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자와 얻은 자
1792년 8월 20일 창덕궁 선정전.
유민들과 소작농의 전라도 지도군과 함흥지역으로 분리 이주계획은 전국적으로 알려졌으며 이 소식은 관보 게시판을 통하여 조선 전역에 알려졌다.
한강 이북에서 지도군까지의 거리는 이들에게는 너무 먼 거리였고 가는 일만 해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각 지방관청에서 이들의 숙식을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부패를 척결하지 못한 지방관과 아전들 때문에 지도군까지 가는 길은 열악하였다.
그래서 가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아 나서지 못하고 주저앉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함흥으로도 갈 수 있다는 말은 희소식이었다.
함경도와 평안도 등 전국의 깊은 산속에는 화전과 사냥으로 살아가던 많은 유민들과,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들과 많은 수의 도망노비가 있었다.
이렇게 깊은 산에 숨어살던 많은 사람들은 이 조치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들이 있는 곳에는 너무도 깊은 산중이라 관의 힘은 미치지 못하였지만 보부상들은 들어갔다.
특히나 국정원에서는 보부상이 깊은 산속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내려오게만 한다면 해당 지역 요원의 확인만으로 바로 포상을 실시했다.
이 포상을 받기 위해 보부상들이 전국의 산 곳곳을 샅샅이 뒤지자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보부상의 지속적인 설득에 산을 내려왔으며 간혹 산적들의 산채도 발견되었다.
산적의 산채가 발견되면 부근의 요원들이 지체 없이 출동을 하였고 10여 명의 조를 이룬 요원들과 이들을 도와주는 50여 명의 조직원 정도로 100명 정도의 산적들은 간단하게 제압되었다.
이들을 제압할 때는 최루탄과 고무탄이 사용되었으며 조직원들은 외부에서 경계를 서고 10명의 요원들이 방독마스크를 쓰고 제압을 했다.
요원들의 제압 작전을 직접 보지 못한 조직원들은 제압이 끝나고 산채에 들어가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냄새가 나서 산적이 제압되고도 산채로 들어가기를 꺼려하였다.
요원들도 이들에게 직접적인 제압 작전은 보여주지 않았다.
이러한 제압 작전은 가끔 부상자가 나왔지만 팔다리에 활을 맞는 정도의 부상이라 곧 회복이 되었다.
제압된 산적들은 거의가 2, 30명 정도의 무리였고 많아야 50명을 넘지 않았다.
대부분이 생계형 산적이었으며 그동안 전국적으로 20여 곳의 산적소굴을 소탕하였으며 제압된 산적들 중 구제불능인 악질 흉악범은 30명을 넘지 않았다.
악질 흉악범 전원은 각지의 관아로 넘겨져 법의 심판을 받게 하였고 나머지는 전주 제주로 보내 특별재활훈련을 받도록 했다.
그러자 조선의 산에는 산적의 씨가 말랐으며 이로 인해 산적의 위험에서 벗어난 상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들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상업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들 보부상의 활약으로 산속에 숨어서 비참하게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조선 전역의 산적수괴 30여 명의 체포는 각 지방관을 통해 정조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정조는 이미 20여 개 지역의 산적 소탕을 정철학을 통해 보고받았기 때문에 악질 흉악범(주로 산적의 수괴)인 그들 30명이 전체 산적 500~600명 중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각지의 지방관의 장계를 보았다.
지방관들의 장계는 차이가 있었으며 열네 곳에서 장계가 올라왔다.
지방관 중 자신의 공으로 올린 지방관이 9명이나 되었고 다섯 명은 정직하게 지역의 주민들이 합심하여 잡아들였다고 했다.
이러한 일은 정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정철학을 통해 산적들의 일을 보고받은 정조는 열다섯 곳의 장계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한 곳의 장계를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정조는 이들 열네 곳의 지방관 중 바르게 장계를 올린 다섯 곳은 포상을 하였고, 아홉 곳의 지방관은 의금부 도사를 파견하여 전원압송을 하였다.
의금부 판사 김이소는 왕의 명에 따라 도사들을 파견하면서도 내심 의아해 하였지만 정조의 처사에 그저 따르기만 하였다.
요즈음의 정조는 이전의 타협을 주로 하던 임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이 속한 남인과 벽파는 들고일어났다.
삼사의 관원들의 상소도 빗발쳤지만 정조는 단 한마디 비답도 내리지 않았다.
