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01)

거듭나는 청진공단

1792년 8월 10일 청진(淸津) 중공업단지(重工業團地).

한여름의 청진은 지금 도시 전체가 건설 현장이었다.

작년 3월부터 시작된 공단 건설 작업은 더 한층 속도를 내고 있었다.

5년 계획으로 준공 예정인 청진제철소는 일관제강 공장으로, 지금으로는 소형인 일일 생산량 1,000톤급의 고로 3기를 건설하고 있었다.

현대의 1만 5,000톤 이상의 생산 능력을 자랑하는 고로에 비하면 아주 작은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온의 계획은 지금의 고로가 수명을 다하면 그동안의 축적된 기술로 대형 고로를 시공하는 것이었다.

제철 기술은 포스코에서 개발한 파이넥스 공법으로 하기로 하였다.

신일본제철의 기술자들도 이 공법을 익히기 위해 포스코에 왔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시간 여행을 하였기 때문에 기술 적용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소결과 코크스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연 상태 가루 모양의 철광석과 무연탄을 바로 녹이는 공법으로, 환경오염과 시간이 줄어드는 공정으로 생산 원가가 현저히 낮아진다.

일관제철소도 가온이 조선에 입성을 하면 남부 지역에 1개소의 제철소를 추가로 건설하기로 하였다.

청진 지역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서 개발하고 있었다.

고말반도 구역의 공업지구와 남쪽의 나남지구의 주거단지, 수성천 지역의 농업지구로 나뉘었다.

최성용은 처음으로 청진을 방문하였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최성용의 모습이 무척 이색적이었다.

처음의 개척단이 들어올 당시에 조선식 복식을 입고 있었지만 짧은 머리로 인하여 주민들과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2년이 다 된 지금은 그동안의 여러 가지 교육으로 두발 문제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나이가 많은 양반들은 상투를 고집하였다.

최성용은 철강공업 단장 이호 박사와 화학공업단장 백기소 박사, 곽병철 청진여단장을 대동하고 고말반도에 있는 해발 190m의 고말산 정상에서 청진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최성용이 청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참으로 장관입니다. 몇 개월 만에 또 달라졌군요. 발전 속도가 놀랍습니다. 두 분 박사님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호 박사가 말했다.

“우리가 고생한 게 있습니까. 현장에서 수고하는 분들이 고생이 많지요.”

백기소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많은 장비들을 투입한 공사라 하지만 우리도 이렇게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백기소와 이호 박사가 최성용의 말에 답을 하자 곽병철 여단장이 말을 하였다.

“우리 가온의 인력들이 군수공업이나 석유산업 전문가 출신들이라서 예상보다 빠른 공사 진척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성용이 곽병철의 말에 대답했다.

“예, 고생들이 많습니다. 특히 공병단의 노고가 크겠습니다. 그리고 현지 주민들과 제주에서 교육받고 들어온 인원들은 어떻습니까?”

“매월 7,000명씩 들어오던 교육 이수 주민들이 5만 명을 기점으로 인원 배정을 줄였습니다. 본래 이곳에 살고 있던 2만 명 정도의 현지 주민들과는 별다른 문제없이 잘 화합하고 있습니다.”

주민 동향을 관찰하는 곽병철 청진여단장이 최성용의 말에 대답했다.

청진부는 지금 군을 포함하면 8만 명이나 살고 있는 도시가 되었다.

그들과 청진을 한참 바라보던 최성용은 일행을 대동하고 부청(府廳)으로 향하였다.

청진부청은 늘어나는 업무로 기존의 관아 옆에 3층으로 새로운 부청을 건설하였다. 기존의 관아는 청진역사박물관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사용되었다.

청진부청 앞에는 청진부사 유득공을 비롯해 몇 사람이 최성용을 기다렸다.

최성용이 유득공을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영재(冷齋, 유득공) 형.”

“아이고, 오랜만이네. 최 대령, 그동안 무탈하셨는가.”

청진부사(淸津府使) 유득공(柳得恭)이 최성용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옆에는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 박지원(朴趾源)과 무산부사(茂山府使) 박제가(朴齊家)가 따듯한 눈길로 그를 환영했다.

유득공과 인사를 마친 최성용은 55세의 박지원을 향해 인사를 하였다.

“연암(燕巖) 선생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

박지원이 최성용을 보고 편한 웃음과 함께 답했다.

