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01)

반란

1792년 11월 10일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 조성진(趙晟進)의 집.

전국적으로 치러진 공무원 임용 고시가 2차에 걸쳐 시행될 때 광주부(廣州府)의 이방비장(吏房裨將) 조성진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40대 후반의 조성진은 광주 관아의 아전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조성진의 집안은 고려조에 유력한 가문이었으나 조선 개국 당시 조선의 억압 정책으로 광주 관아의 아전이 된 집안은 광주 제일의 땅을 가진 대부호였다.

조성진이 비록 광주부의 이방비장에 불과하였지만 종2품의 경관인 광주유수가 부임을 하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광주 지역에서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고려 때부터 내려온 그의 집은 두 번의 전란에도 불에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광주부에서 제일 큰 집이었다.

지금 그의 집 사랑방에는 광주 관아의 아전 중 조성진을 따르는 10여 명의 아전과 토관들이 모여 있었다.

열 명의 아전들도 얼굴 표정이 조성진과 같이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방이 말했다.

“이방 어른, 무슨 대책이 있어야지 이렇게 되면 우리들의 설 자리가 없어져서 결국은 몰락합니다.”

그러자 그 말에 형방 또한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실시하는 임용 고시는 합격을 하여도 이전과는 달리 운신의 폭이 극도로 좁아져 단지 급여만 받고 생활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온 기득권을 전부 내놔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참석한 아전들이 두서없이 대표 격인 조성진에게 말을 하였다.

이들의 내놓은 의견은 지금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멸한다는 것이었다.

조성진이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은가.”

조성진의 말에 호방비장(戶房裨將)인 신병훈인 말을 했다.

“저는 이번에 두 번 시험을 봤지만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 공부 외에는 대대로 물려받은 향리(鄕吏) 업무만 아버님께 배웠을 뿐입니다.”

이방(吏房)의 이속(吏屬)이며 조성진의 동생인 조성호(趙晟浩)가 말을 했다.

“형님, 이러다 우리다 죽고 맙니다. 조정에서 왜 이렇게 임용 고시를 치르겠습니까? 조정에서 우리를 죽이려는 게 분명합니다.”

신병훈이 다시 말했다.

“그렇습니다. 조정에서 우리에게 칼을 들이댄 거나 다름없습니다.”

조성진이 말을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는가.”

조성진의 말을 듣고 호방비장인 신병훈이 다시 말을 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앉아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조정에서 이번에 새로 선출한 공무원을 앞세워 우리가 그동안 한 일들을 파헤치면 이 방에서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병훈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조성진이 말했다.

“그렇다고 조정과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성질이 급한 조성호가 다시 말을 했다.

“싸울 만하면 싸워야지요. 지금 조선 천지에 우리 같은 처지의 향리들이 수천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노비들을 면천을 조건으로 끌어모으면 수만은 족히 모을 수 있습니다. 이 조선에 군대가 얼마나 있습니까. 그건 군적을 담당하는 우리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자 가만히 있던 병방비장(兵房裨將) 심만석이 말을 했다.

“맞습니다. 조정의 병력이라야 얼마 전 별시로 뽑은 장용외영의 병력 1,000명과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의 5,000명의 병력뿐입니다. 지방은 우리가 장악해서 속오군을 중앙에 보내지 않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성진은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다.

병방비장 심만석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지방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향리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하여 속오군을 조정에 보내지 않는다면 심만석의 말대로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고민을 하던 조성진이 결심을 하였다.

이대로 조정의 시책에 넋을 놓으면, 자신의 대는 몰라도 오래가지 않아 자신의 집안은 멸문되거나 재산이 거덜이 나는 것은 불문가지였기 때문이다.

조성진이 말했다.

“알겠네. 한번 해보세.”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성진의 말 한마디에 모여 있던 향리들이 환호하였다.

마음을 굳힌 조성진은 신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성진이 자신의 동생을 보고 말했다.

“너는 이방의 이속들을 데리고 충청도로 가라.”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병방.”

병방비장 심만석이 바로 대답했다.

“예, 이방 어른.”

“그대는 병방의 이속들과 전라도를 맡으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호방.”

호방비장인 신병훈이 대답했다.

“예, 어르신.”

“그대는 경상도를 맡으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경기도를 직접 맡겠소.”

그러자 신병훈이 물었다.

“한강 이북은 어떻게 합니까.”

