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01)

자각(自覺)

1793. 5. 10. 북한산성 행궁.

정조가 북한산성을 찾았다. 장준하가 전날 정조와 통화를 하여 북한산성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했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방문은 다른 날과 같이 산성 아랫마을에서 점심을 먹고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용호영 군사들이 멘 연을 탄 방문이었다.

정조가 북한산성 대서문에 들어서자 최성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오! 그대는 최 공이 아니신가? 먼 길을 떠났었다는 것은 위국공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래 잘 다녀오셨는가?”

정조는 가온 사람들 중 유난히 마음에 들었던 최성용을 보고 자상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런 정조에게 최성용이 대답했다.

“전하의 염려 덕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위국공이 과인에게 오늘 북한산을 방문해 달라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는가?”

“예, 이번에 신이 출장을 다녀온 것을 보고드리기 위해서 그리 하신 것입니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그런가? 그래, 들어가 보세.”

“안내를 하겠습니다.”

최성용은 정조를 행궁에 마련된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정조를 위해 특별히 만든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는 상영관이었다.

정조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활동 그림을 보여줄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이번에 신이 출장을 다녀온 것을 영상 기록물 제작 부서에서 기록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전하께 보여드리고자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소? 기대가 되오.”

최성용은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안내를 했다.

“여기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최성용의 말에 정조가 자리에 앉자 곧 커튼이 드리워지고 불이 꺼졌다.

몇 차례 영상을 본 정조였지만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형 스크린을 주시했다.

이윽고 최성용이 다녀온 것을 편집한 영상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최성용도 설명을 위해 정조의 옆자리에 앉아 같이 관람을 하였다.

웅장한 배경 음악과 함께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영화는 2부로 나뉘어 총 3시간 동안 상영되었다.

최신 음향 시스템을 갖춘 상영관에서의 상영은 한마디로 대단했다.

정조에게 영상 기록물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중간의 쉬는 시간에도 정조는 그 충격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3시간 동안이 상영을 마치고 닫혔던 커튼이 젖혀졌어도 정조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최성용도 완성된 영상 기록물을 보자 청진에서 볼 때와는 달리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최성용도 이런 정도였는데 정조의 감동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정조가 입을 열었다.

“최 공.”

“예, 전하.”

“과인이 본 것이 정녕 사실이오?”

“그렇사옵니다. 신도 영화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정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과인은 믿어지지가 않소.”

최성용은 정조의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조가 다시 말을 했다.

“과인은 정녕 믿기지가 않소.”

“전하.”

최성용도 정조의 감동을 깨트리지 않기 위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정조가 독백같이 말했다.

“그동안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안 개구리)였는가?”

그 물음에도 최성용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조가 이번에는 독백을 했다.

“우리 조선은 그동안 과연 무엇을 해왔던가. 그리고 과인은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가.”

그러면서 정조는 한참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상선 김시묵, 용호영별장 신처선 등 정조를 호종한 모든 사람들도 상영된 기록물을 보고는 그 반응이 정조와 다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정조는 박지원과 같은 말을 했다.

“이보시오, 최 공.”

“예, 전하.”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겠소?”

최성용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상선 김시묵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전하, 한 시진 반(세 시간)의 상영 시간이면 날이 어두워지옵니다. 그리 되면 대궐로 돌아가시는 길이 심히 염려되옵니다. 후일 다시 보심이 어떠신지요.”

최성용도 그 말에 아차 하는 생각에 상선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전하, 그리하시지요. 후일 다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러자 정조가 고개를 흔들며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아니오. 여기 친위군도 있고 우리 용호영도 이제는 충분히 믿을 만하오. 귀궐(歸闕)은 걱정이 없으니 지금 바로 다시 시작해 주시오.”

그렇게 말하는 정조를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러자 상선이 다시 나서며 말했다.

“전하, 그러시면 저녁 수라는 젓수시고 보시옵소서.”

정조는 그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과인은 시장하지 않소.”

정조의 그 말에 다시 영상물이 상영되었다.

최성용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옆에 앉아 영상물을 같이 보았다.