“허허, 저는 잘 지내고 있소. 최 대령도 그 무탈하셨소?”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초정(楚亭) 형께서도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나야 잘 있네. 몇 개월 만에 만났는데도 기개가 헌앙하시네. 반가우이.”

박제가가 반갑게 최성용과 악수를 하였다.

최성용은 규장각 4검서 출신으로 처음으로 가온에서 교육받은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를 해오다 마음이 통한 세 사람이었다.

43세의 박제가와 44세의 유득공 그리고 42세의 최성용은 비슷한 나이로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 여행을 하기 전이라면 200년이 넘은 조상이었기에 최성용은 이들과의 호형호제를 감사하게 생각했다.

나이 차가 별로 없어 친우로 지내자는 두 사람에게 최성용이 극구 우겨 형제의 예로 사귀기로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박제가가 스승으로 모시는 박지원을 스승의 예로 받들었다.

“자! 들어가시게.”

청진부사 유득공의 안내로 부청으로 들어갔다. 부청의 내부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최성용이 감탄을 했다.

“참으로 잘 지었습니다.”

최성용의 말대로 부청은 민원실을 비롯하여 지금 시대 공공기관의 관청으로 사용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가온은 건축을 하면서 화장실을 가장 신경 썼다.

화장실용 도기는 지도군에서 생산을 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단지 휴지는 처음에는 화장실에 거치를 하였으나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민원실에서 받아가는 것이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수세식으로 만든 화장실은 그동안의 주민 교육으로 깨끗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가온은 신도시를 건설할 때 가장 먼저 하수 시설을 만들었다.

우수와 오수를 처음부터 분리하여 후일에 있을 하천 오염을 미연에 방지하였고 하수 처리에도 정성을 다했다.

부청을 둘러본 최성용은 부사실(府使室)로 자리를 옮겼다.

부사실은 이전과 달리 좌식이 아닌 입식이었다.

부사의 책상 앞에는 연해주의 고급 목재로 만든 격식이 있는 문양을 한 목제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 소파 위에 조선의 방석이 놓여 있어 오히려 가죽 소파보다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박지원을 상석에 모시고 차를 마시던 일행에게 직원이 들어와 회의 준비를 알려주었다.

일행은 일어나 3층 대강당으로 올라갔다.

3층의 대강당에는 40여 명의 인원들이 회의실을 꽉 채웠다.

모여 있는 이들은 25명의 수령과 방백(관찰사)을 포함한 함경도의 모든 지방관들이었다.

정조는 그동안 장준하와 협의하여 당색이 거의 없고 실학사상을 가진 인사들이나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인원을 선별하여 함경도로 배치를 하였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지난 진산 사건으로 천주교가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앞으로 거세질 노론, 특히 벽파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차원에서 조치를 하였다.

관찰사를 비롯하여 지방관으로 임명된 관리들과 군 관련자들은 이전의 박지원처럼 임지로 부임하기 전에 북한산성을 통하여 가온에서 특별 교육을 받았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의 경우 제사 문제를 납득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들도 신주는 모시지 않지만 제사는 모시는 선에서 이 문제를 정리했다.

이들을 비롯한 함경도 관리들의 교육은 임지에 부임하고 나서도 세뇌라고 할 정도로 계속되었다.

이들의 교육은 각지에 파견된 가온 출신 국정원 요원들이 담당했다.

본래 실학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이지만 철저한 정신 교육과 가온에서 전해주는 새로운 학문은 이들을 발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조선의 최고 엘리트이고 진보적인 사상이 갖추었던 이들은 부임한 지 2년이 돼가는 지금 지식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함경도에는 25개 지방 관아가 있었으며, 관찰사를 비롯한 40여 명의 관리를 조정에서 임명했다.

무관으로는 종2품 무관으로 함경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두 명의 병마절도사를 두었다. 북도의 절도사는 북청부사를, 남도의 절도사는 경성부사를 겸직하였다.

이들 절도사 밑에 실무를 총괄할 종3품 무관 병마우후가 있었다.

정조는 이들 무관들도 전부 용호영 출신으로 임명하였다. 두 명의 절도사는 행수법(行守法)을 이용하여 정3품 당상군관을 임명하였다.

관찰사에는 광주 부윤 출신으로 후일 남인을 이끌어갈 실학자 이가환(李家煥)이, 안변부사에는 서학을 들여와 조선을 개혁하자고 주장하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승지 출신의 이기양(李基讓)을 임명하였다.