“그곳은 포기해야 하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인원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조성진이 말했다.

“한강 이북 쪽은 그동안 우리들과 별로 왕래가 없었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번에 임용 고시(任用考試)에 합격한 아전들 대부분이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들이 많다고 들었네. 이 말은 이들이 조정의 시책에 충실히 따른다는 증거이기도 하네. 잘못하면 우리의 거사가 노출될 우려가 있으니 하삼도 지역만으로 거사를 준비하세.”

그러자 호방을 관장하던 심만석이 말했다.

“이방 어른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하삼도의 인원만으로도 충분한 인원이 모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한강 이북 지역은 아예 포기를 했다.

조성진이 말했다.

“병장기와 식량은 충분할 것이네.”

그러자 호방 심만석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각 고을마다 비축해 놓은 구휼미는 우리들 쌀독이고 관아에 비치된 병장기는 우리들 주머니칼이 아닙니까.”

심만석의 말에 모두 공감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모여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거사가 성공한 것인 양 했다.

이 당시 거사는 무기와 식량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성사가 가능한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성진은 거사 일을 3차 임용 고시 탈락자가 발표되고 사흘이 지난 12월 10일로 결정을 하여 하삼도로 내려가는 이들에게 알려주었다.

하삼도를 향해 인원들이 은밀히 광주를 빠져나가자 조성진도 경기도의 각 고을을 돌기 시작하였다.

거사 일을 미리 정한 것은, 시일을 늦출 경우 겨울이 닥쳐 거사가 어려워지면 참여한 아전들 사이에서 조정에 고변하는 자가 나올 우려가 있어서였다.

거기에 각 지역별로 행동 요령과 중간 집결지를 미리 정하여 반드시 그 시간에 모이도록 하여, 빠른 시간에 한성에 당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이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이미 국정원의 첩보망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정철학 차장은 임용 고시가 시행되기 전부터 전국의 요원들에게 특별 명령을 내렸다. 각지의 아전들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한 것이었다.

조성진의 거사 준비는 즉각 장준하에게 보고가 되었고 장준하는 이들이 전부 모여 거사를 하도록 놔두라고 지시를 하였다.

1792년 11월 20일 13시. 북한산성 행궁

정조가 오늘 장준하를 만나기 위해 북한산성의 아랫마을 도착을 하였다.

정조는 북한산성에 올 때마다 이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낫것상을 받았다.

오늘도 대령숙수(待令熟手)가 만든 온면을 먹었다. 그리고 늘 해오던 대로 용호영의 군관들이 연(輦)을 메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북한산성에는 이미 장준하가 와 있었다.

장준하가 정조의 안부를 물었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정조가 그 말에 화답을 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소. 위국공도 잘 지내셨소?”

“저도 전하의 염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인사를 마친 정조가 물었다.

“그래, 오늘을 무슨 일로 과인을 보자고 했소?”

정조의 말에 장준하가 담담히 말했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역모가 있습니다.”

“뭐요, 역모?”

정조가 장준하의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준하는 정조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힌 정조가 소파에 다시 앉자 장준하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역모는 이번 공무원 임용 고시에 불만을 품은 아전들이 주동하였습니다. 이들은 전하께서 시행하는 공무원 시행령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것을 우려하여 집단적으로 역모에 가담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정조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반역 도당의 무리가 전부 얼마나 되고 주동자는 누구요?”

“주동자는 광주부(廣州府) 이방비장 조성진이라는 자이고 그들의 무리는 이제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파악이 되지 않으나 저의 추측으로는 4, 5만은 될 것으로 파악합니다.”

정조가 깜짝 놀랐다.

“4, 5만이나 된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빨리 잡아들여 역모 가담자를 줄이는 게 좋겠소.”

그러자 장준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지금 이들만 잡아들인다면 불평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우려가 있습니다.”

정조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세를 불리게 할 수는 없지 않소.”

장준하가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했다.

“전하, 이들의 이동 경로로 보아 한강 이북은 결집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한성 공략은 반드시 화성(수원)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화성에는 전하의 친위군인 장용외영이 있습니다. 그들을 믿으십시오.”

“내 장용외영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영의 병력이 고작 1,000명이오. 한 손이 열 손 감당 못하듯 어느 정도는 군세가 비슷해야 막아내지 않겠소?”

장준하가 정조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말했다.

“전하, 그들을 믿으십시오. 그들은 일당백의 전사들입니다.”

