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01)

출장―유구

1793. 1. 30. 10:00 가온 무역 본사.

최성용은 위국공(衛國公) 장준하에게 신고를 하고 있었다.

“합하(閤下),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게.”

최성용은 장준하에게 인사를 마치고 위국공의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을 나온 최성용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최성용은 시간 여행을 한 후 최초로 지도군을 비롯하여 각지에 있는 개척지를 돌아보기 위해서 출장을 가기로 했다.

가온 무역도 그동안 업무가 늘어나 본사에 이미 300여 명의 인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고, 회사도 가온 무역을 비롯하여 가온 식품, 가온 모피, 가온 조선, 가온 광업, 가온 중공업 등 10여 개 회사가 만들어져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최성용의 일정은 먼저 유구도를 시작하여 개척지 전역을 순차적으로 돌아본 뒤 사백력의 끝인 이종찬시까지 둘러보고 태평양을 건너 북미를 거쳐 다시 제주로 들어와 조선 국내에 있는 지도군과 강화의 홍삼 증포소를 도는 장장 3개월 이상 걸리는 장기 출장이었다.

최성용은 새해가 되면서 소장(小將)으로 승진하였다.

이는 위국공 장준하가 아닌 이형구 대장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만큼 가온 무역은 가온 주민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제는 가온 무역의 대표인 최성용이 그에 맞는 위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성용이 소장 진급을 하면서 그의 위치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장준하의 비서관 역할을 겸직하였으나 늘어난 가온 무역의 업무만을 전담하기로 하고 장준하의 비서실장은 이성호 대령이 맡기로 했다.

위국공의 비서실 업무도 많이 늘어나서 이성호 대령이 신설된 비서실 실장을 맡고, 그를 보좌하기 위해 10여 명의 부분별 비서관들이 포진하게 되었다.

이성호는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대령으로 승진하였으며 최성용이 아끼는 후배로 이번에 특별히 장준하에게 후임으로 천거하여 비서실장에 선정됐다.

최성용의 출장에는 10여 명이 함께 동행하였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영상 제작팀과 작가들이었다.

최성용은 가온이 지금까지 만들어놓고 개척해 놓은 곳에 출장하는 것을 이용하여 10여 명의 팀을 동행시켜 그동안의 가온의 성과를 기록물로 제작해서 각지의 개척민들은 물론이고, 특히 조선의 주민들 교육용 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최성용은 먼저 유구도로 가기 위해 비행선에 올랐다.

이 비행선은 105금강호로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비행선으로 시험 비행을 막 끝내고 정기 항로에 배치되기 전에 장준하가 최성용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주었다.

최성용 소장과 10명의 일행이 올라타자 비행선은 사뿐히 하늘로 떠올랐다.

비행선이 운항 고도에 이르자 잠시 정지하더니 곧 유구도로 방향을 정해 출발을 했다.

비행선은 시속 200km의 속도로 운항해 1,000여 km나 되는 유구도에 오후 3시에 도착을 했다.

1793. 1. 30. 유구도 우루마 비행장.

유구도의 우루마 비행장은 나패에서 25km 떨어진, 나패 항과는 반대로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우루마시에 건립되어 있다.

동쪽은 금무만(金武?)과 남쪽의 중성만(中城?)으로 구성된 ‘우루마’는 오키나와 원주민의 말로 ‘산호의 섬’이었다.

태평양을 향해 뻗어 있는 여승반도(與勝半島)를 끼고 있는 우루마시의 항구에는 가온 무역이 숨겨놓은 고운봉급 LST함 2척과 대조영함 경북함이 정박해 있었고, 항모인 광무황제함은 제주와 유구의 중간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가온에서는 배를 타국에 숨기기 위해 여승반도 일대를 개조된 판옥선으로 항상 순시하고 있었고, 혹시 타국의 배가 올라오면 그 배를 견인하여 돌려보냈다.

혹시 반항하는 타국의 배가 있다면 경고를 하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해안포를 이용하여 그대로 침몰시켜 버렸다.

그 배들은 전부 서양의 배로 작은 판옥선을 보고 무시를 하거나 그 배에 타고 있는 동양인들을 우월감으로 지시에 따르지 않다가 봉변을 당했다.

해안포와 판옥선에 의해 배가 침몰되면 잔인하기는 했지만 선원들을 전원 사살시키고 절대 포로를 만들지 않았다.

우루마시의 비행장에 내린 최성용 일행은 우루마 비행장에서 바라보이는 언덕 전체를 아우르는 안경명성(安慶名城) 터를 바라보았다.