함경도의 관직 중 중앙에서 임명되는 관직은 다음과 같았다.

함경도 관찰사 종2품(함흥부사 겸직)

정3품 대도호부 : 안변, 영흥

종3품 도호부사 : 경성(북도절도사 겸직), 경원, 회령, 종성, 온성, 경흥, 부령(청진), 무산, 북청(남도절도사 겸직), 덕원, 정평, 갑산, 장진, 후주

종4품 군수 : 삼수, 문천, 고원, 단천

종6품 현감 : 홍원, 이성, 길성(길주), 명천

이상 25개 지역.

종5품 도사 : 1명(함흥 주재)

판관 : 함흥, 경원, 회령, 종성, 온성, 경성, 북청(7명 각지에 주재)

종6품 찰방 : 다섯 명(찰방의 수는 확실치 않음)

조선 후기에는 절도사 두 명, 병마우후 두 명과 총 38명이 되었다.

조선의 관리들이 임기는 대개 1,800일이며 당상관은 900일, 관찰사는 2년을 임기로 정하였다.

하지만 함경도는 그 특성상 특별한 공과가 없는 한 관찰사를 제외하고는 정해진 임기보다 배를 넘기기 일쑤였다. 함경도의 관직에 임명이 되면 병을 핑계하거나 갖은 방법으로 사퇴를 하기 일쑤였다.

그런 이유로 한번 임명된 관리는 거의 말뚝 수준이었다.

조선의 관리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부가 현직에 임명이 되어야 녹봉이 나가는 계약직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현직에 있을 때 챙겨야 후일 편안해지는 모순이 있었다.

그러한 관리들이 함경도의 척박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것을 극력 회피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던 정조와 장준하는 이것을 이용하여 함경도 지역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하는 작전에 활용하기로 하였다.

먼저 청진 지역은 주변을 물샐틈없이 막아서 주변과 고립시켰다.

주변에 있는 부사와 현감들은 지역 주민들의 청진 지역 이동을 무조건 제한하였다. 아무리 부사나 현감들이 조심을 한다고 하여도 일반 백성들의 입은 무서운 것이다.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립을 시켜버린 것이다.

청진여단도 주변 지형을 이용하여 각지로 드나드는 길을 세 개로 만들고 다른 곳은 모두 폐쇄했다.

다행한 것은 청진 지역은 주변 지형이 높고 험악해서 여단 병력 2,500명만으로도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는 청진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은 신교육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지금 강당에는 함경도 관찰사를 포함하여 25개 지역의 수령이 전원 참석을 하였다. 민간인으로는 화학공업(단장 백기소), 철강공업(단장 이호), 조선공업(단장 신정일), 기계공업(단장 정진일), 자동차공업(단장 최욱)의 단장 다섯 명이 있었다.

군에서는 청진여단장과 참모들 그리고 청진 주재 공병대장이 참석했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책상과 중앙의 책상이 ‘ㄷ’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었다.

최성용 대령이 강당에 들어서자 모든 참석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성용 대령이 자리를 배정한 대로 중앙의 이가환 관찰사 옆자리에 앉자 다른 참석자들도 앉았다.

그러자 사회자인 여단의 장교가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였다.

“지금부터 관찰사님을 모시고 함경도 지역 주요 간부 회의를 거행하겠습니다. 참석하신 분들은 자리에 일어나셔서 국기를 향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몇 차례 회의 참석 경험이 있는 조선 출신 관리들은 이제는 능숙하게 자리에 일어나 국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최성용의 뒤에는 삼태극기와 삼족오기가 나란히 벽에 부착되어 있었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사회자의 지휘에 각자 손을 올리거나 군례를 취하였다.

스피커에서는 국악기로 편성된 장악원(掌樂院)의 연주가 웅장하게 울려 나왔다.

정조는 처음 가온을 방문했을 때 연주되던 음악을 잊지 않았다. 가온에게 조선의 음악을 들려주려고 지난 1월 사신에게 명하여 연경(燕京, 북경의 별칭)에서 악기를 들여와 청과 조선의 음률을 교정하게 하였다.

이 일은 노론 벽파 유성한(柳星漢)이 ‘경연에 참여하지 않고 쾌락에만 힘쓴다’며 정조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장악원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장중하고 엄숙하면서 아름다웠다.