하지만 정조의 우려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병력 차가 너무 심하오.”

그러자 장준하가 차선책을 말했다.

“전하, 그러시다면 지금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으로 있는 서유대(徐有大)를 불러 지금의 상황을 극비리에 전해주시고, 훈련도감 병사들의 훈련을 위해 북한산성의 정휘 소령이 서유대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정휘 소령이 서유대 훈련대장에게 이번 반란 진압에 대한 훈련도감 병력의 부대 투입 문제와 이동 상황을 설명하게 하겠습니다.”

정조가 조금 안심이 된 듯 용안을 풀고 말했다.

“알겠소. 그리하리다. 더 필요한 것은 없소?”

장준하가 말했다.

“그리고 역모를 진압하고 나서 이들 반역 무리들의 처리 문제가 남습니다. 이들은 자신 노비들을 면천을 조건으로 반역에 참여시킬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노비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면천을 하고 싶어 참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처리와 아전들의 처리 문제를 어찌하실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정조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모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조선의 법이오. 그들은 법대로 처결될 것이오.”

그러자 장준하가 제안을 했다.

“그들을 역모의 죄로 벌주시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이오?”

“지금 파악된 것으로 반역 도당 중에 주축인 아전의 무리가 2, 3,000명 정도가 될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그들의 노비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제안 드립니다.”

그러면서 장준하는 정조를 한 번 쳐다봤다.

정조는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조를 보고 장준하가 다시 말했다.

“잡은 노비들을 앞으로 전하께서 축성하려고 하시는 화성 축성 공사에 투입하시는 등 조정의 개혁에 10년간 종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전들 중 주동 세력은 조선의 법대로 처결하시고, 나머지 인원은 전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들을 고향에서 천 리 밖으로 부처하며 이들에게는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20년간 부역에 종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혹여 앞으로 불손한 생각을 하는 무리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일거양득이 될 것입니다.”

정조가 누그러진 용안으로 물었다.

“그들이 기간을 채우면 그땐 방면하는 것이오?”

장준하가 답했다.

“그때는 저희가 외국으로 이들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 새로운 삶을 개척시키겠습니다.”

“음, 그 방법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오. 내 깊이 생각해 보겠소.”

장준하는 정조와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창덕궁으로 돌아간 정조는 훈련대장(訓練大將) 서유대를 은밀히 불렀다.

그날 밤 정조는 서유대에게 반란에 관한 말을 전하고 철저한 준비를 당부하였다. 준비는 극비리에 진행을 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부대 운용 문제는 따로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을 하였다.

서유대는 정조의 명을 받고 편전을 나오자마자 말을 달려 훈련도감으로 갔다.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역 부근에 있던 훈련도감은 정원이 4,500명이었으나 지금은 3,000명의 병력만이 상주하고 있었다.

훈련도감의 병력은 전원이 유급병(有給兵)이었고 대부분이 장기 근속병(長期勤續兵)으로 조선 제일의 병력이었다.

훈련대장은 훈련도감을 내부적으로 지휘 통제를 하는 훈련도감 중군과는 종2품으로 품계는 같았으나 실질적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자리였다.

서유대는 훈련도감 중군에게 정조의 극비어지를 설명하고 아울러 비밀 유지를 당부하였다.

훈련도감 병력의 훈련을 실시되었다.

신처선 별장과 동행하여 북한산성의 저격대대장 정휘 소령이 훈련도감을 찾은 것은 11월 25일이었다.

정휘 소령은 준비해 간 진압봉을 비롯한 장비로 진압에 필요한 훈련과 반란군 진압 시 부대 운영에 대하여 교육을 했다.

훈련대장 서유대는 자신의 부대가 최일선에서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고 뒤에서 반란군을 체포, 제압하라는 말에 내심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어의에 따라야 하는 군인의 본분을 생각하여 두말하지 않고 정휘의 지시에 따랐다.

그리고 서유대는 처음 보는 진압 장비와 운용 요령 및 훈련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이 장비와 운용 요령 및 훈련을 실시하는 정휘 소령에 대하여 서도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61세의 서유대가 보기에는 30대 초반의 정휘 소령은 손자 나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훈련도감 장병들에게 훈련을 실시하는 정휘가 마음에 쏙 들었다.