유구도의 유일한 윤곽식(일본의 전통적인 성곽 구조) 성으로 그곳에 올라가면 우루마시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지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지금 그곳에는 적 벽돌로 지어진 가온의 동부군 사령부가 삼태극기와 삼족오기를 펄럭이며 우뚝 세워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최성용은 그를 영접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31사단장 유경원 대령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독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기 동부군 사령부가 참 잘 지었습니다.”

“본부에서 군사령부를 크게 지으라는 지시가 있어 조금 크게 지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크지요?”

최성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장차 동부군은 태평양의 절반을 담당할 대양해군의 사령부인데, 앞으로의 위상을 고려해서라도 저 정도는 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유경원 대령이 그 말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자, 마차에 오르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비행장에서 인사를 마치고는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우루마시와 나패까지는 25km의 거리였지만 그동안 도로가 잘 닦여져 있어서 5대의 마차에 분승해 타고 가는 일행은 이동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중간중간에 검문소가 있어서 검문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통행인들을 검문하는 병력은 전부 유구 병력이었다.

가온 무역이 유구를 할양받은 지 1년 6개월이 지나가자, 유구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우리말을 하고 한글을 쓸 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같이 학대를 받아온 30,000명의 유구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이제는 아주 나이든 노인들이 아니면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와 더불어 가온 무역이 실시하는 교육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고, 가온 무역이 자신들을 평등하게 대한다는 인식이 심어지자 유구 총독부가 행하는 모든 사업에 그들 스스로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 도로도 그러한 유구 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유구도의 주민들이 손발을 걷고 참여해 계획보다 1년이나 앞당겨 준공된 도로였다.

잘 뻗은 도로를 2시간여 마차를 타고 달려 유구(琉球) 왕국의 왕성인 수리성(首里城)에 도착을 했다.

붉은색 외양과 붉은색 석재가 깔려 있는 이국적인 수리성(首里城)을 두 번째 와보는 최성용이지만 볼 때마다 느끼는 그 아름다운 외양과 주변의 풍광이 새삼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유구 왕국 관리는 벌써 왕성의 정문 앞에서 최성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성용은 그의 안내를 받아 수리성(首里城)의 정전(正殿)으로 들어갔다.

정전(正殿)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최성용은 먼저 용상(龍床)에 앉아 있던 상목왕(?穆王)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 최 공, 어서 오시오. 오랜만에 오셨소. 참으로 반갑소이다.”

약간 발음이 어색하기는 하였지만 상목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우리말이었다.

최성용이 그런 상목왕을 바라보자 상목왕은 2년 전보다는 훨씬 혈색이 좋아지고 목소리에도 힘이 넘쳐흘렀다.

“예, 전하. 저도 만나 뵈니 반갑습니다.”

“그래요. 하하, 내 말이 아직은 어색하지요?”

“아닙니다. 아주 훌륭하십니다.”

그러면서 준비해 간 선물을 상목왕에게 올렸다.

“호오, 이건 발화기 아니오?”

“예, 이번에 저의 가온 무역이 국왕 전하께 드리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입니다.”

최성용이 상목왕에게 올린 라이터는 유구 왕국의 문양인 둥근 원에 세 개의 꼬리를 단 원 문양으로 구성된 국장이 새겨져 있었다.

2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가온 무역의 라이터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한눈에 보아도 명품이라는 인식이 들 정도로 잘 만들고 있었다.

“아! 참으로 아름답소. 이렇게 아름다움 발화기는 처음 보겠소.”

“전하께서 필요하실 때 사용하시라고 위국공 합하께서 100개의 발화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홍삼입니다.”

“오, 그래요? 안 그래도 총독께서 보내주신 홍삼을 먹고 내 몸이 상당히 좋아졌소. 위국공께 고맙다는 말씀 전해주시오.”

최성용은 상목왕과 간단한 인사를 하고 옆에 있던 정철학 고문과 박용현 총독과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상목왕에게 인사를 마치고는 총독부인 식명원(識名園)으로 왔다.

식명원의 총독 관저인 어전(御殿)으로 들어선 일행은 박용현의 집무실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았다.

박용현 총독이 최성용을 보고 말했다.

“최 제독, 진급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선배님.”

“고맙긴, 자네가 한 일을 보면 당연한 것이지. 그러니 합참의장께서 위국공께 특별 품신을 하신 게지.”

“그럼 말씀하시니 쑥스럽습니다. 군인이 총은 안 들고 어떻게 하다 보니 주판을 들고 말았습니다.”

