건의하여 개정을 했으면 하네.”
장준하가 이렇게 말을 하자 복식 개정을 하는데 어떤 식으로 하느냐로 방향이 정해졌다.
몇 시간의 논의 끝에 이 복식 문제는 장준하의 의도대로 결정되었다.
장준하가 논의를 마치자 정조에게 연락을 했다.
“전하, 장준하입니다.”
“그래요, 위국공.”
“이번에 조정에서 군복의 개정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안 그래도 병참(兵參)이 상소가 있어 묘당에서 논의 중에 있소이다.”
“그 문제 때문에 상의를 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오! 그래요.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말해보시오.”
“모레 전하께서 북한산성에 거둥하실 수 있으신지요”
정조는 복식 문제를 갖고 통신으로 논의만 해도 될 일을 직접보자고 하는 장준하가 의아했으나 두 말하지 않고 승낙했다.
“그렇게 하시오. 내 모레 북한산성에 오르리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약속을 정하고 통신을 마쳤다.
장준하는 긴급히 시내에 있는 양복점의 사장과 의상실의 사장을 불러 들여 사진을 주면서 몇 벌의 옷을 만들어 달라고 특별 부탁을 했다.
1793. 10. 10. 북한산성 행궁.
정조를 만나기 위해 북한산성에 도착한 장준하는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을 보고 감탄했다.
장준하가 북한산성에 주둔해 있는 박승호 소령을 보고 말했다.
“장관이군. 이전 시대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박승호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대기 오염이 전혀 없어서 그런지 단풍이 참으로 색이 곱습니다. 이곳에 오고 나서 해마다 보는 북한산 단풍이지만 아주 아름답습니다.”
장준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는 좋겠군. 북한산에 있으면서 이 좋은 단풍 구경과 서울을 내려다보며 살고 있으니 말이야.”
그 말에 박승호가 말했다.
“저도 이종찬 중령처럼 사백력의 거친 벌판을 달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최성용이 말했다.
“박승호 소령과 이종찬 중령은 동기생입니다.”
그러자 장준하가 박승호를 보며 말했다.
“그래?”
박승호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박승호는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장준하에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풀이 죽은 목소리를 하였다. 장준하가 그런 박승호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위로했다.
“자네가 이곳에 근무하는 것이 다른 어느 곳보다 중요한 임무를 하고 있는 것이네. 조금 있으면 그동안의 노고가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니 힘들어도 잘 견뎌내게.”
박승호가 그 말에 차렷 자세를 하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열심히 복무하겠습니다.”
그런 박승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이보게, 최 제독.”
“예, 합하.”
“정조가 우리 제안을 잘 받아들여야 할 것인데 걱정이군.”
“군대의 제복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특히 지금 시대의 복식은 그 중요성이 더욱 크기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할 것입니다.”
장준하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전부가 안 되면 합하의 말씀대로 장용외영과 용호영의 복식만이라도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바뀐 군복이 지금의 군복보다 훨씬 효용성과 실용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겠지. 어쨌든 제복이라는 것이 실용성도 중요하지만 상징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니 말이야.”
세 사람이 행궁 위에 있는 남장대(南將臺)에 올라 북한산 일대를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정조가 대서문을 통과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세 사람은 보고를 받고 서둘러 남장대를 내려가 정조를 영접하였다.
장준하의 영접을 받은 정조가 행궁의 회의실로 들었다.
다른 때는 정조를 행궁의 대전으로 안내를 했으나 이날은 특별히 회의실로 안내를 한 것이다.
자리에 앉은 정조가 물었다.
“그래, 오늘 과인을 여기서 보자고 한 까닭이 무엇이오?”
장준하가 대답했다.
“지난날 신에게 말하신 군복 개정에 관한 문제를 진언 드리고자 모셨습니다.”
“그래요. 과인도 공이 그 문제로 여기로 부른 것이라 짐작했소. 그래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그 말에 장준하가 대답했다.
“우선 준비한 것부터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장준하의 말이 끝나자 최성용은 박승호 소령에게 바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바로 문이 열리더니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최성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서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앞에 두 명은 전하께서 잘 아시는 조선의 융복과 군복입니다. 그리고 이 복식은 우리 친위군이 입고 이 복장은 우리 가온 친위군이 입는 전투복과 정복입니다.”
최성용의 말에 정조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아주 큰 관심을 표명했다.
“가온군은 계급 상하 표시는 어떻게 하는 것이오?”
최성용이 어깨의 견장과 가슴에 붙인 계급장으로 보이며 말했다.
“저희들은 간부들의 경우 이렇게 어깨와 옷깃에 계급장을 붙이고 사병의 경우는 이렇게 붙입니다.”
최성용은 그러면서 준비한 책자를 보여주었다.
그 책자에는 이등병부터 원수의 계급이 그려져 있었다.
“호오, 모든 장졸들이 하나같이 계급이 있구려.”
“그렇습니다.”
정조는 세심하게 계급장을 바라보았다.
가온의 모든 군제를 일임하고 처음으로 일관된 계급을 본 것이다.
최성용이 잠시 시간을 두었다 말을 했다.
“전하, 그리고 여기를 잠시 보아주십시오. 들여보내게.”
박승호가 문을 열자 총 8명이 들어왔다.
“지금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정조는 앞에 서 있는 모델들을 바라보았다.
8명은 남녀 각각 4명씩이었다.
잠시 바라보니 그들은 일정한 형식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알아채고는 정조가 말했다.
“저들은 뭔가는 모르지만 일정한 형식이 있구려.”
최성용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들은 육군의 남녀 일반 사병들과 장교복장으로 이것이 예복이고 이것이 전투복입니다.”