최성용도 정조와 같이 다시 영상물을 보았지만 그 감동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두 번째 상영을 볼 때도 정조는 아무런 말도 없이 화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최성용은 그러한 정조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조는 화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모든 상영이 끝이 났다.

“후…….”

정조는 무슨 의미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정조가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책에서 보는 것과 이 활동 그림으로 보는 것은 천지 차이구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과인이 오늘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소.”

최성용이 정조의 말에 대답했다.

“이번 출장을 다녀온 목적도, 현지를 돌아보자는 것도 있었지만 이 기록물을 제작하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정조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인이 이렇게 느낄 정도라면 조선의 그 누가 경악하지 않겠는가.”

용호영별장 신처선이 말했다.

“신이 보기에도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신과 같은 무장의 손에 땀이 베일 정도로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 조선의 백성들과 가온의 힘이 저 정도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과인이 할 말을 경이 대신하는구려. 참으로 오늘 새롭게 개안을 한 것 같은 날이오.”

최성용이 인사했다.

“감사하옵니다.”

그러자 정조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시오. 감사는 오히려 과인이 공에게 해야 하는 것을. 오늘 고마웠소, 과인을 자각하게 해주어서.”

최성용은 정조가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최성용은 정조가 이렇게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 기록물을 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성공하였다는 의미도 되었지만 조선을 개혁하는 데 꼭 피를 보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조가 대궐로 돌아가는 길은 밤이 제법 늦었다.

최성용은 박승호 소령에게 부탁해서 정조의 귀궐에 용호영과 같이 한성의 성곽 앞까지 경호를 같이하게 했다.

최성용은 정조를 배웅하고는 바로 돌아와 장준하에게 연락을 했다.

“합하, 최성용입니다.”

“그래, 최 제독. 정조는 다녀갔는가?”

“예, 두 번에 걸쳐 보고 가셨습니다.”

“음, 그래?”

최성용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영상 기록물이 상당한 충격이었나 봅니다. 정조가 몇 년 전 처음 가온에 왔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그래, 그럴 걸세. 나도 기록물을 보고는 이 나이에도 흥분이 되던데 정조는 오죽했겠나.”

그러자 최성용은 장준하에게 정조의 반응을 상세히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장준하가 말했다.

“그 정도였나?”

최성용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들 정도였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하나는 성공한 셈이군.”

“그렇습니다.”

질문을 마친 장준하가 물었다.

“알겠네. 오늘 돌아올 건가?”

“아닙니다. 온 김에 여의도 제방 준공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오? 여의도 공사가 막바지지?”

최성용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음 달 중순으로 들었습니다. 본토에 들어온 김에 저는 여의도 공사 준공식을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청진에서 첫선을 보이고 그동안 편집을 마쳐 정조에게 상영을 한 영상 기록물은 이때를 기점으로 각지에 있는 개척지는 물론이고 제주도와 연해주 주민 교육 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나 가온 사관 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있는 이현호 수사를 비롯한 조선 출신 무관들의 반응은 뜨겁다 못해 격렬했다.

특히 훈련을 받는 것을 주도했었던 이현호는 그 충격의 강도가 남들보다 훨씬 더했다.

이현호는 영상 기록물을 보면서 반드시 고토를 회복할 때 선봉에 서리라고 굳게 다짐한다.

이러한 이현호의 다짐은 뒷날 만주로 진군을 할 때 가장 선봉에서는 영광을 갖게 된다.

가온에서도 이들 20여 명의 무관들을 충실히 훈련시켜 고급 간부로 육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대궐로 돌아간 정조가 먼저 다음 날 장준하에게 연락을 하였다.

1797. 5. 11. 위국공 집무실.

“위국공, 잘 지냈소?”

정조의 인사에 장준하가 대답했다.

“평안하셨습니까? 전하.”

“과인은 여전하오이다.”

“어제 북한산성에는 다녀가셨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소. 과인이 어제 북한산성을 찾았소.”

장준하가 정조에게 물었다.

“보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참으로 대단하더이다. 과인은 활동 그림을 보고 숨이 다 멎을 뻔했소.”

장준하가 정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한 듯 먼저 말을 했다.

“저도 그 영상 기록물을 보고 나서 가온의 친위군은 물론이지만 조선의 백성들 또한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조도 동의의 말을 했다.