이들이 모두 잡혀 오는 15일 동안의 조정은 대간들의 상소와 중신들의 정조의 명을 거두게 하려는 시도가 하루의 시작과 끝이었다.
특히 벽파는 빼앗긴 정국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아주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심지어는 영수(領袖)인 김종수(金鍾秀)가 독대(獨對)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독대는 위험한 정치 행위였다.
잘못하면 반대파의 집중공격을 받아 정치생명이 끝나기도 하는 위험한 수였다.
벽파 전체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종수(金鍾秀) 개인만은 아꼈고 정조는 윤시동(尹蓍東). 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자신의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파당을 짓는다고 유배도 보내기도 하였지만 그의 강직함을 높이 샀다.
정조는 그의 독대가 몰고 올 파장을 우려하여 외관들이 모두 오면 알 거라는 비답을 내리며 독대를 해주지 않았다.
정조가 이렇게 나오는 데는 벽파도 어쩔 수 없었다.
15일 후 모든 외관들이 들어왔고 곧바로 정조의 친국이 열렸다.
친국장에는 채제공을 비롯한 김종수, 윤시동 등 대소 신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내관들이 소리 높여 정조의 국청 입장을 알렸고 모든 신하들은 고개를 숙여 정조의 입장에 인사를 하였다.
이윽고 정조가 자리에 앉자 의금부 판사 김이소가 대신들 앞에 나서며 말했다.
“전하, 죄인들을 모두 잡아들였사옵니다.”
김이소의 말이 떨어지자 잡혀온 외관들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전하, 소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리 잡아들이십니까? 신 등은 산적들을 잡아들인 죄밖에 없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다른 자가 말을 이어받았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신이 백성들에게 해악이 되는 산적을 잡아 조정에 장계를 올린 것이 죄가 됩니까?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전하.”
잡혀온 모든 관리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국청에 울려 퍼졌다.
정조는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
조정의 중신들도 처음에는 이들의 말을 듣고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정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들이 들었다.
국문을 한다면 그동안의 관례로 죄가 있든 없든 일단은 주리를 틀든지 하는 방법으로 일단은 기선을 제압한 후 없는 죄도 만들어야 하는데 정조는 이들의 말을 묵묵부답으로 듣고만 있었다.
국청에 잡혀온 죄인들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하나둘 말을 그치기 시작하였고 잠시 후 모든 죄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정조는 그들이 입을 다물어도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국청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러자 영중추부사 김종수가 벽파를 대신하여 말을 하였다.
“전하, 이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결백함을 고하고 있사옵니다. 이들의 처벌은 부당하옵니다.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중추부사 김종수가 말을 하였으나 그래도 정조는 답이 없었다.
김종수가 다시 말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자 정조가 그동안 한마디 말이 없이 앉아 있던 한 사람의 죄인을 지목하며 말을 했다.
“그대는 왜 다른 자들처럼 변명을 하여 자신의 변호를 하지 않는가?”
그 서슬에 김종수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죄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군망상(欺君罔上)의 죄를 지은 죄인이 목이 베인들 무슨 변명이 있사옵니까. 그저 죽여 주시옵소서.”
죄인의 말에 정조가 말을 했다.
“그래도 하나쯤은 그대 같은 자가 있기를 바랐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제야 주변의 대신들은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여덟 명의 수령들도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잠시 후 한 수령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자신을 변명하였고 그 소란은 한참을 계속되었다.
잠시 후 또 소란이 잦아들자 이번에는 정조가 말을 하였다.
“네놈들, 계속 변명을 해보아라. 어디까지 과인을 기망하는지 들어보자.”
그러자 잡혀온 수령들은 정조의 서슬에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정조가 다시 말을 했다.
“빨리 더 말을 해보아라. 네놈들 말을 한마디도 빠지지 않고 다 들어주겠다.”
국청의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친국을 해야 할 정조가 오히려 죄인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하자 국청에 참석한 신하들은 당황하였다.
왕이 죄인을 심문하고 죄인들이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데 이런 국청은 없었다.
잠시 죄인을 질책하던 정조는 옆에 있던 용호영별장 신처선에게 말했다.
“용호영별장 신처선은 저놈들의 죄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공개하라.”
그러자 신처선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정조의 명을 받았다.
“신 용호영별장 신처선, 주상 전하의 명을 받드옵니다.”
신처선은 죄인을 하나하나씩을 호명하며 그들의 죄상을 공개하였다.