“자네 주판에 우리 모두의 목이 걸려 있네. 그런 말은 아예 하지 말게.”

최성용은 박용현 총독에게 인사를 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식명원은 언제 보아도 참 아름답습니다.”

박용현도 최성용의 말에 동참을 했다.

“그래, 나도 이곳에 온 지 1년이 넘었는데도 볼 때마다 달라지는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네.”

그들은 어전 앞에 펼쳐 있는 연못과 그곳에 있는 여러 시설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식명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총독의 집무실이 있는 어전은 520㎡ 남짓한 목조 가옥이기 때문에 총독의 안전과 타국과의 연회 등을 위해 식명원의 전경을 거의 해치지 않는 곳에 총독궁(總督宮)을 새로 짓고 있었다.

총독궁은 어전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으로 지어졌으며 2층의 벽돌조 건물로, 유구국 섬에서 나는 화강석으로 기초를 다지고 유구 특유의 붉은 벽돌로 짓고 있는 총독궁은 아름답게 지어지고 있었다.

그 총독궁에 지도군에서 가져온 유리로 창문을 장식한, 당시 동양에서는 혁신적인 건물이었다.

최성용은 박용현 총독이 주제하는 만찬에서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고, 오늘은 식명원 어전에서 하루를 쉬고 내일 본격적인 유구도 시찰에 나서기로 했다.

1793. 1. 30. 20:00 유구 왕국 수리성(首里城) 내전.

최성용은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잠자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늦은 밤 최성용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주무십니까?”

“누구요?”

상목왕의 사자가 은밀히 방문을 한 것이다.

“저는 전하의 심부름을 온 사람입니다.”

“그래요? 무슨 심부름이오?”

“전하께서 제독님을 은밀히 뵙자고 합니다.”

“나 혼자 말이오?”

“아닙니다. 총독님과 고문님도 함께 부르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최성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겠소, 잠시 기다리시오.”

상목왕은 자신과 박용현 총독, 그리고 정철학 고문을 함께 수리성(首里城)의 내전으로 은밀히 부른 것이다.

상목왕이 유구의 가온 무역 대표들을 부른 영문을 모르는 세 사람은 만약을 대비하여 각자 권총을 소지하고 내전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내전의 옆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방 안에는 둥근 원탁이 있었고, 사람 수에 맞춰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상목왕이 미리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과인이 경들이 쉬는 것을 방해했나 보오. 자, 자리에 앉으시오.”

그러자 가장 선임인 박용현 총독이 왕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런데 이런 밤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수리성의 내전에는 상목왕이 일부러 그렇게 조치를 해서인지 아무도 없었고, 상목왕과 가온 무역의 세 사람만 있었다.

상목왕이 세 명을 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과인은 경들에게 우리 유구 왕실의 숨겨진 비사를 말해 주려고 하오. 이비사는 대대로 왕실에만 전해지는 비사로 그 일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왕국에서도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몇 되지를 않소.”

상목왕의 어색하지만 한국어로 하는 말을 세 사람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경들은 과인이 어떻게 이렇게 조선의 말을 잘하는지 궁금하지 않소?”

상목왕이 말하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목왕은 54세로 새로운 말을 배우기에는 나이가 많았으나 상당히 능숙하게 말을 해서 그동안 열심히 배워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상목왕의 입에서 노래가 들려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너머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상목왕의 입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세 사람은 왕이 우리말을 배울 때 노래를 같이 배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목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의외의 말이었다.

“경들은 과인이 이 노래를 아주 어렸을 때 배웠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자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중 정철학이 상목왕을 보며 말했다.

“전하, 혹시?”

정철학이 뭔가를 알겠다는 듯이 말을 하자 상목왕은 오래된 나무 상자를 그들의 앞에 내놓았다.

“이것이 우리 왕실에서 극비리에 대대로 왕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것이오.”

정철학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자 그 안에는 유지로 단단히 묶어놓은 것이 들어 있었다.

정철학은 묶여 있는 실을 풀고 여러 겹 싸인 유지를 풀었다.

이윽고 유지를 풀자 그 안에는 뿔로 만든 것이 들어 있었다.

호패였다.

호패에는 홍길동(洪吉同)이라고 쓰여 있었다.

역시, 하는 표정으로 정철학은 상목왕을 쳐다보았다.

그런 정철학을 보고 상목왕이 말했다.

“그렇소. 우리 선조님은 홍길동 할아버님이셨소.”