사회자의 지휘로 모든 국민의례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자리에 앉았다. 회의 참석자들 중 가장 상관인 관찰사가 순서에 따라 인사말을 하였다.

그동안 가온에서의 교육 탓인지 이전에는 인사말을 할 때 온갖 미사여구를 붙였던 관찰사 이가환의 인사말은 아주 간단명료하였다.

이가환은 본래 역사에서는 이 시기 정조가 개성 유수로 특보했으나 지금은 함경도 관찰사로 특보되어 중앙 정계에서 살짝 비켜났다.

관찰사의 인사말이 끝나자 각 지역의 현안들이 순서에 따라 발의되었다. 필요한 부분은 그 자리에서 즉각 조치가 되었다.

지방관의 발의가 끝나자 민간을 대표하여 백이소 박사가 청진공단 진척 상황을 보고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청진공단 건설지원단 단장 백이소입니다. 지금부터 청진공단의 건설 현황에 대해 보고를 하겠습니다. 공단은 지금 석유와 석탄화학공장이 준공을 보았으나, 소규모 공장이라서 내년 말 준공을 목표로 대형 공장 건설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연관 공장 건설이 계속되고 있어서, 앞으로 그 지역 일대가 화학공업단지가 될 예정입니다.”

그러자 최성용이 물었다.

“공해 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백이소가 최성용의 물음에 대답했다.

“화학공단은 공해를 우려하여 고말반도(高抹半島) 동쪽에 자리를 잡았고, 해안에는 별도의 항구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자 최성용이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다시 백이소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리고 지난번 준공한 전기로 공장은 2기의 전기로가 그동안 경험 미숙을 벗어나 정상 가동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철소입니다. 일일 생산 1,000톤을 생산할 고로 3기와 일관제강시설 중 1기의 고로가 내년 중으로 준공이 가능합니다.”

그러자 다시 최성용이 물었다.

“일본인 기술자들의 상황은 요즘 어떻습니까?”

“그동안 제철 기술자인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여 집단 난동을 부려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지금은 다시 마음을 잡고 공사를 재개하여 이전보다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어서 준공 계획에는 차질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백이소의 보고에 회의 참석자들이 앞에 나오는 화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기대감과 만족감을 나타냈다.

청진 지역은 이미 제주와 같은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주민 교화를 위해 영화 상영도 되고 있었다.

조선의 관리들도 수차례 회의 참석으로 빔 프로젝트를 이용해 발표하는 광경이 함경도의 조선 관리들에게 더 이상 생경하지는 않았다.

백이소는 그 뒤에도 많은 보고를 하였지만 군사적인 보고는 하지 않았다.

지금 청진의 조선소에서는 외부시선을 차단하고 1만 톤급 화물선을 시범 제작하고 있었다.

이 화물선은 앞으로 주력으로 건조할 철선 제작 경험을 쌓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늘어날 해상 운송에 대비하여 제작에 들어가 있었다.

이때는 이미 청진공단의 전기로 준공과 동시에 용접봉이 생산되고 있었다.

전선(戰船)은 화물선과 달리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화물선을 제작하면서 기술력을 축적하고 앞으로의 국제 상황을 보아가면서 건조하기로 했다.

일본인들의 집단 난동은 시간 여행 때 격리 수용하면서 철저한 보안을 해서 그동안 한국에서 군사쿠데타나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오인하였던 일본인들이 작년 3월에 청진으로 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짐작하면서 시작됐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선인들이 입고 있는 옷이며 두발 상태를 보고는 혹시나 하며 의심을 하였다.

차츰 시간이 지나서 조선소에서 목재로 범선을 제작하는 것을 보고 이들도 시간 여행을 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들 일본인 기술자 50명(울릉도에서 올라온)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이들의 결론은 하나였다. 이들이 이제 와서 집단적으로 반발하여 제철소 건설을 못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지 파이넥스 공법을 시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일반 제철소 건설은 시간이 문제일 뿐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협의 끝에 일단은 협상을 위해 집단 난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의 난동으로 제철소 건설은 중단되었으며 철강공업단장 이호 박사의 보고를 받은 최성용이 급파되었고 이들을 면담한 최성용은 이들의 의견을 들었다.

일본 기술자 대표로 나선 다나카 히사히토(中村 悠仁)가 최성용에게 말을 하였다.