신처선은 그들이 잡았다고 장계를 올린 산적들이 어느 산채에서 무슨 짓을 하였으며 왜 잡혔고 언제 잡혀서 어떻게 했는지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신처선이 죄상을 공개하는 동안 수령들은 안색이 하얗다 못해 거의 누렇게 변했다.
신처선의 설명을 듣고 있던 조정의 신하들도 그만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신처선이 설명한 말에 의하면 이들은 왕을 능멸한 죄인 중에서도 상 죄인이었다.
이윽고 신처선의 말이 끝이 났다.
신처선의 말이 끝나도 정조는 한참을 죄인들을 노려보았다.
만일 별무사의 정철학을 통해서 이들의 죄상을 알지 못했다면 지금과는 반대의 입장이 되어 잘했다고 이들을 포상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정조는 그 생각을 하면 끔찍했다.
갑자기 조정의 대신들 전부가 믿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한참을 이들을 쳐다보던 정조가 말했다.
“왕을 능멸할 정도로 출세가 좋더란 말이냐. 네놈들이 조선의 사대부더냐. 네놈들이 공부한 경전의 대체 어느 항목에 그런 글이 나오더란 말이냐. 어디 네놈들 진짜 변명을 들어보자. 말을 해보거라. 누가 네놈들을 그렇게 가르쳤더냐?”
‘군주도통론’을 주장하는 정조답게 이들을 못 배운 자들로 몰아갔다.
잡혀온 수령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친국이 한나절도 되지 않고 끝나는 것도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왕조시대에 기군망상의 죄는 역모에 준하는 죄였으나 정조는 이들로 인한 또 다른 정쟁의 빌미를 제공하기 싫어서 죄인들의 판결을 그 자리에서 냈다.
죄를 뉘우치지 않은 자들은 전부 삭탈관직 하였고 모든 가산을 적몰하였다.
그리고 원방에 유배를 보내고 자신이 보위에 있는 동안 절대 이들을 풀어주지 못하게 했다.
죄를 뉘우친 한 명의 죄인은 파면조치하고 원방에 유배하는 것으로 처벌을 낮춰주었다.
삭탈관직(削奪官職)이란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는 형벌을 말하며 왕명이 있기 전에는 서인으로 살아야 하는,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사회적인 매장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죄를 시인한 자는 형을 낮추고 파직과 원방 유배에만 그쳤다.
정조가 의금부청사를 나가 대궐로 돌아가자 김종수를 비롯한 신료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지금 자신들 앞에 앉아 있는 자들은 자파의 관리이거나 혹은 경쟁세력의 관리들이었다.
9명을 보고 있으니 그들에게서 자신들의 초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도 만일 그러한 경우가 생겼다면 과연 사심 없이 처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을 수 없었다.
의금부 국청에 모여 있던 대신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정조는 마지막까지 장계가 올라오지 않은 철원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철원에 파견 나간 암행어사가 철원도호부사를 묶어 우마차로 호송하여 돌아왔다.
암행어사가 보고하기를 철원도호부사가 자기 임의로 철원에 인계된 산적을 엄청난 뇌물을 받고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대노한 정조는 그자를 반역의 죄로 다스려 효수하였고 그 일족은 전원 가산을 적몰당하고 원지에 부처되거나 관노로 삼았다.
죄 없는 가족들은 탐욕한 자 때문에 졸지에 노비가 되거나 거지가 되었다.
후일 폐지되겠지만 조선은 아직도 연좌제가 존재하는 나라였다.
효수된 자의 집안은 기호지방의 거대가문이었으며 그들에게서 몰수한 재산이 조선의 1년 세수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효수된 자는 벽파였으며 벽파에서 이번에 외직에 잠시 두었다 내직으로 불러들여 승지로 천거하려고 심혈을 다하여 키우던 자였다.
벽파의 영수였지만 강직한 성격의 김종수는 이 소식을 듣고 그 즉시 대궐로 들어가 사직상소를 올렸으며 이번에는 정조도 그의 근신을 명하고 그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일련의 사태로 벽파의 입지는 위축되어 갔으며 정국의 주도권은 점점 정조에게 집중되어 가고 있었으나, 조정의 각 정파들은 나름대로 이번 정조의 처결에 의문을 표하였다.