서유대는 대구 사람으로 훈련대장을 비롯하여 5군영 대장을 21번이나 역임한 정조 시대 군부의 군권을 장악했던 핵심 인물이었다.

체격이 크고 성품이 너그러워 당시 사람들은 그를 복장(福將)이라 불렀다.

장준하도 장용외영의 하성호 여단장에게 지시를 하여 특별 훈련을 하도록 하였다. 북한산성의 저격대대에게도 대기 상태로 준비를 하게 하였다.

장용외영은 이들 반역 세력을 막을 주력이었기 때문에 특별 훈련에 들어갔다.

1792년 12월 1일 제주(濟州) 위국공 집무실.

위국공의 집무실에서 비상 대책 회의가 열렸다.

전군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 조선의 반란 사건을 주제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최성용이 지금까지 진행된 사항에 대하여 간단히 경과를 보고했다.

최성용의 보고가 끝나자 장준하가 지휘관들을 보고 말을 하였다.

“이 반란 사건은 어떻게 보면 곪아 있는 살이 터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을 덜어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형구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들이 수면 아래 잠겨 있으면 찾기가 힘들었을 텐데 알아서 기어 나오니 우리야 편하고 좋네요.”

이형구 대장이 장준하의 말을 받자 신중한 성격의 송기훈 제독이 말을 받았다.

“불필요한 민간인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그의 말에 최성용 대령이 답을 하였다.

“앞으로 전투가 벌어질 수원 방면의 전 고을에 청야 정책을 시행하여 주민들을 소개할 계획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이형구 대장이 말을 하였다.

“최 대령, 아무리 장비가 앞서 있어도 병력이 너무 적은 게 아닌가?”

최성용이 말했다.

“지난 역사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에서 벌어진 전투 중 1894년(고종 31년) 11월에 동학혁명 중 최대이고 마지막 전투였던 공주 우금치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전투에서 무라타 연발 소총으로 무장한 2,000명의 일본군과 조선 관군 3,200명에게 20만 명의 농민군이 섬멸되었습니다. 이것이 동학혁명이 실패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올라오는 반란군의 수준과 우리 병력은 지난 1894년보다 격차가 훨씬 더 벌어져 있습니다. 우리 군을 믿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이형구 대장이 말했다.

“그래, 맞아. 믿어야지.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만일을 위해 준비를 해놓겠네.”

송기훈 제독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에 개입을 하는 것입니까?”

송기훈 제독이 장준하에게 개입 문제를 말하자 장준하가 말했다.

“이번에 반란을 제압하면 전면에 별무사를 내세울 계획일세. 그들이 정조의 지휘를 받아 화성을 축성하고 조선 각지의 도로를 닦는 일을 관리하도록 할 계획이네.”

최성용이 부연 설명을 했다.

“이번에 반란이 진압되면 조정에서 시파와 벽파는 물론 남인들까지도 완전히 위축될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이들이 앞으로 정조의 개혁을 노골적으로 반대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종철 중장이 모처럼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조에게 위해는 가하지 못하더라도 복지부동하면 문제가 있지 않겠나?”

최성용이 우종철의 질문에 답했다.

“정조의 치세가 앞으로 8년 남았습니다. 우리가 들어와서 약간의 변화가 발생한다고 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벽파들이 그사이 결정적으로 반대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정조의 독주인데 오히려 독주를 놔두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래야 불순분자들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장준하가 최성용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지금 국정원이 조선의 정보를 계속 수집하고 있고 위험한 인사들의 움직임이 거의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 조정의 일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송기훈 상장이 말을 했다.

“이번에도 특수효과 팀을 투입하여 작전을 벌입니까? 제 생각에는 많은 전투 병력의 투입보다는 오히려 이들의 작전이 기대가 됩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활용하는 것이라 당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상당히 기대됩니다.”

송기훈 상장에 우종철 중장이 대답을 하였다.

“그렇습니다. 특수효과의 위력은 지금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자주 하면 위력이 반감되지만 이들 반란군들에게는 그 효과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자 최성용이 대답했다.

“이번에도 특수효과 팀이 투입됩니다. 합참의장님께 결재를 받겠습니다.”

이형구가 바로 대답했다.

“그래, 최 대령. 바로 올리라 하게. 지휘관은 자기 병사 안 다치고 이기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니겠어?”

그러자 최성용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성호 여단장에게 합참의장님께 직접 보고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아전들 반란 사건은 특수효과 팀이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이형구 대장은 제주에서 2개 여단 병력이 대기하도록 지시하였다.