자신들도 시간 여행을 한 것을 알고 있으니 자신들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하였고, 최성용이 그 기회에 대하여 묻자 다나카 히사히토가 말했다.

이 제철소 건설은 앞으로 자신들이 적극 참여하겠고 최선을 다해 준공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자신들도 포로가 아니라 이곳에 완전 정착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 요구사항이다.

임진왜란 등의 전쟁으로 도공들이 끌려가 일본에 정착을 한 것과 같이 정착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가지 못하겠지만 후일 자신들의 후손들이 일본을 도와준다면 좋은 일이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도 함께 하였다.

그들의 말을 들은 최성용은 장준하에게 보고를 하였고 장준하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조건은 전원 귀화였다.

정착마을을 건설하여 집단거주를 원칙으로 하였고 그들의 기술은 30년간 외부 유출을 할 수 없으며 그 이후 후손들이 일본에 가서 기술 전수를 해주는 것은 막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들끼리 많은 격론이 있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던 일본인들은 장준하의 조건을 수용하였다.

일본인 제철 기술자들은 다음 날 바로 한글 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글 교육과 함께 한국의 역사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미 한국 귀화를 결정한 일본인들은 별다른 이의 없이 교육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이에 따라 제철소 주변 주택단지 안에 일본 귀화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어차피 지금 반발을 해봐야 자신들에게도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고, 후일 자신들의 후손이 지금의 자신들의 생각을 알고 일본에 제철 기술을 알려준다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서였다.

40대 초반인 이들에게 포로생활과 같은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귀화한 일본인들은 후일 대부분이 한국인들과 결혼을 하였으며 후손들을 보았다.

결혼을 하고 후손을 낳는 등 시간이 지나자 처음의 일본을 생각하는 마음은 많이 달라졌다.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간 도공들은 평생을 부모형제들이 살고 있는 조선으로의 송환을 꿈꾸어왔지만 시간 여행 탓에 일본으로 돌아가봐야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이 일본에 가서도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몇 년의 시간이 지나서 않은 때였다.

시간 여행을 하여 온 지금의 1790년대 일본은 현대인인 그들이 생각하는 조국이 아닌 것이다.

한국으로 귀화를 하여 꾸준히 교육을 받은 탓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돌아가 제철 기술을 전수해 봐야 그것을 활용할 일본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과, 이미 발전을 시작한 조선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일본인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자신들 스스로 버리게 된다.

지금 가온의 수만 명이 넘어와서도 10년을 준비하고 있는데 불과 50명의 자신들만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최성용은 후일 대한제국의 영토가 된 북해도의 실란(室蘭)에 이들만을 위한 휴양소를 지어주었다.

이들은 전부 신일본제철이 있던 북해도의 실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최성용의 조치를 고마워한 일본인 제철 기술자들의 후손들이 실란에 최성용의 송덕비를 세우게 된 것은 더 후의 일이었다.

귀화한 일본인 중 대표자였지만 35세로 가장 어렸던 다나카 히사히토는 동경대를 나온 재원으로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김중인(金中仁)으로 개명했다.

청진 김씨의 시조가 된 김중인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한 후에는 가온이 추진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이 되었고, 20년 후인 55세에는 일본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청진제철소장이 된다.

후일 김중인은 ‘청진의 김중인’으로 불렸으며 그가 소장으로 재직하던 1810년부터 20년 동안 세계철강 산업을 좌지우지하였으며, 지금도 청진제철소 정문에는 김중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많은 보고가 끝이 나고 최성용의 차례가 되었다.

“그동안 많은 고생들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생략하고 주민들 문제만 언급을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유민들과 소작농 등을 전부 연해주의 훈련소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최성용의 말에 이미 정조의 교지를 받은 관찰사 이가환(李家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다시 최성용이 말했다.

“지금까지는 전라도 지도군에 집결하여 주민들을 이주시켜 왔는데 지난봄의 문제와 거리 문제로 앞으로는 한강 이북의 지역은 함흥을 집결지로 하여 이주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참석자들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최성용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청진의 북부 지역은 두만강을 바로 넘어가는 것이 이동에 편리하니 그렇게 조치를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최성용의 말에 담당 목민관들은 동의를 표했다.

그리하여 함경도 청진이북과 백두산 지역 주민들은 청진을 돌아가는 코스를 택하였고 나머지 평양과 청진이남은 함흥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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