“그렇소. 어제 비로소 과인이 정저지와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소이다.”

“그렇습니까?”

정조가 다시 말했다.

“그렇소이다. 이 좁은 조선에서 아옹다옹거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밤새 과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소이다.”

장준하는 정조가 어제 영상물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그 말 한마디에 바로 알아버렸다.

“맞습니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옳으신 생각입니다. 더 크고, 더 먼 곳을 봐야 합니다.”

정조가 본론을 말했다.

“아무래도 공이 말한 10년의 기간을 기다리자는 것을 조금은 앞당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오이다. 금년부터 함경도 일대부터 개혁을 시작하면 굳이 10년을 채울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좋을 듯하오.”

장준하가 그런 정조에게 말했다.

“그러시면 좋은 복안이라도 계시는지요.”

정조가 대답했다.

“과인의 생각에는 금년 한해 준비를 해서 내년에 시작을 하면 어떻겠소?”

장준하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내년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소.”

“하지만 전하, 그것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옵니다.”

정조가 말했다.

“그대들이 이룩한 이 몇 년의 과업은 우리 조선이 수백 년을 두고도 하지 못할 일이고 청국조차도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오. 이러한 대단한 일을 한 그대들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오.”

장준하는 정조가 이렇게까지 생각을 급진전할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장준하는 생각지도 못한 정조의 결심에 잠시 당황했다.

“전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과인의 결심을 공은 잘 헤아려주기 바라오.”

장준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일정이 괜찮으시면 신이 일단 내일 북한산으로 올라가겠습니다. 먼저 직접 만나뵙고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 말에 정조가 승낙을 했다.

“그러시오. 과인이 내일 북한산성으로 찾아가리다.”

장준하는 그렇게 정조와 통신을 마치고 급히 비상을 걸어 전체 주요 지휘관 회의가 장준하의 집무실 옆 회의실에 열리게 되었다.

급하게 연락을 했지만 그들이 모두 모인 것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최성용만이 북한산성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참석자들은 민간인으로 권오인 회장을 비롯해 김석태 지사를 비롯한 시장들, 군에서는 이형구 대장을 비롯한 군 주요 지휘관들과 신경식 국정원장도 참석을 하기로 했다.

이성호 신임 비서실장이 장준하를 보좌하며 열리는 첫 전체 회의였다.

이성호가 집무실로 들어가 장준하에게 보고했다.

“합하, 모든 분들이 모이셨습니다.”

“그런가? 권 선생님, 가시죠.”

권오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럽시다.”

장준하의 집무실에는 가장 먼저 온 권오인이 장준하와 한담(閑談)을 나누며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준하와 권오인이 회의실로 들어서자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일어서 있었다.

장준하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모두 자리에 앉읍시다.”

참석자들이 자리에 앉자 장준하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정조가 북한산성에서 이번에 최성용 제독이 출장하면서 만들어온 영상 기록물을 보았습니다. 상당한 충격과 함께 그 자신이 새롭게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나 봅니다.”

이형구 대장이 말했다.

“그 정도 기록물이면 정조의 충격 또한 대단할 것입니다. 저도 그것을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을 정도입니다. 우리 가온군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이현호 수사와 조선의 무관들도 이 기록물을 보고 난 후 훈련에 임하는 태도가 엄청나게 진지해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김석태 지사도 말을 했다.

“민간인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 제주도는 물론 연해주 주민 훈련소에서도 이 영상물을 시청하고 나서는 주민들이 교육을 받는 자세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주 각지에 있는 주민들의 반응 또한 대단하였고, 특히 가온 시민들도 이번 기록물을 보고는 자부심 또한 대단히 높아졌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국정원장 신경식의 보고도 이어졌다.

“각지에 있는 개척지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곳 주민들의 호응이 이곳보다 더 열정적이라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을 위한 영상 기록물은 최성용의 귀환과 동시에 가장 먼저 만들어져 각지의 개척지로 보내졌었다.

그들의 보고를 들으며 장준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했다.

“예상보다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권오인도 이에 동참하며 말했다.

