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01)

유령선

1792년 9월 25일 수원 화성 장용외영 주둔지.

조선의 무과(武科)는 식년(式年, 子·卯·午·酉年)시와 별도로 특설되는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각종 비정규 무과가 있었다.

식년시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가 있었으며, 고시 과목은 강서와 무예 2종류가 있었다.

영조 연간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무예의 종류로 보사(步射)로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말을 타고 하는 마술(馬術), 기창(騎槍), 기추(騎芻)가 있었고, 그 외 유엽전(柳葉錢), 조총(鳥銃), 편추(鞭芻)를 고시했다.

1894년까지 시행된 무과는 식년시에는 대체로 규정인 28명을 선발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훨씬 인원을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몇백 인, 심한 경우는 몇천에 달하기도 하였으며 가장 많이 선발한 경우는 1676년(숙종 2년)의 정시에서는 1만 8,251인을 뽑아 이른바 만과(萬科)라는 별칭을 낳기도 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무과 급제자의 총수가 문과 급제자의 총수인 약 1만 4,500명의 열 배가 넘는 15만 명을 초과하기에 이르렀다

무예의 종류로는 선조 이후 명의 척계광(戚繼光)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참고하여, 무예 12반을 훈련도감에서 군병들에게 훈련시켰다.

영조 때는 장창 등의 기예를 세분하여 18반으로 늘렸으며, 정조 때는 여섯 가지 기예를 더하여 24종의 무예로 정비, 무예 24반이 되었다.

정조 때는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박제가(朴濟家, 1750~1815) 등을 시켜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했다.

24반 무예의 종류에는 목장창,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기창(騎槍), 당파, 낭선, 예도(銳刀), 쌍수도, 왜검, 제독검, 본국검, 쌍검, 마상쌍검, 월도, 마상월도, 협도, 등패, 권법, 편곤, 마상편곤, 곤봉, 마상곤봉, 격구, 마상재(馬上才) 등이다.

이 24반 무예는 순조 연간 정순황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장용영을 폐지하면서 모든 무기의 판매가 금지됨으로써 대부분 전하여지지 않는다.

조선의 군병 체계는 기효신서에 따른 체계였다.

기효신서의 군병체제는 속오법(束伍法)과 삼수기법(三手技法)이었다. 임란 이후에는 선조가 조선의 군 편제를 대폭 바꾼다.

기효신서에 따라 편제된 조선의 군제는 중앙군으로는 훈련도감, 지방군으로는 속오군(束伍軍)을 두었고 인조반정 이후 설립된 5군영도 기효신서에 따라 편제되었다.

조선의 실정을 감안하지 않고 저술된 기효신서에 따라 부대의 편제도 조선 전기의 부대편제를 폐지하고 대(隊), 기(旗), 초(哨), 사(司), 영(營)의 부대를 편제한 것이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무능하고 부도덕한 왕이 철저한 검증도 거치지 않고 단지 이여송이 기효신서에 나오는 병법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는 것 때문에 채택한 것이다.

이 병제는 병제가 채택된 후에도 조선과는 괴리된 병제로 조선이 끝날 때까지 항상 문제가 됐다.

이 편제는 후일 인조 때 두 차례 호란 때도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쓸모가 없었다.

1907년 8월 1일 일본에 의해 해산된 조선의 군대가 일국의 군대로는 부끄러울 정도인 겨우 8,800명일 정도로 허약한 군대가 되어버렸다.

정조가 9월 10일 무과 별시를 시행했다.

별시는 그 시행을 관보 게시판에 미리 게시하여서인지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이날의 별시는 조선에서는 기존에 실시되었던 무과와는 전혀 과목으로 무과가 시행되었다.

이론 시험인 강서는 그동안 시행된 중국의 병서인 무경칠서(武經七書)―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울요자(尉?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삼략(三略), 육도(六韜)―가 아닌 현대적인 전술 전략과 각 부대의 전투 이론 등을 출제하였다.

무예로는 먼저 현대적인 군대의 완전군장과 비슷한 무게를 지고 100리 구보를 하거나, 특공 무술과 같은 일대일 겨루기나 총검술과 같은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아주 낯선 무예들을 겨루었다.

특히 조총(鳥銃) 사격에서는 이날 처음으로 조선신해총이 조선에서 첫선을 보였다.

제주 출신 1,000명의 병력은 정조의 명으로 함경도의 22개 관아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와 증서를 만들어 참석을 하였다. 이 병력 중 50명은 가온 출신이었고 특히 본부여단장 하성호 중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무과 별시는 친위군인 장용외영에 자파 인원을 투입하기 위한 의도였다.

조정의 각 정파에서도 많은 수의 장정들이 응시를 시켰지만 1,000명을 선발하는 무과에서 기존의 조선 출신은 단 한 명도 선발되지 못했다.

이런 별시를 거쳐 선발된 1,000명의 장병들이 그동안 준공을 마친 화성의 장용외영의 군영에 주둔하였다.