이 일은 크게 하려면 한없이 커질 수 있는 일인데 상징성 있는 김종수의 단지 근신을 명하는 사직이라니, 왕조시대에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정조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은밀히 정조의 행적을 속속들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정조의 행적 중에서 2~3달에 한 번 용호영의 훈련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북한산성에 다녀온다는 것 외에는 조금도 의심되는 부분이 없었다.
최근에 측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함경도로 보내는 자신들로 봐서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별무사의 전수도 지난 6월에 세금을 납부하면서 정조를 알현한 후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번 일과는 연관성이 없었다.
의심은 갔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정조가 무선 통신기를 갖고 있는지를 알 리가 없는 대신들은 답답하기만 하였다.
이들 조정 중신들의 움직임은 즉각 국정원의 정보망에 포착되었으며 정철학은 이들 정파 간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즉각 정조와 장준하에게 보고했다.
점차 조선의 모든 정보가 가온의 국정원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정치는 정보의 싸움이고 주도권의 싸움이어서 지금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정조에게 정보만 정확히 제공된다면 이전 시대와 같은 허망한 일은 없을 것이다.
창덕궁에는 2년 전부터 CCTV가 설치되었으며 그동안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내관(內官)들과 여관(女官)들은 은밀히 제거가 되었다.
이전에 파당에 기대거나 권력자의 힘을 믿고 대궐 내에서 보이지 않는 권세를 누려온 내관과 여관들이 소문 없이 하나둘 사라졌다.
이들은 은밀하게 사라지거나 사고로 인하여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 수는 무려 40명에 달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의 내관은 관직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여관은 거의 대부분이 상궁급이었다.
어떨 때는 하루에 3명이 돌연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전부 대궐만 벗어나면 사고를 당하였고, 권력자들이나 대비의 개인적인 심부름으로 대궐을 나서면 어떻게 된 일인지 반드시 죽었다.
정조는 대궐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말을 북한산성을 통해 알고 있었으며, 특히 정조의 화성능행에 참석하지 않은 내관들 중 당파와 관련된 자들과 권력자에 빌붙던 내관들이 정조의 2번의 능행에서 10여 명이 한꺼번에 죽어 나갔다.
조선의 내관들은 정원이 있으며 그 정원은 140명의 내관들과 내관이 되기 전 교육을 받고 있는 어린 내시 9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40명의 내관 중 59명이 관직에 임명된다.
여관인 궁녀는 680명(영조대의 기록) 정도였으나 영조 조에 가뭄이 들자 100명의 궁인을 내보내 지금은 580명의 궁녀가 있으며 고종 무렵에 450명의 여관이 있었다고 하니 500~600명이 있었다.
궁녀는 각 처소별로 충원하였으며 왕이라도 대비전이나 세자전의 궁녀들은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정철학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부터 북한산성에서는 송훈 소령의 저격대대가 상주하고 있었고 다른 곳은 손을 대지 않았지만 대궐만큼은 불순세력을 완전 소탕하라는 장준하의 지시가 있었다.
송훈 소령이 진급하면서 특수여단장으로 중부군으로 내려갔어도 정휘 소령의 지휘로 북한산성에는 저격1대대가 상주하고 있었다.
2년 사이 어떠한 사유라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면 당연히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출퇴근하는 내관들은 퇴근 후 어떠한 경우라도 조정의 관리들을 만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문제가 있다면 아예 대궐 내에서 이야기하였지 어떠한 경우라도 퇴궐 후 집 밖을 나서지 않는 것이 살길이었다.
사고사를 당한 내관들이 전부 대궐 밖에서 관리를 만나고 나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내관들이 사고사는 없어지게 되었지만, 내관들은 점점 관리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내관들 중 상전(尙傳)은 왕명을 전하는 직으로 비록 종4품이지만 그 임무 때문에 힘이 있는 자리로, 두 명이 정원이었던 상전이 네 명이나 연달아 죽어 나가자 아무도 상전을 맡으려 하지 않아 애를 먹을 정도였다.
새로 임명된 상전도 절대 일반 관리들과 대궐 밖에서 사사로이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당연히 상전에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내관들은 사고사를 당한 동료들이 권력자들과의 가깝거나 파당에 빌붙었던 자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여관들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되자 당연히 이들은 의식적으로 조정의 신하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조정의 각 당파들도 이들의 문제를 알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목숨을 걸고 만나자고 할 수는 없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대비전이었다.