그러면서 상목왕은 그들이 유구에 정착하게 된 유래를 말해 주었다.

상목왕의 조상인 홍길동은 역사 속 실제 인물이었다. 연산 6년(1500년) 12월 29일에 비록 잡히기는 하였지만, 그 당시 홍길동에게는 따르는 무리가 상당히 많았었다.

주로 충청 지역에서 활동하던 홍길동이 그 지방 관아를 접수하면 모든 문서들을 불태웠기 때문에 13년이 지난 중종 8년의 실록에서도 기록이 유실되어 홍길동이 장악했던 지역의 세를 거두기 어렵다고 양전(토지를 측량)을 호조에서 주창할 정도였다.

관가에 붙잡혔던 홍길동은 체포 직후 주위의 도움으로 옥을 탈출하였다.

파옥을 하고 난 홍길동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 2,000명을 이끌고 유구 제도의 남쪽에 있는 10여 개의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

홍길동 일행은 그곳에 성을 쌓고 몇 년을 지냈으나 유구 왕국의 제2쇼씨 왕조의 제3대 국왕인 쇼신왕(尙?王)이 이것을 알고 그 당시 유구의 거의 전 병력인 3,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 바람에 10여 개 섬에 있던 성들 대부분은 파괴가 되었고, 조선에서 넘어온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나 홍길동이 있었던 본거지인 궁고도(宮古島) 전투에서는 홍길동 병력의 분전으로 유구 왕국의 병력 대부분을 죽이고 쇼신왕까지 사로잡았다.

조선에서 넘어온 2,000명의 인원도 불과 50여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유구의 병력을 물리치고 쇼신왕을 비롯한 30여 명을 포로로 잡게 되었다.

몇 년간의 유구 생활로 이미 유구어에 익숙한 홍길동과 측근들은 포로로 잡은 쇼신왕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이가 차이 나서 그렇지 쇼신왕과 홍길동의 외모는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홍길동과 그의 측근들은 홍길동을 쇼신왕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쇼신왕과 사로잡힌 포로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알아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쇼신왕과 유구의 포로들이 완강히 저항하며 거부했지만 유구 포로들은 곧 모든 것을 토설하기 시작하였다.

소설에서 도술을 부린다고 할 정도로 남달랐었던 홍길동은 6개월의 기간 동안 그의 부인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쇼신왕의 모든 것을 완벽히 숙지했다.

그동안 홍길동의 부하들도 유구의 풍속을 거의 대부분 숙지하여 이제 유구인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홍길동은 쇼신왕과 그의 부하 50명을 어쩔 수 없이 죽여서 묻었고, 일행들을 이끌고 왕성이 있는 유구도로 들어갔다.

그사이 홍길동군과 치열한 격전으로 전쟁을 마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수차 유구도에 사람을 보내 군량을 받아왔었기 때문에 홍길동 일행이 궁고도(宮古島)를 출발할 때 우려와는 달리 그들이 유구 왕국에 도착했어도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홍길동은 수리성으로 들어가 은밀히 왕비를 제거하고 세자를 사고로 죽게 하였다.

왕실을 정리한 홍길동은 같이 온 수하들을 시켜 왕비의 친척들도 역모로 모조리 노비로 만들어 외딴섬으로 보내버린다.

제2쇼씨 왕조가 창업한 지 1세대가 지났지만 섬 지방의 특성상 강력한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한 유구 왕국은 후일 1609년에 사쓰마번에 정복당하고 말 정도로 왕권이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홍길동의 공작은 쉽게 성공을 거둔다.

홍길동은 왕비를 제거하자 자연스럽게 유구의 새로운 유력자 집안의 여인을 왕비로 삼는다.

홍길동은 유구 왕국을 강성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일단의 무리를 이끄는 것하고 아무리 작지만 왕국을 다스리는 것하고는 달랐기 때문에 현상 유지에 만족해야 했었다.

홍길동이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당시 유구의 인구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홍길동의 호패와 더불어 유구의 왕에게 은밀히 전해져 대대로 내려져 왔었다.

그 후 유구 왕국은 이러한 왕실의 비화로 조선을 상국으로 모시며 충심을 다했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1609년 사쓰마번의 유구 침공 때 사쓰마로 잡혀간 제7대 상목왕을 구하기 위해 당시 세자는 갖은 보물을 싣고 사쓰마번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하지만 유구 세자가 갖고 있던 금은보화를 탐낸 당시 제주 목사에 의해 살해된다.