정조는 하성호 중령에게 파격적으로 천총의 품계를 내려 대외적으로도 지위를 맞춰주었다.

이 장용외영의 부대는 조선에 처음 주둔하는 부대로 북한산성에 주둔 중인 가온군 200명과 함께 가온의 조선 상륙의 전초부대 역할을 할 것이다.

1792년 9월 30일 나가사키 가온무역 상관.

지난 3월 대마도주의 해적질을 미리 감지하여 몰살한 후 이 사실을 안 정조의 노여움으로 제포와 염포왜관을 폐쇄한 조선은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부산포만을 열어두고 있었다.

부산포에서도 왜인들의 거주를 극히 제한하여 왜관 내 숙박을 금지하고 교역 물품에도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자 대마도의 생활은 궁핍을 면치 못했다.

섬에 있는 대부분의 배들은 3월의 전투로 수장되었기 때문에 대마도에는 물론 큐슈(九州)에 있는 대마도의 영지에도 왕래할 배가 부족했다.

대마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 3월의 일을 큐슈에 전하였고 조선의 왜관 폐쇄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자 대마도의 해적질에 관한 소문은 순식간에 나가사키 전역에 퍼졌다.

가온무역 상관에서도 대마도의 해적질에 관한 소문을 은밀히 퍼트렸다.

나가사키는 이 소문으로 발칵 뒤집혀졌으며 나가사키부교소(長崎奉行所)의 지토(地頭) 가토 마사모리(家藤昌盛)도 이 소문을 접하였다.

사람을 풀어 이 소문의 진상을 확인한 결과,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자 가토 마사모리는 이 사실에 난감해 했다.

잘못하면 쓰시마 번(對馬藩)에 치명상을 입힐 사건의 처리에 고심했다.

대마도의 해적질 사건은 나가사키(長崎)뿐이 아니라 일파만파로 번졌다.

사건이 무르익은 것을 안 별무사 별좌(別坐) 기정진은 석원형 과장과 협의하여 나가사키 부교소(長崎奉行所)를 방문하였다.

기정진은 지토인 가토 마사모리에게 대마도 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를 했다. 대마도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가온무역 상관 철수까지도 고려하겠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에 당황한 가토 마사모리는 잠시의 시간을 요청하였다. 기정진이 그에게 말미를 주자 가토 마사모리는 에도의 막부로 급히 사람을 보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쓰마 번(薩摩藩) 숙노(宿老)인 카바야마 치카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번의 미래가 걸린 상관 폐쇄 문제 해결을 위해 사쓰마 번의 번주(藩主) 시마즈 나리노부(島津?宣)에게 보고를 했다. 사람을 급히 에도로 보내 이 사실을 전대 번주에게도 보고하여 대책을 강구하도록 알렸다.

에도 정치권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사쓰마 번의 전대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는 이 보고를 받고 대노했다.

시마즈 시게히데는 당장 막부(幕府)의 수석노추(首席老中)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에게 이는 막부의 치욕이라고 말하고 이를 강력하게 대처하여야 한다는 요청을 한다.

이미 이 일을 보고받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도 가온무역 상관이 철수하는 데 따른 세수 손실을 우려하면서, 쓰시마 번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해적질에 노발대발했다.

해적질을 하려면 은밀히 하든지 100척의 배와 3,000명이 전멸을 당할 정도라면 전력을 투구한 것이다. 그러고도 이런 결말이 나온 것인데, 그렇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아야 했다.

고심을 하던 끝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결정을 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쇼군에게 전말을 보고하였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 쇼군의 재가를 얻었다.

에도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면서 개혁을 주도하던 수석노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말은 곧 쇼군의 말과 다름없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자신을 보좌하던 막부의 와카도시요리(若年寄)인 야마가와 사쿠자에몬(山川 作左衛門)을 불러 대마도의 사건에 대해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야마가와 사쿠자에몬은 참근 교대(?勤交代)를 하기 위해 에도에 머물고 있던 쓰시마 번주 소 요시카쓰(宗義功)를 불러 막부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소 요시카쓰는 자신의 일로 인하여, 조선에서는 강력히 항의가 있었고, 만일 쓰시마 번의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다면 막부에게 엄청난 세원이 된 나가사키의 가온무역 상관을 철수를 하겠다고 하고 있으며, 쇼군이 조선에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할 지경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 요시카쓰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소 요시카쓰는 오래 지나지 않아 결심을 한다.

어찌 되었든 다이묘(大名)로서 쇼군에게 짐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상황은 누구의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었다.

소 요시카쓰는 바로 쇼군에게 할복을 할 수 있는 영광을 달라고 청원하였다.

이틀 후 쇼군에게 함(函)이 내려왔고 함에는 30㎝의 단도 와키자시가 들어 있었다.