자신의 오빠인 김구주가 죽게 된 이후부터 이를 갈며 벽파의 입장에서 자신의 입지를 닦고 있던 정순왕후는 자신의 측근 상궁이 자신의 명을 받아 대궐을 나가기만 하면 사고사를 당하자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이것이 정조의 공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이 의심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대궐 밖에서는 은밀히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사도세자의 혼령이 자신의 아들인 정조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만 골라서 저승으로 끌고 간다는 다소 황당한 소문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소문은 내관과 여관들의 연속된 사고사로 점차 사실로 굳어져갔다.
이러한 소문은 빠르게 한성 전역에 퍼져 나갔고 이 소문은 꼬리를 물어 왕에게 잘못 보이면 무조건 죽는다는 소문으로까지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정조의 문안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자신도 책임이 있으니 자신도 와서 데려가라고 막말을 할 정도가 되었다.
정조 사후 대리청정을 하면서 자신을 여자 군왕이라고 부르게 하고 신하들 개인의 충성서약을 받을 정도로 대가 센 정순왕후(貞純王后)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신하들도 최측근이 아니면 의식적으로 대비전에 방문 횟수가 줄어갔다.
그 후에도 간혹 이것을 잊어버리고 대신들과 접촉하는 대신들과 여관들은 예외 없이 당시는 아니라도 반드시 사고사를 당했다.
정순왕후는 점차 고립되어 갔으며 내관과 여관들은 자신들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792년 8월 31일 연해주(沿海州), 사백력(斯白力).
연해주 주민훈련소는 오늘 제1회 주민 수료식이 거행되었다.
1만 명의 주민은 교육을 받고 전원 북미로 향했다.
이들은 북미의 개척된 지역에 정착하여 정착지 개발과 각자 자신들이 맡은 업무에 종사할 계획이다.
수료식을 마치고 배에 오르는 주민들을 바라보는 연해주 총독 김진만 중장은 자신이 취임하고 첫 번째 보내는 주민들이라 남다른 애착과 기대감을 가졌다.
저들이 북미 개척의 선구자가 되어 후일 어떠한 평가를 받을 건가 하는 생각도 하였다.
김진만은 주민들이 승선하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려 총독부로 돌아갔다.
총독부의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동안 자신이 기다리고 있었던 이종찬의 보고서가 비행선을 타고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지난 6월 중순 밝달호 동쪽까지 점령을 마치고 밝달호를 따라 이르쿠츠크와 주변을 완전히 평정하겠다는 보고를 김재갑을 통하여 들었지만 이번에는 이종찬의 친필 보고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5월부터 연결하기 시작한 하바롭스크와의 전화선은 얼마 전 연결되었다.
서방원정대 대장 이종찬 소령의 보고서는 간단했다.
‘고토 회복, 도시 이름 명명 바랍니다. 소령 이종찬.’
그러면서 이종찬―푸가초프 조약서 원본을 보내온 것이다.
그것을 본 총독 김진만은 옆에 있던 연해주 사단장 장도현 대령에게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보고서를 본 장도현 대령은 김진만 총독과 함께 크게 웃었다.
간단하지만 많은 내용이 함축된 글이었고 그 글에 자신감이 들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허큘리스 수송기를 타고 장준하에게 전달되었으며 장준하 또한 이형구 대장 송기훈 상장과 함께 크게 웃음을 터트렸음은 불문가지였다.
전권을 위임받고 두 강을 경계로 푸가초프 백작과 계약을 하라고만 하였는데 이종찬은 가온의 지휘부에서 생각지 않은 안가라 강과 예니세이 강의 소유권과 밝달호의 소유권까지 대한제국의 소유로 명확히 영유권을 구분하여 조인을 해온 것이다.
장준하는 즉시 사백력의 도시 이름을 지었다.
지금 이종찬이 머물고 있는 이르쿠츠크의 연안 요새는 이종찬의 전공을 생각하여 ‘이종찬시’로,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는 ‘신의주시’로, 치틴스크(치타)는 ‘신천마시’로, 네르친스크는 ‘신정주시’로 명명하였으며, 하바롭스크는 ‘신청진시’로 야쿠츠크는 ‘신회령시’로 명명하였다.
유럽의 예와 같이 함경도와 평안도 북부 지역의 이름을 차용하였다.
그리고 개척 지역에서 최초로 ‘이종찬시’라는 개인 이름의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이종찬은 이후 ‘이종찬시’에서 20년간 근무하며 수많은 전투를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전신(戰神)이 되었다.
