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그 후
1792년 12월 29일 창덕궁 선정전(善政殿).
반란이 진압되자 하성호 중령은 이 사실을 즉각 정조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수문장청(守門將廳)에 전교를 하여 당분간의 용호영의 지시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도성의 각 수문장들은 곧이어 정조의 교지를 갖고 들이닥친 용호영 군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도성의 문은 여덟 개의 문으로 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흥인지문의 사대문과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자하문(창의문)의 사소문이 있다.
정조 때부터 종6품 참상관(參上官)으로 도성의 각 문에 수문장(守門將)의 직제를 두었다. 이들의 입직을 직접 정조 자신이 결정하여 왔기 때문에 용호영의 도성 문 장악은 간단히 이루어졌다.
다음 날(29일) 파루(새벽 4시)에 도성 문이 열릴 때부터 도성에 들어오는 모든 출입자들의 일제 검색이 시작되었다.
각 문의 관리 책임을 맡은 용호영 군관들의 손에는 한 권의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 책자에는 이번 변란을 피해 사직 상소를 올리고 도망한 자, 상소도 올리지 않고 도망한 자, 사대부 중 한성에 거주를 두고 도망한 자, 성균관 유생 중 도망한 자 등 국정원에서 수집한 내용들이 상세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 수는 무려 2,000명에 달하였다.
보름 동안 성문 앞에서 이들의 검색은 계속되었다. 이들을 잡아들인다는 말을 들은 백성들의 고변이 이어져 도성 부근에 숨어 있던 자들도 전부 잡아들였다.
29일부터 실시된 검색에 붙잡혀 들어온 자들은 1,900명에 달하였고 100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창덕궁 선정전에는 지금 대신들이 좌정해 있었다.
이미 반란군 진압의 장계가 밤새 말을 달려 이날 아침 조정에 도착해 있었다.
채제공이 말했다.
“전하, 아전들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하옵니다. 하례드리옵니다.”
“하례드리옵니다.”
채제공의 정조에 대한 하례의 말이 있자 신하들도 따라 정조에게 하례를 하였다.
“고맙소. 이번에 장용외영의 장병들과 훈련대장 서유대와 훈련도감의 장병들이 노고가 많았소.”
정조의 말에 예조판서(禮曹判書) 이문원(李文源)이 말을 했다.
“전하, 이번에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장용외영의 하성호라는 장수가 큰 공을 세웠다고 하옵니다. 이자에게 후한 상급을 내려주심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그러자 우의정 김이소가 이문원의 말을 받았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 장수는 1,000명의 병사로 6만 명의 대군을 상대로 병졸 한 명의 손실도 없이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가히 상을 내려도 부족함이 없는 자이옵니다, 전하.”
그 말에 정조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다.
“과인이 일전에 한 장수를 만났던 적이 있었소. 그 장수가 과인에게 이런 말을 하였소. 진정한 장수는 상급을 바라지 않고 명예를 바란다고 말이오. 그게 군인의 길이라는 말을 들었소.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채제공이 말을 하였다.
“전하, 명예를 군인의 최고 덕목으로 생각한다는 그 장수의 말은 새겨들을 말이옵니다. 신등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채제공이 대신들을 대표하여 사과를 하였고 그 말을 듣던 대신들도 작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대신들은 이전에 정조의 말은 미리 대비를 할 수 있는 말이 많았는데, 요사이 정조는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를 정도로 많이 변했다고 생각을 했다.
채제공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정조가 말을 했다.
“과인은 그에게 다른 것은 줄 것이 없소. 금은보화는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과인은 믿소. 그 대신 그에게 ‘수고했다’는 한마디는 꼭 해주고 싶소.”
편전에 앉아 있는 대신들은 정조의 하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오늘따라 자신들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고 있는 대신들은 그저 묵묵부답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채제공이 다시 말을 하였다.
“전하, 그리고 이번에 반란을 일으킨 수괴들을 처결해야 하는데 하교해 주십시오.”
채제공의 말이 있자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하였다.