최성용은 하성호 중령에게 특수효과 안건을 이형구 대장에게 보고드리라고 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이형구는 그 자리에서 결재를 해주어 특수효과 팀 파견이 결정되었다.

1792년 12월 10일 조선 한강 이남 전역.

12월초가 되자 조성진 반란의 동참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조성진은 반란군의 본영을 이천으로 결정했다.

그동안 조성진이 하삼도 각처에 파견한 광주부 아전들은 각처의 반란 참여 세력들이 동의를 하는 대로 이천에 있는 반란군 본영으로 이 소식을 전하였다.

이전부터 조정에 불만이 있었고 조성진과는 친분이 있던 이천 군수 조경철이 반란에 동참하기로 하여, 이천 관아를 반란군 본영으로 삼은 것이다.

12월 10일이 되자 하삼도와 경기도에서 동시에 아전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의 반란은 3차 시험까지 탈락한 아전들의 가세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아전들은 자신의 집 노비와 관노를 면천을 미끼로 끌어들였다. 각 지방 관아의 수령들은 이들의 위세에 눌려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이들은 각 고을마다 거의 참여한 병방들의 주도로 노비들을 집결하여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전장에 나서지 못하는 늙거나 병든 노비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우마차에 구휼미 등의 군수물자와 쌀을 싣고 동참했다.

전라도에서 600명의 아전들과 1만 명이, 경상도에서 1,000명의 아전들과 1만 5,000명이, 충청도에서 1,000명의 아전들과 1만 명이, 경기도에서 400명의 아전들과 2만 명의 인원이 참여하기로 하여 총 3,000명의 아전들을 포함한 5만 5,000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의 참여가 결정을 되었다.

이전부터 관아의 아전들은 자신들만의 정보 전달 체계가 있었다.

이두(吏讀)와 같이 자신들만 아는 표기법이 이번 반란에 아주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각 도의 반란 주동자들은 군이 집결되는 대로 이천의 조성진이 있는 본영으로 파발을 띄웠다.

이들의 반란에 대비를 하고 있던 국정원 요원들을 통해 이들의 이동 경로가 속속 수원의 장용외영으로 들어왔다.

국정원 요원의 노력으로, 반란군들이 이천 지역에서 병력을 집결하여 수원을 돌파하고 송파나루에서 한강을 건넌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반란군들은 지방 관아는 그대로 두고 한성을 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북상을 개시했다.

북상을 하면서 각 고을의 병방(兵房)들은 수시로 모여 반란군의 조직을 짰다. 서로 비슷한 아전이란 처지로 이들의 결집력은 대단하였다.

반란군들이 조선의 남쪽 끝에서 올라오기 시작할 때부터 반란군의 주요 이동로에는 주변 고을의 아전들과 노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세가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눈치를 보던 지방관들도 하나둘 반란에 참여했다.

10일 시작된 이래 반란 세력은 불과 보름 만에 그 세력이 엄청나게 불어나 처음에 파악된 참여 인원보다 많은 6만 명을 넘어섰다.

1792년 12월 20일 화성 장용외영 주둔지.

화성의 장용외영에는 북한산성에 주둔해 있던 정휘 소령의 저격대대와, 용호영을 훈련시킨 교관 그리고 제주도의 가온에서 특수효과 팀이 들어와 있었다.

오늘은 훈련대장 서유대가 훈련도감 병력 3,000명을 끌고 화성에 와 있었다.

하성호 중령은 서유대 훈련대장에게 작전 상황을 설명했다.

하성호 중령의 작전 계획을 들은 서유대 대장이 의문을 표시한 채 말했다.

“그럼 내가 이렇게만 한다면 되는 거요?”

하성호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영감(令監)께서는 우리 장용영이 반란군을 진압할 때 반란군의 뒤에서 이들의 도주로를 적극 차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전의 성패가 서 대장님이 지휘하시는 훈련도감에 달려 있습니다.”

서유대는 처음 보는 군관이 천총의 지위로 장용외영을 지휘하는 것도 이상하였지만 왕이 반드시 이자의 말에 따르라는 게 더욱 이상하였다.

하지만 전시인 까닭에 우선은 하성호 중령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하였다.

“알겠소. 그럼 작전은 언제 시작할 것이오?”

하성호 중령이 앞에 있는 지도를 보고 말을 했다.