“한민족이라면 그것으로 보고 피가 끓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장준하가 권오인 회장의 말을 끝으로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시게 된 것은 정조의 제안이 있어서입니다.”

그러자 모두 의아한 눈으로 장준하를 바라봤다.

이형구가 모두를 대표하여 물었다.

“정조가 제안을 하다니, 무엇을 말입니까?”

“정조가 10년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년에 바로 개혁을 실시하자고 하네.”

“예?”

질문을 한 이형구도 놀랐지만 참석자들 모두 다 놀란 얼굴이었다.

침착하고 입이 무거운 우종철 장군도 이번에는 참지를 못하고 말했다.

“내년이면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아직 이곳은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자 성격이 급한 이형구 대장이 말했다.

“준비는 지금부터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저는 정조의 말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중한 성격의 김석태가 말했다.

“내년 초면 모르지만 내년 하반기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정도의 기간이면 주민들을 교육시킬 교사들을 어느 정도 정예화할 수 있습니다.”

장준하가 권오인을 보고 물었다.

“권 회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권오인이 말했다.

“나는 모든 문제는 접어두고 정조의 용기 있는 결단에 감사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권오인의 말이 있자 참석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해 주었다.

권오인이 그것을 돌아보고는 말을 다시 했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나는 무조건 정조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준비를 하고 시간을 갖는 것은 반발 세력으로 인해 피를 볼 것을 우려해서가 아닙니까. 정조가 우리를 먼저 요청했습니다. 무조건 내년에 실시해야 합니다.”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고 모두들 스승으로 생각하는 권오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쩌렁거리며 울리자 상황은 한쪽으로 바로 몰아졌다.

장준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내일 내가 정조를 북한산성에서 만나 그의 의중을 확실히 알아보겠습니다.”

권오인이 다시 말했다.

“내일 정조를 만나 의중을 확인하거든 반드시 그에게 밀지를 받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그와 우리의 입장을 확실히 할 것입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권오인이 말했다.

“무슨 일이든 만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정조가 우리 편을 들어 개혁을 하겠다고 나서지만 만일 상황이 급변하면 발을 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양이 아주 좋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개혁을 시행하라는 의지가 담긴 밀지를 미리 받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자 이형구 대장이 말했다.

“만일 밀지를 받아놓아도 정조가 마음이 바뀐다고 해도 그대로 밀어붙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권오인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아무리 정조가 개혁가이기는 해도 그것은 유학자의 입장에서의 개혁입니다. 유교(儒敎)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명분입니다. 정조는 지금까지는 우리 쪽이라고 분류를 해도 무방하나 앞으로는 조선 안에서 그와 머리를 맞대고 개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에 정당성과 명분을 갖기 위해라도 밀지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자 장준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준하가 권오인의 지적에 대답을 하자 여러 가지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장준하는 그 말들을 모두 듣고는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일단 여러분들의 중지가 정조의 말에 따르자는 쪽으로 모이는 것 같습니다. 개별적인 사안들은 내일 내가 정조를 만나고 난 후 그의 본래 의도를 파악하고 나서 다시 회의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형구 합참 의장이 말했다.

“기대가 됩니다.”

우종철 합참 부의장도 말했다.

“정조가 어떤 사람입니까. 절대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회의를 하는 동안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장준하가 시간을 보고는 말했다.

“자, 벌써 자정이 넘었습니다. 일단 회의는 여기서 끝을 내고 내일 내가 북한산을 다녀온 후 다시 일정을 잡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자 참석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장준하는 그들을 돌려보내고 퇴근을 하지 않고 바로 북한산성 행궁에 있는 최성용을 불렀다.

“합하, 밤늦은 시간 무슨 일입니까?”

“정조가 큰 결단을 했네.”

“예? 결단이라니요?”

장준하는 간략하게 정조의 결단과 회의 결과를 설명했다. 최성용의 반응은 간단했다.

“역시 어제 영상 기록물을 보고 자각을 한 것이 맞습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자네는 다른 의견은 없는가?”

최성용은 권오인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에게 이제는 명분만 있으면 됩니다. 본래 목표보다 몇 년 앞당겨지면 준비하는 데 약간의 힘은 들지 몰라도 정조가 완전히 개혁의 편에 섰습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최성용의 말에 장준하는 권오인에게 묻지 못한 말을 물었다.