후일 이 사실을 안 그의 아들인 제8대 쇼호왕(尙豊王)이 즉위하자 조선과 국교를 단절하고 제주의 배만 표류해 오면 어부들을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하게 된 것이다.

홍길동은 왕위에 앉자마자 대대적으로 궁궐을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고, 왕궁의 정문도 조선과 같이 예를 따른다는 뜻에서 수례문이라 이름 짓고, 현판에 예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수례지방(守禮之邦)이라는 편액을 걸게 하였다.

지금도 오키나와에 가면 홍길동이 있던 섬에 8채의 조선식 초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곳의 박물관에는 홍씨의 왕이란 뜻의 오야케 아카하치(洪家王)의 족보와 조선식의 농기구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긴 시간 상목왕에게 유구 왕실의 비사를 들은 최성용이 말했다.

“그래서 전하께서 처음 외신(外臣)을 만났을 때 ‘역사는 아무리 아니라 해도 물 흐르듯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말씀하셨군요.”

상목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과인도 언젠가는 최 공에게만은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였소. 그러다 오늘에 이르러 이리 세 분을 모시고 우리 왕실의 비사를 말씀드리게 되었구려.”

총독인 박용현이 상목왕을 보며 말했다.

“전하, 고맙습니다. 이렇게 유구 왕국과 우리가 남이 아닌 게 밝혀졌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외신들이 전하와 이 유구국을 위해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상목왕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소. 과인도 경들에게 수백 년 동안 묻어둔 우리왕실의 비사를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오. 그동안 선왕들께서는 사쓰마번의 지배에서도 조선의 말을 잊지 말라며 늘 말씀해 오셨지만, 그것도 200년 가까이 지나니 우리도 모르게 모든 풍습이 일색(日色)으로 바뀌게 되었소. 다행인 것은 우리 백성들이 조선말과 글을 익히는 데 성심을 다하고 있으니, 이는 경들이 성심을 다한 덕이 아니겠소?”

최성용은 그제야 상목왕이 처음부터 조선에 친절한 이유를 알게 되었고, 초대 총독이었던 자신을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왕을 보고 그 마음에 고마움을 느꼈다.

최성용이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 그동안 사쓰마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저희는 잘 알고 있고 전하께서 저희들이 펼치는 정책에 얼마나 도움을 주시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 유구 왕국과 가온 무역은 한 몸입니다. 총독 각하의 말씀대로 외신들이 앞으로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최성용의 말을 들은 상목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래요. 내 이미 그대들이 이곳에 올 때부터 과인은 이미 그때 그대와 한 몸이 되었소. 부디 우리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시오. 과인의 부탁은 그것뿐이오.”

최성용을 비롯한 세 사람은 상목왕을 보면서 한참 동안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식명원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식명원 어전의 소파에 앉은 세 사람은 조금 전에 들었던 상목왕의 비사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박용현 총독이 최성용과 정철학을 보고 말했다.

“상목왕이 처음 우리가 왔을 때 최 제독을 보고 했다는 말이 새롭네.”

그 말에 최성용 소장이 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상목왕(尙穆王)은 처음부터 우리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난날 우리들의 잘못으로 우리를 못 믿었던 거죠.”

박용현 총독이 말했다.

“그 세자를 죽였다는 제주 목사가 누구야?”

“1609년 이후이니 찾으려면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번 찾아볼까요?”

그러자 정철학 차장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찾으면 뭐 하겠습니까, 이미 200년이 지난 일인데. 상목왕이 마음을 열었다는 게 우리에게는 더 의미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박용현 총독이 말했다.

“그렇지. 지금까지 진행된 대로만 되면 국왕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그러자 정철학이 다시 말을 했다.

“맞습니다. 이미 사쓰마번의 사탕수수 농장도 다 철수를 해서 앞으로는 유구 국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대규모 영농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유구 제도에 있었던 사쓰마번의 사탕수수 농장이 전부 아마미 제도로 옮겨갔다.

처음 유구 할양 협상에서 본래 유구 제도의 일부였던 아마미 제도까지 할양 요구를 하였으나 사쓰마번의 절대 불가 방침으로 일단은 그들의 주장대로 해주었다.

사쓰마번은 혹시 가온 무역이 마음이 변해 자신들의 주요 자금원인 이곳의 사탕수수 농장까지 빼앗길 것을 우려한 것이었고, 가온 무역은 후일 일본이 어수선해지면 강제로라도 아마미 제도를 점령하려고 양보한 것이었다.