“지금 저희 첩보로 파악된 반란군의 예상 진격로가 이쪽 방향입니다. 우리는 이곳 양지현과 용인현 사이에 있는 좁은 지형에 매복을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우리 군은 이곳 주변에 이미 매복에 들어가 있습니다. 영감께서는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훈련도감의 병력들이 작전 지역에서 동요하지 않고 작전대로 시행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수만 명에 이르는 반란군들을 합심하여 막아도 힘이 들 것이다. 서유대는 이들이 자꾸 뒤에 도망병의 체포만을 당부하자 은근히 화가 났다.

그래도 자신은 조선 제일의 무관이 아닌가.

서유대는 속으로 화가 났지만, 그래 당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이들의 말에 따랐다.

“알겠네. 그럼 나는 우회하여 이들이 지나가고 나서 덕평 방면에 주둔해 있겠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성호가 설명한 대로, 양지현을 지나가는 양지천은 노적산을 끼고 돌아서 흘러가는 데서부터 용인현 입구에 있는 봉두산까지 앞뒤가 막힌 병목 지형이다. 길이가 4㎞ 정도 되고 폭이 200m 정도의 논밭 지형이 양지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어 있었다.

하성호 중령은 이 지형에서 일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하성호는 먼저 장용외영의 병사들과 폭파 전담반을 보내 이 지형의 좌우에 매복을 시켰다.

용인 방면의 병목 지형에 반란군이 모두 들어오면 돌과 흙과 나무 등이 쏟아 내려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장애물을 설치하기로 했다.

반란군이 머물 것으로 예상되는 양지현 관아 일대 지역과 이 병목 지형에 특수효과 팀에게 영상 시스템 설치를 주문하였다.

정휘 소령의 저격조에게는 병목의 전후 지역을 맡겼다. 중군이 머물 곳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저격조의 70명을 나머지는 양지현 관아 부근 반란군 숙영지 지역에 매복을 지시하였다.

이들이 하는 매복은 현대식 군 전술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엄폐호(掩蔽壕)는 1790년대의 조선의 군으로는 발견이 불가능한 기도 비닉을 완벽하게 유지한 매복이었다.

하성호가 전군에 지시하여 모든 준비를 마치게 하고 반란군을 기다리던 날이 반란군이 이천을 출발하는 26일이었다.

1792년 12월 25일 한성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경기도 한강 이남과 하삼도의 변란은 각지의 파발을 통해 한성에 알려졌다.

깜짝 놀라 편전을 달려온 대신들과는 달리 이미 이들의 도발을 알고 있었던 정조는 이전의 조정과는 달리 10일 일어난 아전들의 반란을 지체 없이 관보 게시판을 통하여 한성 주민들에게 바로 알리게 하였다.

대신들은 주민들의 동요를 들어 반대를 하였으나 정조는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한성의 주민들은 동요하였으나 정조 임금이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교지를 믿었다. 불안하였지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도 어리석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렇게 숨기지 않고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무언가 준비가 있지 않겠는가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이야기하였다.

정조도 또 특별히 교지를 내렸다.

한성에 있는 어떤 사람도 이번 변란을 피해 한성을 빠져나갈 경우, 이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행동으로 반드시 처벌한다는 교지를 관보 게시판에 게시하였다. 백성들은 이런 정조의 특별 교지를 믿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훈련대장 서유대의 편전 입시와 훈련도감의 훈련 강화 등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이미 눈치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관보에 변란 소식을 백성들에게 사실대로 알릴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여서 조정의 대신들은 난감해졌다.

본래 변란이 일어나면 조선의 대신들은 자신들의 집부터 챙기는 게 우선이었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했다고 호종 공신을 책봉할 정도로 변란이 일어나면 관리들은 말만 군신유의(君臣有義)이지 효라는 핑계를 대고 일단은 자신의 집이 최우선이었다.

이들의 머리에는 임금은 바뀌어도 집안은 대를 잇는다는 생각이 박혀 있었다.

대신들은 전전긍긍했다.

한성의 대문은 닫히지 않았으나 각 문의 경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운신이 힘들었다. 특히 경기도에 집이 있는 관리들은 목이 탔다.

정조는 다시 한번 교지를 내렸다.

만일 조정의 관리라는 자가 임금의 말을 어기고 도성을 비운다면 이는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는 교지였다.