“우리의 개혁에 정조가 그렇게 대단한가? 우리는 정조 사후를 보고 준비를 해오지 않았나?”

“제가 보기는 이렇습니다.”

그러면서 최성용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금 조선의 상황은 개혁을 하도록 여건이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작년부터 시행된 관보 게시판으로 인해 정부의 정책이 속속들이 백성들에게 알려지고 있고, 신문도 이제는 완전히 정착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어리석은 아전들의 반란으로 우리가 아주 손쉽게 지방 조직도 정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지도군 일로 청국의 실권자인 화신이 조선의 일에 간섭하기를 아주 꺼려할 것이고, 내년에는 백련교도가 드디어 난을 일으킵니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여건이 완전히 무르익겠지만 내년이라도 충분합니다.”

최성용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다시 시작했다.

“이러한 때 정조의 의지가 완전히 개혁으로 기울어졌다면 이는 상황 종료입니다. 우리가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조 스스로가 나선 일입니다. 지금 시기는 오히려 금상첨화입니다.”

최성용의 긴 설명이 끝났다. 장준하가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네. 일단은 내일 아무 일정도 잡지 말게.”

“알겠습니다.”

장준하는 그렇게 연락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갔다.

본부 건물에서 내려다보이는 화순항은 자정이 넘어 한 시가 되어가는 시간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장준하가 이성호 실장에게 말했다.

“이 실장.”

“예, 합하.”

“저 항구를 보게. 오늘 보니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렇습니다.”

이성호는 장준하의 말에 화순방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화순 항구를 바라보며 장준하가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일을 하기는 꽤 많이 했는가 보네. 평생을 성리학에 파묻혀 산 정조가 자각을 할 정도니 말일세.”

이성호가 최성용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아직 최성용과는 달리 장준하를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정조가 확실한 개혁 의지가 있다면 의외로 조선의 개혁은 피를 흘리지 않고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겠습니다.”

장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지금 훈련 대장은 누구인가?”

이성호 실장이 바로 대답했다.

“서유대(西有大)라고 하는 무장입니다. 정조의 총신입니다.”

“서 씨라고 하면 골수 노론 아닌가?”

“그래도 인물이 충직하고 덕장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입니다. 정조가 특히 총애하여 지금 조선의 군사 행정에 상당한 입김을 행사할 정도입니다.”

“흠, 그래?”

“다른 무관들보다는 그래도 지금의 훈련대장은 정조의 총신으로 정조가 지시한다면 우리의 일에 동참할 가능성이 가장 큰 무장입니다.”

“알겠네. 조선의 대신들도 앞으로 빨리 자각을 하면 얼마나 좋겠나.”

장준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의 시선은 화순항의 불야성을 이루며 밤을 잊은 불빛에 가 있었다.

1793. 5. 12. 북한산성 행궁.

정조는 이날 다른 날과 같이 늘 그 시간에 북한산을 찾았고, 또 늘 하던 대로 용호영이 멘 연을 타고 대서문에 다다랐다.

이날은 최성용과 함께 새벽에 올라온 장준하가 정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준하가 연에서 내린 정조를 보고 인사했다.

“전하, 오랜만에 용안을 뵈옵니다.”

정조도 장준하를 아주 반갑게 맞았다.

“그래, 과인도 위국공을 상면(相面)하니 반갑기 그지없소. 늘 통화만 하다 이게 얼마 만이오?”

“몇 개월이 지난 것 같습니다.”

“허허, 벌써 그렇게 되었나.”

두 사람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걸어서 행궁으로 갔다.

이 북한산성의 행궁에는 비록 좌식(坐式)이기는 하지만 정조의 집무실인 대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최성용이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집무실로 정조를 안내했다.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정조가 말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그러자 장준하와 최성용이 정조 앞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장준하가 바로 정조에게 말했다.

“전하, 어제 하신 말씀을 듣고 참으로 당황했습니다.”

그 말에 정조가 말했다.

“뜻밖이라서 그럴 것이오. 하지만 과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장준하가 물었다.