함이 내려오고 3일 동안 참선을 하던 소 요시카쓰는 에도의 저택 마당에 천을 치고 할복 의식을 거행했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쳐주는 가이샤쿠(介錯)는 자신의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숙노인 미우라(三浦)에게 맡겼다.

흰 천이 쳐진 할복장에 앉아 있던 소 요시카쓰가 할복을 했다.

잠시 후 참근 교대를 위해 에도로 따라온 무사 전원이 소 요시카쓰를 따라 할복을 했다.

쓰시마의 숙노인 미우라는 이들의 시신을 전부 수습하여 화장을 하고 에도 부근에 있는 사찰에 이들을 안치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곳에서 할복하면서 사건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들의 전원 할복은 에도에 참근 교대를 위해 와 있던 다이묘들의 동정을 사면서 이 동정이 막부에 대한 보이지 않은 반발로 나타난다.

그중 가장 크게 반발을 한 번은 조슈 번(長州藩)이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반발을 하기에는 번주인 모리 나리후사(毛利?房)의 입지가 아직 약한 처지였다.

모리 나리후사는 은밀히 사람을 풀어 간몬 해협 건너편의 구주(九州) 지역에 있는 사가 번(佐賀藩)과 후쿠오카 번(福岡蕃) 등 구주의 번들과 후일을 위해 계속하여 유대를 다져나가기 시작한다.

후일 이 사건은 막부에 엄청난 짐으로 돌아온다.

막부의 수석노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소 요시카쓰의 할복 후 후속 절차를 진행했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는다는 핑계로 주민들 전원을 큐슈의 쓰시마 영지로 이주시키고 공도(空島)로 만들어 폐번(廢藩)을 해버린다.

조선, 일본과 미묘한 양속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지켜나가던 쓰시마 번은 이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버렸다.

막부 시절에 흔히 있던 폐번과 감봉은 쇼군의 절대적인 고유 권한으로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 막부의 쇼군은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다이묘들을 통제, 감시했다.

생각지도 않은 막부의 폐번과 공도 정책에 가온무역은 당황했다.

가온무역은 쓰시마 번의 입지를 줄이고 쓰시마 번주 소 요시카쓰를 굴복시켜 앞으로 중간기지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예 공도가 되어버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이다.

이런 정책이 가온무역에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가온무역은 즉시 특수효과 팀에서 좌도도와 같은 영상 시스템을 만들게 하였다. 이들을 대마도에 파견하여 주둔하면서 주변에 고기라도 잡기 위해 큐슈나 혼슈(本州)의 어부들이 출항을 나오면 영상 시스템을 가동해 대마도를 아예 유령의 섬으로 만들었다.

1792년 10월 1일 창덕궁 선정전(善政殿).

정조는 의금부 판사(判事) 김이소(金履素)를 박종악(朴宗岳)의 후임(後任)으로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했다.

정조는 지난 영남만인소 당시 임오역적에 대한 토벌을 주창하고 김종수를 공격하였던 박종악을 김종수에 대한 의리로 파직했다.

정조는 속으로야 시파인 박종악을 두둔하고 싶었지만 영조와의 의리를 중시하는 세력을 무조건 외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이소는 지난 유월 정조에게 보고되어 이번에 시행되는 지방 공무원 임용 고시와 임용된 공무원 교육을 준비하기 위해 공무원교육원(公務員敎育院)을 운용할 임용도감 도제조(都提調)를 겸직했다.

임용 고시는 전국의 지정된 시험장에서 10, 11, 12월 세 번에 걸쳐 시행이 되며 누구나 지원이 가능했다.

임용 고시는 절대 평가제로 실시되며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지선다형 문제도 출시될 예정이었다. 전국의 300여 곳의 지방 관아에서 동시에 치러진 임용 고시는 조선에서 기록을 많이 양산했다.

임용 고시는 철저한 준비를 거쳐 10월 5일 전국적으로 동시에 실시되었다.

9,000명의 지방 공무원을 선발할 이번 시험은 조선의 시험 중에서 가장 많은 10만여 명의 인원이 응시를 하였고 응시자들의 연령층과 신분층이 다양했다.

지방 공무원 응시생은 종9품이 받던 녹봉의 두 배를 지급한다는 것과 정식으로 신분이 보장되며 정6품까지의 진급이 가능하다는 것을 백성들은 관보 게시판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재직하던 아전뿐이 아니고 양반들과 양민들 그리고 중인들이 대거 응시를 했다.

응시율은 10 대 1이 넘는 경쟁이었으며, 1차 시험의 결과 3,000명만이 합격을 하였고 나머지 선발 인원은 11월 12월 재심으로 선발하기로 했다.

이 3,000명의 인원 중 아전 출신은 절반도 되지 않았으며 그것도 나이가 많거나 문제가 많거나 토색질을 일삼던 아전들의 대거 탈락했다.