서로 눈치를 보고 있던 신하들이 하나둘씩 사직 상소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승정원으로 올라오는 사직 상소를 바라보는 정조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이들은 지금 도망을 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핑계야 갖은 핑계를 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성을 도주하겠다는 것이다.

정조는 마지막으로 다시 교지를 내렸다.

절대 자신이 도성을 비우는 일은 없을 것이고 반란군이 군세가 아무리 많아도 반드시 격멸할 것이니 불안해 하지 말라는 교지였다.

이 교지는 기름에 불을 부었다.

조정에서는 정세가 좋지 않으니 교지를 계속 내린다는 말이 돌았다. 조정의 신하들은 너도 나도 사직 상소를 올리고 자리에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그래도 이들은 사직 상소라도 내고 도망가니 양심은 조금 있는 편이었다.

12월 25일이 되어 이천에 집결한 반란군이 그 세력이 6만이 넘는다는 소문이 돌자 도성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쌓였다.

이럴 때 국정원의 정보망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국정원은 ‘지금 조정의 군대가 이들을 막고 있으니 도성까지는 절대 넘보지 못한다’는 소문을 급속히 퍼트리기 시작하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동요는 하였으나 소문을 믿고 기다리자는 사람들과 피난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이때 정조가 일어섰다.

정조는 남아 있던 신하들의 만류에도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의 2층 누각에 올랐다.

창덕궁 돈화문 앞 광장에는 지금 많은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한 명이 2층 누각을 보고 말을 하였다.

“저기 2층에 있는 분이 주상 전하 아니신가?”

“그런가보이. 용포가 보이는 것 보니 주상 전하신가 보네.”

“맞다. 우리의 주상 전하시다, 전하.”

그러자 모여 있던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올리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전하.”

“전하.”

정조는 그들의 외침을 듣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들이 힘든 것은 정사를 잘못 본 자신의 책임이 아닌가.

정조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주상 전하 천세’를 외치며 절을 하기 시작하였다.

광장에는 벌써 수천의 한성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백성들이 절을 하고 천세를 외치고 있을 때 용호영별장 신처선은 정조의 경호에 극도로 예민해 있었다. 다행히 한성까지는 간세가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백성들이 잠시 잠잠해지자 정조의 옥음이 울려 퍼졌다.

신기하게도 정조의 옥음은 광장에 있는 백성들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과인은 이곳 창덕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적도들이 도성으로 쳐들어오면 과인은 활을 들어 그들을 막을 것이고, 그들이 성을 넘는다면 과인은 돌을 들어서라도 막을 것이다. 나의 백성들아, 조선의 백성들아 과인을 믿으라. 과인이 그대들과 함께할 것이다.”

생전 처음 임금의 옥음을 들은 백성들은 감격했다.

지금 이 나라의 하늘이 미천한 자신들과 함께하겠다고 하지 않은가.

백성들은 정조의 옥음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것을 본 정조도 용안에 옥루가 흘러내렸다.

돈화문 앞에서는 조선이 건국되고 한 번도 없었던 풍경이 연출되었다.

수천의 백성들은 천세를 불렀고 수많은 백성들이 스스로 좌우 포도청으로 뛰어가 자경단(自警團)을 자임하였다.

정조는 각 포도청에 이들을 단 한 명도 소홀히 하지 마라는 전교를 내렸다.

백성들 사이에도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물론 이는 국정원의 힘도 있었지만 후일 파악한 바로는 이 소문만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백성들의 감격과는 달리 은밀히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수십 명의 신하들이 변복을 하고 한성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도성을 빠져나가던 조정의 신하들과 양반들은 길에서 자경단에게 걸리기만 하면 몰매를 맞았으며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백성들은 이것을 전부 포도청에 바쳤으며 이것을 안 정조도 이들의 일을 눈감아줄 지경이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로 수백의 전현직 관리들이 도성을 빠져나갔으며 이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국정원의 그물에 포착돼 있었다.

반란 사건이 일어나니 제일 바쁜 곳이 국정원이었다.

정철학 차장은 벌써 며칠째 잠을 못 잤는지 모른다.

사명감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정철학 차장이 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한성의 양반들을 감시하고 반란군의 간세를 수색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미 십여 명의 반란군 첩자들을 색출하여 잡아들였다.

지금 도성을 빠져나가는 전현직 관리들과 사대부들의 현황도 빠짐없이 수집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