“자칫 잘못하다 보면 많은 피를 흘릴 수도 있습니다. 조금 시간을 더 두고 시기가 무르익기를 바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정조가 그 말에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사실 과인이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생각을 해봐도 결론은 한 가지요. 내년이면 충분하오.”

옆에 있던 최성용이 말했다.

“자칫 무리를 하다 보면 걸림돌이 상당히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정조가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과인이오.”

최성용이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예?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 전하시라니요?”

정조가 대답했다.

“그렇소. 과인이 이틀 밤을 새우며 내린 결론이 바로 과인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거요.”

장준하와 최성용은 정조의 말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말하는 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장준하가 말했다.

“민망하신 말씀, 듣기 어렵습니다.”

정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분명 과인이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오.”

정조가 단정을 하는 듯 말을 하자 장준하와 최성용은 정조의 말을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 대략 난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정조가 말했다.

“과인은 소싯적 천재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소. 그 이유로 할바마마의 총애가 도를 넘었고, 과인도 그 총애를 따르고자 죽을힘을 다해 학문을 익혀왔었소. 물론 아바마마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흔들리기는 했지만 지금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있고 과인 스스로 군사(君師)라 자임하고 있소.”

정조가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밝히자 두 사람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정조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학문에 전념하며 일생을 살다 보니 과인 스스로 개혁 군주라 자임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과인의 잣대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아주 편협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오. 과인은 지난 활동 그림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소. 과연 과인의 잣대로 세상을 바꾸었을 때 백성들이 그 활동 그림 속에서처럼 거리낌 없이 아주 마음껏 웃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이오.”

정조는 그러면서 장준하와 최성용을 바라보았다.

장준하는 지금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되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는 정조가 다시 말했다.

“돌이켜보면 그대들을 만나기 전까지 과인은 등극한 후에도 단 하루도 마음 편했던 날이 없었소. 이틀간 과인은 많은 생각을 했소. 그리고 드디어 결심을 한 것이오. 개혁을 과인의 눈이 아닌 백성의 눈으로 개혁을 하자고 말이오.”

“전하.”

장준하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자 정조가 손을 들어 제지를 하면서 다시 말을 했다.

“사실 오늘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처음 그대들을 만나서 10년 계획을 세우고 개혁을 준비할 때도 처음과는 달리 과인의 마음은 솔직히 과연 이것이 맞는 길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몇 번은 있었소. 너무나 갑자기 과인의 앞에 나타난 그대들을 믿는 마음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대들에 대한 의구심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을 하지 못하겠소. 다만 아바마마께서 현신하시어 그대들에 대해 말씀해 주셨고, 그 후 일련의 일이 조선을 위하는 것이 명백하여 그냥 덮었던 것이오.”

장준하는 정조의 고심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장준하가 정조를 보고 말했다.

“전하, 그런 성려가 계셨다면 미리 말씀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정조가 대답했다.

“아니오, 그때 당시 당파에 찌든 조정을 뒤엎을 수만 있었다면 과인은 위국공이 이끄는 친위군이 아니라 악마와도 손을 잡았을 것이오.”

장준하가 그런 정조를 보고 말을 하려 했다.

“전하.”

장준하가 다시 말을 하려 하자 정조가 손을 들어 다시 제지를 하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오. 과인은 이제 완전히 깨닫게 되었소. 백성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고,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대들이라는 것을.”

그러면서 정조는 탁자를 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준하와 최성용이 앞으로 다가갔다.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삼각형의 형태로 앉게 되었다. 정조가 자리에 앉아 잠시 두 사람을 보고는 말했다.

“이전에 과인이 그대들에게 무릎을 꿇은 일이 있었소. 그때 과인은 많이 절박했었소. 그러던 차에 때마침 그대들의 무력을 보고 도와달라고 했던 것이오. 하지만 오늘은 아니오.”

그러면서 정조는 두 사람을 다시 한 번씩 쳐다봤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양손으로 두 사람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

“이제는 함께합시다. 내 조선을 천하제일의 대국으로 만들고,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만 있다면 내 이 왕의 자리도 내놓으리다.”

두 사람은 정조의 청천벽력 같은 엄청난 말에 동시에 소리쳤다.