임용 고시는 철저한 보안 속에 치러졌으며 11월 5일 치러진 2차 임용 고시에는 더 많은 인원이 몰렸고 2차 임용 고시에서 4,000명의 인원이 합격했다.

이 합격 인원들 중에는 기존 아전 출신이 고작 1,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아전들의 형편을 고려하고 지방업무의 연속성을 우려하여 3차 시험에 아전의 수를 반수 이상 합격시키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12월 5일 치러진 3차 시험에서는 1,000명 이상의 아전이 합격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3,000명이 채 되지 않아 반수 이상이 탈락하였다.

조선 개국 이래 고려의 유력 세력들을 누르기 위해 시행된 아전 정책과 지방 세력들이 대개편을 맞았다.

합격한 인원들은 기수별로 전원이 천안에 새로 지어진 공무원교육원에서 시간 여행을 해 온 가온 출신 교수들의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모든 교육은 한글로 진행되었으며 주로 공무원의 자세나 소양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았다. 관내 유민들과 소작농의 이주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교육받았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공무원 교육은 많은 성과를 낳았다. 특히 이전과는 다른 공무원에 대한 처우로 참석자들이 높은 참여도를 보였다.

합격된 순서로 교육을 받은 공무원들은 교육을 마치고 배정된 지역으로 돌아가 합격을 하지 못한 아전들에게 업무 인수를 받게 했다.

1개월간 실시된 공무원 교육을 마친 합격생들은 출신지를 중심으로 배정되었다. 정식 업무는 1월 1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의정 김이소는 임용도감 도제조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9,000명에 달하는 많은 수의 공무원을 교육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였고, 정조는 이를 크게 치하하였다.

김이소는 이때 임용도감 도제조 업무를 보면서 정조가 앞으로 행하려고 하는 개혁을 이해하면서 결정적으로 시파(時派)로 돌아선다.

1792년 10월 10일 창덕궁 선정전(善政殿).

조정이 발칵 뒤집혀졌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 정존중(鄭存中)의 상소가 올라와 있었다.

그동안 계속 수세에 몰리던 벽파가 정국을 전환하고자 정조의 극한 신임을 받고 있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정면으로 탄핵하는 상소였다.

그동안 수세에 몰리던 노론이 정조의 신임이 지극한 대사헌 정존중을 내세워 정국 돌파용으로 채제공을 탄핵한 것이다.

정존중은 음서로 관직에 나와 60세인 1780년(정조 4년) 광주 목사(光州牧使) 재직 때 60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 병과에 1위로 급제했다.

이후 정조의 신임으로 중용되다 벼슬이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고 지금 나이가 72세였다.

아무리 음서로 출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60의 나이에 정3품 당상관인 광주목사가 과거에 매달릴 정도로 과거는 사대부의 필생의 목표였다.

조선의 수백만의 사대부는 다른 것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과거가 인생의 절대 목표였다. 그 정도로 왜곡되고 권력 지향적인 사회구조였다.

노론 계열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정홍상(鄭弘祥)도 영조에게 강력한 탕평책의 실시를 건의하는 소(疏)를 올렸다. 그 정도로 강직한 집안 출신의 정존중을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정조는 올라온 상소를 놓고 고심에 고심을 했다.

채제공이 누구인가. 사도세자에게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유일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를 하였고, 영조도 이 사건으로 후일 정조에게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할 정도로 당대의 충신이다.

홍국영 실각 후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음에 몬 자들에 대한 강경한 처결을 주장하는 채제공을 견제하기 위해 홍국영의 파당으로 몰아 결국 8년간 은거를 하게 되었다.

그런 채제공을 1788년 자신이 직접 친필로 된 특명으로 우의정에 임명한 이래 지금까지 복심(腹心)과도 같았던 충신이 아니던가.

우의정으로 임명된 때 채제공의 나이 68세였고 그리고 5년의 시간이 지났다.

두 사람 모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도 넘을 나이였으나 정조는 이들을 중히 쓰고 있었다.

정존중의 탄핵은 진산 사건의 원칙 없는 처결과 5년간의 상신(相臣)으로서의 처신에 대한 탄핵으로, 명분을 갖춘 상소를 채제공이 정조 자신의 심복이라고 무조건 내칠 수는 없었다.

지난달 남인의 이가환(李家煥)을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해 벽파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고 있는 정조에게 상선(尙膳)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좌상 대감 입시이옵니다.”

“드시라 해라.”

이윽고 편전에 채제공이 들어와 정조에게 인사를 하고 좌정하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으나 채제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정조가 채제공을 보며 말했다.

“좌상, 그게 무슨 말씀이오. 과인이 좌상을 벌하다니요?”

채제공이 정조의 말에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전하, 조정의 신하 된 자가 자신의 허물을 남에게 탄핵당했다 함은 씻을 수 없는 불충이옵니다.”

그러자 정조가 고개를 흔들었다.

“진산 사건이야 좌상께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과인이 그리하라 이른 것이 아니요. 그것은 좌상의 허물이 아니지 않소.”