전투복은 얼룩무늬로 되어 있었으며 예복은 대한제국 시절의 예복을 현대화하여 아주 화려하고 기품이 있게 만들어졌다.
정조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저 옷들은 어느 나라의 옷이오. 혹, 양이들의 옷이 아니오?”
최성용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번에 위국공께서 전하께서 군복 개정에 뜻이 있으신 것을 알고 특별히 새롭게 만든 제복입니다.”
그 말에 정조가 아주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렇소? 오! 위국공의 노고가 참으로 크시었소.”
장준하가 겸양의 말을 했다.
“아닙니다. 신은 초안만 잡았을 뿐이고 재봉사들과 의상 전문가들이 이틀 동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장준하가 말을 끝내자 최성용이 군복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이 군복은 바지의 통과 소매가 좁아 전투가 벌어졌을 때 활동성이 아주 용이하고 이 전투복은 산과 들과 배색을 잘 이루어 전투 시 매복이나 위장에 아주 좋습니다.”
정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성용의 설명을 들으며 장준하가 만든 군복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정조는 군복 색상이나 부착물들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복식이 호복(胡服, 만주족이 복식)같이 소매와 바짓단이 좁은 것이 영 마음에 꺼려졌다.
정조가 갈등하는 것을 보고는 장준하가 말했다.
“전하 복식을 바꾸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과인도 그것을 알기에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소.”
최성용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전하, 다음 복장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최성용의 말이 끝나자 아주 화려한 옷을 입은 두 명이 들어왔다.
최성용이 말했다.
“이 예복은 장군들이 입는 예복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품이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졌구려. 그런데 이 옆에 있는 이 화려한 예복은 누구의 것인가?”
정조가 보고 있는 예복은 정말 화려했다.
어깨 견장을 비롯해 모든 수실이 금실로 되어 있었고 가슴에는 십여 개의 훈장이 화려한 빛을 뽐내며 달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의 예복이었다. 정조는 그 옷을 보고는 감탄해 하는 표정이었다.
최성용이 말했다.
“이 예복은 주상 전하께서 입으실 예복의 시제품이옵니다.”
정조가 놀라면서 말했다.
“그런가?”
장준하가 말했다.
“지금이 복식은 시제품입니다. 앞으로 견장과 훈장을 더 세밀히 다듬으면 전하의 예복은 물론이고 모든 예복이 아주 기품 있고 화려할 것입니다.”
정조는 지금의 복장이 아주 마음에 들었으나 조선의 복식과 너무도 다른 모습에 한편으로는 이질감마저 느껴져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조의 망설임도 장준하가 건의한 말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전하, 우선 장용외영과 용호영의 복식만을 바꾸어 보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먼저 친위 병력이 착용을 하고 그 문제점을 수정하면서 연후 점차 확대해 간다면 조정의 다른 의견도 한결 줄어들 것입니다.”
정조가 말했다.
“그래, 공의 말이 옳소. 내 우리친위군에 먼저 적용을 해보리다. 분명 편리하고 좋기는 한데 아직 낮이 설고 파격적이라 망설였지만 그렇게 하면서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면 되겠소이다.”
최성용도 말했다.
“그리고 이번 장용영과 용호영의 군복은 저희 가온 무역에서 전량 외국에서 들여온 천으로 만들어 공급을 하겠습니다.”
정조가 그 말에 놀라서 물었다.
“그 많은 군복을 가온 무역에서?”
“예, 전하.”
“허허,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그렇게 정조는 먼저 장용영과 용호영에 새로운 복식을 적용하기로 결정하고 10명의 새로운 군복을 입은 장병들을 대동하고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대궐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었다.
비변사에서 군복의 개혁에 관한 논의를 아뢰었다.
결론은 융복은 폐지를 하고 군복으로 대체하며 소매가 너무 넓은 것을 좁게 하자는 것이었다.
정조는 편전에 원임과 시임 그리고 2품 이상의 대신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다.
대신들이 모두 모이자 정조는 어젯밤 대궐에서 보인 새로운 군복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은 지금의 복식 중 융복을 폐지하고 군복 중 문제가 되었던 소매를 짧게 줄이는 것으로 건의를 하였는데 정조가 아예 새로운 복식으로 만들어 온 것이다.
당연히 대신들이 술렁였다.
여기에 정조가 대신들의 술렁임을 무시하고 하교했다. 가장 먼저 장용영과 용호영에 지급을 하여 문제점을 수정할 것이고 그 비용 또한 가온 무역에서 전액 지급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친위군을 조정의 세금도 아닌 개인 금고와 다름없는 가온 무역에서 공급하겠다는 말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자신들이 봐도 비록 처음 봐서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정조가 선보인 복식은 군복은 입기에 아주 편하게 보이고 예복은 기품 있고 화려해 보이는 것이 자신들의 눈에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며칠간의 군복의 복식논의는 정조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끝이 났다.
정조의 밀어붙이기식 군복제정에 군무의 직접당사자들인 병조판서 정호인(鄭好仁), 장용대장 김지묵(金持默), 훈련도정(훈련도감 정삼품 당상) 조심태(趙心泰), 금위대장 이한풍(李漢豊)은 모두 정조가 선보인 복식을 장용영과 용호영군복으로 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대장 서유대는 물론 당연히 찬성이었다.
대신들은 대궐을 나서며 요즘 정국이 순간순간 격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정조가 선보인 옷이 평상복이라면 미풍양속을 해치는 호복이라며 생떼라도 쓸 수 있겠지만 전시에 필요한 군복을 비록 조선의 복식과는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주 간편하게 착용이 가능한 군복을 특히 정조가 직접 고른 것을 나서서 반대할 대신들은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대신들 또한 없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조선 전체가 들썩이는 일이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