상목왕과 유구의 미래에 대해 한참의 대화를 주고받던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그때 시간이 벌써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1793. 1. 31. 08:00 유구 가온 무역 상관.

전속 부관 배만식 소위가 두드리는 문소리에 이미 일어나 준비를 마친 최성용은 어전 숙소의 문을 열고 나왔다.

최성용이 먼저 인사를 했다.

“배 소위, 어제 잘 쉬었나?”

“예, 제독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아침에 유구 국왕 전하와 09:00에 수리성에서 조찬 회동이 있습니다.”

“그래, 알고 있네. 바로 가세.”

수리성에서 어젯밤 세 명과 유구 국왕과의 조찬 회동이 있었다.

어젯밤에 왕실의 비밀을 말한 한 탓인지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따듯한 미소가 어렸으며 화기애애하게 조찬 회동이 진행됐다.

조찬을 마친 최성용 소장은 곧바로 나패 항에 있는 가온 무역 상관으로 향했다.

상관에는 이미 유구도 상관장 민지환과 국정원 임철순 과장이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민지환의 따듯한 인사말에 최성용이 화답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죠?”

“예, 정초라서 바쁜 것 외에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성용과 같이 온 10명의 부서장들은 이미 상관에 있는 자신들의 파트너와 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일일이 동행한 영상 제작팀이 새벽 일찍부터 일일이 녹화를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렇게 하십니다.”

민지환의 안내를 받은 최성용 소장은 그의 안내로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탁자 위에는 최성용에게 보고할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최성용이 자리에 앉자 바로 업무 보고가 시작되었다.

업무는 오스만 제국과 유럽 각국의 순으로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과는 알리 아지즈와 협의한 대로 분기별로 천은 200만 냥어치의 물품을 지속적으로 구매해 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매월 천은 100만 냥의 발주가 계속 이어졌고, 특히 겨울의 모피 수출로 유럽 지역은 수백만 냥의 매출이 추가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도 매월 비슷한 양을 수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가온 무역과의 거래에서, 특히 러시아와 스웨덴 무역을 독점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나패에는 마이소르 왕국에서도 상인이 들어와 상관을 개관하고 있었고, 이들의 수입 물량은 영국에 못지않았다.

인도는 지금 수많은 번국과 마이소르같이 커다란 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마이소르 왕국의 티푸 술탄은 현명한 지도자였다.

티푸 술탄은 나패의 자유 무역항에 상인을 파견하여 가온 무역에서 차관으로 받은 은의 상당 부분으로 여러 품목을 수입해 가서 번국들과 중계 무역을 시작하여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의 해상전(海上戰)을 우려하여 제품 수송을 가온 무역에 일임했다.

가온 무역도 마이소르 왕국을 영국이 알지 못하게 지원해 주면서 티푸 술탄을 지원했다.

마이소르 왕국이 중계 무역으로 많은 수익이 나자 이는 바로 전비를 충당할 재원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은 역사와는 다르게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 두 나라는 누군가 나서서 휴전을 시켜야 했으나 가온 무역은 일부러 나서지 않고 양국이 긴장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영국이 마이소르 왕국과의 문제 때문에 버마(미얀마)와 여타 인도차이나에 진출할 여력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파는 곧바로 말레이시아에서 나타났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고착되는 시기였으나 지금은 식민 지배가 확실하게 매듭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틈새는 국정원의 인도차이나 담당 태인선에게는 바로 기회가 되었다.

에스파냐와는 이번 북미 영토 협상으로 아주 긴밀한 관계가 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받아가기로 한 1억 달러는 은으로 환산하면 무려 천은 4,200만 냥이 넘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식민지에서 나는 은이 많은 탓인지 에스파냐가 수입해 가는 수입 물품도 거의 영국에 육박할 정도로 많았다.

이 무렵 가온 무역에서 수출하는 물품은 다양해졌다.

제품의 면면을 보면,

가온 식품 : 라면과 소금, 팜유.

가온 모피 : 최고급 모피를 비롯한 모피 제품.

가온 조선 : 2,000톤급 이하의 범선.

가온 수산 : 천연 진주, 염장에 의한 원양의 어류.

가온 군수 : 제이스 소총과 탄환.

가온 요업 : 골회자기와 평판 유리 등 유리 제품.

가온 공업 : 발화기(라이터), 성냥, 최고급 비누, 화장품, 치약.

가온 건강 : 인삼과 홍삼.

가온 광물 : 금과 은을 제외한 일반 광물.