“전하, 당시 신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것을 굽힌 것도 전하를 성심으로 보필하지 못한 것이옵니다.”

“아니오. 좌상 과인의 허물을 어찌 좌상에게 전가할 수 있겠소.”

정조의 말에 채제공이 더욱 몸을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지금 신이 물러나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 저를 놓으셔야 저들이 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옵니다. 전하, 앞으로 전하께서 하셔야 할 개혁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험한 길인데, 노신이 그 앞을 막을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부디 저를 벌하시어 전하의 개혁의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조는 채제공의 말에 탄식을 했다.

“아! 좌상.”

정조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7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얼마나 정력적으로 자신을 대변해 왔던 채제공이었던가.

탄핵을 받은 지금도 조선 개혁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벌하라고 하는 그를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채제공이 앞으로 가서 채제공의 손을 잡고 말했다.

“좌상, 잠시만 고생하시오. 과인이 힘이 없어 좌상을 고생시키는구려.”

그러자 채제공은 더욱 죄스러워 하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전하, 정치란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신 전하의 성심을 알고 있사오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한참 동안 왕과 신하가 손을 잡고 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이 잡은 손은 놓을 줄 몰랐다.

다음 날 정조는 편전에서 전교를 내린다.

탄핵당한 채제공을 파직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탄핵을 한 정존중도 파직하고 평안도(平安道) 구성부(龜城府)로 유배형에 처했다.

이 전교로 노론은 자파의 중신들을 모아놓고 환호를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환호는 오래지 않아 조선을 뒤흔든 엄청난 사건으로 가라앉게 된다.

1792년 10월 20일 한성 부근 내수사전(內需司田).

한성 부근에 있는 내수사전에서 추수가 한창이다.

베이는 벼는 작년부터 보급된 탈곡기를 이용하여 그 자리에서 탈곡을 하여 가마니에 옮겨 담았다.

금년 봄에 내수사전 3,000결에 심은 신품종 벼는 그 수확량이 예상보다 많은 70퍼센트가 증산되었다.

신품종 벼는 시간 여행 오기 전 쌀 증산을 위해 수십 년간 한국의 농업진흥청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지속적인 벼 품질 개량을 한 벼였다.

병충해와 냉해에 특히 강하고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좋아 예상보다 많은 쌀 증산을 가져온 것이다.

조선의 1결은 240말의 쌀이 생산되는 면적을 말한다. 1말은 지금의 1분의 3인 8㎏이고, 1결은 100부(짐), 1부는 10속(묶음), 1속은 10파(줌)이다.

내수사전은 전부를 최고 상답으로 보고 1결을 3,000평으로 했다.

내수사전을 병작반수(竝作半收, 자신이 지은 작물의 반을 가지는 방법으로 가장 대표적인 소작법) 하는 농민들은 지금 신이 났다.

작년보다 일손도 훨씬 덜 들고 수확은 반이 넘게 늘어났다. 예년에 수확한 전부를 가져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깨춤이 절로 났다.

1결당 1명씩 소작을 하는 농민들은 가마당 80㎏ 기준으로 24가마의 쌀을 수확하여, 12가마를 내수사(內需司)에 납부하고 12가마로 1년을 살았다.

거기에 8가마의 쌀이 더 자신들의 몫으로 떨어지니 모두가 주상 전하의 공덕이라며 송덕가(頌德歌)를 불렀다.

내수사전의 증산은 바로 창덕궁 편전에 전달된다.

내수사에서도 결당 8가마의 증산으로 2만 4,000석의 여유가 생겨 내수사전이 두 배 늘어난 것 같았다.

내수사전에서 쌀이 증산되고 백성들이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송덕가를 부른다는 말에, 정조는 그동안 채제공의 파직으로 우울하던 기분을 확 바꿀 정도였다.

정조는 이를 크게 기뻐하였고 내년부터 전국적으로 신품종 벼를 보급하라고 지시하였다.

정조는 특별히 내수사에게 수확한 벼를 종자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잘 보관하라고 특별히 전교(傳敎)를 내렸다. 추가 수확된 쌀의 일부를 도성 인근에 어렵게 사는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배려로 지난번 방납과 공납 진상 등의 철폐에서 얻어진 민심은 더욱 정조에게 쏠렸다.

아울러 이 소식을 정조가 친히 장준하에게 연락하여 그의 공을 치하하였다.

1792년 10월 30일 호주 여왕의 땅주 신무산(웨이파) 부근.

한반도의 78배나 넓은 호주 대륙은 남북의 기후차도 만만치 않다.

본격적으로 호주 대륙의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지금은 북쪽의 보크사이트 산지인 신무산(新茂山) 지역 부근에 있는 대단위 밀 농장에서 호주 대륙 처음으로 파종이 시작되었다.