20년 후 최초의 출발지였던 신청진시(하바롭스크)로 돌아간 이종찬은 김재갑의 뒤를 이어 사백력 총독으로 재임하다 그곳에서 묻혔다.
그가 개척한 ‘이종찬시’와 ‘신의주시’, ‘신천마시’, ‘신정주시’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서 그의 영웅적인 삶을 기렸고 사백력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종찬은 후일 사백력 개척의 영웅으로 그 이름이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
사백력의 신청진시(하바롭스크)는 지금 모피로 뒤덮여 있었다.
사백력의 원주민 사냥꾼들은 예니세이강 동쪽은 물론 중부 시베리아의 사냥꾼들도 가온무역의 후한 모피 값 때문에 그 먼 거리를 달려와 모피를 팔고 갔다.
시베리아의 거의 모든 모피가 신청진에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지난겨울 청국에 최고급 모피를 판매한 이래 가온모피는 그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었으며, 작년 한해 모피로만 천은 100만 냥의 수익을 올릴 정도였다.
가온무역 가온모피는 아예 모피 판매가 끝나는 늦겨울부터 내년에 팔 신상품 준비를 하였다.
슈퍼컴퓨터를 뒤져 이 당시 패션보다 10년 정도 앞선 디자인을 적용하고 중국인들에 어울리면서 좀 더 이국적이고 화려한 데다 특히 호주연안에서 채취한 최고급 진주로 세공한 세공품으로 장식한, 동서양 어디에도 어울리는 초호화 모피코트 샘플을 만들었다.
이러한 디자인을 비롯해 다른 10여 가지 디자인의 모피를 가온모피는 신청진시에 온 청국 상인과 유구의 유럽 상인에게 보여주었다.
청국상인도 유럽의 상인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디자인에 놀랐고 그 화려함에 놀랐고 그 비싼 가격에 한 번 더 놀랐다.
모피의 가격은 금 100냥(천은 1,000냥)이었고 청국과 유럽에 각각 한정판매를 한다고 하면서, 만일 팔리지 않으면 전부 소각 처리한다고 공시하였다.
특히 그때까지 없었던 A/S제도를 도입하기로 하여 상인들의 눈을 휘둥그레 하게 했다.
유럽은 지정된 곳으로 청국은 북경까지 모두 제품을 도착시켜 주겠다는 조건을 달자 유럽의 1,500벌과 청국의 1,000벌의 한정판 최고급 모피는 그 자리에서 구매계약을 맺게 되었다.
지금의 교역에서는 판매도 중요하지만 수송이 가장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럽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가기로 하였고 거기에서 각국의 상인들이 자신이 주문한 물량을 가져가기로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판매 정책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가온모피는 최상급의 제품으로 인정을 받게 되며 그 명성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후 가온모피는 해마다 동일한 수량의 모피를 각국에 공급하였으며 유럽에서는 가온모피가 유럽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자 인기가 급증하였다.
모피코트를 기다리는 일이 2년 이상 걸리자 수입상들의 요청으로 청국의 수량을 3분의 1로 줄이고 나머지 수량을 전량 유럽에 보내게 된다.
가온모피의 최고급 상표는 해마다 디자인을 달리하여 나와서 유럽의 귀족들이 연말 파티에 새로운 모델의 디자인을 입고 나오는 것이 부의 척도로 인정될 정도였고, 후일 가온모피는 추가요금을 부담하면 가문의 문장도 새겨주었다.
이와는 별도로 중 하급 상품도 제작하여 판매를 하였으며 가온모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
러시아가 기를 쓰고 시베리아로 동진한 것이나 캐나다의 허드슨베이사가 그 넓은 땅을 돌아다니며 모피사냥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들의 제품이 가온의 제품보다는 떨어지겠지만 모피사업의 수익률은 그 어느 것보다 높았고 가온무역은 그 후 모피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
이 모피의 판매로 인하여 전 세계의 정국은 상당한 파도가 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왕실은 자신들의 독점사업인 모피산업이 막히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를 군자금이 부족해지기 시작하였다.
여름궁전에 있는 예카테리나 여제는 시베리아에서 들려오는 영토 침략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금 러시아는 수보로프 백작이 치르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깊은 수렁에 빠져 드네스트르 강을 사이에 두고 오스만 제국과 대치 중에 있었다.