“그들 중 수괴를 색출하여 전원 효수하고 나머지는 경중을 가려 처결을 하되 아전과 양반 출신들은 각 지방의 성곽을 보수하고 국방을 위한 공역장(公役場)에서 20년간 강제 노역형에 처하되 반드시 차꼬를 채워 노역을 시킬 것이고 그들의 전 재산을 몰수를 하고 그의 가족들은 고향에서 천 리 밖으로 나가 살게 하시오.”
서슬 퍼런 정조의 하교였다.
마치 준비된 듯한 정조의 하교에 대신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정조가 다시 하교했다.
“그리고 노비 출신 반란군들은 자의로 반란에 참여한 자도 있겠지만 타의에 의한 참여를 한 자가 많을 것이오. 그들을 전부 화성의 축성 등 앞으로 있을 조정의 토목공사에 10년 노역형에 처하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정조의 말은 일견 강력하기도 하였지만 반란의 수괴들은 이미 저격으로 대부분이 사살된 것을 알고 있는 정조의 처리 방침은 대체적으로 사람의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형벌이었고 장준하와 협의한 내용이었다.
대신들도 반역에 대한 처결을 하는 정조의 말이 대부분 일리가 있어서 반역의 무리들은 무조건 사형을 하고 관노로 삼던 이전의 처결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대체적으로 수긍을 하자 정조가 드디어 칼을 빼 들었다.
“과인은 이번에 수차례 전교를 내리고 교지를 반포하여 어느 경우라도 그 누구도 도성을 떠나지 말라고 하였소. 경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대신들의 얼굴에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도 오늘 파루(새벽 4시) 때부터 용호영이 군관들이 도성8개문에 배치되어 모든 출입자들을 일일이 검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들은 무슨 일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입궐을 하였는데 화성에서 장계가 도착한 것을 보고 ‘아차’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미 화성의 일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오늘 파루 때부터 용호영이 도성 문을 장악했구나 하는 말들을 각자가 하였기 때문이었다.
정조의 내심을 읽은 대신들은 얼굴이 심각해졌다.
편전에 있는 대신들은 알고 있었다.
조정의 어느 파벌을 막론하고 지금 많은 수의 전현직 관리들이 정조에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사직 상소를 올리고 심지어는 상소도 올리지 않고 도성을 빠져나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도 그들을 수차 말려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족친들도 상당수 있는 대신들의 마음은 정조의 말이 비수로 가슴에 박혔다.
정조도 대신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반란군들이 화성을 격파하고 한강을 넘기 위해 송파까지 올라왔다면 과연 이들 중 몇이나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정조의 처결은 단호하였다.
의리정치(義理政治)를 자신의 정치이상으로 삼고 있는 정조에게 군신유의를 무시한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신하도 백성도 아니었다.
정조는 자신의 교지를 무시하고 도성을 빠져나간 전원을 삭탈관직하고 사대부나 유생의 경우 사적(士籍)에서 이들의 이름을 완전히 삭제하도록 하고 두 번 다시 신원시키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전원을 5년 노역형에 처하며 이들의 전 재산을 완전히 몰수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 가족 전부를 도성 천 리밖에 나가 살게 하고 다시는 도성 문을 넘지 못하게 하였고 만일 이들이 도성에 들어오면 반역을 도모하는 것으로 알고 삼족을 멸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얼마 전 영남만인소가 있을 때도 영조와의 의리를 중시하여 김종수를 두둔하고 자신의 의견을 대변했던 박종악을 파직한 정조였기에 이번의 조치에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어리석게도 반란이 끝난 29일에도 소식을 알지 못하고 도성을 빠져나가려는 양반들이 300여 명이나 더 있어서 정조의 극한 노여움을 샀고 대신들의 목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정조는 노여움을 억누르고 이들에게 인신체벌을 가하지 않았고 그것을 본 대신들은 오히려 그런 정조를 더 어려워하게 되었다.
정조의 조치는 바로 시행되었고 몰수한 재산은 어마어마하였다.