한반도와 정반대의 기후를 가진 호주 대륙의 곡물 파종으로 남북이 거의 한 달의 시간 차가 발생할 정도였다.

104 금강호 비행선이 완공을 하여 이제는 네 대의 비행선이 운항되고 있었다.

호주, 북미, 유구도, 연해주와 제주의 정기항로를 운항하는 비행선으로 원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의 서신 왕래나 긴급을 요하는 물품의 수송에 한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양을 내해로 하는 넓은 땅을 가진 가온무역의 입장에서는 항공 수단의 빠른 확충이 관건이었다.

모든 제반 여건이 갖춰지는 몇십 년간의 하늘은 이 비행선이 담당할 것이다.

비행선도 헬륨 가스 생산 문제로 앞으로 각 개발 지역에서 자체 생산되는 몇 년 후까지는 생산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호주에서는 그동안 인도양을 방어하던 잠함 손원일과 LST함에 기범선 세 척을 묶어 호주 서해안 방어에 들어갔다. 그리고 2년 동안 유럽의 범선 수십여 척을 격침, 침몰시켰다.

특히 손원일 함이 바닷속에서 발사하는 어뢰는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 가끔 한 척씩 살려 돌아가는 범선에서 나오는 소문으로 인도양 호주 항로는 마의 항로로 불렸다.

미신을 잘 믿는 선원들이 호주 항로를 타는 것을 극력 꺼려 하였다.

다니엘 로빈슨 선장은 세 척의 배를 몰고 지금 호주 항로로 가고 있었다.

로빈슨 선장은 2년 전부터 호주로 가는 배들이 사라지는 것에 주목하였다.

호주는 이제 막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영국이 유형수들을 보내는 커다란 섬으로만 알고 있었다. 영국조차도 당시에는 호주 대륙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후일에 가서야 호주 대륙을 완전히 일주하여 그 크기를 알게 된 때는 1800년대였기 때문에 1792년대의 호주는 그저 커다란 섬에 불과하였다.

아직은 버뮤다 삼각지대가 마의 지역으로 인식되기 이전의 상황이라 다니엘 로빈슨 선장은 이 지역이 마의 바다가 아니라 해적의 소행으로 생각했다.

만일 자신이 이 지역을 탐사해서 문제를 찾아낸다면 귀족의 작위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니엘 로빈슨 선장은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 지금 호주 항로에 나선 것이다.

호주 항로로 간다는 말을 하자 선원들 모집이 어려워서 세 척의 배를 운항할 선원들에게 기존의 다섯 배의 임금을 주기로 하고 모집을 하였다.

배의 선장들을 비롯한 간부 선원들에게는 항해를 마치고 특별 보너스를 주기로 계약을 하였다.

어렵게 선원을 모은 다니엘 로빈슨 선장은 케이프타운을 떠나 항로 남쪽으로 내려가 호주 방향 쪽으로 순항하고 있었다.

다니엘 로빈슨 선장의 배들도 1,000톤급 범선이라 그의 함대는 손원일 함의 레이더에 즉각 포착이 되었다.

관측장교가 함장에게 말했다.

“선박 발견 9시 방향 30㎞ 지점입니다. 저놈들 또 오는가보네.”

레이더 관측장교 정성철 중위가 최정호 대령에게 선박 발견을 보고하였다.

“함을 선박 가까이 다가가라.”

함장 최정호의 지시로 함이 선박에 다가가자 최정호는 잠망경을 띄워 그 배가 영국 국적의 범선임을 확인했다. 최정호 대령은 자신이 처리를 하려다 기범선 함대에 무전을 보냈다.

주변에서 경계를 하고 있던 기범선 세 척 중 한 척의 배가 영국의 탐험가인 다니엘 로빈슨 선장의 함대를 향해 서서히 전진했다.

최정호 대령은 모처럼 온 저 배를 전부 침몰시키지 말고 공포를 심어주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저 배들 중 두 척을 침몰시키고 한 척을 돌려보내기로 작전을 세우고 오늘은 유령선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가온무역의 범선 함대에는 영국 범선 한 척을 유령선으로 개조한 범선이 있었다.

그 범선은 내부를 너무 실감나게 개조하여 배를 개조한 특수효과 팀도 들어가기 꺼려할 정도로 무서워하였다.

날이 점차 저물어가고 있던 저녁 무렵 아직은 주위 사물이 눈으로 보일 때였다.

기함 로즈 호의 가장 높은 마스트에 있던 견시수(見視手)가 배를 발견한 것이다.

“전방에 범선이다.”

로빈슨 선장이 견시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일자 망원경으로 들여다보았다.

그의 망원경에도 배가 보였고 그 배가 돛도 펼치지 않고 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조타수(操舵手), 배를 좌 전방으로 돌려 항진하라.”

로빈슨 선장의 말에 조타수가 키를 좌 전방으로 맞추어 배를 전진하도록 하였다.