“전하.”

“전하.”

정조가 다시 말했다.

“해봅시다. 이제는 과인부터 바뀌겠소. 지금까지 배운 학문이 한낱 쓸모없는 종잇장이 되어도 좋소. 과인의 자리가 부담스럽다면 그 자리 또한 내놓으리다. 우리 진정 우리 민족을 위해 함께해 봅시다. 내 우리 민족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반드시 참아내겠소.”

장준하와 최성용은 정조가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말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장준하는 정조가 지금까지 일국의 군주로만 보던 것과는 달리 너무도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잠시 그런 정조를 바라보던 장준하가 말했다.

“전하, 신들을 믿어주셔서 정녕 고맙사옵니다.”

정조가 말했다.

“아니오, 공들이 있어서 과인이 오히려 고맙소.”

장준하가 다시 말했다.

“전하의 옥좌(玉座)에 도전하는 어떠한 것도 신이 막아드리겠습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조가 다시 말했다.

“아니오.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면 과인을 생각지 말아주시오.”

장준하가 정조를 보고 다시 말했다.

“아닙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하의 자리는 신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드리겠사옵니다. 그러니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정조가 그 말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고맙소. 하지만 과인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것 또한 알아주시오.”

장준하가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우선 좌정을 하십시오.”

정조가 대답했다.

“알겠소.”

정조가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자 최성용이 치워진 탁자를 앞으로 당겨놓았다.

정조가 좌정을 하는 것을 보고 장준하가 말했다.

“전하의 하교대로 내년에 시작을 하겠습니다.”

그 말에 정조가 반색을 했다.

“오! 그렇소? 그런 결정을 해주어서 고맙소.”

장준하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전하께서 결단을 내려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전하께서 내년 중 개혁을 시작하자는 말씀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지금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저희들 생각에서는 전하께서 지금과 같이 해도 충분하니 천천히 변화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정조가 그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렇소.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과인은 이렇게만 변화해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이 확 변화되리라고 생각했소. 그렇게 되면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기득권을 가진 권신들이 서서히 자리에서 물러나면 원하는 바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었소.”

최성용이 옆에서 말했다.

“이번 영상 기록물을 감상하시면서 결단을 내리신 듯합니다.”

정조가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그렇소. 이번에 과인은 최 공이 출장을 다녀오면서 제작한 영상 기록물은 보고서 참으로 과인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오. 개혁을 하자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아직도 편안한 자리에서 어느 정도 눈감아주면서 갈 생각을 했었다는 생각에 스스로 많이 자책했소. 이번의 활동 그림 시청은 과인에게는 결단을 내리고 자각을 하게 되는 커다란 전기가 되었소. 참으로 뜻 깊은 활동 그림 시청이었소.”

최성용이 말했다.

“그러시다면 다행한 일입니다.”

정조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시오. 밖에 상선 있는가?”

정조의 말에 상선 강진구가 대답했다.

“예, 전하. 대령해 있사옵니다.”

“지필묵이 있으면 가져오라.”

“예, 전하.”

잠시 후 상선 강진구가 지필묵을 가져왔다.

정조의 앞에 있는 탁자에 지필묵이 놓이자 상선이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이 갈리는 잠시 동안 정조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먹이 다 갈리자 정조는 상선을 나가는 것을 보고는 장준하를 보고 말했다.

“오늘의 일을 내 확인시켜 주겠소. 더불어 개혁에 동참을 할 조선의 인재들이 있다면 이 교지를 이용해서라도 끌어들이기 바라오.”

정조는 그러면서 붓을 들고는 한글과 한문으로 각각 친필 문서를 작성하고는 날인도 하였다.

정조가 붓을 놓으며 두 장의 문서를 장준하에게 주며 말했다.

“자, 여기 있소. 친위군이 개혁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과인의 윤허를 받아서 행동하는 것이고, 또한 과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글이오.”

장준하가 두 손을 그것을 받고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남은 시간 열심히 훈련을 시켜 개혁이 시작될 때는 최고의 정병으로 만들 일만 남았습니다.”

최성용도 장준하의 말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정조가 말했다.