정조도 이를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개국 이후 대대로 세습되어온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한 아전들의 수탈은 도를 넘어 나라가 흔들릴 정도였으며, 대신들도 아전들의 엄청난 재산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특히 경기지역 아전들의 재산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성을 도주하거나 도주하려 한 양반들의 재산 또한 어마어마했다.
만일 정조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조정 대신들 대부분의 재산이 몰수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대신들과 대부분이 척족이기 때문이다.
6,000여 명의 반란 주모자들과 한성의 양반들을 포함한 이들의 재산은 전국의 전답 170만 결 중 10만 결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정조는 이 전답들을 억울하게 빼앗긴 주민들에게 심사를 거쳐 되돌려주게 했다.
그리고 남은 전답 10만 결을 특별히 임자별전(壬子別田)이라 하여 호조에서 특별 관리하게 하였고 이 전답은 각 소작농에게 병작반수(竝作半收)하게 했다.
여기서는 내수사전의 신품종 벼를 최우선 심게 하고 여기서 병작반수(竝作半收)하고 나오는 150여 만 석(신품종은 50퍼센트 이상 증산되었다.)의 쌀은 전부 구휼미로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이 구휼미는 앞으로 절대 전용을 못하게 하는 특별 전교를 내려 자신의 뒤에도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여 대신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이들의 가옥과 엄청난 동산은 각 지역마다 가장 큰 집을 민속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이들의 세간 중 문화재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수집하여 전시하게 하였고, 그중에서도 귀중한 것은 각 도 별로 박물관을 지어 별도의 전시공간을 마련하게 했다.
각 고을 별로 남은 가옥도 전부 사람을 지정하여 관리를 잘하여 두라고 하였다.
가온은 이곳을 후일 학교 등의 장소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도 남은 세간들은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라고 하였다.
이들의 집에서 나온 물건들은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이들에게 몰수한 물건들로 시작한 각지의 민속박물관들은 그 후부터 주변 주민들의 사료기증을 받아 후일 조선사 민속자료연구에 귀중한 보고(寶庫)가 됐다.
이들에게 압수한 상평전과 금은 등 귀중품도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정조는 이들 금전 중 상당부분을 각 고을 주민들에게 분배하여 주었고 나머지는 국고에 환수조치 했다.
정조의 모든 조치는 하나도 남김없이 관보 게시판에 게재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조치는 조선 백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정조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민심을 결집시켜 주었다.
정조는 이번 변란에 자신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도성을 지켜준 고마운 한성 주민들에게 환수한 돈으로 사제감(司宰監)과 내섬시(內贍寺)의 특별히 명을 내려 1,000여 마리의 소와 1만여 마리의 돼지를 잡아 이틀간 한성 주민 전체에게 잔치를 열어주었다.
이틀간의 잔치에 도성에서는 정조에 대한 찬송가(讚頌歌)가 만들어져 불릴 정도가 되었는데 조선의 개국 이후 이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 저녁 정조는 장준하와 통화를 하면서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정조와 장준하와의 협의에 의해 결정된 조치였다.
정조는 양지현 전투에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다시 현신(現身)하여 반란군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줄였다고 하는 장계를 보면서 아버지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게 되어 더 한층 기뻤다.
정조가 등극한 후에도 외줄을 타는 심정으로 국정운영을 해오다 이렇게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보기는 처음이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통화를 마친 정조의 옆에는 촛불이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1793년 1월 1일 제주 성산포(城山浦) 일출봉(日出峰).
오늘도 어김없이 일출봉에는 가온 주민들을 위한 행사와 차례가 진행되었다.
위국공 장준하는 모여 있는 많은 주민들을 보며 행사를 했다.
벌써 조선에 들어오고 3번째 맞이하는 해맞이 행사였다.
올해도 많은 주민들이 행사에 참여를 했고 다른 해와 달리 조선 출신 주민들도 많이 참석을 했다.
해맞이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장준하는 최성용 대령과 자신의 관사에서 모처럼 한가한 아침을 먹었다.
“모처럼 한가한 아침이네.”