잠시 선단이 순항하자 이제 육안으로도 배가 보일 정도가 되었다.

갑판장이 로빈슨 함장에게 말했다.

“함장님, 그런데 저 배가 이상한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로빈슨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군. 뭔가가 이상한 느낌이네. 배 위에 사람도 없는 것 아닌가?”

함장과 갑판장은 망원경으로 앞에 떠 있는 배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한참을 훑어보던 로빈슨이 말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것 같군.”

이윽고 다니엘 로빈슨 선장이 갑판장 존 스미스에게 말했다.

“이보게. 존, 한번 건너가 보아야겠네. 자네, 나와 같이 건너가보세.”

“알겠습니다.”

배가 아무래도 이상하여 건너가기 싫었던 갑판장 존 스미스는 선장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보트를 내려 20명의 선원들과 같이 그 배로 가보기로 하였다.

로빈슨 선장과 갑판장 스미스를 포함한 20명의 로즈 호 선원들은 보트를 내려 앞에 있는 배로 노를 저어갔다.

배 앞에 보트를 대자 그 배의 몰골이 보였는데 무언가 끈끈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한 선체에는 희미하게 ‘빅토리아’라는 선명이 보였다.

갑판장 존 스미스가 선장에게 말했다.

“빅토리아 호라면 지난번 호주 항로에 항해를 갔다가 사라진 배가 아닌가요?”

그러자 로빈슨 선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네. 작년 호주 선단의 기함인데 그 배가 여기서 표류하고 있었나보네. 가까이 가보세. 내부에 생존자가 있는지도 알아보세나.”

존 스미스가 선원들에게 외쳤다.

“배 가까이 보트를 대라!”

갑판장의 지시에 따라 선원들은 보트를 빅토리아 호 옆에 붙이고 줄을 날려 고정했다. 먼저 한 사람이 올라가서 확인한 후 줄사다리를 내렸다.

두 명의 선원을 제외한 모든 선원들이 갑판에 올라가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판장은 선원들을 시켜 갑판을 수색하였으나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날을 점차 어두워져가는데 아무도 없는 배 위에 서 있던 선원들은 삐걱거리는 빅토리아 호의 판자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긴장했다.

선원들은 괴괴한 분위기에 말도 하지 않고 숨소리만 높였다.

로빈슨 선장일 말했다.

“자, 배 내부도 수색을 해보자.”

그러면서 로빈슨이 선원을 둘러보고 지시를 했다.

“자네들 다섯 명은 여기 갑판을 경계하고, 나머지는 하나씩 수색해서 생존자를 찾아보세.”

선장의 지시에 선원들이 움직였다.

선장과 갑판장은 선원을 각각 나누어 그들을 데리고 선실로 내려갔다.

그들이 선실에 들어가고 나서 두 시간이 지났다.

선실로 내려간 그들이 혼비백산하며 뛰어 올라왔다.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린 선장과 갑판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서둘러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자신의 배를 향해 전속력으로 노를 저어 배에 올라탔다.

로즈 호에 오른 선장은 배를 케이프타운으로 돌려 전속 회항을 명령했다.

배는 그의 지시대로 선수를 돌렸다.

삐걱.

그런데 이들의 배가 선수를 돌릴 때쯤 서 있던 빅토리아 호가 큰 나무 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였다.

“으악!”

갑자기 선장과 갑판장 등 그 배를 탔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꽈광. 쩌저저저적.

이렇게 로즈 호의 갑판이 정신없을 때 선수를 돌리던 바로 옆에 있던 배가 갑자기 폭발음을 내더니 배가 두 동강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손원일 함 수중 폭파 팀의 작품이었다.

다니엘 로빈슨 선장은 그래도 침착하였다.

“보트를 내려 선원들을 구하라!”

그러자 정신을 차린 갑판장 존 스미스가 선원을 독려했다.

“빨리 보트를 내려라. 선장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느냐?”

다니엘 로빈슨 선장의 말에 선원들이 옆에 있던 보트를 내렸다. 그리고 부서지는 배에서 떨어져 내리는 선원들을 구해내기 시작하였다.

그사이에도 빅토리아 호는 서서히 배를 움직여 로즈 호로 접근하고 있었다.

갑판장이 소리쳤다.

“으악! 선장님, 빅토리아가 다가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선원부터 구하라.”

“위험합니다. 배를 출항해야 합니다.”

“안 돼. 선원의 생명이 우선이야.”

다니엘 로빈슨 선장은 옆에서 겁에 질려 배를 출항하자는 갑판장의 말을 무시하고 선원들 구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래도 이번 선장은 직분에 충실하구만.”

최정호 대령은 잠망경에서 보이는 불빛을 보면서 배 위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날은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그믐날의 달도 없는 하늘은 별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하였지만 야간 투시경이 장착된 잠망경은 어느 정도 상황을 알아볼 수 있었다.

끼익. 삐걱.