가온 양회 : 포틀랜드 시멘트 등 10여 개 회사가 만들어져 제품 생산을 위한 공장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가온의 계열사에서는 생산량이 발주량을 따라가지 못해 24시간 풀가동 중이었고, 이들 제품은 유럽을 향해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유구에서 유럽 각국에 수출하는 양이 연간 천은 오천만 냥에 달할 정도로 나패 자유 무역항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1년 사이 벌써 ‘국제 거리’는 말 그대로 국제 거리가 되어 10여 개국에서 각국에서 5,000명의 인원이 상주하는 곳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자주 벌어지는 파티로 인해 국제 거리는 밤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그들을 위한 조계지가 의미가 없어졌다. 그것은 각국이 늘어나는 인구들을 감당하기에는 조계지가 너무 좁아 자연스럽게 국제 거리 주변이 이들 외국인들의 주거지로 발전했다.

나패는 이들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항구에 들어오는 무역선들에게 음, 식료품을 공급하는 일로 엄청나게 번창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청국의 유구를 보는 시선을 광저우에서 막고 있지만 어느 시기가 되면 청국과 반드시 한 번은 마찰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가온 무역에서는 청국이 유구의 상황을 알게 되는 것이 백련교의 난이 벌어지고 난 후이기를 바랄 뿐이다.

최성용이 민지환에게 치하를 했다.

“민 관장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성과입니다.”

“아닙니다. 지금 본국에서의 상품의 개발 속도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을 적당한 타이밍으로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각국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원하는 색깔로 서서히 물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성용이 민지환의 설명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이 유구가 우리 가온 무역의 눈이자 입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성용 제독은 임철순 과장을 보고 물었다.

“임 과장, 유구국 주민들 교화 문제와 국가 현황은 어떤가?”

“예, 보고드리겠습니다.”

임철순 과장이 최성용에게 유구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유구의 총 인구는 22만이었다.

가온 무역의 속지(屬地)가 된 1년 6개월 동안 유구는 그네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엄청나게 변했다.

유구에는 가온에서 제주와 똑같은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그동안 지속적인 교육으로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우리말로 대화를 하는 데 별 불편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유구어는 일본어와 달라서 한국어 발음이 안 되는 것이 거의 없어서 우리말을 익히는 데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익힐 수 있었다.

가온 무역에서도 이들 유구 주민들을 처음부터 차별을 두지 않고 우리 국민과 동일하게 대우했다.

유구 주민은 조선의 백성보다 단지 키가 조금 작다 뿐이지 입은 옷도 전부 개량 한복으로 바뀌어 조선의 백성과 외양에서부터 거의 같아졌다.

이들 유구 국민들이 왜색을 털어내려는 움직임은 가온에서 예상하던 상상 이상이었다.

200여 년 동안 유구 왕국은 사쓰마번의 식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쓰마번은 자신들의 전매품인 흑사탕을 생산하기 위해 사탕수수 농장에 30,000명의 유구 백성들을 노예와 같이 부렸다.

그리고 유구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을 모조리 수탈을 해가 버렸기 때문에 유구 왕국은 명맥만 유지하는 허수아비 나라가 될 정도였고, 사쓰마번은 유구가 죽든 살든 자신들 잇속만 챙겨갔다.

사쓰마번이 중국의 신경만 쓰지 않았다면 유구 왕국은 이미 멸망을 하고 사쓰마번의 일개 지방으로 변했을 것이다.

유구 왕국의 백성들은 그것이 한이 되었는지 이들은 사쓰마번이 물러가자마자 가온 무역에서 주민 교육을 시키기도 전에 30,000명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풀려날 때 입혀준 개량 한복을 보고 스스로 한복을 만들어 입을 정도로 왜색 털기에 주민 스스로가 적극 나섰다.

지금은 동부군 소속으로 유구 출신 병사들 20,000명이 군복무 중에 있었다.

처음 징병제가 실시될 당시 노동자 30,000명과 주변에 있는 유구 주민들이 대거 몰려와 군 입대를 시켜달라고 하여 가온군이 진땀을 뺐다.

이들은 돈도 필요 없고 먹여만 준다면 조국을 위하고 힘을 길러 사쓰마번을 반드시 쳐 부숴버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녀서 가온의 유구 총독부를 진땀나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는 사쓰마번 등 일본과 마찰을 일으키기에는 시기 상조였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규정대로 주민 교화 훈련을 마치고 정예군으로 20,000명을 선발했다.

이들 20,000명을 선발할 때 선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강력히 반발할 정도로 유구 주민들의 군입대 열의는 대단하였다.