“영상 기록물을 보니 북미 지역의 개척지를 부여주와 고구려주로 이름을 지었다고 들었소.”

최성용이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정조가 말했다.

“그렇다면 기록물에 나온 호주는 가야주(伽倻州)로 그 밖에 섬 지역은 사국 시대 당시 해상 왕국이었던 백제의 이름을 따서 백제주(百濟州)로 하면 어떻겠소?”

장준하도 그 말에 이의가 없었다. 그렇지만 정조가 말한 사국 시대라는 말에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사국 시대라니요?”

정조가 대답했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이렇게 사국(四國) 아니오?”

장준하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면서 장준하와 최성용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삼국 시대로 많이들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정조가 사국 시대라고 하였던 것 때문이다.

최성용이 물었다.

“거사는 내년 언제쯤이 좋겠습니까?”

정조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지는 추수가 끝난 직후가 좋을 듯하오.”

장준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9월경으로 대략적인 날을 잡고 정확한 시기는 추후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성용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 정도 시기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준비는 갖출 수 있겠습니다.”

장준하가 정조를 보고 말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장준하가 말했다.

“밖에서 준비를 하는 동안 국내에서는 분위기를 띄워주셨으면 합니다.”

정조가 물었다.

“분위기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조정이 약간은 혼란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정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혼란스러운 것이 좋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조정 권신들 사이에 정치적 논쟁거리를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장준하의 말에 정조가 관심을 지으며 물었다.

“정치적 논쟁을 만들게 되면 당쟁이 격화되지 않겠소?”

“전하께서 조정을 잘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장준하는 정조에게 몇 가지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정조가 말했다.

“알겠소. 일단 내 번암을 만나 그렇게 해보리다.”

이날 정조와 장준하, 그리고 최성용은 밤이 되도록 머리를 맞대고 앞일에 대한 논의를 했다.

밤이 이슥할 무렵 정조는 북한산을 내려갔다.

장준하와 최성용은 대서문까지 정조를 배웅했으며 돌아가는 정조의 뒷모습은 협의를 잘 끝냈다는 느낌 때문인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배웅을 마치고 행궁으로 올라온 두 사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장준하가 먼저 말을 했다.

“완전히 정조의 생각이 바뀐 듯하네.”

최성용도 장준하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저도 저렇게까지 정조가 적극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장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우리로서는 다행한 일이네. 그나저나 정조가 사국 시대라는 말을 하기에 많이 놀랐네.”

최성용도 동의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저도 정조가 그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 시대라는 개념은 역시 식민사관에 입각한 개념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그래, 앞으로 이렇게 혼란을 겪지 않도록 권 회장님께서 우리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정립해 주셨으면 좋겠네.”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 천손 민족이라는 확실한 주체성을 가지지 않겠나.”

최성용이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아우, 몇 시간 앉아 있었더니 등이 다 아픕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일 년 동안은 상당히 많이 바쁘겠습니다.”

장준하가 그런 최성용을 아들을 보는 것 같은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온 무역에서도 많은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준비를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내년에 봉기할 백련교가 잘해주어야 할 것인데, 준비는 차질 없나?”

“우리 측 교관들이 나가 있어서 훈련은 충실히 받을 것이니 역사와 같이 10년 만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준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청국의 병사들도 만주 지역의 병력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허수아비일 것인데. 그래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 자네는 앞으로의 일정은 일단 모두 보류를 하고 오늘 나하고 귀환을 하세.”

최성용이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장준하는 비서실장 이성호를 보고 말했다.

“우선 급한 것이 전체 회의이니 먼저 오늘 중으로 각지의 총독을 전부 불러들이게. 회의는 20일에 하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장준하의 지시는 바로 이행되어 이날 저녁 곧바로 각지의 개척지로 긴급 전문이 보내졌다.

이 당시 총독이 주재하는 각 개척지마다 정기 항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특히 북미의 경우 지리적 특성으로 아예 한 척의 비행선이 상주하고 있었다.

비행선은 그동안 증산되어 107 금강호까지 만들어져 실전에 투입되어 있었다.

장준하와 최성용은 이성호 실장이 전문을 보냈다는 보고를 받고는 바로 북한산을 출발하여 가온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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