작년여름 이스마일 요새에서의 대재앙 이후 전쟁의 답보상태에 빠졌고 엄청난 전비가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인 스웨덴 왕국이 러시아를 향해 노골적인 침략 움직임이 있었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16세기부터 흑해를 사이에 두고 1차 세계대전까지 약 20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온 대표적인 앙숙이다.
지금의 전쟁은 1787년부터 시작되어 본래는 1792년 1월 9일 야시조약으로 드네스트르 강을 국경으로 확정하게 되나, 지금의 상태는 러시아가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오스만 제국군이 바로 강을 건너 크림한국으로 진격할 태세였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종전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오스만 제국의 와지르(수상) 무함마드 알리의 입장은 아주 강경하였다.
지금의 전투에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인 예니 체리 군단의 병력 중 수도방위에 필요한 5,000명의 병력을 제외하고 전 병력을 전장에 투입하고 있었다.
정치군대이기는 하지만 오스만 제국 최강의 부대인 예니 체리군단의 전투력 또한 대단하였다.
그동안 유구도에서 계속 소총 탄환을 사가고 있었으며, 소총도 1만 정을 추가로 구매하여 예니 체리 군단 전 병력에게 제이스 소총을 지급하였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전역에서 예카테리나 여제의 명으로 각 지역 귀족들의 수많은 부대가 징발되어서 왔고 이 전장에서 그들이 총알받이로 죽어 나갔다.
러시아 최대의 명장 수보로프는 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도 머스캣 소총의 두 배의 유효사거리와 사격 때 반동이 작아 높은 명중률을 보이는 제이스 소총 때문에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드네스트르 강변에 대치된 지 1년이 넘으면서 수십만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예카테리 여제는 결정을 해야 했다.
어느 쪽이든 한곳을 결정해서 끝을 봐야 다른 쪽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하다가는 스웨덴까지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 결정은 바로 내려졌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입장에서는 시베리아를 포기하더라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여기서 밀리면 중앙아시아의 초원까지도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여제는 카자크 군단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카자크 군단은 1650년대 이래 결성된 군단으로 러시아와 반독립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황제들은 이들의 자치(自治)를 축소시키기 위해 그동안 지속적으로 이들의 유력한 지도자에게 작위를 수여하면서 회유하였고, 이들 지도자들은 그러한 러시아의 회유에 넘어가 지주로 귀족화되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수보로프 백작에게 카자크 군단의 힘을 빌리도록 명령하였고 수보로프 백작은 여제의 명에 따라 카자크 군단을 불러들였다.
예카테리나는 이들을 불러들이며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인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이들에게 주기로 약속하고 자치권(自治權) 확대도 보장해 주었다.
카자크 군단은 지금의 카자흐스탄의 넓은 영토를 10여 개 군단이 분할하고 있었으며 이를 예카테리나 여제가 정식으로 인정을 하고 자치권을 준다고 하였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정식 문건을 접수한 카자크 군단은 카자흐스탄의 전체 협의를 거쳐 2개 군단에서 5만 명이 이 전투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중앙아시아의 한국(汗國)이 멸망하자 이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자치적 군사공동체 집단은 초기의 민주적인 방식에서 점차 변하였다.
러시아의 제정(帝政)이 강화되자 러시아 황제들은 카자크 상층부에 갖가지 회유를 하면서 카자크의 자치권(自治權)의 축소를 기도하여, 18세기에 이르러 각 집단의 수장(首長)들이 러시아 정부의 작위를 받아 귀족화하였다.
카자크 군단은 광대한 토지나 자치권을 보상 조건으로 제정 러시아의 비정규군으로서 수많은 전투에 용병으로 참여하고는 하였다.
카자크 군단은 전원이 기병들이었으며 이들의 생활습관은 몽골과 비슷하여 걸음마와 동시에 승마를 배우게 되며 전투가 벌어지면 나이가 들거나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집단의 남자들이 전부 참여를 하는 방식으로 싸우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이 참여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오스만 제국의 와지르(수상) 무함마드 알리는 예니 체리군단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카자크 군단과 정면충돌을 하지 말라고 하고, 현 전선을 유지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알리 아지즈에게 급히 제이스 소총 1만 정과 실탄과 탄약 수천만 발의 추가 구입을 의뢰한다.
이때가 1792년 10월이었으며 카자크 군단도 겨울로 들어가는 지금 수만 명의 군단을 이동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어 수보로프와 협의하여 3월의 대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베사라비아 전장에 내년 봄에 도착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