그 후에도 유구에서는 군에 입대하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전통이 생겼으며, 유구 병력은 이후에도 가온 해군의 주력군이 될 정도로 성장을 하였다.

이들의 애국심을 높이 산 이형구 대장 등 군 지휘부는 해군의 특수 훈련을 이들에게 집중시켜 당대에 세계 제일의 해군 특수 전단으로 육성했다.

그 뒤로 이들 20,000명의 유구 전사들은 제2해병 군단인 유구 군단이란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온군은 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에게만 특별히 유구국의 국장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유구 군단은 그 국장을 가슴에 달고 전 세계 상륙전과 침투전 등 가장 힘든 전투에 항상 선봉에 섰으며, 이후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패의 전사가 된다.

유구 군단의 훈련 강도는 전군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혹독했고, 그들은 그 훈련을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견디어냈다.

그들은 항상 병력을 군단 병력을 이만 명의 인원만을 유지하였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발생하는 유구의 남는 군 자원은 전원 해군의 일반 병으로 배속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유구 군단의 인적 자원은 더 고급화되어 갔다.

가온의 군 지휘부도 이들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유구 군단은 후일 유구 왕국이 대한 제국의 연방이 될 때에도 솔선하여 유구의 여론을 주도할 정도로 죽음으로 가온에 충성을 하는 부대 전통을 만들게 된다.

유구 군단의 군복은 특색이 있게 상하 전부 짙은 청색이었고, 복식은 근대의 군복과 같이 소매 단이 짧고 바지도 너덜거리지 않고 허리띠를 매는 복식으로, 이들의 모자도 짙은 청색의 베레모였다.

유구 군단의 군복은 가온 무역이 마이소르 왕국에서 특별히 주문하여 배급해 주었다.

최성용은 단순히 유구 주민 교화의 일환으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을 해방시켜 준 것이었다.

그 인연을 유구 사람들은 수백 년을 지나도 최성용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가온에 충성을 하는 최강의 부대가 되어 돌아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가온 본부는 이러한 결과를 교제로 남겨 개척지 주민 교화의 모범 사례로 삼아 영관급 이상 고급 간부들의 교육 자료로 활용하였다.

유구 왕국의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해방된 날이 공교롭게 8월 15일이었다.

해방되던 그해 최성용이 상목왕에게 건의하여 대대적으로 노동자들의 위로 잔치가 열렸고, 이후 그 전통이 계속 전승되어 오늘날 유구 최대의 축제가 되었다.

이날의 축제에는 지금도 해마다 가온 무역에서 형식적이지만 일정한 양의 축제 용품을 보내주었다.

유구 주민들은 축제 기간 동안 선조들의 어려움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각자의 집에서 조금씩의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지나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 생겼고, 유구의 주민들은 최성용과 그의 후손들을 해마다 초청하여 이 행사의 주빈으로 예우해 주었다.

최성용 소장이 임철순 과장의 말을 듣고 말했다.

“유구도가 제주도보다 주민 교화 정책이 더 빠르게 성공한 것 같군.”

임철순이 그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교육이란 것이 자발적 참여와 타의에 의한 참여 효과는 그 성과에서 엄청난 격차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유구 주민들이 우리말을 익히려면 상당히 힘이 들었을 터인데도 주민들의 적극적인 열성에 불과 2년이 되지 않아 거의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될 정도로 유구 주민들 22만이 소중한 우리 국민이 되었습니다.”

최성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네. 그들도 이제는 우리 국민이야. 처음부터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일세.”

최성용은 그러면서 이들에게 유구 왕실의 비밀에 대하여 이들에게 말해 주었다.

이들은 그 말을 듣고 소설 속의 인물로만 생각했던 사람이 실제의 인물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실제 인물이 소설화되었다는 것과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후손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데 있었다.

그것도 그 후손이 자신들이 지금 만나고 있는 상목왕이라는 것에 더욱 신기하게 생각했다.

최성용은 이들의 보고를 받고 나니 오전 시간이 지나갔다.

상관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운 최성용은 민지환의 안내를 받으며 나패에 있는 각국 상관의 장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이는 그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기 전 인사차 방문이었다.

외국 상관장들과의 인사는 어느새 저녁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게 했다.

최성용은 만찬을 열기로 했다. 국제 거리에 있는 각국 상관 지점장을 초청하여 가온 무역 상관에서 파티를 겸하여 열기로 했다.

파티는 20:00부터 시작되었으며, 이 파티에 특별히 유구의 세자가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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