다니엘 로빈슨 선장은 빅토리아 호가 자신의 배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구조 작업에 몰두하였다.

최정호 대령은 다니엘 로빈슨 선장의 헌신적인 구조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처음의 계획을 수정하여 이들의 배를 더 이상 침몰시키지 않기로 하였다.

몇 시간의 구조 작업을 마치고 두 척의 배는 서둘러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갔다.

로즈 호 선장 다니엘 로빈슨은 항구에 도착하자 두 척의 배를 서둘러 팔아 선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두 번 다시 배를 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무조건 호주 항로는 가지 말라고만 하였다.

빅토리아 호에 올랐던 18명의 선원들은 그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전원이 고통스럽게 살다가 몇 년 사이에 전부 죽었다.

그들은 병에 걸려 있던 동안 옆에서 보기 힘든 고통을 호소하였다. 주위에서 아무리 물어도 누구도 배 안에서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몇 년 후 다니엘 로빈슨 선장이 죽을 때 유언같이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겼다.

백여 년이 지난 후 가온무역에서 이들의 유족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했다. 그들의 후손들에게는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서로 죽고 다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가온무역이 만들어놓은 의도적이고 비인륜적인 함정에 걸려 수년을 고통 속에 시달리며 죽어갔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개척 시대의 모든 것이 공개되었어도 그때 특수효과 팀이 사용한 약품에 대하여는 끝내 비밀에 부쳤다.

두 척의 배에 타고 있던 선원도 두 번 다시 호주 항로에는 배를 타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서양 선원들은 이 항로로 배를 몰고 가는 것을 아주 꺼렸다.

그 이후 케이프타운에서 호주 항로로 운항하려는 서양의 배는 10여 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겨우 생기기 시작했다.

손원일 함이 로즈 호를 상대할 때 김영훈 총독은 뉴질랜드 섬을 탐험하였다.

뉴질랜드 탐험대는 총 여섯 척으로 구성된 기범선이었다. 최정식 호주함대 사령관이 범선 함대를 지휘하였다.

호주 범선 함대는 1,500톤급 세 척과 3,000톤급 세 척으로 이루어진 함대였다. 지난번 효종함이 남태평양 서양 세력 소개 정책을 점검할 겸하여 여섯 척의 함대로 고선지항을 출항하였다.

뉴질랜드 북섬에는 마오리족이 50만이 살고 있었지만 남섬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북섬에서도 거의 북쪽 지역에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었다.

김영훈 총독은 최정식 대령에게 지시를 하여 북섬에는 마오리족의 국가를 건설해 주었다. 그리고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남섬에는 가온무역의 요새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마오리족에게 그들 고유의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을 펼치게 하였다. 필요하면 그들을 보호해 주겠지만 그게 아니면 스스로 군대를 양성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호주 원주민들과는 달리 45개 마을로 이루어진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들은, 귀족과 평민 노예들 계급이 있었으며 간단한 철기도 있을 정도였다.

단지 이들의 철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칼과는 달리 날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고구마와 감자가 주식이며 원시 농경을 하고 있었다.

김영훈 총독은 문자가 없는 이들 50만의 마오리족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이들의 언어를 한글로 표시하게 하여 가온무역에 포함시킬 계획이었다.

김영훈 총독의 이 계획은 그 후 결실을 거두어 20년 후 아오테아로아(Aotearoa, 길고 긴 흰 구름의 땅)라고 하는 마오리족 국가가 탄생하였다. 아오테아로아는 남태평양 최대 국가로 성장한다.

최정식 대령은 남섬과 북섬 사이 해협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요새를 건설하였고 북섬에 들러 마오리족과 통교를 하였다.

북섬의 마오리족 사람들과 통교는 그들의 친절함으로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슈퍼컴퓨터에서 뽑은 마오리어를 갖고 대화를 하려는 최정식 대령을 아주 좋게 보았다.

이들의 언어는 1,600㎞ 떨어진 호주 원주민들과는 달라서 각자의 대화를 이해하는 데는 6개월 정도가 걸렸다.

최정식 대령은 이들 마오리족에게 새로운 농사법을 가르쳐주고 양과 소를 공급하여 대단위 목장을 개발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김영훈 총독의 의도대로 마오리족의 국가 건설과 개발을 유도할 계획이었다.

최정식 대령은 남섬에 요새를 건설하고 탐험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에게 두 척의 범선을 주어서 각자 동서 해안을 탐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요새 건설이 완성되는 대로 내륙 탐사도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최정식 대령은 또 2년 전에 소개한 남태평양에서의 서양 세력에 대한 점검을 하기 위해 효종함이 돌았던 주요 해로를 따라서 여러 섬들을 확인하기 위해 두 척의 범선을 보냈다.

이 확인 작업이 끝이 나면 뉴기니 섬을 기준으로 동족의 여러 군도의 서양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가온무역은 섬의 원주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들을 전부 독립시킬 계획을 세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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