“그렇습니다. 합하(閤下)를 모시고 이렇게 식사하는 것도 3년 만에 처음입니다.”
장준하가 최성용에게 말했다.
“그래, 우리가 시간 여행 후 둘이 앉아 식사하는 것이 처음이구나. 최 대령도 참으로 고생 많이 했지?”
그러자 최성용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보다는 합하께서 마음고생 많이 하셨지요.”
“그래, 성용이. 잘 견뎌보자. 그리고 자네도 이제 결혼해야 할 터인데, 빨리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야지?”
“아직까지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 사람, 자네 나이도 벌써 40이 넘었어. 지금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야.”
시간 여행을 한 가온 주민들에게는 작년부터 결혼 열풍이 불었다.
많은 수의 독신자들이 1791년이 넘어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자 주변에서 짝을 찾아 결혼하기 시작했다.
가온 주민들의 결혼 상대자는 조선 백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유구국의 유구인과 그리고 호주 원주민 출신들도 일부 있어서 이들의 결혼이 자연스럽게 가온무역의 융화정책에 도움이 되었다.
“저보다 합하께서 재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장준하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이 사람, 내 나이가 벌써 육십이 다 돼가네. 이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결혼은.”
장준하의 말에 최성용이 다시 말했다.
“아닙니다. 앞으로 합하께서 앞으로 상당기간은 가온을 이끌어주셔야 하는데 그럴 경우 옆에서 합하를 도와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그 얘기는 그만하세. 그리고 가온무역은 계획대로 잘 운영되고 있나?”
“예, 지금 사백력의 모피 사업이 상당한 수익을 발생하고 있고 쌀과 소금도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으며 나머지 제품들도 무리 없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작년 가온무역의 성과를 연말에 조선에 아전들의 변란으로 서면보고서를 작성하여 지휘부에 돌렸습니다. 필요하면 지휘관 회의가 소집되면 구두보고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장준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올라온 보고서를 못 봐서 그렇지. 금년에는 바쁜 일이 정초부터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서면보고서를 읽어보겠네.”
다른 날과 달리 편안하게 말을 하는 장준하를 보면서 최성용은 시간 여행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들이 없는 장준하는 20여 년 차가 나는 최성용을 자신의 아들같이, 후계자같이 아꼈다.
장준하는 위관 시절부터 최성용을 점찍어 10년이 넘게 자신의 전속부관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옆에 데리고 있었다.
장준하의 특별 배려로 군의 여러 전문교육을 받았고 시간을 내어 대학원에서 진학하여 경영학을 공부하고 더불어 조선사도 공부하는 배려도 받았다.
최성용 또한 장준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최성용도 편모슬하에 독자로 자랐고 소위에 임관하자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혼자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장준하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최성용도 장준하도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둘 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각자 부자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모은 금이 얼마나 되지?”
“재작년 말에 300톤 정도가 모였고 작년에 호주에서 금 400톤과 은 1,000톤이 들어왔고 북미 지역은 작년 6월부터 네 곳의 금광에서 매월 50톤의 금과 100톤의 은이 들어왔습니다. 예상외로 사백력의 발레이 금광에 엄청난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어서 그곳에서도 9월부터 매월 10톤의 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장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상보다 많은 양이군.”
“그렇습니다. 사백력의 발레이 금광은 매장량이 북미 동백 금광보다 몇 배나 많은 엄청난 매장량인데 주변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당분간은 많은 금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발레이 금광은 산출량은 비록 적지만 순도가 아주 높은 부광이라 여건만 갖춰지면 상당한 양의 금이 산출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장준하가 다시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래, 고생들이 많겠구나. 그들에게 무언가 조치를 취해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북미도 인원이 보충되어 금년부터는 두 배 정도의 생산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출로 100톤 정도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금으로 환산하면 약 1,400톤 정도 됩니다.”
장준하가 말했다.
“그런가. 상당한 양이군. 금년은 어느 정도 예상되는가?”
최성용이 다시 대답했다.
“금년은 지금의 금광만으로도 북미에서 1,200~1,500톤, 사백력에서 300~500톤, 호주에서 500~600톤으로 예상되어 작게는 2,000톤에서 많게는 2,600톤 정도의 금이 생산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위국공은 최성용의 구두보고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고생이 많았구먼. 자네가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러자 장준하가 최성용을 보고 다시 말을 했다.
“오늘자로 북미 지역과 마리아나 제도가 우리 가온무역의 영토가 되는구나.”
“그렇습니다, 합하. 우리가 얻으려고 계획한 땅은 이제 북해도와 만주만 남았습니다.”
장준하가 최성용의 보고에 만족해 하며 지시를 했다.
“그렇게 되었구나. 그건 그렇지만 땅만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 않나? 만주 지역은 청국과 한바탕 각오를 해야 되니 앞으로 적당한 시기를 봐서 공작을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자네, 이번에 외국출장 간다며?”
“예, 그동안 각 지역의 총독께 맡겨놓은 가온무역 업무도 점검할 겸해서 개척지 전역을 둘러볼 계획으로 조금 장기로 출장을 잡았습니다.”
“그래. 자네도 이번에 업무도 업무지만 휴식도 겸해서 다녀오게. 이번에 다녀오면 언제 또 나갈지 모르니 여행을 겸해서 다녀오게.”
“고맙습니다. 제가 다녀오면 합하께서도 잠깐씩 다녀오실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혼자 가서 죄송합니다.”
최성용의 말에 장준하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죄송하기는. 자네와 내가 둘 다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는 없잖은가.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게. 몸조심하는 것 잊지 말고.”
“예, 합하.”
모처럼 사석에서의 한가한 시간을 맞아 장준하와 최성용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놓고 말을 주고받았다.
1793년 1월 3일 전조선 지방 관아.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전 조선의 지방 관아에는 구천 명의 공무원들이 일시에 투입되었다.
공무원들은 공무원교육원의 교육을 마치면서 각자 배정받은 지역, 배정받은 업무에 투입이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공무원교육원에서 실무교육도 받았고 기존의 아전들이 3,000명 정도 신규 임용되어 있었고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아전들도 있어서 이들의 업무 인수인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각 지방에 배치된 공무원들은 비록 1개월간의 교육기간이지만 현장 업무 교육을 받아서인지 업무 인수인계와 더불어 바로 자신들에게 배정된 업무를 시작했다.
이전의 아전들과는 달리 이들은 처음 발령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교육의 성과인지는 몰라도, 아주 의욕적으로 업무를 추진하였으며 그 성과는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지난해 말 반란을 일으킨 아전들과 이들에 동조한 양반들의 재산몰수 작업에 투입된 공무원들이 진가를 발휘했다.
이들은 모든 작업에 원칙을 고수하였고 이전과 같으면 아는 이들끼리 나눠가질 세간 하나, 숟가락 하나도 일일이 조사하여 문서화 했다.
혹시 뭐 먹을 것 없나 하고 기웃거리던 지방관들과 지방의 양반들은 이들의 원칙에 입각한 조사에 혀를 내 두르고 돌아갔다.
그 덕분에 재산조사는 엄정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공무원들의 철저한 조사에 반란에 참가했던 아전들이 지난번 재산신고에 신고하지 않았거나 숨겨 두었던 수많은 은결도 찾아내는 성과도 거두었다.
처음 발령받은 공무원들도 신이 났다.
이들은 이전의 아전들이 느끼던 물에 기름 뜬 것 같은 자신들 신분에 대한 위축감도 들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특히 아전 출신 공무원들 사이에서 더 많이 나왔으며 이번에 임용된 공무원 중 지난 아전 시절에 대한 잘못을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공무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무원교육원에서도 이들 아전 출신들을 교육할 때 특별히 1년간의 기간을 주어 지난 아전 시절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당사자와의 협의와 화해만 있으면 면죄부를 주겠다는 정조의 특별 교지가 이들에게 내려진 것을 알려주었다.
이들 아전 출신 공무원들 중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과거를 반성하는 아전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었고 그 후에는 철저한 발본색원을 할 계획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